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과위무(止戈爲武)
‘무(武)’는 그칠(멈출) ‘지(止)’와 창 ‘과(戈)’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서, 그 의미는 싸움을 그치게 하는 데 있다. 즉, 무력(武力)은 싸워서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억제하고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十二年조 초장왕(楚莊王)의 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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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초장왕(楚莊王) 17년(B.C.597년), 초나라가 정(鄭)나라를 쳐 굴복시키자, 진문공(晉文公) 이후 중원의 패자를 자처하던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필(邲) 땅에서의 전투에서 초나라에 크게 패배하였다.
초장왕이 정나라 땅 형옹에 군대를 머물러 있을 때, 신하 반당이,
“임금께서는 어찌 병장기들을 끌어모아 쌓고 진나라 군의 시신을 거두어서 경관(京觀, 승전 기념의 큰 무덤)을 만들지 않습니까? 신이 듣기로는, 승전을 하면 반드시 자손이 그 무공을 보고 잊지 않도록 한다고 합니다.” 하니,
초장왕이 말했다.
“잘 모르는 소리다. 글자를 봐라. ‘武’(무)자는 ‘止’(지)와 ‘戈’(과)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丙辰 楚重至於邲. 遂次于衡雍. 潘黨曰 君盍築武軍 而收晉尸以為京觀 臣聞克敵 必示子孫 以無忘武功. 楚子曰 非爾所知也 夫文 止戈為武.
"... 무릇 '武'(무)의 7덕은, 금폭(禁暴, 폭력을 금함), 집병(戢兵, 무기를 거두어 보관함), 보대(保大, 큰 나라를 유지함), 정공(定功, 세상을 평정하는 공을 세움), 안민(安民, 백성을 편안히 함), 화중(和衆, 세상 사람들을 화합시킴), 풍재(豊財, 재물을 풍성하게 함)에 있다. 그래서 자손이 그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두 나라 병사들의 뼈가 들판에 흩어지게 하였으니, 그것은 폭(暴)이다. 무력을 과시하여 제후들을 위협하였으니 폭(暴)하되 집(戢, 무기를 거둠)하지 못하였고, 그러니 어찌 큰 나라를 보유(保大)할 수 있겠는가. 진나라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 어찌 세상을 평정한 공(定功)을 세웠다 할 수 있겠는가. 백성들이 바라는 것에 거스른 것이 이미 많거늘 백성들이 어찌 편안(安民)할 수 있겠는가. 덕이 없으면서 제후들과 강함을 다투었으니 무엇으로 세상을 화목(和衆)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남의 위태로움을 나의 이익으로 여기고 남의 환난을 나의 평안으로 삼아 내 영화를 누리고자 하니 어찌 재물을 풍족(豊財)히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무(武)의 7덕 중 나는 한 가지도 가진 게 없는데 무엇을 자손에게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저 선대 왕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전쟁에 이겼음을 고할 수 있을 뿐이다.
.. 夫武 禁暴 戢兵 保大 定功 安民 和眾 豐財 者也.故使子孫無忘其章.今我使二國暴骨.暴矣.觀兵以威諸侯 兵不戢矣 暴而不戢 安能保大 猶有晉在 焉得定功 所違民欲猶多 民何安焉 無德而强爭諸侯 何以和衆 利人之幾 而安人之亂 以爲己榮 何以豊財 武有七德.我無一焉.何以示子孫.其為先君宮.告成事而已.
그러니 무(武)는 나의 공적이 아니다. 옛날의 밝은 왕들은 불경한 자들을 토벌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여 땅에 묻고 흙을 쌓아올려 큰 치욕을 받게 하였다. 그런 일로 경관(京觀)이 만들어져, 불의하고 부정한 무리들을 징계한 것이다. 지금 진나라는 죄로 삼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모두 충성을 다해 그 군주의 명에 따라 죽었으니, 내가 어찌 그들을 구경꺼리 무덤(京觀)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초장왕은 황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선군의 사당을 지어 전승을 고한 후 초나라로 돌아갔다.
武非吾功也.古者明王.伐不敬.取其鯨鯢而封之.以為大戮.於是乎有京觀.以懲淫慝.今罪無所.而民皆盡忠.以死君命.又何以為京觀乎.祀于河作先君宮.告成事而還._ 春秋左氏傳/宣公 十二年
[통영 통제영의 세병관 올라가는 계단에 있는 지과문]
무력(武力, Power) 즉 군사력의 진정한 의미는 전쟁 억제력에 있음을 2600년전 초장왕이 폐부를 찌르는 무의 일곱가지 덕(武有七德)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조신시대 3도 수군통제영이었던 통영의 세병관(洗兵館)을 오르기 위해 망일루(望日樓)를 지나 계단을 오르다보면 중간쯤에 지과문(止戈門)이 있다. 임진왜란의 뼈저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의 도발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보유하여야 한다고 우리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이 현판을 문에 건 것임을 알 수 있다.
초장왕보다 약 100년 쯤 후에 나타난 최고의 병법가 손무도 이와 비슷한 명언을 남겼다. 그의 손자병법에서는 "백전백승은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그토록 땀흘려 추구하는 재력, 지위, 명예 등도 모두 힘이니, 무(武)와 다르지 않다. 무(武)의 7덕(德)을 잘 새기면서 이 시대의 힘들을 왜 추구하고 어떻게 보유하고 물려줄 것인지를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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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辰.楚重至於邲.遂次于衡雍.潘黨曰.君盍築武軍.而收晉尸以為京觀.臣聞克敵.必示子孫.以無忘武功.楚子曰.非爾所知也.夫文.止戈為武.武王克商.作頌曰.載戢干戈.載櫜弓矢.我求懿德.肆于時夏.允王保之.又作武.其卒章曰.耆定爾功.其三曰.鋪時繹思.我徂維求定.其六曰.綏萬邦.屢豐年夫武.禁暴.戢兵.保大.定功.安民.和眾.豐財.者也.故使子孫無忘其章.今我使二國暴骨.暴矣.觀兵以威諸侯.兵不戢矣.暴而不戢.安能保大.猶有晉在.焉得定功.所違民欲猶多.民何安焉.無德而強爭諸侯.何以和眾.利人之幾.而安人之亂.以為己榮.何以豐財.武有七德.我無一焉.何以示子孫.其為先君宮.告成事而已.武非吾功也.古者明王.伐不敬.取其鯨鯢而封之.以為大戮.於是乎有京觀.以懲淫慝.今罪無所.而民皆盡忠.以死君命.又何以為京觀乎.祀于河作先君宮.告成事而還._ 春秋左氏傳/宣公 十二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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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의 세병은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 물을 끌어다가, 갑옷과 무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인가.'
https://www.hanryeo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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