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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

사기기행(史記紀行) 제1편 _ 20170914

by 변리사 허성원 2019. 12. 1.
[사기기행]

#1

중국 시안에 사기 기행왔습니다.
남을 속이는 범죄인 '사기'가 아니고 중국의 역사책 사기(史記)를 공부하는 여행입니다.

- 이번에도 세리시이오의 만권만리 프로그램에 동참한 학습 여행입니다.
이 여행을 이끌어주시는 김영수 교수님은 제가 오래 전부터 강의와 책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왔던 분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사기(史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 사기는 중국의 고대 전설의 시대부터 BC 약90년까지의 역사를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입니다.
130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총 52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수많은 인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지요.
경영자들에게 대단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손자병법이 겨우 6천자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엄청난 컨텐츠 규모가 짐작 가실 겁니다.

- 이런 엄청난 기록이 중국의 무거운 내공을 구성하고 있는 겁니다.
사기가 완성될 시기에 우리 땅에서는 신라 등 삼국이 아직 건국되기도 전이었으니, 중국 역사의 무게와 그 내공은 우리가 어찌해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면 우리의 영혼에 녹아들어 그것만큼은 오로지 우리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최대한 많이 챙겨 소화시키고 가겠습니다.

- 오늘 첫날은 서안함양 공항에 내려서 바로 머지 않은 곳에 있는 한경제의 묘(양릉)를 관람하였습니다. 역시 중국의 엄청난 스케일은 입이 딱 벌어집니다.
한경제는 한고조 유방의 손자로서 한나라 4대 황제입니다. 3대 한문제와 함께 나라가 안정되어 그 치세를 문경지치라 부릅니다.

- 양릉을 나와 한성시를 향해 갑니다. 한성시에는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 태어난 용문이 있습니다.
서안은 카이로, 로마, 아테네와 함께 세계 4대 고대 역사 도시 중 하나입니다.
서안 인근의 함양은 진나라의 수도이고, 서안의 옛 지명은 장안으로 한나라와 당나라 등 여러 왕조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서안 지역은 2천 수백년 전의 과거와 최고권력자를 배츌한 현재,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미래 모두가 배움과 관심의 대상인 곳입니다.

- 사마천은 그 개인의 삶 자체만으로도 후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이릉의 화'에 연루되어 죽음과 궁형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죽음보다 치욕스런 궁형을 택합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지요.
그런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홍모보다 가벼운 죽음보다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사마천을 낳은 한성시는 어떻게 사마천을 도시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3박4일간 틈나는 대로 여행기를 올리겠습니다.

[사기기행]

#2

한경제의 양릉 내에서 본 유물들입니다.

-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의 무덤 중에서 정부가 정식으로 발굴한 곳은 단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북경의 명대 13황제 능 중 신종의 무덤. 신종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돕는다고 파병을 했던 황제입니다.
중국정부는 이 발굴을 크게 후회하여 왔고, 그 이후로 단 하나의 무덤도 파헤치지 않았습니다. 발굴은 또 다른 파괴라 여기는 것이지요.
중국 정부의 인식. 정말 대단하죠?
진시황능 등 황제들의 무덤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발굴하면 어마어마한 관광상품이 될텐데요.
이렇게 자중하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국 대륙의 내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래서 한경제의 무덤은 전혀 손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주변의 갱도만 발굴되어 관광에 제공되고 있지요. 갱도는 총 24개. 각 갱도는 창고, 주방, 감옥 등 기능 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황제의 무덤은 진시황 때 처음으로 봉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왕의 무덤은 모두 평탄하게 조성되었는데, 진시황 때부터 이릉위산(以陵爲山, 능으로 산을 만들다)하게 되었고, 후대에는 이산위릉(산을 능으로 만들다)하였답니다.

- 한경제는 한나라의 세번째 황제인 한문제의 아들이고, 사마천을 태사령으로 데리고 있던 한무제의 아버지입니다.
한문제는 유방의 큰 아들인데, 여태후가 낳은 아들이 한혜제로서 먼저 황제에 올랐으나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황제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태후는 유약한 혜제를 앞세워 섭정을 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정통 권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몰락하지요.

- 각 갱도에는 토용들이 많습니다.
진시황능에는 토용들이 실물 크기였지만, 여기에는 팔길이 정도의 작은 토용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적게 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토용은 전체적으로 가늘고 깁니다. 그리고 팔이 없습니다. 아마도 팔 부분만을 나무로 만들어 부착하였었는데, 지금은 그 부분이 썩어 없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사기기행]

#3

- 한경제 능에서 한성으로 가는 길..
두어시간을 달려도 그저 평탄하다.
산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답답하다.
이 지역은 초한지나 삼국지에 '관중' 땅이라 불리는 곳이다.
여기를 차지하는 자가 천하를 차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곳의 토질은 순전히 황토다. 서북 쪽의 사막에서 날아온 미세 황토 입자가 퇴적되어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깊은 계곡이나 절개지가 보인다. 토질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가 집중적으로 오면 땅의 형태가 바뀐다. 어떤 데는 작은 그랜드캐년처럼 깊게 파인 지형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가면 400킬로미터 정도를 달려도 끝없이 옥수수 밭만 이어져 있다고 한다.

- 이런 평탄한 땅을 보니, 고대 중국의 전쟁이 왜 병차(兵車)를 기반으로 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병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고 3명이 승차한다. 마부는 전차를 운전하고, 차우(車右)는 창으로 근접전을 주로 담당하며 차좌(車左)는 활로 원거리 공격을 맡는다. 차좌가 최상급자이다.
이러한 마차는 평지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산악지대와 같이 병차의 이동이 원활하지 못한 곳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 이런 병차를 이용한 전투방식을 개혁한 사람이 조나라의 무령왕이다.
조무령왕이 도입한 것은 호복기사(胡服騎射).
호복기사는 오랑캐의 바지를 입고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을 말한다. 몇 백 년 후의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것처럼.

당시 중원에서는 남자들이 치마를 입었다. 치마를 입었으니 말을 탈 수가 없다. 반면에 북쪽 오랑캐들은 바지를 입고, 한 사람씩 말을 타고 어디든 달리며 활을 쏘고 창칼을 다루니 그 기동성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무령왕은 그 점을 간파하고 호복기사를 도입하려 했으나 오랑캐 풍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끈질기고도 절묘한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여 끝내 호복기사를 관철함으로써 중원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혁신은 지난하다. 그래서 잭 웰치는 하나의 변화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700번을 반복해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병차)
(무용총의 벽화 수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