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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

모임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1. 7. 24.

<종교(정치..)는 남자의 그것과 같다.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좋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하지만 제발 그것을 드러내놓고 흔들어대지는 말라.>

 

연말이 가까워오니 여러 모임들에서 이런 저런 행사 안내 통지가 온다. 회장 이취임식, 송년회, 정기총회 등등. 얼굴 내밀어야 할 곳이 참 많기도 하다. 나서기를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닌데도 다부지게 살아온 세월만큼 관계도 늘어난 모양이다. 모든 모임에 대해 나의 반응은 온도 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곳은 뜨겁고 어떤 곳은 미지근하다. 또 일부는 많이 차가워져 있다. 온기가 사라졌음에도 꾸역꾸역 나가는 것은 그동안 먼지 쌓이듯 쌓인 정과 가벼이 안면을 바꿀 수 없다는 알량한 체면 때문이리라.

모든 인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언젠가는 멈추거나 떠나야 한다. 그게 인간의 숙명 아닌가. 무릇 깨달음은 멈춤을 아는 데에서 시작하고(知止而后有定 _ 大學), 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으며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 _ 道德經) 하였다. 어차피 죽음이 갈라 놓을 때까지 모든 관계와 모임을 살뜰히 챙기지는 못할 것이니, 욕됨과 위태로움이 오기 전에 멈추어야 함을 생각해두어야 한다. 그럼 언제 멈출 것인가. 

요즘 특히 나가기가 영 껄끄러운 친목 모임이 두엇 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불편한 것은 '정체성'의 갈등이다. 개인의 정체를 정의하는 개념에는 종교, 가문, 출신, 정치관, 역사관, 성적취향 등이 있다. 이들에 관련하여 마찰을 일으키면 거의 해결방법이 없다. 누구도 자신의 정체를 포기 혹은 변경할 수 없고 또 남으로부터 침해당하고 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는 이런 정체성 관련의 이슈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아가서는 더욱 존중하는 것이 모임 등 관계의 시작점이다. 그것은 최소한의 예의인 동시에 단체 활동이 허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 할 것이다.

발걸음이 선뜻 내키지않는 모임은 그 최소한의 예의나 조건이 많이 손상되어 있다. 최근에는 특히 정치적인 이야기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나이가 들어 꼰대가 되어서인지 남의 말은 도통 들으려 들지 않고 자기 생각만 일방적으로 퍼붓는다. 어디서 줏어왔는지 극도로 편향되고 지독히 왜곡된 정보를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다 나르고, 자리에 앉을 때마다 거품을 물고 쏟아낸다. 그 중에 간혹 들어줄만한 옳은 말이 어찌 없겠는가. 그마저도 말하는 태도에 따라서는 듣기 싫다. 처음엔 지적도 해보고 어깃장도 놓아보았는데,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가 없고, 아무리 말려도 멈추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 잘 안다.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고등학교 동기 몇 녀석은 아예 절교를 해버렸다. 그래서 어딜 가도 웬만하면 적당히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고 그 순간만 넘기려 노력하지만, 그들의 말이 너무 길거나 내용이 심하게 악의적이면 결국 내 인내심이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다.

편견에 찬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더 위험한 것은 거기에다 행동력과 영향력이 더 보태진 경우이다. 어느 관료 출신이 함께하는 한 모임에 초대를 받아 가본 적이 있다. 내가 평소 가까이하고 싶은 멤버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관료 출신은 아직 힘이 넘쳤고, 그 모임과 회원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애정과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떠들고 그의 케케묵은 유신 시절의 사상을 열정적으로 전파하려 들었다. 그의 편견과 영향력에 보태어진 애정이 좋은 사람들의 모임을 희안한 방향으로 왜곡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그 자리를 겨우 벗어난 후 다시는 불러도 가지 않았다.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오래전에 누가 내게 해준 말이다. 이 말이 최근만큼 실감나게 와닿은 적이 없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생각이 서로 같다는 말이 아니다. 설사 생각이 다르다 하더라도 상대를 배려하여 절제하고 걸러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기에 말이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은 상대의 입장과 철학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각자 자기 말만 내뱉는 상황이다.

그렇다. '말이 통한다는 것'의 핵심은 '존중'에 있다. 상대의 호불호를 알고 그에 맞춰 내 행동을 여미는 것이 '존중'이다. 내가 그들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듯이 그들도 나를 당연히 잘 안다. 정치 이야기 등 정체성 주제는 항상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소지가 크기 때문에, 나는 그런 주제가 적어도 나에게서는 출발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다. 혹 상대에게서 그런 말이 나올 기미가 보이면, 조기에 멈출 수 있도록 언질을 주거나 경고 사인을 보낸다. 그런데 그들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오만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 요청이나 경고를 애써 무시한다. 아니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한다. 그건 고의다. 나에 대한 '존중'을 이미 버렸다는 명시적인 통고 행동이라고 밖에 여길 수 없다. 모르고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건 무지 혹은 오만 때문이니 문제는 조금도 덜하지 않다.

존중 받지 못한다는 것은 '모임'의 존재 의미를 고려할 때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심대한 문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다. 이제는 내가 그들을 더 이상 존중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존중 받지 못한 데 대한 보복이 아니라,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역사 인식, 인륜, 정치 철학 등 그 왜곡된 사고의 틀을 제대로 알아 버린 것이다. 냄새 풀풀 나는 식민사관이나 간혹 가슴 서늘하게 만드는 파쇼적 인권관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나. 그건 바로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에게는 아무리 억지로 노력해도 존중의 마음을 도저히 일으킬 수가 없고, 같은 공간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조차도 불편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개인을 미워할 수 없다. 그들도 나와 동등한 양심의 자유가 있다. 나는 그들의 사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양심의 자유는 무조건 존중해야 한다. 다만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성향을 무시하며 공개적으로 그 자유를 흔들어대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모임'의 침묵하는 분위기도 문제다. 부적절한 소리가 나올 때 별 저항 없이 내버려두는 것은 묵시적 허락으로 간주된다. 그 발언자가 모임의 지배적 위치에 있어 '모임' 자체와 다른 회원들을 존중하지 않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가질수도 있다. 그러면 회원들이 그 눈치를 보며 위축되어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모임은 언로가 제한되어 편향된 그들에게 휘둘리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일치되어 그 편향된 생각에 동조하고 있는 모임일 수도 있다. 혹은 대다수가 편향된 소수를 아예 무시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간에 그 모임은 상당히 병든 상태이다. 언제든 탄력적으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자정, 자가 치유 기능이 매우 약화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존중 받지 못하는 자리라면 명백히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존중할 수 없는 사람과 뭔가를 도모한다는 것도 명백히 위선이다. 일부 혹은 다수가 다른 일부 혹은 다수를 존중하지 않는 그런 모임도 정말 잘못된 것이다. 그런 모임 자리를 그동안에 쌓은 정 때문에 꾸역꾸역 나가는 것은 내 인생을 무가치하게 소모하는 낭비다. 내가 나가는 모임은 만인이 만인을 진심으로 존중하여야 한다. '존중'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극히 적다 하더라도 그곳은 내가 설 곳이 아니다. 그 외 다수와의 인간적 친분이 아깝다면 그건 다른 방법으로 지킬 노력을 할 일이다.

더북하게 자란 나뭇가지는 수시로 전지하여 다듬어 주어야 한다. 나무의 건강과 매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가끔씩 관계들을 단촐하고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전지 작업에 나름대로 까다로운 원칙이 있듯이, 관계 정리에도 나름의 잣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모임 정리에 '존중'이라는 잣대를 사용하기로 한다. 

그대들의 모임에서는 '존중'이 건강하게 살아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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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사람들과의 어울림은 아름다운 것이다.
어진 곳에 살기를 택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는가


_ 논어(語) 이인(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