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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지혜로운삶

정의란 무엇인가 _ 플라톤의 '국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1. 7. 30.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 함께 피레우스 축제에 다녀오던 길에 폴레마르코스를 만나 그의 집에 초대된다.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를 만나 가벼운 인사를 나누다가, 대화 주제가 '정의란 무엇인가'로 넘어간다.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와 순차적으로 정의의 뜻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답을 말하지 않고 상대의 논리에 반박하며 질문을 던지는 특유의 질문 대화술로 논쟁을 이어간다. 

1. 케팔로스의 정의 : '정직과 빚진 것을 갚는 것'

케팔로스(부유한 사업가 노인)와의 대화
노년의 삶에 대해 잠시 대화한 후,
'재산의 유용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케팔로스는 핀다로스가 한 '희망이 정의와 성스러움 속에 사는 사람의 영혼을 달래준다'라는 말을 들며, '정의' 뜻을 정직과 빚진 것을 갚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고는 케팔로스는 자리를 뜨고,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재화를 이어간다.

'남에게 빌린 것은 반드시 돌려주어야 옳다'

소크라테스의 논박 : 상대가 만약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면? 혹은 적이라면?
-> 플레마르코스 '상대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

2. 플레마르코스의 정의 : '친구에게는 이익을, 적에게는 해악을 주는 것'

병에 걸렸을 때 의사가 필요하고, 항해를 할 때 선장이 필요하다. 그런데 병에 걸리지 않거나 배를 타지 않을 때 선장이 필요없다.
그러면 평화시에는 정의가 필요없는가?

플레마르코스 정의의 수정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

소크라테스 : 유용하다는 것은 기술과 같은 것이군.
병을 잘 고치는 자는 병의 예방에 능할 것이고, 공격을 잘하는 자는 지키는 데 능할 것이다.
방어에 능한 자는 곧 공격에도 능할 것이며, 잘 지키는 자는 훔치는 데에도 능할 것이다.
결국 정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행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결론이 나오네.
결국 정의한 도둑질을 잘하는 하나의 기술이 되고 말았네.
다만 자네 말처럼, 친구에게는 이익이되고, 적에게는 해를 주는 방법으로 말일세.

소크라테스 : 그리고 선과 악, 친구와 적은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말일세.
그러다 보면 악한 자에게 이익을 주고 선한 자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법이지.
그러면 선량한 사람을 해치는 일이 정의의 몫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정의로운 자는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못한다> _ 소크라테스의 논리
말의 미덕은 정의이다. 말이 상처를 입으면 말의 미덕이 손상되어, 불의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해를 입으면 미덕이 손상되어 부정한 사람이 된다.
정의로운 사람이 그의 정의로움으로 타인을 '불의'하게 만들 수 있는가? 불가하다.
따라서 선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부채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친구와 적을 구분하여 이익과 해악을 나누는 것이 정의라고 하는 주장은 잘못이네.

 

3. 트라시마코스의 정의 :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트라시마코스 : 지배계급은 법률을 만들 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법률을 제정합니다. 이를 위반하면 정의에 어긋난 범죄자로 처벌하죠. 그래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는 곧 강자의 이익을 말하죠.

소크라테스 : 법률은 완전하지 않소. 통치자도 실수를 하기 때문에 항상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법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오. 그런데 그렇더라도 그 법에 따르는 것이 정의라고 그대는 말하지요.
법을 따르는 것 즉 정의가, 강자의 이익에 부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강자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소. 그러면 그대의 주장과 정반대의 상황이 되는 것이오.

<통치자는 약자의 이익을 대변한다>

소크라테스 : 의사가 의사로 불리고 선장이 선장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의술이나 항해술을 가졌기 때문이오. 의사는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의술을 써서 환자의 몸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돈벌이를 일삼는 자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선장도 선장의 이익을 위해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배를 탄 사람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면서 지휘하여야 합니다.
통치자도 이와 같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지 않고, 국민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지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기술이나 어떤 통치도 그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즉 기술의 대상, 통치는 통치의 대상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오. 그러니까 통치자로서의 강자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기보다는 통치받고 있는 약자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봐야 하오. 그리고 참된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언제나 대상의 이익(국민의 이익)을 돌보기 마련이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도 돈이건 명예건 보수가 주어여야 하며 그 지위를 거부할 경우엔 형벌이라도 주어여야 하는 거요.


 

소크라테스는 진지하게 논증한다. 정의가 불의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하며, 그 이유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정의로운 자는 지혜롭다. 음악가로서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지혜로운가. 당연히 조예가 깊은 쪽이다. 의사나 다른 전문가 등 어떤 분야에서든 전문 지식이 깊은 자가 더 지혜롭다. 지혜로운 사람은 굳이 남을 앞지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지하고 열등한 사람은 항상 타인을 이기려고 덤벼들며,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우긴다. 남을 굴복시키려 들거나 열등함에도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그래서 정의는 지혜를 닮았고, 불의는 무지와 열등에 가깝다.

둘째, 불의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다. 트라시마코스는 불의가 정의보다 더 크고 강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의가 불의보다 더 지혜롭고 더 높은 덕이라는 점과, 불의가 분열과 증오를 불러오는 반면 정의는 우애와 협조를 부른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군대, 도둑 혹은 강도와 같은 자들의 집단이 불의의 뜻을 품고 자신들의 강한 힘을 이용하여 나쁜 일을 도모한다고 하자. 그들은 불의의 뜻을 가졌기에 분열과 증오로 서로를 해치게 되며, 결국 그들이 가진 본래의 힘을 유지하거나 발휘할 수 없다. 이처럼 좋은 집단이든 나쁜 집단이든, 불의가 개입되면 불화로 인해 일을 그르치게 된다.

그래서 불의는 각 개인과 집단의 이익과 대립되고, 물론 정의에도 대립한다. 그렇기에 불의한 자는 신의 선택을 받을 수 없어 신의 적이 되고, 정의로운 자는 신의 친구가 될 것이니, 정의가 모든 면에서 불의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다. 지혜든 덕이든, 그리고 뜻을 모아 어떤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든 모두 그러하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악인들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들 집단은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한다.

셋째, 정의로운 삶이 행복하고 이득이다. 눈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고, 귀가 없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모든 사물에는 각기 고유한 기능이 있고, 그 고유한 기능을 그 사물의 '덕'이라 부른다. 눈과 귀가 덕을 잃고 악덕에 물들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사람의 정신에도 고유의 기능이 있어, 우리의 삶은 그 정신의 기능에 의지한다.

정신의 덕은 정신의 기능을 올바르게 잘 지키는 것이니 그것은 곧 정의이다. 고유한 덕의 기능을 상실한 악덕의 정신은 불의가 된다. 훌륭한 덕의 정신을 가진 사람과 악덕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정의롭고 훌륭한 정신을 가진 사람의 삶은 그 본연의 덕에 따르므로 잘 살게 되며 행복을 누리고, 그렇지 못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잘 살 수가 없어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은 그 자체로 유익한 것이니, 불의에 빠진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결코 이득이 될 리가 없다. 그러니 정의는 곧 행복과 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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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_ 플라톤의 '국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