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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아버지

아이를 꼭 낳아야 해요?

by 변리사 허성원 2023. 8. 15.

"아이를 꼭 낳아야 해요?"

 

1. 어제 저녁 아들과 소주를 한 잔 하던 중에 아들이 한 말이다.

"아이를 꼭 낳아야 해요? 이런 세상에 애를 낳는 것은 태어난 애에게 죄를 짓는 게 아닌가요?"

아들의 말을 듣고 순간 많이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무거운 주제다.
가볍게 뭐라 답할 사안도 아니고, 한번도 깊이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무거운 이야기 거리다.
대충 얼버무리고 더 깊은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들이 아직 20대 초반이기에 결혼이나 출산 문제는 아직 그리 급하지 않다.
충분히 많은 시간이 있으니 깊이 생각해봐야 할 사안이다.

2. 그 자리에서 아들은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강아지를 키울 생각 없으세요?'

처음의 질문과 무관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녀석이 강아지를 아이의 대체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3.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3-1. 우리 각 개인은 인류라는 종족의 진화의 말단에 서있다.
인류의 진화는 우리의 DNA를 후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중단 없이 이어진다.
그러니 우리에게 진화의 이어짐이 계속되게 하여야 할 의무는 없는가?
그 거대한 진화의 흐름을 일개 개인이 감히 멈출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선택을 거론 하는 것은 극도의 이기적이고도 직무유기적인 삶의 태도가 아닌가.

3-2. 분쟁지역 등과 같은 극한의 환경에서는 역설적으로 출생율이 높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개체의 생존 위기는 계통의 존속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도록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유전자에는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개체에게 그 존재를 지켜준 계통의 시계열적 정보를 보존하여 후세에 전달할 책임을 부여한 것이다. 
내가 속한 연령대는 베이비 붐의 시대다. 한국전쟁 폐허 속에서 먹고 살기 힘든 그 시절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태어났겠나.

3-3.  그걸 보면 지금의 생존 환경은 너무 좋다. 그것이 참 문제다.
지금 이 시대에 출산이 급격히 감소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 환경이 나빠져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환경이 너무 살기 좋기 때문이다.
다들 개인의 삶을 더 즐기고 누리기 위해 출산을 포기하는 것이다.
미래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듯이, 그 미래를 미래의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단정해서는 안된다.

3-4. 인생은 원래 고해다. 
행복은 고해라는 뻘밭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은 것이다.
좌절, 고난, 시련이 있기에, 행복은 더욱 아름답고, 이 세상은 더욱 살맛나는 것이다.

아이는 행복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 아니다.
고해 속에 던져져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고 그 과정에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행복이란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역경과 짝을 이룬다. 고난과 시련이 있기에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 혹은 그것을 거치고 난 저 건너편에 존재하는 가치다.
모든 생명은 그 삶을 불편하게 하는 환경이라는 존재 속에 살면서 생존과 번영을 추구한다.
그런 생명의 기회를 누군가의 선택이어서는 되겠는가?

3-5. 번식은 모든 생명체에게 본능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내 유전자를 가진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고 생명의 영속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내 평생 최고의 기쁨을 너를 처음 만났을 때였다.
그 순간을 지금 다시 상상하기만 해도 저 아래 단전에서부터 짜릿한 감동이 올라온다.
그리고 네가 자라가는 전 과정과 존재 그 자체도 내 삶 전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세상에 어떤 가치도 너를 대신할 수 없다. 내 생명마저도 그렇다.
너를 구하기 위해 나를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난 아낌없이 나를 던질 수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런 존재를 가져봐야 하지 않겠가?
그런 존재의 의미는 오로지 직접 체험하여야만 온전히 알 수 있다. 

3-6. 행복이란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다.
혼자 살아서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
나의 존재는 곧 타인의 존재이고, 타인이 존재하기에 나도 존재한다.
내가 새 생명을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면, 그것은 바로 인류의 종말이며, 사랑도 행복도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

3-7. 아이는 나의 분신이다.
내 분신을 미래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나 역시 미래로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래로 가고 싶지 않은가?
하긴 미래는 불확실하고 두려운 곳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이든 풍요와 평화가 항상 보장되었던 미래는 없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라. 불확실과 두려움은 곧 호기심과 셀렘이 되고, 그렇기에 도전의 의지가 생기게 된다. 

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간 '꿀벌의 예언'을 읽는다.

4-1. 이 책에서, 르네의 모험 이야기와 번갈아 가며 〈므네모스〉의 장이 나온다. 이 장은 일종의 역사서 역할을 한다.
그 시작은 이렇다.

우리가 태어나는 이유는 세 가지 때문이다.
1. 배우기 위해.
2. 경험하기 위해.
3.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4-2. 출판사 서평 중에서

"신화적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소설 『꿀벌의 예언』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 르네 톨레다노가 꿀벌이 사라지고 인류 멸종의 위기를 맞은 2053년 지구를 보고 온 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시공간을 넘나들며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르네가 다녀온 30년 뒤의 미래는 겨울임에도 지구 온난화가 극심해져 기온은 43도가 넘고, 전 세계 인구수는 150억 명에 달하는 충격적인 모습이다. 여기에 더해 꿀벌까지 사라지면서 식량이 부족해 곳곳에서 폭동이 벌어진다. 인간들은 식량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핵무기까지 동원해 세계 대전을 벌이고 있다.
미래의 르네는 현재의 르네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꿀벌의 예언〉이라는 책에 쓰여 있다는 걸 알려 주고, 르네는 인류를 구할 실마리가 적혀 있는 예언서를 찾아 전생의 자신을 찾아간다. 놀랍게도 예언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던 전생은 무려 1천 년 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출정한 십자군 기사였고, 르네는 전생의 자신과 함께 예언서에 얽힌 거대한 모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간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르네는 미래를 구할 힘은 현재의 바로 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 메시지는 독자가 살아가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 모두의 〈현재〉에는 미래를 보다 낫게 바꿀 힘이 있다. 꿀벌이 사라질 미래마저도."

4-3. 미래는 암울하다. 
지구는 뜨겁고, 인구는 넘쳐나고, 식량은 부족하며, 전쟁은 극심하다.
본인이 '르네'라면..
자기 자신을 그 암울한 미래에 보내겠는가? 아니면 포기하겠는가?
그 미래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전사로 키우겠는가?

5. 인간은 존엄한가

칸트는 말한다.
"인간은, 모든 지성적인 존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스스로가 목적으로 존재한다. 너 자신의 인격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

인간은 누구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만 대우를 받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다.
그러니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존재가 결정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로운 연속성에 따라 저절로 세상에 나타나고, 스스로 그 가치를 구축하고 확인하며 성장하여야만 한다.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아들과 더 토론해보고.. 계속 보충해나갈 것임.)

 

이 아이가 지금 20대 중반으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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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_ 까뮈의 '시지프 신화'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The Struggle itself […] is enough to fill a man’s heart. One must imagine Sisyphus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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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삶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살도 의식의 소멸을 통해 부조리를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끝까지 살아남아 그 척박한 땅의 괴상한 식생을 면밀하게 관찰하기”를 권한다. 카뮈에게 희망은 자살과 똑같은 삶의 회피이다. “내세에 대한 희망, 또는 삶에 초월적 의미를 부여했다가 그것을 배반해버리는 어떤 위대한 ‘이념’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다. 자살과 희망 대신 카뮈는 부조리를 명철하게 바라보며 고집스럽게 버티는 ‘저항’을 권한다.

일그러진 얼굴과 흙투성이 두 손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내려가는 그 남자가 보인다. 시지프는 그러나 자신의 비참한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겪는 고통의 근원인 이 통찰력은 운명을 그의 것으로 만들고, 그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준다. 인간이 자기 삶을 향해 되돌아가는 바로 그 미묘한 순간, 그는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다.”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10056.html

 

시지프가 부조리를 이기는 법

[똑똑! 한국사회]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한 유령이 21세기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무려 4대에 걸쳐 권력의 세습을 준비하는 ‘봉건’적 전체주의 국가의 조

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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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 삶의 부조리 => 계통 연속의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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