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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재산권보호

[허성원 변리사 칼럼]#89 슬기로운 기술 베끼기

by 변리사 허성원 2022. 12. 3.

슬기로운 기술 베끼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등의 명령 실행은 화면에 띄워진 그림 아이콘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라 한다. 그 이전에는 copy, delete 등 명령어 문자를 일일이 입력하는 CUI 환경이었다. 1983년 애플이 출시한 매킨토시에 의해 GUI가 최초로 상용화되었다. 그런데 당시 애플이 매킨토시를 막 출시하려 할 때, 공교롭게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윈도우라는 새로운 GUI 운영체제를 개발한다고 발표하였다.

스티브 잡스는 놀라고 화가 나서 당시 애플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던 빌 게이츠를 불러, 그의 배신행위를 비난하며 자신들에게서 GUI 기술을 도둑질하였다고 따지며 다그쳤다. 그러자 조용이 듣고 있던 게이츠가 말했다.

", 스티브, 이 문제는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 둘에게 제록스라는 부자 이웃이 있었는데, 내가 TV를 훔치려고 그 집을 침입했다가 당신이 이미 훔쳐 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비슷하다고 봐요."

빌 게이츠는, 스티브 잡스의 매킨토시뿐만 아니라 자신의 윈도우도 그들의 독자 기술이 아니라, 제록스의 팔로알토연구소가 가진 GUI 기술에서 훔쳐온 것임을 실토하며 꼬집은 것이다. 팔로알토연구소는 혁신적인 GUI 기술을 최초로 개발하고도 그 잠재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반에 공개하였다. 그것을 본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그 파괴적 잠재력을 단번에 알아보고,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록스의 시스템을 역설계하여 각자 나름의 GUI를 개발해내었다. 이처럼 현재 모든 컴퓨팅 시스템의 표준이 된 GUI 혁명은 남의 기술을 베낀 역설계의 산물이다.

이 에피소드는 론 프리드먼의 저서 '역설계'에 소개되어 있다. 역설계는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 혹은 역공학이라고도 부른다. 통상의 설계는 자신의 아이디어나 축적된 기술에 기초하여 제품의 얼개를 그려내어 제품에 적용하지만, 역설계는 타사의 제품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차근차근 분해하며 역으로 설계 도면을 재구성해내는 작업이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구조적인 형상뿐만 아니라, 구성품의 재질, 열처리, 표면처리, 공차, 상호 동작 관계 등 숨겨진 기술적 요소까지 분석해내고 데이터화하여 설계에 반영한다.

이 역설계는, 아무리 좋게 표현하더라도 결국은 남의 제품을 통째로 베끼는 일이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7~80년대 우리나라 산업의 초기 고도 성장은 사실상 이 역설계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년대 전반에 연구원 생활을 시작한 나도 수많은 외국의 기계들을 구입하여 분해하고 잘라 보면서 배웠었고, 당시 척박한 산업과 기술의 환경에서 연구나 설계업무에 종사한 엔지니어라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역설계 행위가 혹 부끄럽거나 부도덕한 일로 여겨지는가. 물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겠지만, 비난받을 범법행위도 아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합법적인 노력으로 인정된다는 말이다. 시판된 제품은 이미 공개 기술이기에, 부정경쟁방지법에서 말하는 영업비밀의 보호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공개된 남의 제품을 마음대로 베낄 수 있다니, 그렇다면 누가 새로운 제품을 마음 놓고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 혁신적인 제품일수록 그것을 베껴서 무임승차하려는 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그들은 선량한 경쟁자의 개발 시간(lead time)’을 부당히 무임승차하여 유리한 출발(headstart)’을 하게 될 것이니, 공정한 시장경쟁이 보장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하다. 그런 우려를 해소하는 것이 특허제도의 존재 이유이다. 비밀로 유지된 기술은 영업비밀로 보호되지만, 공개된 기술은 특허가 보호한다. 이런 특허제도가 있기에,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혁신제품들을 함부로 베껴서 쓰지 못한다.

그리고 역설계는 기업의 건강한 생존 활동이다. 경쟁사의 새 제품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면 그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경쟁 제품은 신속히 입수하여 분석하고, 배울 점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하지만 배우되 함부로 쓸 수는 없다.

단순 모방은 자존심의 문제도 있지만 비난을 피할 수 없고, 특허 침해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그래서 모방하되 자신만의 가치로 승화하여 비난과 자존심의 문턱을 뛰어넘어야 하고, 특허 리스크도 철저히 예방하여야 한다. 거기다 자신의 고유 특허를 확보하여 무장할 수 있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이 삼박자가 슬기로운 기술 베끼기의 기본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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