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롱특허는 없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그대 말은 쓸모가 없네." 장자가 말했다. "'쓸모없음'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니 이제 '쓸모있음'에 대해 더불어 말할 수 있겠군. 이 세상은 넓고도 크지. 그런데 사람은 겨우 발자국 정도만 쓸 수 있을 뿐이라네. 그렇다고 발자국만큼만 남겨놓고 황천에 이르기까지 땅을 파낸다면, 여전히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겠는가?” 혜자가 답했다. “쓸모가 없겠군.” 장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네.”
장자 외물(外物) 편의 고사이다. '쓸모있음'은 '쓸모없음'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장롱특허'에 관한 기사가 최근 자주 보인다. "R&D 2위 한국, 장롱 특허만 쏟아낸다", "세금 낭비하는 ‘장롱특허’ 이대론 안 된다", "한국이 세계 2위? 참담한 R&D.. 장롱특허가 혈세 먹어치웠다" 등의 제목이다. 기사들에 따르면, '장롱특허'는 정부 출연연 등이 등록만 받아두고 활용하지 않는 특허들로서, 그들의 보유 특허 중 60%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고 하며, 국민의 혈세만 축내는 공공의 악으로 규정하고, 국가 연구개발사업의 비효율적 운용을 질책한다. 하지만 장롱특허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니다.
연구기관들의 업무 성과는 발명과 특허의 형태로 꾸준히 창출된다. 그 기술들이 모두 산업 현장에 활용되어 경제적 가치를 발휘한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가당치 않다. 그건 전 세계 축구선수가 모두 국가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월드컵 경기장에서 뛰길 바라는 것과 같다. 국가 대표선수 한 사람을 키워내는 데에는, 중도에 포기하였거나 후보로서만 혹은 국내경기에서만 뛰고 있는 그런 수많은 이름 없는 선수들로 이루어진 두터운 선수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허도 축구선수처럼, 주전 기술이 있는가 하면, 실패 기술, 후보 기술 혹은 은퇴 기술이 있는 법이다. 지금 세계 시장을 뛰어 다니는 주전 기술도 그 이전의 수많은 시행착오 기술이나 징검다리 기술 등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기술 사다리가 없었다면 어찌 탄생할 수 있었겠는가.
기술이라는 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영원히 그 빛나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듯, 지금 앞선 기술이 언젠가는 다른 새 기술에 의해 노후화되어 밀려나야 한다. 지금의 주전 기술이 장롱으로 들어가고, 장롱 속의 기술이 현장으로 발탁거나, 하다못해 주전 기술의 강화를 위한 훈련 상대가 되기도 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술은 없다. 모든 새로운 기술은 장롱에 쌓인 기술들을 토양과 거름으로 하여 탄생하니, 그 장롱특허들이야말로 진정한 기술력의 본질일 수도 있다.
특허는 기술 전쟁의 무기이다. 무기는 전쟁 시에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 군대의 존재이유와 같다. 그래서 그 존재만으로 전쟁을 억제하여 평화를 지키는 역할도 한다. 무기 특허가 지금 사용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평화 시 군대의 필요를 부정하는 것이다. 평소에 장롱에 보관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다가, 유사시에 훌륭한 공격 무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특허들이 있다. 그러다 무기로서의 기능을 잃으면 적극적으로 권리를 포기하면 유지비용을 줄일 수 있다. 포기된 장롱특허는 널리 자유로운 이용에 제공되어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덕을 베풀 수 있게 된다.
특허 전략은 돌탑을 쌓는 것에 비유된다. 그 탑의 높은 꼭대기는 빛나는 주전 기술의 자리일 것이다. 탑을 좁게 세우면 작은 외력에도 위태롭기에 마음껏 높이기 어렵다. 그러니 높이 쌓으려면 넓게 쌓아야 한다. 높은 탑은 기초가 넓고 주춧돌이 튼튼하여야 한다. 그 기초나 주춧돌을 구성하는 작은 돌들이 바로 지금 쓰이지 않는 장롱특허들이다. 양은 질을 낳는다. 풍성한 양의 장롱특허 층에서 우수한 주전 기술들이 배출된다.
현역으로 뛰는 핵심 주전 기술을 발자국이라 하면,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장롱특허가 메우고 있다. 장롱특허 없이 주전 기술만 덩그러니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장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쓸모있음의 쓸모는 알지만 쓸모없음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_ 인간세). '쓸모없음'의 '쓸모'를 잊거나 천대하지 말라. 쓸모없는 장롱특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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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특허는 있다
며칠 전 포스팅한 칼럼 '장롱특허는 없다'에 관련하여 직간접적으로 여러 의견을 들었다.
당연히 동의와 부정의 의견이 공존한다. 동의하는 쪽은 국책연구기관 등에서 특허관리를 담당하는 분들이 많고, 그 반대 쪽은 특허청 심사관이나 경영자들이다.
사실 그 칼럼을 쓰면서도 지면의 한계가 있어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할 수가 없음을 알고, 의도적으로 다소 편향되어 보이게 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반론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아래와 같은 칼럼 외전을 쓸 수 있게 되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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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子謂莊子曰:「子言无用.」 莊子曰:「知无用而始可與言用矣. 天地非不廣且大也,人之所用容足耳. 然則厠足而墊之致黃泉, 人尙有用乎?」 惠子曰:「无用.」 莊子曰:「然則无用之爲用也亦明矣.」 _ '莊子' '外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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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木 自寇也. 膏火 自煎也. 桂可食, 故伐之. 漆可用 故割之. 人皆知有用之用 而莫知無用之用也. _ '莊子' '人間世'
산의 나무는 스스로를 해치고, 호롱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기에 베어지고, 옻나무는 쓸모가 있어서 잘라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有用之用)는 알지만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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