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영과 세상살이/지혜로운삶

짤짤이의 추억

by 변리사 허성원 2023. 5. 3.

짤짤이의 추억..

 

30년도 더 된 예비군 훈련 때의 에피소드다.
강남에 있는 작은 사무소에 다녔기에 동네 예비군 훈련을 나갔다.

개포동의 대모산 어딘가에서 어영부영 졸고 몸을 뒤틀면서 훈련 같잖은 훈련을 받고 있는데..
옆에 있던 생판 처음 보는 좀 모자라 보이는 녀석이 '우리 심심한데 짤짤이나 할까요?'하고 나를 겨냥해서 물어보고는 주변에까지 동의를 구하듯 둘러본다.
내가 좀 어리숙해 보였나? 그래도 한 때 내가 짤짤이라면 한가닥 했었다. 구슬, 딱지, 병뚜껑에서부터 시작하여, 도토리, 몽돌, 토큰, 회수권, 동전 등 안 해본 게 없다. 딱 잡으면 몇 개인지를 99% 확률로 귀신같이 뚫고 맞혀내던 날고기던 실력이다.

이 놈 잘 걸렸다 싶어.. 마지못해 놀아주는 척 하면서 붙어보기로 했다.
몇 놈 더 달라붙었다. 예비군복 입으면 다들 거지나 양아치 같이 보이지만, 특히 더 거지 같은 놈들만이 꾸역꾸역 모여 약간 으슥한 데로 가서 둘러앉아 짤짤이를 시작했다.
그런 자리에는 반드시 이상한 놈들이 있다. 참가하지 않으면서 구경만 하는 놈이다. 이런 놈도 필요하다. 교관이 오는지 망을 봐주기도 하고, 가끔 담배 심부름도 해준다. 물론 수고료로 적당히 삥을 뜯어줘야 한다.

그렇게 다들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치듯 동전으로 시작했는데..
슬슬 분위기가 과열되었다. 좀 많이 잃은 놈에게서 지폐가 나오고 나중에는 10만원 권 수표도 나왔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내가 너무 너무 잘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 거지놈들이 너무 못하는 거다. 돈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따고 있었다.
나는 당초 적당히 놀면서 조금 따고 물러나서, 슬그머니 마지막 출석에라도 얼굴을 내밀고는 보람차게 집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려면 딴 돈 다 내놓고 가라는 거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죽기살기로 혼신의 노력을 다해 딴 피 같은 돈을 절대 그냥 줄 수는 없다.

오기로 계속했는데 환장하게도.. 계속 돈은 더 따는 거다.
출석은 이미 망쳤으니 다음에 보충교육 다시 받을 수밖에 없다. 이왕 버린 몸.. 돈이나 따자 싶어 더욱 열심히 돈을 땄다.
그런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앞이 잘 안보일 때까지 이 녀석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제안을 했다. 일단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식당에서 계속하든지 결판을 내자.. 라고 했더니.. 다들 동의한다.

거지같은 놈들과 삥 뜯던 양아치 같은 놈을 이끌고 허름한 닭백숙 집에 가서 식사를 하며 소주도 한잔 했다.
분위기가 좀 잦아들려는데 좀 많이 잃은 놈 하나가 보챈다.
어디서 군용담요 하나 얻어와서 판을 깔고 있다.
돈 따고 배도 부른 내가 무슨 의욕이 있겠나.
밥값 내가 낼 테니 그만하고 집에 가자. 늦게 가면 마누라에게 야단맞는다. 나 빨리 가야 한다. 라고 했더니, 소리 지르며 성질을 부린다.

그래서 내가 아~ 그 양반 성질 더럽네 하면서, 당신 직업이 뭔데.. 그 성질로 우찌 살아가요?
했더니.. 머뭇거리며 성형외과 의사란다.
처음 짤짤이하자고 나를 슬슬 긁었던 그 놈이다. 그 거지가 의사란다. 기가 차서..
그러면서 자연스레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는데.. 한 넘은 변호사고 다른 하나는 당시 강남에서 알아주던 제법 큰 식당의 사장 아들이었다. 구경하던 양아치는 잘나가는 학원 강사란다.

직업을 말하고 나니 더 하자고 떼쓰는 놈이 없다.
자리를 옮겨서.. 방석집 비슷한 곳으로 옮겨 젓가락 두들기며 찐하게 한 잔 더 먹었다.
짤짤이 해서 딴 피같은 돈에다 내 생돈 상당히 더 보태서 쓰고.. 늦게 집에 들어왔다고 집에서 또 벌금도 내고.. 그랬던 이야기다.

(2022 5 3일  페이스북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