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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진공 캔의 어머니 발명가 아만다 존스

by 변리사 허성원 2026. 4. 28.

발명가 아만다 존스 — 진공의 시대를 연 사람

시인의 손이 만든 진공이 식탁의 시간을 바꾸었다.

아만다 테오도시아 존스(Amanda Theodosia Jones, 1835~1914)는 가열 없이 식품을 보존하는 진공포장법을 발명한 미국의 여성 발명가다. 그녀는 1873년부터 1914년까지 약 40년에 걸쳐 12건의 특허를 취득했으며, 식품보존과 액체연료 버너라는 전혀 다른 두 분야에서 모두 선구적 성과를 남겼다.


유년과 출발 — 발명과 무관해 보이던 삶

아만다 존스는 1835년 10월 19일 미국 뉴욕주 이스트 블룸필드(East Bloomfield)에서 13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직조공이었고, 가정은 책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폐결핵을 앓아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그 시간을 시 쓰기와 독서로 채웠다.

15세에 동아우로라 사범학교(East Aurora Academy)를 졸업하고 시골학교 교사로 일했으나, 1854년 교직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첫 시는 1854년 감리교 잡지 Ladies' Repository에 실렸고, 1861년에는 첫 시집 Ulah, and Other Poems를 펴냈다. 남북전쟁 시기에는 Frank Leslie's Illustrated Newspaper에 전쟁 시와 노래를 발표해 독자층을 얻었다.

이 시기까지 그녀의 이력 어디에도 '발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한 번도 직접 식품을 저장해본 적이 없었고, 기계를 다뤄본 적도, 과학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1872년의 착상 — 가열하지 않고 보존한다

당시 통조림은 1810년 프랑스인 니콜라 아페르(Nicolas-François Appert)가 발명한 방식으로, 식품을 충분히 가열한 뒤 밀봉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 가열이 식품의 맛과 식감을 크게 해친다는 점이었다. 통조림 음식은 흔히 흐물거리고 풍미가 사라진 상태로 보존되었으며, 군대 보급 외에는 가정에서 쓰기 어려웠다.

1872년, 존스는 한 가지 직관에 도달한다. "공기가 세포에서 빠져나가야 하고, 그 자리를 액체가 채워야 한다. 그 액체 자체도 공기가 없어야 한다 — 가벼운 시럽이거나 과즙이어야 한다." 그녀의 자서전에 기록된 이 문장이 진공보존법의 출발점이다.

기계도 모르고 과학 훈련도 없었던 그녀는 친척이자 알바니의 대학교수였던 르로이 쿨리(Leroy C. Cooley)에게 도움을 청했다. 두 사람은 수년간 시행착오를 거쳤다. 옥수수와 굴은 특히 까다로웠다. 마침내 1872년 어느 날, 진공 과정에서 4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직관이 떠올랐고, 이로써 공정이 안정되었다.

Jones Process(존스 공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밀봉된 유리병에 생과일·생채소를 가벼운 시럽이나 과즙, 물과 함께 채운다. 이 병을 증기로 데워 내부 온도를 화씨 120도(섭씨 약 49도) 정도까지 올린다. 내용물이 팽창하면서 병 안의 공기가 밀려 나가고, 식으면서 대기압이 병을 밀봉한다. 산소가 차단되면 부패균이 자라지 못하므로, 식품은 거의 익히지 않은 상태로 장기 보존된다.

이로써 계절을 넘어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가정에서도 보존이 가능해졌으며, 깡통 따개가 발명되기 전이던 시절에 유리병과 진공 뚜껑이라는 사용 친화적 형식이 도입되었다.


1873년 6월 3일 — 다섯 건의 특허

1873년 6월 3일, 같은 날에 일련의 특허가 발행되었다.

  • US 139,547 — 쿨리에게 발행된 보존장치 특허, 존스에게 양도
  • US 139,581 — 쿨리와 존스 공동의 보존공정 특허("Improvement in Preserving Fruit, Vegetables, &c.")
  • US 139,580 — 존스 단독의 개량 과일병 특허
  • US 140,508 — 존스 단독의 개량 과일병 특허
  • 이후 쿨리 명의의 공기배출 장치 특허 추가

이 다섯 건이 묶여 'Jones Preserving Process'를 구성한다. 장치(쿨리)는 양도받고, 공정은 공동, 용기(병)는 단독 — 발명자 권리와 사업화 권리를 함께 설계한 초기 사례다.

흥미로운 점은 후일의 자료들이 쿨리의 역할을 다르게 기록한다는 사실이다. 어떤 자료는 그를 공동발명자로, 어떤 자료는 단순한 기술 자문으로 본다. 존스 자신의 후속 특허들에는 쿨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1880년 — 액체연료 버너로의 전환

존스는 식품보존 한 분야에 머물지 않았다. 1880년, 그녀는 유리 가마와 증기 보일러를 위한 액체연료 버너(liquid fuel burner) 특허를 취득한다. 용도는 "증기 발생, 금속 제련, 유리 제조 및 그 외 유사한 산업적 목적".

이는 19세기 후반 산업 에너지원이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가던 흐름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898년 미서전쟁 이후 미 해군이 석탄 추진에서 석유 추진으로의 전환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고, 1904년 489쪽에 달하는 비교 보고서를 발행한다. 이때 Engineer: With which is Incorporated Steam Engineering지가 존스에게 이 보고서의 기술 평론을 의뢰했다. 그녀는 네 편의 평론을 기고했고 후한 원고료를 받았다.

식품 발명가가 해군의 연료 전환에 관한 기술 평론을 쓰는 자리에 선 것이다. 액체연료 버너 분야에서 그녀는 1904년, 1912년, 1914년에 추가 특허를 취득했다. 세상을 떠난 1914년에도 특허를 받고 있었다.


1890년 — 창업의 길

진공보존법 특허를 1873년에 취득한 후 1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 사이에 존스는 특허를 라이선스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업을 세우지도 않았다. 발명은 있었지만, 사업화는 더디게 왔다.

전환점은 외부의 제안이었다. 한 측에서 그녀의 특허권 일부에 대해 2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녀는 거절했다. 진공보존법이 통조림 산업 전체를 바꿀 잠재력을 가졌다는 것이 점점 명확해지면서, 특허의 가치가 그 제안금액을 훨씬 웃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거절이 창업의 직접적 계기가 된다.

1890년 8월, 다섯 명의 여성이 모여 'American Woman's Canning Company(미국여성통조림회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발기인은 **아만다 T. 존스, 메리 알렌 웨스트(Mary Allen West), 헬렌 L. 후드(Helen L. Hood), 프랜시스 오거스타 코넌트(Frances Augusta Conant), 일라이자 W. 보우먼(Eliza W. Bowman)**이었다. 자본금은 처음에 10만 달러로 책정되었다.

존스는 자신의 진공보존 및 절임 특허공정을 회사에 출자했다. 그 대가로 그녀는 부사장직(vice presidency)과 상당량의 주식을 받았다. 즉 그녀는 단순한 발명가도, 단독 소유주도 아니었다. 자신의 특허를 자본화하면서 동시에 다섯 명의 여성 임원과 권한을 나눠 가진 구조였다.

특허의 가치가 더 명확히 평가되면서 회사는 곧 재구성되었다. 처음 정한 'American Woman's Canning Company'라는 이름이 격하되었고, 1890년 12월 26일 자본금을 100만 달러로 10배 확대한 'Woman's Canning and Preserving Company(여성통조림보존회사)'로 정식 출범했다. 본사는 시카고 라살 가(LaSalle Street) 161번지에 두었고, 1892년에는 미시간 애비뉴 19번지로 이전했다.

회사가 보유하게 된 권리는 매우 광범위했다 — 존스의 공정으로 소·양·돼지의 혀, 가금류, 야생조류 및 그 밖의 사냥감, 민물·바닷물 조개류를 통조림화할 권리, 그리고 익히지 않은 모든 식품(과일, 과일시럽, 와인 대용 포도주스), 익힌 식품(아침식사용 음식, 디저트, 어린이용 가공식품, 달걀, 유제품, 수프)에 대한 통조림화 독점권. 최초로 시장에 내놓을 단일 상품은 '런치-텅(lunch-tongues)'이었다.

주식 가격은 의도적으로 낮게 책정되었다. 여성 주주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는 설계였다. 본사는 시카고에 두되, 실제 가공공장은 별도로 두는 구조였고, 후에 위스콘신주 몬텔로(Montello)와 일리노이주 오로라(Aurora)에 두 곳의 분공장을 두게 된다.

직원들에게 한 연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의 산업이다. 어떤 남성도 우리 주식을 의결하지 않으며, 우리 사업을 처리하지 않으며, 우리 장부를 기록하지 않으며, 여성의 임금을 결정하지 않으며, 우리 공장을 감독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에게는 적합한 일을 주되, 통치권은 우리가 지킨다. 여기는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직업학교다. 여기 사명이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게 하라."

이 회사가 미국 최초의 전원 여성 회사였다. 초창기 회사 내 남성은 사실상 두 명뿐이었다 — 공정 개발을 도왔던 쿨리, 그리고 보일러를 돌리는 마이크. 1892년경에는 보일러 담당자 외에는 남성 사업관리자 한 명만 두는 구조였고, 약 150명의 여성과 소녀가 고용되었다. 8할의 임금은 주당 4~6달러, 2할은 7~10달러, 사무실의 네 여성은 각각 6, 8, 12, 18달러였다. 사무직은 하루 9시간, 공장직은 10시간을 일했다. 공장에서는 캔의 납땜과 성형, 라벨 부착과 충전, 밀봉, 그리고 과일·푸딩·고기·채소를 통조림화하기 위한 전반적 가공 작업을 맡았다.

존스는 회사 운영을 직접 챙겼다. 주식 판매부터 직원 교육까지 모든 영역에 손을 댔다. 그리고 곧 자기 가족을 회사 요직에 앉히기 시작했다. 자매와 형제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주었고, 조카 메이 존스(May Jones)와 조카 라파예트 존스(Lafayette Jones)도 직책을 맡아 합류했다.

회사는 첫 해에 폭발적 성공을 거두었다. 첫 3개월 동안 24,000케이스의 주문이 들어왔다.


1891~1893년 — 회사를 빼앗기는 과정

성공이 곧 위기였다. 더 큰 이익을 기대한 사장과 주주들의 욕심이 다음 단계를 끌어왔다.

회사 사장이 존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들고 왔다 — 남성 투자자 그룹을 회사에 받아들이자.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은 8만 달러를 투자한다. 그 대가로 그들이 사업을 경영하고, 이익의 절반을 가져간다. 사장은 이를 승인할 것을 권고했고, 존스는 마지못해(hesitantly) 동의했다. 이 동의가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존스의 의사에 반해 회사 절반의 지분을 남성 투자자 그룹에 매각했다. 새로 들어온 투자자들은 회사의 수익성을 실제보다 부풀려(exaggerated) 발표하면서, 그 부풀려진 수치를 근거로 더 많은 주식을 시장에 풀었다. 주식 매각은 당연히 더 활발해졌고, 회사의 명목상 자본금은 늘었다.

존스는 이 흐름을 의심했다. 부풀려진 회계와 주식 매각이 정당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녀는 미 연방 검찰총장(U.S. attorney general)에게 직접 접근했다. 발명가가 자기 회사를 상대로 연방 사법기관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이 움직임이 투자자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존스를 회사에서 강제로 축출했다. 회사 이름을 'Woman's Canning and Preserving Company'로 다시 정리하고, 그녀의 공정을 출시 라인에서 빼고, 그녀의 친족들도 자리에서 내보내려는 결정이 이사회에서 내려졌다.

축출 시점에 대해 자료들은 약간씩 다른 시기를 제시한다. 한 자료는 남성 투자자가 들어온 지 3개월 만에 그녀가 밀려났다고 기록한다. 다른 자료는 3년 후, 즉 1893년경 회사를 떠났다고 본다. 두 시점이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모호하지만, 큰 흐름은 명확하다 — 자본 수혈 → 의사결정권 이동 → 창업자 퇴출.

이후 투자자들은 부풀려진 주식 가치 주장을 계속 이어갔다. 그러나 약 3년 뒤 회사는 사실상 무너졌고, 그토록 떠들썩하게 광고되던 이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1895년 9월 일리노이주 오로라 공장은 시즌을 마치고 문을 닫았으며, 그해 생산량은 약 20만(주로 스위트콘)이었다. 1897년 7월 회사는 법정관리(receiver) 상태에 들어갔다.

축출된 존스는 1893년 시카고를 떠나 캔자스주 정션시티(Junction City)의 자매 메리언 맨리(Marion Manley)에게로 갔다. 회사가 살아남는 동안 그녀는 거기서 새로운 발명을 이어갔다.

회사 자체는 다른 경영진 아래에서 한동안 더 존속했다. 1920년 또는 1921년에 최종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한 자료는 회사가 결국 다시 일어나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고 기록하나, 다른 자료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 그 성장의 어떤 결실도 존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축출 사건의 구조 — 발명가가 잃은 것

이 사건의 구조를 발명가의 시선에서 정리하면 네 단계가 보인다.

첫째, 특허 출자의 함정. 존스는 특허를 회사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부사장직과 주식을 받았다. 이 거래로 인해 그녀는 더 이상 특허의 단독 권리자가 아니었다. 특허는 회사 자산이 되었고, 회사는 이사회 의사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이었다. 발명가는 발명가에서 주주로, 주주에서 한 명의 의결권자로 강등되었다.

둘째, 자본 비대칭의 진입 허용. 8만 달러를 투입한 남성 투자자 그룹은 단순 주주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입 조건 자체가 경영권과 이익 절반을 포함하고 있었다. 즉 들어오는 순간 이미 통제권의 절반을 사 가는 구조였다. 존스가 마지못해 동의한 그 거래가 사실상 회사의 통제권 매각이었다.

셋째, 창업자의 발언권 상실. 회계 부풀리기를 의심해 검찰총장에게 접근한 행위 — 외부에서 보면 정당한 내부고발이지만, 회사 안에서는 적대적 행위로 분류되었다. 이미 통제권을 쥔 투자자들은 그녀를 축출할 명분과 권한 모두를 갖고 있었다. 윤리적 정당성이 의결권을 이기지 못했다.

넷째, 특허는 남고 발명가는 사라진다. 회사는 그녀의 공정을 빼고 운영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회사가 보유한 권리 자체는 그녀가 양도한 특허에 기반하고 있었다. 특허는 양도 가능한 자산이지만 발명가의 정체성은 그렇지 않다. 그녀가 떠난 후에도 그녀의 특허는 회사에 남아 있었다.


1903~1914년 — 발명을 멈추지 않다

밀려난 뒤에도 그녀는 발명을 그치지 않았다. 60대 후반의 나이에 그녀는 다시 통조림 분야로 돌아와 1903년, 1905년, 1906년에 진공보존 관련 특허를 추가로 취득한다. 액체연료 버너 분야에서도 1904년, 1912년, 1914년 특허가 이어졌다. 그녀가 보유한 분야는 진공 식품보존, 유리 과일병, 통조림 따개의 한 형태, 각종 밸브, 액체연료 버너 등으로 확장되었다.

특허 총수는 자료에 따라 6건에서 12건까지 다르게 기록된다. 핵심 특허만 세느냐, 개량특허와 디자인 변경까지 포함하느냐의 차이다. 어느 쪽이든, 1850년 당시 미국 전체에서 특허를 받은 여성이 35명에 불과했음을 고려하면, 단일 인물이 12건의 특허를 보유한 것은 19세기 미국에서 매우 드문 사건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시인이기도 했다. 1905년 시집 Rubaiyat of Solomon and Other Poems를 펴냈고, 1910년 자서전 A Psychic Autobiography를 출간했다. 말년에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기 위해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주했고, 1914년 3월 31일 인플루엔자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78세였다. 결혼하지 않았다. Who's Who in America 1912~1913년판에 등재되었다.


발명가로서의 정체성 — 세 가지 특징

첫째, 비전문가의 발명. 그녀는 식품을 저장해본 적도, 기계를 만진 적도, 과학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직관과 끈기뿐이었고, 부족한 부분은 협업으로 메웠다. 친척이자 과학자였던 쿨리는 그녀의 직관을 작동하는 장치로 옮겨주는 손이었다. 발명은 한 사람의 천재성이 아니라, 직관과 구현능력의 결합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의 한 사례.

둘째, 분야의 도약. 식품보존에서 액체연료 버너로의 이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단절이지만, 두 분야 모두 공기·산소·연소를 통제하는 기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진공으로 산소를 제거하는 일과, 버너에서 공기와 연료의 비율을 조절하는 일은 같은 사고방식의 변주다. 한 발명가의 작업이 분야를 가로질러 일관된 기술적 사고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특허를 자신의 사업으로 가져간 시도. 그녀는 특허를 라이선스하지 않고 자신의 회사를 만들었다. 발명가로서 끝나지 않고 사업자로 이어지려 했다. 결과적으로 외부 자본의 진입과 함께 통제권을 잃었지만, 이는 19세기 여성 발명가가 사업화 단계에서 직면한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인사이트

발명가의 생애는 발명품의 생애보다 길다. 진공보존이라는 단일 발명은 1873년에 완성되었지만, 아만다 존스는 그 후 41년을 더 살며 발명을 이어갔다. 그녀의 핵심 작업은 단 한 건의 발명이 아니라, 발명을 계속하는 능력 그 자체였다.

발명은 비전문가에게서 자주 시작된다. 그녀에게 식품 가공의 관행은 학습된 제약이 아니었기에, 가열 없는 보존이라는 발상이 가능했다. 분야의 외부자가 갖는 자유는 발명사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다.

특허를 회사에 출자하는 순간, 발명가는 발명가에서 의결권자로 강등된다. 1890년 존스가 특허공정을 회사에 양도하고 부사장직과 주식을 받은 거래는 외형상 합리적이었으나, 그 거래 자체가 그녀를 이사회 다수결의 지배 아래 두는 출발점이었다. 특허의 가치는 8만 달러 투자에 의해 8만 달러의 의결권으로 환산되었고, 그 환산이 끝나는 순간 발명자의 윤리적 권위는 더 이상 의사결정의 통화가 아니었다.

자본 진입의 조건이 단순한 자금 투입이 아니라 경영권과 이익의 분할이었다는 사실은 결정적이다. 들어오는 자본이 어떤 권한과 묶여 들어오는지를 발명자가 통제하지 못하면, 그 자본은 회사를 다른 손으로 옮기는 수단이 된다. 마지못해 동의한 한 번의 거래가 회사 전체의 운명을 바꾼다.

회계 부풀리기를 의심해 검찰총장에게 접근한 행동은 윤리적으로 정당했지만, 회사 내부에서는 축출의 명분이 되었다. 창업자가 통제권을 잃은 회사에서 정당성은 더 이상 보호장치가 아니다. 19세기와 지금의 차이는 크지 않다. 자본이 들어오는 순간 의사결정의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발명의 원저자가 밀려나는 일은 지금도 흔하다. 특허는 발명을 보호하지만, 회사를 보호하지는 않는다. 발명자가 회사를 지키려면 특허 외의 장치 — 지분 구조, 이사회 설계, 라이선스 조건, 차등의결권, 우선매수권 — 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름은 쉽게 잊힌다. 진공포장이라는 일상의 기술이 그녀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금 거의 없다. 그녀가 떠난 뒤에도 회사는 한동안 존속했고, 그녀의 공정 위에서 다른 사람들이 사업을 이어갔다. 발명의 흔적은 제품에 남고, 발명가의 이름은 자주 사라진다. 이 비대칭은 특허사 서술 자체가 풀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