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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지혜로운삶

피로스 이야기

by 변리사 허성원 2021. 7. 25.

1.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일갈

BC280년 로마는 피로스의 침공으로 위기에 빠졌다.
피로스는 한니발이 최고의 명장으로 손꼽았던 명장이었지만, 로마는 쉽게 정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피로스는 변설에 뛰어난 측근인 키네아스를 보내어 화의를 제안했다. 회의 조건은 피로스의 승리를 전제로 하여 로마가 정복한 일부 지역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을 공격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는 고심했다. 강력한 피로스의 군대와 싸우지 않고 휴전하여 평화를 얻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 원로원에서 표결에 부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Appius Claudius·BC 340 ~BC 273)가 원로원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는 고령의 나이와 시력을 잃은 눈 때문에 오랫동안 국정에서 물러나 있던 전직 집정관이었다. 아들과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서서, 굴욕적인 평화협상을 집어치우라고 연설하였다. 일부만 옮긴다.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내 눈이 멀게 되어 버린 것을 불행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내 귀까지 같이 멀어버리지 않은 것이 한탄스러워지는군요. 그랬더라면 이런 불명예스럽고, 로마의 명예를 더럽히는 휴전의 이야기 같은 것은 듣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단 한번의 불운을 당했다고 해서 여러분은 갑자기 어떻게 되어버리기라도 했습니까? 그 불운을 가져온 자와, 그자를 불러들인 무리를 적 대신 '친구'로 부르고, 루카니아와 브루티움인들로부터 선조들이 얻은 것을 돌려주겠다니요. 이것은 로마인을 마케도니아인의 노예로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이 노예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는군요.

그대들이 언제나 외쳐왔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직 젊고, 우리의 부친들이 한창이셨을 때, 저 위세를 떨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만약 이탈리아로 와서 우리와 대결했더라면 그는 지금 천하무적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기는 커녕 우리에게 패배당하여 도망치거나, 혹은 굴복하여 오히려 로마를 더 영광스럽게 만들어줄 뿐이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
여러분, 이런 자와 친구가 되면 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다른 침략자들까지 불러들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모욕을 당하고도 피로스를 응징하지 않은 채 그냥 돌려 보낸다면 남들은 우리를 손쉽게 굴복시킬수 있는 상대라고 경멸할 것이며, 타렌툼인이나 삼니움인들도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출처)

로마는 결국 피로스왕을 몰아내고 주권과 명예를 지켰다.

원로원에서 연설하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Cesare Maccari 작

 

2. 피로스의 승리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는 비록 이겼지만 그 자체가 오히려 재앙인 경우를 가리킨다.
피로스(Phrrhus)는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의 왕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에 비교할 만한 전략, 전술가였다.
기원전 297년 피로스는 많은 병사와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군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은 이렇다.
"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로마인들과 싸워 한 번 더 승리를 거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이 말에서 유래하여, 승리자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겨 결국에는 패배를 안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상처 뿐인 승리라는 의미로, 1885년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라프가 처음 사용하였다.

 

3. 피로스의 참모 키네아스

 

피로스의 최측근 참모인 키네아스에 대해, 피로스는 이렇게 평가했다.
"내가 힘으로 빼앗은 것보다 키네아스가 혀로 얻은 땅이 더 많다."

그는 빼어난 연설 솜씨로 전투 없이 정복하고 점령한 땅의 민심을 거두어 실질적인 영토로 만드는 역할을 한 지혜로운 참모였다. 
피로스가 로마 출정을 앞두고 있을 때  키네아스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키네아스가 물었다.
- 폐하, 이번 출정에서 로마에 승리를 거두면 그 다음엔 무엇을 하실 겁니까?
피로스가 대답했다.
"그 다음엔 이탈리아를 점령하여야지!"
-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나서는요?
"그 다음엔 비옥한 땅을 가진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 그런 다음에는 전쟁을 끝나는가요?"
"지중해를 너머 카르타고가 남아있지."
- 그러면 마케도이나와 그리스까지 전체를 정복하여 지배하게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것입니까?
그제서야 피로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편히 쉬어야지. 좋은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이야기나 하며 지내야지."


마지막 대답을 들은 키네아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편하게 쉬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면 지금도 할 수 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아무런 위험없이 이미 그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로마를 공격하고, 이탈리아를 정복하며, 카르타고까지 건너가야 하지요?"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어느 성공한 기업가가 휴양지의 게으른 젊은이와 나누는 대화의 형태로 돌아다닌다.
명장 피로스는 뛰어난 전략전술가로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저 편히 쉬며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라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필부의 비전이다.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갖지못한 군대의 운명은 불보듯하다.

어쩌면 '피로스의 승리'를 다시 정의하여야 할 것 같다.
"명분과 비전이 없는 승리"를 가리키는 말로서, 모래 위에 쌓은 성과 같이 오래 지킬 수 없다는 의미로.

실제로 피로스는 로마와의 화의 협상이 무산된 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그 나라도 이내 몰락하였다.

4. 아피아 가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감동적인 연설로 인해 키네아스의 화의 제안은 무산되었다.
실패한
키네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 길의 이름이 아피아 가도(Via Appia)이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재무관 시절 입안하여 건설했기에, 그의 이름 '아피우스'를 따서 명명되었다.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고,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2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이다.

[송동훈의 세계 문명 기행] [28] 지중해 진출에만 500년… 로마는 착실히 길을 닦으며 싸웠다

 

5.

"글라우콘, 이상국가란 말일세,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지 않는 한, 혹은 통치자가 철학을 국부하여 국가를 다스리지 않는 한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세. _ 소크라테스(in 플라톤의 국가론)

철인정치 _ 플라톤

"플라톤은 한 사회에서 정의를 실천할 사람으로 철학자 겸 통치자, 즉 철인왕(哲人王)을 상정했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고 지적이며 믿을 만하고 단순한 삶을 살 의지가 있는 인간이다. 이런 지도자가 다스리는 유토피아를 ‘칼리폴리스(kallipolis)’라고 불렀다. 철인왕은 모든 현상의 형상에 숨겨진 원형, 즉 이데아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다. 그는 지식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지식 자체,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 자체가 된 자다. 그는 철인왕을 항해를 떠난 배의 선장으로 비유한다.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민주주의를 비판한다. 당시의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인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융합과는 다른 선동주의나 다수주의에 가깝다. 다수의 투표로 뽑은 선장이 해로(海路)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 배는 좌초하고 만다. 플라톤은 민중들을 항해 지식이 없는 선원들과 비교한다. 불평이 많은 선원들은 선동가들이거나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배를 운항하는 항해사는 철학자다. 선원들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배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해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플라톤은 “진정한 선장이라면 배를 다스리기 위해서 항해에 필요한 계절, 하늘, 별, 바람, 그리고 모든 기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