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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

사기기행(史記紀行) 제3편 _ 20170916

by 변리사 허성원 2019. 12. 1.
[사기기행]

#8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마천 이전에 역사학은 없었다.
그는 역사학의 조물주다"
_ 양계초

이 위대한 역사학의 창시자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음 글 정도는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여행을 안내하시는 김영수 교수님의 블로그 글.
[사기기행]

#9

오늘 아침에는 진시황의 리더십을 주제로 김영수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오늘 강의에서 특히 느낀 것은..
"진나라 군사력은 헤어스타일에서 나왔다"

병마용갱의 병사들을 자세히 살며보면, 그들의 머리와 수염의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머리와 수염으로 자신을 표현했고 그것을 매우 중시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머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사들을 시중드는 사람이 적어도 1명 이상 2명 정도 배속되었을 것이다.

이런 헤어스타일 문화로부터 두 가지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투구를 쓰지 않았다.
병마용갱에서 투구는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뛰어난 기동성과 그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의 자율과 명예를 중시했다.
개성이 존중되었고 전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매우 명예롭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전사들은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손질하면서 전쟁에 임하는 마음 자세를 경건히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러니 진나라는 그런 군사들의 자부심에 찬 사기가 결집된 군사력에 기초하여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병마용의 신발바닥 사진이다. 친구 최경효 회장이 내게 알려줘서 알게된 것이라 사진을 찾아 올린다.
병마용의 신발 바닥을 보면 미끄럼 방지 패턴이 형성되어 있다.
놀랍지 않은가?
 
[사기기행]

#10

진나라 2세 황제 호해의 묘와 그 옆의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호해의 묘 입구에는 후사지사(後事之師, 뒷 일의 스승)이라 씌어 있다.
진시황이 이룬 통일의 업적을 통일 후 불과 15년, 진시황 사후 4년도 채 지키지 못한 호해의 행적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찾아야 할 것인가.

우선.. 후계 시스템의 구축이 미흡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진시황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환관 조고와 이사가 후계 농간을 부리게 된 데에서 이미 조짐이 있었다. 호해가 조고 등이 제안한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일 수 있던 상황이 문제였다는 것.
진시황이 태자 부소를 멀리 하지 않고 믿을 주어 적절히 권한을 위임랬더라면 그런 농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력 승계를 위한 설계가 미비하거나 명확하지 못하여 큰 혼란을 초래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제환공이나 조무령왕의 전례에서 배웠어야 했다.

그 다음 한 가지는.. 호해의 최대 잘못으로 권력을 신하와 나누었다는 것.
한비자는 신하를 까마귀를 길들이듯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다. 까마귀를 기를 때는 까마귀의 날개깃을 잘라야만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게 된다.
날개깃을 자르고 먹이를 주는 것은 권한을 제한하고 말을 잘 들을 때 주인이 주는 보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 즉 당근과 채찍으로 다스리라는 가르침이다.
한 때 황제였던 호해의 묘는 일반인의 무덤으로 격하되어 아파트 앞의 마을 가운데에 썰렁하게 보존되고 있다.

"前事之不忘 后事之师也。" (전사지불망 후자기사야)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으라.

사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纪)에서 사마천이 언급한 말입니다.
시진핑이 일본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인용한 바 있고,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 난징대할살 기념관 등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새겨진 "전사물망 후사지사".
 
 
 
[사기기행]

#11

오늘은 대체로 서안 시내 관광으로 하루를 보냈다.
호해묘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이족 거리, 대안탑, 장안성 등은 좀 따분한 느낌.
이들 관광 코스는 저번에도 다 돌아봤기도 하고, 이번 사기기행 주제와는 좀 거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다.
하지만 대명궁은 나름 강렬한 자극을 준다. 대명궁이라고 해서 단순히 명나라 시대의 궁전인가 했는데.. 당나라 시대에 건축되어 대부분의 당나라 황제가 생활했던 곳이다.
규모는 자금성의 4.5배 정도였다고 한다. 번성했을 당시 장안의 인구가 100만이었다고 하니 대충 그 영화를 가늠할 수 있겠다.
지금은 대명궁의 유적지와 축소재현된 모형만 남아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중국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다시 한번 체험하였다. 아이맥스 영화까지..

자은사의 대안탑
현장법사. 삼장법사라 불리기도 한다. 서유기의 삼장법사의 실제 모델.
장안성
장안성. 도시 중심부를 완전히 한바퀴 두른다. 걸으면 약 3시간 거리.
대명궁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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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 재현된 대명궁. 그 시절 당나라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땅에는 무게가 있다.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의 무게이다.
장안, 이 서안은 세계 어느 곳도 그 무게를 감히 겨뤄보자고 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땅에서 며칠 여행을 이제 마무리한다.
서안의 거대한 중력장을 아쉬움없이 잘 벗어날 수 있으려나..

"여행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 돌아가지 않는 것은 방황이다."
지난 번 만권만리 그리스기행 때 김상근 교수께서 하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