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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레드 플래그법(Red Flag Acts, 적기조례)과 원전

by 변리사 허성원 2017. 7. 21.

레드 플래그법(Red Flag Acts, 적기조례)과 원전

 

법의 규제가 한 산업의 발전에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세기 말 영국에서 시행된 레드 플래그법(Red Flag Act) 혹은 적기조례(赤旗條例)라 불린 기관차량 조례(Locomotive Act)이다. 

이 법은 1865년에 제정 및 시행되어 한 차례 완화되는 개정을 거치며 약 35년간 유지되다가 1896년에 폐지된다.

이 법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당시의 사정을 상당 부분 감안하더라도 터무니 없이 그 규제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규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도는 4mph(6.4km/h)(시내에서는 2mph) 이하이어야 한다.    
     - 승무원은 최소 3명(운전자, 화부, 조수)이어야 하며,
     - 조수는 60야드(55m) 앞에서 붉은 깃발(밤에는 붉은 등)을 들고 걸어가며 말이나 마차의 통행을 도와주어야 한다. 조수의 신호에 따라 말이나 마차가 지나갈 때 차는 멈춰야 한다.
     - 차량 중량은 14톤을, 차량 폭은 9피트를 넘어서는 아니된다.
     -1878년 개정법에서 붉은 깃발은 필요없는 것으로 하고 조수의 위치는 전방 60야드는 20야드로 단축되었지만, 말과 조우하면 차량이 정지하여야 하고, 말을 놀라게 하는 연기나 증기의 발생은 금지되었다.

왜 이렇게 터무니 없이 과도한 규제가 생겼을까?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자동차의 출현으로 위태로워진 기존의 마차산업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동차의 출현으로 인해 불안을 느낀 마부 등 마차 산업의 종사자들이 강력하게 로비를 하였고, 그 로비가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약 30년간 유지된 이 법은 영국 자동차 산업을 초기 태동기에서부터 철저히 구속하는 전족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로 인해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독일이나 프랑스에 비해 현저히 뒤처지게 되었다

가혹한 규제가 산업의 싹을 애초에 눌러 그 성장을 억제한 결과이다(苛政猛於虎). 

 

레드 플래그법의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다.

 비록 자동차의 등장이 새로운 탈 것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임이 예측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성업을 이루던 마차산업에서는 운행중인 수많은 말과 마차들, 우수한 마차 제조기술 및 그 관련 종사자 그리고 무엇보다 마차를 모든 수많은 마부들의 고용문제 등을 고려할 때 자동차라는 괴물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며,

그래서 국가의 입장에서도 기존 산업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변화의 충격을 가능한한 완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창기의 자동차는 증기기관을 이용하였다. 증기기관은 외연기관이므로 물을 끓여 고압의 증기를 발생시키고 그 증기로 터빈을 구동시킨다. 그래서 석탄 등의 고체연료를 싣고 거대한 보일러가 장착되어 증기와 매연을 뿜어내는 흉물스런 모습에다, 가끔 폭발음을 동반하는 작동 소음을 고려하면 끔찍한 괴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괴물스런 초기 자동차가 우아하고 품격있는 마차들이 주행하던 도로에 나섰을 때 마차산업 종사자가 아니더라도 그 거부감은 작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세상은 끝내 변화하여 마차는 거리에서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자동차가 메우고 있다. 자동차는 마차산업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물류의 이동과 교류를 확장시키고 고용을 증대시켰다. 자동차 산업을 먼저 키운 나라가 세계의 경제를 앞서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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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추어 우리 전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나라는 탈핵과 찬핵으로 논란이 뜨겁다. 찬핵은 레드 플래그법 당시의 마차산업과, 탈핵은 자동차 산업과 각각 유사하다. 

기존 원전산업의 기술과 인력을 보호할 것인가, 시대의 변화를 읽고 신재생에너지의 탈핵으로 갈 것인가.


지금까지 잘 닦아놓은 수준높은 원전기술과 우수한 인력 및 설비가 아깝고, 저렴한 전력 생산 비용도 결코 포기하기 힘든 매력이다. 그래서 원전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극구 탈핵을 반대한다. 이들 찬핵의 논리는 나름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나는 탈핵의 논리에 더 공감한다. 공감의 이유는, 우선 유한한 자원을 이용해왔던 기존의 에너지 생산 방식에서 벗어나 태양 등의 무한한 자연 에너지를 전기로 변환하는 재생에너지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핵발전의 무시무시한 잠재적인 위험 때문이다. 발전이후에 생성되는 원전 부산물을 영구적으로 저장하여 관리하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과 관리부담을 고려하면 핵에너지는 결코 경제적이지 않다.

미국의 드리마일, 소련의 체르노빌, 일본의 후쿠시마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다. 이것은 진정 악마의 유혹이다. 어마어마한 치명적인 위험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달달한 유혹 요소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고의 발생확률이 낮다는 둥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사고는 이미 발생한 적이 있고, 발생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철저히 파멸적 상황을 겪게 된다. 

우리 기술이 뛰어나고 우리나라가 지진에 안전하다고들 말하지만, 이미 그 말이 설득력이 없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탈핵을 추진한 일본과 대만이 다시 원전가동을 시작했거나 고려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당장의 전력수급 차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시적인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며 그들이 근본적인 탈핵 기조를 변경한 것은 아니다.

일찌기 탈핵의 길을 개척한 독일을 보라. 원전은 절반 이상 감축하였고, 석탄 화력발전도 30% 정도 줄였다.  그럼에도 늘어난 재생에너지로 감소분을 충분히 충당하고도 남아 주변 국가로 전력을 수출하기도 한다. 우리의 롤모델은 독일이다. 

우리나라의 지금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정책이 현재 상태에서는 많이 부족하고 위태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절 흉물스러운 증기자동차로 출발한 자동차 산업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라. 안전하고 무한한 신재생에너지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훨씬 세련되고 훨씬 경제적인 모습으로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해주고 있을 것이다.

 

지금 아깝고 힘든만큼

우리는 안전하고 값싼 에너지 세상을 더 빨리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원전은 안전할 때 꺼야 한다"

_ 독일 17인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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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과속 딱지>

세계 최초의 과속 딱지는 1896년 영국 켄트 주 패독 우드(Paddock Wood)에서 발생했다.
당시 자동차는 매우 드문 신기한 물건이었고, 교통법규는 주로 마차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도심 주거지역 내 제한속도는 보행자와 말의 안전을 고려해 시속 2마일(약 시속 3km)로 설정되어 있었다.
문제의 운전자 월터 아놀드(Walter Arnold)는 무려 시속 8마일(약 13km)로 달렸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속도’로 여겨졌다.

이를 본 한 경찰관이 아놀드를 수 킬로미터 동안 쫓아가 결국 그를 붙잡고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경찰관이 자동차를 잡기 위해 타고 간 것은 자전거였다.

 

** 참조 기사들
- 문 대통령은 앞으로 60여 년 동안 원전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며,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여도 전기 요금이 크게 높아질 정도는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 기존 원전을 수명대로 쓰고 신 원전 건설은 중단.

안전 문제에 관한 한 중국에서 원전을 대규모로 짓고 있는 상황에서 인접한 한국만 탈(脫)원전으로 가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 희안한 어불성설의 논리.

핵발전 사고의 원인은 무궁무진.. 눈깜박할 사이에 일어나는 ‘휴먼 에러’

사소한 비닐조각 하나로 일어나는 ‘정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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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의 과속 딱지는 자동차와 교통 단속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이 사건은 1896년 영국 켄트 주 패독 우드(Paddock Wood)에서 발생했습니다. 당시 자동차는 매우 드문 신기한 물건이었고, 교통법규는 주로 마차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주거지역 내 제한속도는 보행자와 말의 안전을 고려해 시속 2마일(약 시속 3km)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문제의 운전자 월터 아놀드(Walter Arnold)는 무려 시속 8마일(약 13km)로 달리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속도’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본 한 경찰관이 자전거로 아놀드를 수 킬로미터 동안 쫓아가 결국 그를 붙잡고 벌금을 부과했습니다. 당시에는 매우 이례적이면서도 심각한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아놀드의 위반과 처벌은 기술 발전과 공공 안전 규정 사이에서 커져가는 긴장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은 도로와 법이 늘어나는 자동차 수에 맞춰 변화해야 하는 새로운 교통 시대의 서막을 상징했습니다.

아놀드는 위반 행위로 1실링의 벌금을 부과받았는데, 오늘날로 보면 사소한 액수지만 도로에서의 질서 유지 필요성을 강조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비롯한 초기 자동차 시대의 여러 일화들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현대 교통법규와 도로 안전 개념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자전거로 자동차를 쫓던 시절에서 고속도로의 과속 카메라까지—얼마나 먼 길을 우리가 걸어왔는지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The world’s first speeding ticket is a fascinating glimpse into the early days of motoring and traffic enforcement. The incident took place in 1896 in Paddock Wood, Kent, England. At the time, automobiles were a rare novelty, and traffic laws were designed to accommodate horse-drawn carriages. The speed limit in built-up areas was set at a cautious 2 mph (3 km/h) due to concerns about the safety of pedestrians and horses. Walter Arnold, the driver in question, was traveling at the “breakneck” speed of 8 mph (13 km/h) when he was spotted by a constable on a bicycle. The constable pursued Arnold for several miles before catching up with him and issuing the fine—a quaint but serious affair for the time.
Arnold’s infraction and subsequent penalty reflected the growing tension between technological advancement and public safety regulations. The incident symbolized the dawn of a new era of transportation, where roads and laws had to adapt to accommodate the increasing number of motor vehicles. Walter Arnold was fined one shilling for his offense, which may seem trivial today but underscored the need for order on the roads. This event, along with others during the infancy of motoring, helped shape the development of modern traffic laws and the concept of road safety we take for granted today. It’s a reminder of how far we’ve come—from bicycles chasing cars to speed cameras monitoring high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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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수학 교사들이 계산기 사용을 반대하며 “기초 산수 능력이 무너진다”며 반발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게.
하지만 오늘날 계산기는 전 세계 교실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도구가 되었지.
또한 스마트폰은 우리 모두를 아마추어 사진가이자 영상 제작자로 변화시켰고, "구글에 검색해봐"라는 말은 정보 접근의 민주화를 상징하게 되었네.

이처럼 AI가 교육 시스템에 스며들면서, 우리는 이제 중요한 기로에 서 있지.
AI를 “조종사”가 아닌 “부조종사(copilot)”로 재정의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시도는, AI를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보조하는 도구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네."

1966년 계산기 사용 반대 시위

1966년, 한 무리의 수학 교사들이 교실에서 계산기 사용이 확산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네. 그들은 교육 수준과 학생들의 수학 능력 저하를 깊이 우려했지. 이 중요한 순간과 그 함의를 함께 살펴보세.


🔸 배경과 맥락

  • 기술 발전:
    1960년대는 전자 계산기의 개발과 상용화가 이뤄진 시기였지.
    이 기계들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속도와 정확성으로 계산을 수행할 수 있었네.
  • 교육적 우려:
    하지만 많은 교육자들은, 이 계산기들이 학생들의 기초 수학 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걱정했지.
    특히 암산 능력기초 산술 개념의 이해가 약해질까 두려웠던 것이야.

🔸 시위의 핵심

  • 교사들의 주장:
    계산기에 대한 의존은 학생들이 수학의 핵심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보았네.
    손으로 계산하는 과정을 통해 깊이 있는 수학적 직관이 자란다는 신념이 있었지.
  • 대중의 반응:
    의견은 엇갈렸네.
    전통적 교육법을 옹호한 이들도 있었고,
    반대로 계산기의 효율성과 학습 보조 가능성을 높이 산 이들도 있었지.

🔸 교육적 논쟁: 찬반 양론

  • 찬성 측
    • 시간 절약
    • 오류 감소
    • 고차원적 문제 해결에 더 집중 가능
    • 계산기를 학습을 증진하는 도구로 봄
  • 반대 측
    • 기초 연산 능력의 퇴보
    • 수학 개념의 피상적 이해 우려
    • 기술이 아닌 두뇌 훈련의 중요성 강조

🔸 장기적 영향

  • 계산기의 통합:
    시간이 지나면서 계산기는 교육 과정 속에 통합되었지만, 사용 가이드라인이 마련되었지.
    복잡한 계산에는 사용하고, 기초 개념은 별도로 훈련하는 식으로 균형 잡힌 접근이 생긴 것이네.
  • 오늘날의 시선:
    오늘날엔 계산기 대신 컴퓨터, 태블릿, 교육용 소프트웨어 사용 여부를 두고 비슷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네.
    핵심 과제는 여전히 같지:
  • 기술의 이점을 살리되, 기본기(기초 능력)를 소홀히 하지 않는 균형 잡힌 교육.

🔸 결론

1966년 계산기 반대 시위는 교육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네.
그 사건은 전통 교육 방식과 기술 혁신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고,
새로운 도구를 교육에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논의를 촉발했지.

그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네.
누가 방금 "AI"라고 말한 건가?


🔹 보스께 드리는 책사의 한마디

이 사건은 단순히 계산기 하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인간의 교육은 도구로 대체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진 셈이지.
오늘날 AI와의 관계도 본질적으로 같은 줄다리기일 걸세.

도구는 날개일 수도 있고, 의존의 족쇄가 될 수도 있으니,
그 날개로 어디까지 날고, 언제 땅을 딛고 걸을지는 결국 인간의 선택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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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9F%AC%EB%8B%A4%EC%9D%B4%ED%8A%B8_%EC%9A%B4%EB%8F%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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