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적재산권보호/특허의도

장롱특허는 있다 _ 초벌 글

by 변리사 허성원 2021. 7. 3.

장롱특허는 있다

 

며칠 전 포스팅한 칼럼 장롱특허는 없다에 관련하여 직간접적으로 여러 의견을 들었다.
당연히 동의와 부정의 의견이 공존한다. 동의하는 쪽은 국책연구기관 등에서 특허관리를 담당하는 분들이 많고, 그 반대 쪽은 특허청 심사관이나 경영자들이다. 

사실 그 칼럼을 쓰면서도 지면의 한계가 있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할 수가 없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다소 편향되어 보이게 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반론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아래와 같은 칼럼 외전을 쓸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린다.

 

#1
<핵심은 '양'과 '질'의 문제이다.>

특허전략의 기본은 질높은 유효 특허를 잘 확보하는 것이라는 점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다들 잘 알겠지만, '질'이라는 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질'은 여러 곳에서 작동한다.
연구개발의 질, 특허명세서 작성의 질, 특허관리의 질, 특허 심사 심판의 질 등등..
이 다양한 '질'은 해당 분야에 속하여 있는 '사람의 질'이기도 하다.
결국 '질'을 확보하는 것은 제대로 숙련된 사람을 키우고 유지하는 것이다.

'숙련'은 시간과 양의 함수다.
한두해 경력이나 한두 건 처리한 경험으로 숙련을 논할 수 없다.
충분히 많은 시간 동안에 충분히 많은 양의 훈련을 거쳐야만 비로소 '숙련'을 말할 수 있다.

소위 장롱특허는 '숙련'된 연구인력, 특허담당자, 심사관을 양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숙련된 '사람'이 충분히 육성되어 있는 환경에서만 질높은 '주전 특허'가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질높은 주전 기술'을 발자국이라 하자. 발자국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무엇인가가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장롱특허가 아니겠는가.

"뱁새가 깊은 숲속에 집을 짓지만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해도 그 배만 채우면 족하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문장이다. 
뱁새를 위한 나뭇가지 하나와 두더지의 배를 채울 물만 있으면 된다고 우길 것인가? 그것들을 위해 숲과 황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는가.

#2
<특허 진보의 역사>

우리 기업들의 특허 업무가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지 그 역사를 보자.

우리 기업들은 80년대까지만 해도 특허를 거의 이용할 줄 몰랐다. 
삼성전자 등이 TI사로부터 컴퓨터 특허침해로 제소되고, 수천만불을 물어준 이후에,
죽기살기로 특허 출원 건수를 늘리기 시작했다.

1997년 IMF 직전에는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은 한 해 2만건이 넘게 출원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문에 특허청의 심사2국에서는 자동차심사과가 몇 개 더 늘기도 했다.
당시 특허사무소의 특허담당자 한 명이 한 달에 40건 이상의 명세서를 써대는 것이 예사였다.
변리사의 수가 500명도 채 되지 않았을테니, 변리사가 실무를 제대로 관리할 수도 없었다. 

IMF 이후에 대기업들은 특허 질의 관리에 대폭 집중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해외에서 돈을 벌어오는 특허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같이 특허 정책의 역사를 보면 대충 이렇게 정리된다.
- 1단계 : 생존 단계, 특허 공격을 받고 살아남기, 특허 하나라도 가져보기.
- 2단계 : 양적 확보 단계, 배고픈 사람의 식탐과 같이 특허 건수 확보 시기.
- 3단계 : 질관리 단계, 먹고 살만하게 되어 품위를 추구하는 시기.
- 4단계 : 지배 단계, 특허로 돈을 벌어오는 수준.

삼성전자 등 일부 기업들은 명백히 4단계에 있는 듯하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특허 기업인 삼성전자도 1, 2, 3 단계를 약 30년간 충실히 거쳐왔다.

그런데 우리 중소기업들은 어느 단계에 있을까?
특허를 한 건이라도 가지고 있는 중소기업이 10%는 될까?

실제로 기업 현장을 보면, '우리도 특허 한 건이라도 가져봤으면'하는 기업이 많다.
그래서 1단계 내지는 2단계의 중소기업이 대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1, 2 단계에 허덕이는 기업들에게 3단계 수준의 특허 정책을 요구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리고 1, 2 단계를 거쳐본 기업만이 3단계를 간절히 원할 수 있다.
특허공격을 받고 심대한 위기에 빠져 보고,
어쩌가 확보한 특허로 내 비즈니스를 보호하려 했는데, 특허가 아무 소용이 없는 깡통이었던..
그런 아픈 경험을 가져야만, 비로소 '질'의 특허를 추구하게 되는 경지에 이른다.

 

#3
<장식특허?>

장롱특허는 수준이 낮은 허섭쓰레기 특허일 가능성이 높다.
'허섭쓰레기 특허'는
특허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
특허를 침해하기가 오히려 더 힘든 경우,
설사 침해가 발생하더라도 회피가 극히 용이한 경우,
특허 침해를 도저히 잡아낼 수가 없는 특허 등이다.

이런 '허섭쓰레기 특허'를 보유할 의미는 전혀 없다
라고 말한다면 그건 특허의 존재의미 중 상당한 부분을 망각한 것이다.
바로 '장식특허'의 영역이다.

어느 기업이 특허를 몇 건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특허가 없는 기업 A, 5건 가진 기업 B, 50건 가진 기업 C가 있다고 치자.
그 특허의 내용을 전혀 보지 않고도
A, B, C 세 기업들의 연구개발 노력과 역량, 시장에 대한 도전적 태도, 경쟁력 등이 은근히 느껴질 것이다.

A, B, C 세 기업의 경영자가 어떤 경쟁 기업을 방문하였다고 하자.
그 경쟁 회사의 본사의 온 벽면이 특허증으로 도배되어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상상해보라.
세 기업 경영자의 머리 속에는 각기 전혀 다른 복잡한 생각이 들 것이다.

한편 특허는 고객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특허 건수는 고객에게 더 나은 제품을 더 싸게 공급하기 위해 연구개발 노력의 결과라고 주장할 수 있다.
특허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건 대 고객 노력이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허섭쓰레기 특허가 나름 비즈니스에 기여하는 방법이니,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4
<장롱특허는 질낮은 특허?>

장롱특허는 수준이 낮은 허섭쓰레기 특허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모두가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시행착오의 기술, 부분적으로 성공한 기술, 다른 보완이 필요한 기술, 적용 타이밍을 기다리는 기술 등에 대한 것도 얼마든지 많다.
이런 기술은 다른 기술의 출현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하고, 언젠가 보완 기술이 등장하는 등 시기가 도래하면 주전 기술로 발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자.
유효한 질높은 주전 특허만을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축구경기에 비유해보자.
선수의 슛이 골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필경 쓸데없는 노력이다.
그런 선수의 슛팅을 비난하고 질타하면서,
오로지 골로 연결될 수 있는 유효한 슛팅만 해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의 골을 내기 위해,
골키퍼에게 붙잡힌 아까운 슛이나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무수한 헛발질을 견뎌내야 한다.
그런 붙잡힌 슛이나 헛발질들이 과연 쓸모없고 불필요한가?

더 중요한 것은 오로지 공격용으로만 개발된 '무기 특허'도 있다는 사실이다.
경쟁업체의 제품을 타겟으로 하여, 의도적으로 확보하는 경우를 말한다.
최근 이런 사례를 드물지않게 접하게 된다.
이런 무기 특허는 공격의 타이밍과 방법만을 기다리며 대기한다.

그런 무기특허가 특허괴물들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특허권자는 그 특허들을 장롱에 잘 보관해두고 그 기술은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
공격 명령을 내릴 대상과 시기만 노린다. 

 

###
솔직히 특허를 다루는 실무 변리사의 입장에서,
특허권자는 물론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특허 즉 장롱특허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고객이 그런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면 비용 절감을 위해 당연히 적절한 시기에 포기하라고 거품을 문다.

하지만 그것을 장롱에만 넣어두고 보유하고 있는 주체는
모두 나름대로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장식적 효과, 기업의 비즈니스 자신감, 하다 못해 과거 기술에 대한 의리 등 나름의 이유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롱 특허는 분명 당장 쓸모는 없지만, 항상 어디서나 천대받아야 할만큼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 4위의 다출원 특허 강국이 되었고,
기업의 연구능력, 변리사들의 특허 창출 능력, 특허청의 심사능력 등에서 세계적인 특허 선진국이 되었지 않았는가.

그리고 장롱특허는
기업의 성장단계에서 실질적으로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단계에 해당한다.
지금 벤츠를 타고 다닐 만큼 형편이 나아졌다고.
어렵던 과거에 타던 소형차나 그것을 아직 타고 다니는 사람을 천대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가?

장식특허를 볼 때 혹시 다음과 같은 키워드에 해당하지 않는가를 한 번만 생각해보자.
주전 기술 개발의 '거름', 숙련된 인력의 '훈련', 기업의 '장식', 기술 변천 역사와 '추억', '자존심' 등등..

그래서 장롱특허는 쓸모가 있다. 

 

화웨이 본사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특허증들

 

 

 

**
뱁새가 깊은 숲속에 집을 짓지만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해도 그 배만 채우면 족하다.

鷦鷯巢於深林,不過一枝.,偃鼠飮河,不過滿腹 _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 鷦鷯(초료, 뱁새 초, 굴뚝새 료), 偃鼠(언서, 누울 언, 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