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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 100번째 칼럼

by 변리사 허성원 2023. 3. 4.

100번째 칼럼

 

이 글로서 이 신문에 싣는 나의 칼럼이 꼭 100번째가 된다. 21828일에 첫 칼럼 '인류의 위대한 발명, 천리마'를 게재하고 근 2년 반 만의 성과다. 처음엔 한 달에 한 건 꼴이었으나, 22년 새해 들어서는 팔 걷어 부치고 거의 매주 하나씩 실었다. 버겁다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러면서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하였다. 기회를 준 신문사와 서툰 글을 읽고 격려해주신 많은 독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칼럼의 주제는 대충 4가지로 나뉜다. 천리마를 모티브로 한 32개는 사기, 한비자, 순자 등 동양고전에 등장하는 천리마 이야기에 기초하여 리더십이나 전략 혹은 삶의 지혜 등에 관한 통찰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특허 전략과 리더십 관련 글이 각각 20개와 42개이다. 이들도 동서양 고전의 가르침을 많이 빌려왔다. 그리스신화의 아테나를 모티브로 한 특허철학에 관한 아테나이 시리즈는 이미 5개가 실렸고 이는 한동안 계속 될 것이다.

안다는 것과 쓴다는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야 앎을 글로 전환하는 요령과 틀이 조금 보이는 듯하다. 나의 글쓰기는, 적절한 글감 즉 모티브를 찾고, 그를 뒷받침하거나 이해를 돕는 팩트나 비유 자료를 구한 다음, 그들로부터 통찰한 가르침이나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도출해내는 3단계의 과정으로 대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의 진정한 핵심은 '연결'이다. 연결은 스티브 잡스가 말한 창의력의 본질이듯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팩트, 비유, 통찰을 절묘하게 서로 이어나가는 데에 글쓰기의 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장롱특허를 비난하는 기사를 만나면, 장자의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 고사와 기술개발의 현실 및 특허전략을 엮어서, 내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선명히 하는 것이다.

매번 새로운 글감을 정하는 일은 역시 쉽지 않다. 그래서 일상의 하나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관점과 시야가 예전에 비해 현저히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다. '그 행하는 바를 보고, 그 까닭을 살피며, 좋아하는 바를 헤아려보라'(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_ 論語 爲政編). 이는 공자가 인물을 평가하는 방법이지만, 세상을 보는 눈도 다르지 않다. 공자가 쓴 ()’, ‘()’, ()’은 모두 '보다'라는 공통의 뜻이 있지만, 그 쓰임이 미묘하게 다르다. '()'가 물리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라면, '()'은 머리로, '()'은 가슴으로 보는 것이리라. 그저 눈으로만 보는 '()'의 수준으로는 현상을 기록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머리로 혹은 가슴으로 보는 ()’()’의 시야가 나름 호소력 있는 글을 탄생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득이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온갖 분야에서 폭넓게 관심을 두고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짧은 고전 문구 하나를 인용하더라도, 그 원문을 찾아 해당 문장뿐만 아니라 전후 상하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옮겨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나 책 속에서 혹은 시사 이슈를 가져다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것을 기억에 의존하여 대충 써서는 큰 탈이 날 수 있으니, 벤허 등 옛 영화를 다시 보거나 고전 등 여러 책을 새로 읽기도 하며, 인터넷 검색도 꼼꼼히 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이다. 배운 지식과 정보만으로는 감동이 없다. 사색이 깊을수록 풍부한 통찰이 얻어졌다. 공자가 말했다. '배우되 사유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사유하되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그래서 배움과 사유가 적절하게 균형이 필요하다. 구슬처럼 흩어진 지식은 사유를 통해 비로소 서로 꿰어져 큰 가치를 발휘한다.

칼럼이 여기까지 온 것은 스스로도 기특하고 대견하다. 이 일은 신문사 정창훈 대표와 소주를 나누다가 기명칼럼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누구의 제안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청약과 승낙이라는 계약법 상의 합치로 약속이 성립되었다. 이로 인해 나는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높은 곳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우는(登高去梯)' 상황에 올라타서, 곱다시 죽기 살기로 지금에 이르렀다. 한 마디 제안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였다.

이 칼럼은 별다른 사정이 없는 한 지속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인의 지성을 자극하는 쇠파리가 되고자 하였다. 언감생심 쇠파리의 경지까지는 넘볼 수 없지만, 나의 생각과 글이 쇠파리의 날갯짓만큼이라도 독자들의 마음에 파동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로서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 변함없는 따뜻한 관심과 따끔한 채찍을 요청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