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함'이 없다
어금니가 아파 찾은 동네 치과 의사는 다짜고짜 이를 뽑자고 한다. 미덥지 않아 다른 치과로 갔더니 '아직 좀 쓸 만하니, 최대한 치료해서 조금이라도 더 쓰고 봅시다'라고 하며 잇몸치료를 해준다. 몇 번 치료를 더 받은 어금니는 근 7년 넘게 버텨줬다. 무릎이 아팠을 때도 그랬다. 당장 수술하자는 말을 뿌리치고 옮겨간 다른 병원에서는 운동 처방을 권한다. 무릎은 수년 동안 안녕히 지내고 있다. 그들에게서 참된 의사의 모습을 느낀다.
특허 침해, 기술탈취, 영업비밀 이슈 등 기업 간 갈등 사건을 만나면, 젊은 시절에는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기가 막힌 증거 확보 사례나 절묘한 외통수 논리로 승기를 잡은 무용담 등으로 싸움닭 별명까지 듣게 된 술안주꺼리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승소가 반드시 의뢰인의 승리가 아니며 대리인의 자기만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무리 극적인 승소를 쟁취하더라도 비즈니스 관계가 망가져 기업이 위태로워졌다면 그것은 결코 승리가 아니다. 기업이 진정 원하는 것은 개별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성공임을 깨닫고 기업 간의 갈등을 소송 이외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게 되었다.
‘진정 훌륭한 변호사는 법을 이용하지 않는 해결책들을 충분히 잘 아는 사람이다’라는 법언이 있다. 변리사, 변호사 등 대리인에게 있어 법을 통한 문제 해결 수단은 의사의 수술칼과 같아서, 대체로 수술 자국과 같은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다. 기업 간의 갈등은 주로 비즈니스에 기초한 것이기에, 그 원인과 당사자들의 니즈 등을 잘 살펴보면 서로가 만족하는 다양한 창의적인 대안을 협상 등을 통해 이끌어 낼 수 있으므로, 흉터 없는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백번 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_ 손자병법 모공편). 전쟁에서 잘 싸우는 장수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장수가 진정한 명장이라는 말이다. 장수의 핵심역량은 전쟁에서 싸우는 능력에 있다. 그런데 고금 최고의 병법서는, 역설적이게도 장수들에게 핵심역량을 쓰지 말고 이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다들 전문 역량의 망치를 나름 하나씩 들고 있다. 과제를 만나면 그들은 다들 자신의 망치를 들고 두들겨 해결하려 든다. 하지만 정말 훌륭한 전문가는 가급적 자신의 망치를 쓰지 않으려 애쓴다. 위대한 스승은 지식 주입 없이 깨닫게 하고, 훌륭한 리더는 부리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게 한다. 그처럼 명의는 수술 없이 치료하고, 명장은 싸우지 않고 이기고, 좋은 변호사는 소송 없이 분쟁을 풀고, 뛰어난 변리사는 특허 없는 특허전략을 구사한다.
“높은 덕은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함'이 없고, 낮은 덕은 '함'으로써 '하지 못함'이 있다(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_도덕경 제38장).” 인위(人爲)를 배제하여 자연의 순리에 맡기라는 '무위(無爲)의 도'의 가르침이다. 법률, 특허, 세무 등과 같은 모든 전문가 영역은 세속의 이해를 규율하기 위해 인간이 창안한 것이니, 인위의 극치이다. 그래서 전문가의 '인위의 도'는 '낮은 덕'의 경지로서, 인간의 갈등 해결에서는 ‘하지 못함’의 미흡한 한계가 크다.
하지만 도덕경의 가르침에 따라 전문가들이 ‘하지 않음’의 도를 취하면, 자연의 순리에 따른 조화나 상생 등과 같은 고귀한 가치가 창출될 수 있다. 그 고귀한 가치는 모든 갈등을 자연 순리에 따라 근원적으로 풀어내어, 인위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더 원만히 해결한다. 그래서 진정 훌륭한 전문가는 무위의 도를 실천하여 자신의 핵심역량을 쓰지 않고 해결한다. 이를 일러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함‘이 없다 할 것이다.
** 도덕경 제 38장
높은 덕은 덕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덕을 갖게 되고,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기에,
덕이 없어진다
높은 덕은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함'이 없고
낮은 덕은
'행함'으로써 '하지 못함'이 있다.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_ 도덕경 제 38장 전반부
**
이 도덕경 제38장의 '무위이무이위(無爲而無以爲)'는 일부 판본에서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 기재되어 있다고 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제37장과 제48장에 등장한다.
'무위이무이위(無爲而無以爲)'와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는 의미가 어떻게 다를까?
'以'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관건이다.
제48장을 읽을 때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를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함이 없다'로 해석한 바 있다.
'이(以)'는 기본적으로 '써'의 뜻을 가진 어조사로 주로 쓰이지만,
자전을 보면, 이유나 까닭의 의미로, 혹은 시간, 수량 등의 '한계(限界)'의 뜻으로도 드물게 쓰임을 알 수 있다.
'한계'의 의미로 본다면, '以爲'는 '행함의 한계' 즉 '할 수 없음'이나 '하지 못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이(以)'는 '부(不)'와 동일한 뜻으로 다루어도 어색함이 없다.
곧 이런 해석이 된다.
높은 덕은 '하지 않음'으로써 '하지 못함'이 없고
낮은 덕은 '행함'으로써 '하지 못함'이 있다.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지적재산권보호 > 특허의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성원 변리사 칼럼] #30 장롱특허는 있다 (0) | 2021.07.01 |
---|---|
[허성원 변리사 칼럼] #29 장롱특허는 없다 (0) | 2021.06.23 |
NFT 이해하기 (1) | 2021.06.16 |
[허성원 변리사 칼럼] #27 죽어 덕행을 이룰 것인가 살아 공명을 이룰 것인가 (0) | 2021.06.12 |
황홀(恍惚) _ 도덕경 14장 (0) | 2021.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