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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21 왜 그리고 언제 울 것인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3. 7. 29.

왜 그리고 언제 울 것인가

 

내친 김에 울음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지난 칼럼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로다'에서 연암 박지원의 '호곡장론'을 가지고 리더의 울음터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번에는 허균(許筠)의 통곡헌기(慟哭軒記)이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에게는 허친(許親)이라는 조카가 있었는데, 그는 새로 지은 집에 통곡헌(慟哭軒)’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통곡하는 집이라는 뜻이니, 허친의 성정과 기행도 당대의 이단아였던 숙부에 뒤지지 않은 듯하다. 통곡헌기는 그 현판 이름에 관한 글이다.

통곡하는 집이라고 이름을 기이하게 지었으니 사람들이 비웃었다. “인간 세상에 즐거워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찌 '()' 자를 현판에 쓴단 말인가? 더군다나 곡하는 사람이라면 부모 잃은 자식이거나 남편 잃은 아녀자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몹시 듣기 싫어하는 소리인데, 그대 홀로 사람들이 싫어함을 무릅쓰고 거처에다 걸어놓았네. 어찌 그리하는가?”

허친이 말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버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피하는 사람이오. 세상 흐름이 기쁨을 좋아하면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나는 근심합니다. 부귀나 영화를 이루면 세상 사람들은 기뻐하지만, 나는 마치 더러운 것인 양 그것들을 버릴 것이오. 오직 빈천하고 검약한 것을 본받아 그에 처하고, 반드시 매사에 거스르고자 합니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택하려 하니, 그런 즉 통곡보다 더한 것이 없기에, 내 집의 현판으로 삼았소.”

스스로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 임하고, 사람들이 다들 싫어하는 슬프고 근심하는 일을 보듬으며 살겠다고 한다. 예수나 테레사 수녀와 같은 성인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고도의 탈속한 말이다. 허친의 실제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삶의 철학과 고결한 품성이 온전히 느껴진다. 허균은 조카의 말을 받아 그를 비웃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통곡하는 데도 역시 도()가 있지요. 사람에게는 대개 칠정(七情)이 있고, 그 중에서 쉽게 마음을 움직여 감정을 일으키는 것으로 슬픔만한 것이 없습니다. 슬픔이 도를 넘으면 곡을 하게 되는데, 슬픔이 닥치게 되는 까닭은 여러 가지지요. 때맞춰 일을 해낼 수 없어 상심하여 통곡한 사람은 가태부(賈太傅), 흰 실이 그 본성을 잃게 된 것을 슬퍼하며 운 사람은 묵적(墨翟)이요, 갈림길이 싫어 통곡한 사람은 양주(楊朱), 길이 막혀 통곡한 사람은 완보병(阮步兵)이요, 불우한 운명을 비관하여 스스로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고는 정에 부쳐 운 사람은 당구(唐衢)입니다. 이들은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 통곡한 것입니다. 이별을 상심하거나 억울한 마음을 품는 등 하찮은 일로 아녀자들의 울음을 흉내 낸 것이 아닙니다."

가태부(賈太傅) 즉 가의(賈誼)는 한나라 문제 때의 문신으로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사직이 위태롭다는 상소를 올리며 곡()을 언급하였고, 묵적(墨翟) 즉 묵자(墨子)는 흰 실이 염료에 의해 물들듯이 군주들이 신하들에 물들어 심성이 변하게 됨을 슬퍼하였다. 양주(楊朱)는 갈림길에서 한 쪽을 선택하면 다른 길을 버려야 하기에 울었고,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완보병(阮步兵, 阮籍)은 울분이 차면 말이 가는 대로 가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면 통곡하였으며, 당구(唐衢)는 자신의 뜻이 수차례 꺾이자 그 슬픔을 못 이겨 통곡하였다.

군자 즉 리더의 울음은, 소인들의 것과 달리, 그 우는 뜻이 높고도 큰 데에 있어야 한다. 허균은, "지금 이 시대는 저들의 시대에 비해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교활합니다. 벗의 만남에서도 서로 어긋남이 갈림길 나뉘는 것보다 더 심하며, 어진 선비가 당하는 곤경과 불행은 막다른 길보다 더합니다. 그러니 모두가 세상을 벗어나 떠날 생각을 합니다."라고 하며, 지금 나라의 현실은 리더들의 통곡이 필요한 지경임을 이른다.

그리고 허균은 마무리한다. "만약 저 군자들이 이 시대를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팽함(彭咸)이나 굴대부(屈大夫)처럼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으려고 했을 것이오. 허친이 '()'을 현판에 쓴 것도 역시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은 그의 '()'을 비웃지 말아 주십시오.” 은나라 팽함(彭咸)이나 초나라 굴대부(屈原)는 그들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돌을 끌어안는 등 하여 강물에 뛰어들어 죽은 충신들이다. 그들은 때를 놓쳐 제대로 소리 내어 울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나라의 파멸 위기를 맞았다.

리더의 울음이 가벼울 리 없다. 그 우는 까닭은 태산처럼 무거운 뜻을 품고, 그 우는 때는 시의(時宜)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 군자가 울어야 할 이유와 그 때를 허균은 통곡헌기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다. 지난번에 호곡장론을 보고 좋은 울음터를 이미 생각해 두었으리라. 이제 그 울음터에서, 왜 그리고 언제 울어 볼 것인가.

 

교산 (蛟山) 허균(許筠) (1569~1618) :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성옹(惺翁) 등이다. 허엽의 막내아들로 강릉시 사천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노수신 등 재상과 장차 이름을 날리게 될 이순신, 유성룡, 원균이 살고 있는 건천동에서 살다가 1577년 8세 때 상곡(명례방)으로 이사를 갔다.

** 허균(許筠,1569~1618)

허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인이다. 1569년(선조 2)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 10)에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문재에 뛰어났고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이달에게 배웠다. 명 사신 접대에 종사관으로 기용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명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가담하여 폐모론을 적극 주장했다. 유학 외에 불교와 도교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비판적 개혁사상가로서 여러 이론을 개진했고,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한정록」 등의 작품을 남겼다.
..
허균은 1617년(광해군 9) 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 허균의 '나를 나무라는 사람에게(對詰者)' 중에서
(허균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쓴 글로서, 그 성정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 나의 성품이 더럽고 옹졸하고 엉성하고 거칠어서, 기교를 부릴 줄도 모르고 아첨하지도 못하네.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고, 이야기가 남을 칭찬하는 데에 미치면 입이 머뭇거려지고, 발이 권세 있는 집의 대문에 이르면 발꿈치가 갑자기 쑤신다네. 높은 사람에게 절하려면 몸이 기둥처럼 뻣뻣해진다네. 이런 떨떠름한 모습으로 높은 사람들을 뵈오니 보는 이들이 금방 나를 미워해서 목이라도 자르고 싶겠지.."
_ 이이화의 <허균의 생각> 중에서

** 통곡헌기(慟哭軒記) 원역문(자료들 참고하여 자가 번역하였음)

余猶子親者構其室。扁曰慟哭軒。人皆大笑之曰。世間可樂之事甚多矣。何以哭爲室扁耶。況哭者。非喪之子則失恩婦也。人甚惡聞其聲。子獨犯人忌而揭其居。何哉。

내 조카 ‘친(親)’이 그의 집을 짓고 현판을 ‘통곡헌(慟哭軒)’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인간 세상에 즐거워할 만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찌하여 울 '곡(哭)' 자를 집의 현판으로 삼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곡(哭)'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모 잃은 자식이거나 아니면 남편을 잃은 아녀자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몹시 듣기 싫어하는데, 그대 혼자서만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를 무릅쓰고 거처에다 걸어놓았네. 어째서 그리하는가?”

親曰。余背時嗜而違俗好者。時嗜懽。故吾好悲。俗則欣欣。故吾且戚戚。至於富貴榮耀世所喜者。則吾棄之若浼。唯視賤貧窮約而處之。必欲事事而違之。常擇世之所最惡者。則無踰於哭。故吾以額吾之軒也。余聞而諗諸笑者曰。

그러자 ‘친(親)’이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버리고 좋아하는 것을 피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흐름이 기쁨을 좋아하면 나는 슬픔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즐거워하면 나는 근심합니다. 부귀나 영화를 이루면 세상이 기뻐하지만, 나는 마치 더러운 것인 양 그런 것을 버릴 것입니다. 오직 천하고 빈궁하고 검약한 것을 본받아 그에 처하고, 반드시 매사에 거스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를 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즉 통곡보다 더한 것이 없기에, 나는 그것을 내 집의 현판으로 삼은 것입니다.” 라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비웃던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夫哭亦有道矣。蓋人之七情。易動而感發者。無哀若也。哀至則必哭。而哀之來者亦多端。故傷時事之不可爲而慟哭者。賈大傅也。悲素絲之失其質而哭者。墨翟也。厭岐路之東西而哭者。楊朱也。途窮而哭者。阮步兵也。悲時命之不偶。自放於人外而寓情於哭者。唐衢也。之數子者。皆有懷而哭。非傷離抱屈而屑屑效兒女子之哭者

“통곡하는데도 물론 도(道)가 있지요. 사람에게는 대개 칠정(七情)이 있고, 그 중에서 쉽게 마음을 움직여 감정을 일으키는 것으로는 슬픔만한 것이 없습니다. 슬픔이 도를 넘으면 반드시 곡을 하게 되는데, 슬픔이 닥치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기 마련이지요. 때맞춰 일을 해낼 수 없어 마음이 상하여 통곡한 사람은 가태부(賈太傅)요, 흰 실이 그 본성을 잃게 된 것을 슬퍼하며 곡을 한 사람은 묵적(墨翟)이요, 동서로 나뉜 갈림길이 싫어 통곡한 사람은 양주(楊朱)요, 길이 막혀 통곡한 사람은 완보병(阮步兵)이요, 불우한 운명을 비관하여 스스로를 세상 밖으로 몰아내고는 정에 부쳐서 통곡한 사람은 당구(唐衢)입니다. 이들은 모두 품은 생각이 있어 통곡한 것입니다. 이별에 마음 상하거나 억울한 마음을 품는 등의 하찮은 일로 아녀자들의 울음을 흉내낸 것이 아닙니다.

今之時。比數子之時。又加末矣。國事日非。士行日偸。交朋之背馳。有甚於路岐之分。而賢士之厄困者。不啻於途窮。皆有遁去人外之計。

지금 이 시대는 저들의 시대에 비해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나랏일은 날로 그릇되고, 선비들의 행실도 날로 교활합니다. 벗의 만남에서도 서로 어긋남이 갈림길 나뉘는 것보다 더 심하며, 어진 선비가 당하는 곤경과 불행은 막다른 길보다 더합니다. 그러니 모두 사람들을 벗어나 떠날 생각 하고 있습니다.

若使數君者子目擊斯時。則未知當作何如懷。而將慟哭之不暇。皆欲抱石懷沙。如彭咸,屈大夫也。親室之扁以哭。亦出乎玆。諸君毋笑其哭可也。笑者喩而退。因爲之記。以釋群疑。

만약 저 군자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눈으로 보게 한다면 어떤 생각을 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장차 통곡할 겨를도 없이 모두 돌을 끌어안거나 모래를 품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팽함(彭咸)이나 굴대부(屈大夫)처럼 말이죠. 허친이 '곡(哭)'을 현판에 쓴 것도 역시 그런 뜻에서 나온 것이니, 여러분들은 그의 '곡(哭)'을 비웃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하니, 비웃는 자들이 깨우치고 물러갔으므로, 이에 (통곡헌)기(記)를 지어 뭇 의심을 풀게 하였다.

** 통곡헌기(慟哭軒記) 출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중 통곡헌기(慟哭軒記) 원문

 

** 지난 칼럼 <목놓아 울기 좋은 곳이로다>

 

[허성원 변리사 칼럼]#120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로다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로다 “목 놓아 울기 좋은 곳이로다. 가히 울어 볼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 이 말은 조선 후기 문인이며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이 사신 일행을 따라 청나라의 수도

www.dotomari.com

 

** 사단칠정(四端情)

사단(端,  )은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씨 즉 선천적이며 도덕적 능력을 말하며, 칠정()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을 접하면서 표현되는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을 말한다. 사단은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 나오는 말로 실천도덕의 근거로 삼았다. 측은지심():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수오지심(): 자신의 옳지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사단은 이 네 가지 도덕적 감정을 말한다.
그리고 칠정은 《예기()》의 〈예운()〉과 중용()에 나오는 말로, 기쁨(희 ), 노여움(노 ), 슬픔(애 ), 두려움(구 ), 사랑(애 ), 미움(오 ), 욕망(욕 ) 일곱 가지 인간의 자연적 감정을 가리킨다. 원래 사단은 인()·의()·예()·지()의 덕목과 관련된 윤리적 범주에, 칠정은 인간의 감정을 총칭하는 인성론의 범주에 각각 속하여 서로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성리학이 일어나면서부터 이 두 개념은 인간 심성이 발현되는 과정에서 도덕적 성격을 띠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각각 나타내는 상반된 의미로 인식되어 대조되는 개념으로 쓰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단칠정 [四端七情]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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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賈太傅 : 한 문제(漢文帝) 때의 문신 가의(賈誼)이다. 20세에 박사(博士)가 되었고
장사왕 태부(長沙王太傅)를 지냈는데, 33세에 죽었다그가 양 회왕의 태부(梁懷王太傅)로 있을 때에 일종의 시국광구책(時局匡救策)인 치안책(治安策)을 문제에게 상소하였다. 그 상소의 첫머리에서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데 지금의 사세가 통곡할 만한 것이 하나요눈물 흘릴 만한 것이 둘이요길이 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입니다. 그외 이치에 반하고 도리를 해치는 것은 두루 열거하기도 어렵습니다(賈誼 上疏曰臣竊惟今之事勢可爲痛哭者一可爲流涕 者二可爲長太息者六 若其他背理而傷道者難徧以疏擧”라는 글이 매우 유명하다.

 

통감 이야기 167. B.C.174년 賈誼上疏 가의상소문.

통감 이야기 167. (通鑑節要) B.C.174년 太宗孝文皇帝 上 (文帝 六年 丁卯) 賈誼上疏 가의상소문. 관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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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염소사(悲染素絲) 혹은 묵비사염(墨悲絲染)
묵자(墨子, 묵적墨翟, BC 479년경 ~ BC 381년경)이 흰실이 물드는 것을 슬퍼하다. 흰 실은 검은 색이든 붉은 색이든 무엇으로나 물들일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성품도 처한 상황에 따라 착하게도 악하게도 될 수 있고, 한 번 물들면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묵자를 이를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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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路岐, 갈림길), 읍기양주(泣岐楊朱)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양자(楊子; 楊朱, B.C.440~B.C.360)가 갈림길을 보고 통곡을 했는데, 그 이유는 남으로도 또 북으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楊子見岐路而哭之 爲其可以南可以北)고 한다.
어느 한 쪽 길에 들어서고 나면 다른 길로는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슬퍼한 것이다.
양주읍기(楊朱泣岐) 또는 양주읍기로(楊朱泣岐路)라고도 한다.

* 완보병(阮步兵)
“벼슬은 반갑지 않다. 다만 두강이 소중할 뿐”(不樂仕宦 惟重杜康)이라며 두강촌에서 두강과 더불어 난세를 타넘은 완적(阮籍·210~263)이다. 그는 당대 제일의 문사이면서도 권력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좋은 술이 많다는 어느 병영의 보병교위로 자원해 갔다. 그런 그를 친구들은 완보병(阮步兵)이라 불렀다. 완보병은 종종 울분에 차면 수레를 타고 말이 가는 대로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수레가 멈추면 그 자리에서 통곡하다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 팽함 [彭咸]
은(殷)나라 때 사람. 충신(忠臣). 현명하다는 칭송을 들었다. 임금에게 직간(直諫)했지만 듣지 않자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굴원(屈原)이 「어부사(漁父辭)」에서 “어찌 깨끗하고 깨끗한 몸으로 남의 더러움을 받겠는가. 내 차라리 소상강(瀟湘江) 강물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쓰겠는가.(安能以身之察察 受物之汶汶者乎 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라고 표현했는데,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