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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담장의 역설 _ 쇼생크 탈출

by 변리사 허성원 2026. 4. 26.

담장의 역설 _ 쇼생크 탈출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레드가 브룩스의 가석방 결정 때 소란을 피운 후 이런 통찰의 말을 했다.
"이 담장이란 게 웃기는 거야. 처음엔 다들 미워하지. 그러다 익숙해지는 거야.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거기에 의존하게 돼. 그걸 길들여진다고 한다네."
이 3단계는 단순한 감옥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모든 구조물에 길들여지는 보편적 운명이다. 50년의 수감 후 출소한 브룩스는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하숙집 들보에 목을 맨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라는 형벌이 그것이다. 퇴직자들이 회사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정체성이 증발하는 것도 같은 구조다.
그러나 앤디 듀프레인은 다른 길을 보여준다. 19년간 록 해머로 벽을 파면서도 모차르트를 감옥 전체에 틀고, 도서관을 만들고, 지와타네호를 꿈꾸었다.
핵심은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자각하는 것이다. 익숙함의 마비를 깨고 의존의 공포를 이겨내는 것은 단 하나의 동사, '희망'이다. 앤디는 '이런 좋은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쇼생크라는 세계

1947년, 젊은 은행 부지점장 앤디 듀프레인은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 두 건을 선고받고 쇼생크 주립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는 무죄였다. 그러나 판사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냉혈한의 증거로 보았다. 이것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무고한 자가 거대한 울타리 안에 던져지는 순간.

쇼생크는 단순한 감옥이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폭력이 응축된 공간이다. 소장 노튼은 성경을 들고 다니며 독실한 기독교인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죄수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돈세탁에 가담하는 부패한 권력자다. 간수장 해들리는 총과 곤봉으로 질서를 유지한다. 이 공간에서 죄수들은 번호로 불리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식사를 한다.

영화의 첫 밤, 새로 들어온 죄수 한 명이 울음을 터뜨린다. 해들리는 그를 때려죽인다. 의사는 부르지도 않는다. 아침이면 그의 시신은 조용히 치워진다. 이것이 쇼생크의 첫 교훈이다. 울타리 안에서 저항하는 자는 소멸한다.

레드라는 관찰자

영화는 레드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된다. 그는 10대에 살인을 저지르고 종신형을 받은 흑인 죄수로, 영화가 시작될 때 이미 20년째 복역 중이다. 쇼생크 안의 모든 것을 구해다 주는 조달자로, 담배부터 포스터, 심지어 록 해머(작은 암석 망치)까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인물이다.

레드는 10년마다 한 번씩 가석방 심사를 받는다. 20년차, 30년차, 40년차 심사 장면이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젊은 시절의 레드는 심사관 앞에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다"고 간절하게 호소한다. 탈락한다. 30년차에도 비슷하게 말한다. 탈락한다. 40년차, 그는 이제 지쳐 있다. 재활이라는 말을 비웃고, 심사관에게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는 이 순간, 레드는 비로소 가석방을 얻는다. 더 이상 나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순간 나갈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 이것이 제도화의 완성이다.

브룩스의 비극, 그리고 레드의 통찰

영화에서 레드의 그 유명한 대사는 특정한 맥락에서 나온다. 브룩스 해틀렌이 출소한 직후다.

브룩스는 쇼생크의 도서관 사서였다. 50년을 복역한 노인으로, 작은 새 제이크를 키우며 온순하게 살아가던 인물이다. 어느 날 그에게 가석방 통보가 내려온다. 동료들은 축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브룩스는 동료 죄수 헤이우드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다시 범죄를 저지르면 쇼생크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 직후 식당에서 죄수들이 브룩스를 두고 "양철 변소 속 쥐처럼 미쳤다"고 비웃는다. 레드가 끼어들어 차분히 말한다.

"그만 좀 해. 브룩스는 미친 게 아냐. 그냥 길들여진 거야."

헤이우드가 코웃음 친다. "길들여졌다고? 헛소리."

레드가 이어간다. "50년이야, 헤이우드. 50년을 여기서 살았다고. 여기가 그가 아는 전부야. 여기서는 그가 중요한 사람이지. 교양 있는 사람이고. 그런데 밖에 나가면? 아무것도 아냐. 양손에 관절염 걸린 늙은 전과자일 뿐이지. 도서관 카드 하나 만들지도 못할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플로이드가 다시 빈정거린다. "레드, 헛소리하는 거 같은데."

그때 레드의 입에서 그 유명한 3단계 대사가 나온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 플로이드. 하지만 내 말 잘 들어. 이 담장들이 웃긴 게 말이야. 처음엔 미워해. 그러다 익숙해지지.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거기에 의존하게 돼. 그게 길들여진다는 거야."

지거가 발끈한다. "헛소리. 난 절대 안 그래."

어니가 조용히 받는다. "브룩스만큼 오래 있어봐. 그때도 그렇게 말하는지."

레드의 마지막 한마디. "맞는 말이야. 종신형으로 보내면, 정확히 그것을 가져가지. 진짜 중요한 부분을."

그리고 곧이어 브룩스의 출소 이후가 편지와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낯선 도시의 하숙집,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 마트의 포장 담당 일.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너무 시끄럽다. 그는 매일 밤 악몽을 꾼다. 떨어지는 꿈. 어느 저녁 브룩스는 하숙집 방 천장 들보에 "브룩스가 여기 있었다(Brooks was here)"라고 새긴 뒤 목을 맨다.

이 소식이 쇼생크에 전해진다. 레드가 말했던 3단계가 현실로 증명된 순간. 그의 통찰은 동료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이미 목격한 패턴에 대한 증언이었다.

레드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나는 브룩스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때로는 그가 여기 있지 않다는 사실에 슬퍼진다. 그러나 여기가 그의 집이었다는 사실에 더 슬퍼진다."

이것이 울타리의 역설이 가장 잔혹하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50년의 수감이 그에게서 앗아간 것은 자유만이 아니라 자유를 감당할 능력 자체였다. 그의 유일한 집은 감옥이었다.

1단계 미움, 낯섦의 고통

브룩스도 처음엔 쇼생크를 미워했을 것이다. 앤디가 도착한 첫 밤, 고참 죄수들은 신입들에게 내기를 건다. 누가 먼저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모든 신입이 이 단계를 거친다. 철창이 닫히는 소리, 낯선 냄새, 모욕적인 검신, 제복으로의 환복.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존엄을 벗겨낸다.

처음 울타리와 마주쳤을 때 인간은 그것을 적대시한다. 신입 사원이 회사 규칙을 답답해하고, 신병이 내무반을 증오하며, 이민자가 낯선 땅의 모든 것에 저항한다. 이 단계의 감정은 진실하다. 울타리는 실제로 나를 구속하고 있고, 내 자유의지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피투(Geworfenheit)의 순간이 여기에 있다. 던져진 존재로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다. 앤디는 무고하게 종신형이라는 상황 속에 던져졌다. 신입 사원도, 신병도, 이민자도 마찬가지다. 그 낯섦 앞에서 처음엔 저항한다. 장 아메리가 아우슈비츠에 끌려간 첫 순간을 회고하며 "세계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고 썼던 것도 이 단계다. 세계가 나에게 적대적임을 인식하는 날것의 감각.

하이데거의 "던져진다"는 표현은 두 방향을 포함한다. 하나는 타인에 의해, 또는 운명에 의해 내가 던져지는 경우다. 이것이 피투(Geworfenheit)다. 독일어 geworfen은 werfen(던지다)의 과거분사로, "던져진"이라는 수동의 의미가 명확하다. 누가 던졌는지는 따져 물을 수 없다. 다만 내가 이미 던져져 있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내가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가족, 어느 신체로 태어났는지를 나는 선택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언어를 모국어로 갖게 되었는지도, 어떤 문화 속에서 자랐는지도 마찬가지다. 더 근본적으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도 내 선택이 아니다. 이 모든 던져짐이 피투의 영역이다. 앤디가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은 것, 누군가가 가난한 집에 태어난 것, 누군가가 전쟁의 한복판에 태어난 것. 모두 피투다.

다른 하나의 던짐이 기투(Entwurf)다. 독일어 ent-werfen은 "내던지다, 기획하다, 설계하다"는 능동적 행위를 뜻한다. 던져진 자리에서 내가 나 자신을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다시 던지는 것. 영어로 옮기면 project가 가까운데, 이 단어가 "기획하다"와 "투사하다"의 의미를 둘 다 갖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미래로 자기를 투사하는 행위가 곧 기획이고, 그 기획이 곧 자기 존재의 형성이다.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가 분리된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라고 말한다. 인간은 언제나 "이미 던져진 채로 자신을 던지는" 존재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geworfener Entwurf, 즉 던져진 기투다. 우리는 백지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늘 어딘가에 이미 던져진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는다. 매 순간 자신을 미래로 던진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어떤 사람과 살지, 어떤 가치를 지킬지, 오늘 어떤 행동을 할지. 이 모든 것이 기투다.

쇼생크에 던져진 죄수들은 모두 같은 피투의 자리에 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어떻게 자신을 던질 것인가는 각자의 기투다. 브룩스는 50년간 기투를 멈추었다. 레드는 기투의 가능성을 잊어버렸다가 마지막에 회복했다. 앤디는 19년 동안 매일 자신을 미래로 던졌다. 같은 피투, 다른 기투. 영화는 이 차이를 따라간다.

앤디는 이 단계를 독특하게 통과한다. 울지 않는다.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첫 2주 동안 그는 쇼생크의 공기 자체를 관찰만 한다. 레드는 이를 보며 "마치 산책하듯 걷는다, 걱정거리라곤 없는 사람처럼"이라고 회상한다. 앤디는 울타리를 미워하는 대신 해독하고 있었다.

루쉰의 광인일기에 나오는 광인이 처음 예교라는 울타리를 발견했을 때, 그는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외쳤다. 미움의 단계에서 인간은 아직 깨어 있다. 고통이 경고 신호로 작동하는 것이다.

2단계 익숙함, 감각의 마비

시간이 흐르면 울타리는 풍경이 된다. 쇼생크에서 이 단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죄수들의 일과다. 아침 점호, 작업장으로의 이동, 세탁실과 작업실에서의 반복 노동, 식당의 묽은 수프, 저녁 점호, 감방의 불 꺼짐. 이 리듬이 수십 년 반복된다.

앤디가 도서관을 개선하고자 할 때 이 단계의 비극이 드러난다. 쇼생크 도서관은 낡은 책 몇 권이 전부인 먼지투성이 방이다. 앤디는 주 상원에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한 통씩. 6년이 지나서야 200달러와 헌 책 몇 박스가 도착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제 일주일에 두 통씩 쓴다. 결국 주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도소 도서관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죄수들은 도서관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이미 익숙함에 마비되어 있다. 책을 읽는 것도, 배우는 것도, 변화하는 것도 귀찮다. 그들에게 쇼생크는 더 이상 감옥이 아니라 집이다.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공장 노동자, 같은 법조문을 읊는 변호사, 같은 강의를 수십 년 하는 교수. 그들의 익숙함은 숙달이 아니라 마모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수행하던 일이 점차 자동화되고, 자동화된 행위는 더 이상 그 행위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한 das Man, 세인의 영역이 바로 여기다.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사는 상태. 울타리 안의 삶이 어느새 삶 전체가 되어버린 상태. 이 단계의 무서움은 고통이 없다는 데 있다. 고통이 없으므로 변화의 동력도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메이지 초기 일본인들을 보며 한탄한 것도 이 지점이었다. 막부의 신분제라는 울타리 안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그 울타리가 무너진 뒤에도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몰랐다. "일신독립하여 일국독립한다"는 그의 외침은 익숙함의 마비에서 깨어나라는 호소였다.

3단계 의존, 자유라는 형벌

브룩스의 죽음은 3단계의 가장 극단적 귀결이다. 울타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자유가 해방이 아니라 형벌이 되는 역설.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형에 처해졌다"고 했을 때, 그는 바로 이 역설을 본 것이다.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형벌이다. 매 순간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한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이 무게를 회피하기 위해 인간은 울타리를 찾는다. 회사가 결정해주길 바라고, 가족이 결정해주길 바라고, 국가가 결정해주길 바라고, 종교가 결정해주길 바란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분석한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인들은 전례 없는 정치적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히틀러라는 새로운 울타리로 달려갔다. 자유는 공포였고, 권위주의는 안식이었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심문관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다시 돌아온 예수에게 대심문관은 말한다. "당신이 인간에게 준 자유 때문에 그들은 불행해졌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자유를 거두어들이고 대신 빵과 기적과 권위를 주었다. 그들은 행복해했다."

브룩스는 이 자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간의 전형이다. 제이크라는 작은 새조차 그가 바깥세상에 풀어주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쇼생크 밖에는 브룩스가 돌아갈 둥지가 없었다.

브룩스도 50년 전에는 어딘가에 던져졌을 것이다(피투).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 너머로 던지지 않았다(기투의 부재). 50년 동안 "나는 쇼생크의 사서"라는 세인의 규정을 자기 존재 전체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래서 던져진 자리(피투)가 바뀌자, 새롭게 기투할 능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50년간 기투의 근육을 쓰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유라는 광활한 가능성 앞에 놓인 것이다. 자살은 마지막 기투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투의 영원한 종결, 가능성 자체의 폐쇄다.

레드의 출소, 같은 벽 앞에서

브룩스가 자살한 지 수년 뒤, 레드도 출소한다. 그는 브룩스가 묵었던 바로 그 하숙집에 배정받는다. 같은 방, 같은 창문, 같은 들보.

레드의 출소 후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마트에서 일하는 그는 화장실에 가야 할 때마다 매니저에게 묻는다. "화장실에 가도 됩니까?" 매니저는 짜증을 낸다. "레드, 아무 때나 가도 됩니다. 물어볼 필요 없어요."

레드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40년 동안 허락을 받고 오줌을 싸왔다. 허락 없이는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이 장면은 울타리 의존의 가장 구체적인 이미지다. 감옥은 그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방광까지 제도화되어 있다. 그는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한다. 또는 범죄를 저질러 쇼생크로 돌아갈까 고민한다. 브룩스의 길을 따라갈 뻔한다. 자신이 예언했던 3단계의 마지막 귀결, 그 운명이 이제 자신에게 닥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울타리들

한국인에게 익숙한 울타리는 여럿이다.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울타리, 강남 아파트라는 울타리, 명문대 졸업장이라는 울타리, 특정 정치 진영이라는 울타리. 처음엔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들어가고 나면 익숙해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그 울타리 없이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퇴직 후 급격히 무너지는 한국 남성들의 사례는 전형적이다. 회사라는 울타리가 사라지면서 정체성 자체가 증발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들은 대답할 수 없다. 직함이 곧 자아였기 때문이다. 브룩스가 쇼생크의 사서로서는 교양인이었지만 바깥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듯이, 한국의 많은 은퇴자들은 명함이 사라지는 순간 자신의 형체도 함께 사라진다.

피투의 연속으로 살아온 삶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오랜 직장 생활을 한 사람들의 삶은 피투의 연속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들의 첫 취직조차 자유의지로 선택한 기투가 아니었다. 사회의 떠밀림에 의해, 부모의 기대에 의해, "남들 다 가는 길"이라는 세인의 목소리에 의해 어느 직장에 던져진 것이다. 본인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의 좌표 자체가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어느 학교, 어느 학과, 어느 회사가 좋은지의 기준은 모두 세인이 미리 정해놓은 것이었다.

대학 졸업 시즌이면 학생들은 비슷한 정장을 입고 비슷한 자기소개서를 써서 비슷한 회사에 지원한다. 합격하면 안도하고 떨어지면 좌절하지만, 정작 "내가 왜 이 회사에 가려 하는가"는 묻지 않는다. 물어볼 시간도, 물어볼 언어도 없다. 그저 던져진다. 첫 출근일은 또 하나의 피투의 순간이다.

그 던져진 자리에서 그는 익숙해진다. 출근길의 동선이 몸에 새겨지고, 부서의 어법이 입에 익고, 회사의 리듬이 자기 리듬이 된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면 그 자리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20년, 30년이 흐르면 그 자리가 곧 자기 자신이다. 레드의 3단계가 정확히 이 궤적을 그린다. 미움, 익숙함, 의존.

문제는 이 긴 시간 동안 진정한 기투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매일 출근하고, 일하고, 회식하고, 집에 돌아온다. 매년 비슷한 평가를 받고, 비슷한 승진을 하거나 누락된다. 외형은 활발한 활동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정체다. 자신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던지는 결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회사라는 피투의 자리에서 회사가 정해준 궤도를 따라 흘러갔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퇴직이 온다. 이 퇴직조차 그의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다. 정년이라는 제도, 구조조정의 칼바람, 경영 악화의 통보. 그는 또다시 던져진다. 일생에 두 번째 큰 피투다. 첫 번째 피투는 직장으로의 던져짐이었고, 두 번째 피투는 직장 밖으로의 던져짐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받아줄 다음 자리가 없다.

브룩스가 50년의 쇼생크에서 출소장으로 던져진 그 순간이 한국 직장인의 퇴직일과 정확히 겹친다. 한국 사회는 거대한 쇼생크다. 사람들은 거기에 던져졌고, 거기서 익숙해졌고, 거기에 의존하며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정년이라는 가석방을 받는다. 그러나 그 자유는 그가 살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50년 또는 30년의 기투 부재는 자유를 감당할 능력 자체를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이 진단이 가혹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이 가능하다. 핵심은 직장 생활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 다니면서도 매일 자신에게 묻는 일. "이것이 정말 나의 선택인가, 나의 책임인가, 나의 가능성인가." 이 물음을 멈추지 않는 자만이 퇴직의 피투 앞에서도 새로 기투할 수 있다. 앤디가 19년간 록 해머를 놓지 않았듯이, 던져진 자리에서도 매일 자신을 미래로 던지는 연습. 이 연습이 없으면 퇴직은 곧 실존의 종결이 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비판한 것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사대부들은 성리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 바깥의 세계, 즉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보고도 보지 못했다. 울타리가 시야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도 이 구조는 반복된다. 오래된 연인 관계, 불만족스러운 결혼, 숨 막히는 가족관계. 처음엔 이 관계의 문제점이 선명하게 보인다(미움). 시간이 지나면 그 문제점조차 일상이 된다(익숙함). 결국 그 관계 없이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의존). 이혼 후 급격히 무너지는 사람들, 자식이 독립하자 삶의 의미를 잃는 부모들이 여기에 속한다.

탈출의 가능성, 앤디의 기투

쇼생크에는 레드 외에 다른 인물이 있다. 앤디 듀프레인. 영화는 앤디의 19년을 길게 따라간다.

앤디의 19년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기투(Entwurf)다. 피투가 던져진 상황이라면, 기투는 그 던져진 자리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던지는 행위다. 앤디는 자신이 무고하게 던져진 사실(피투)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던져진 자리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는 매일 자기 자신을 미래로 던진다.

앤디의 기투는 세 층위로 펼쳐진다.

첫째, 울타리 안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쓸모를 잃지 않았다. 어느 날 지붕 타르 작업 중에 그는 간수장 해들리가 세금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엿듣는다.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 말을 건다. "당신 아내를 신뢰합니까?" 그는 해들리에게 합법적으로 세금을 피할 방법을 알려준다. 그 대가로 동료 죄수들에게 맥주 세 병씩이 돌아간다. 그날 죄수들은 햇빛 아래 지붕에서 맥주를 마신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이 장면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는 자유인처럼 앉아 있었다. 마치 우리 집 지붕을 타르칠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창조의 왕들이었다." 죄수라는 세인의 규정을 거부하고 자유인으로 자신을 기투한 순간이다.

둘째, 울타리 안에 외부의 것을 몰래 들여온다. 어느 날 그는 소장실 방송 시스템을 장악하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중 이중창 Sull'aria를 감옥 전체에 틀어버린다. 마당의 죄수들이 모두 멈춰 선다. 레드의 내레이션. "그 여자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지금도 모른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나는 그 짧은 순간 쇼생크의 모든 사람이 자유로웠다고 말하고 싶다."

이 대가로 앤디는 독방 2주 형을 받는다. 독방에서 나온 그에게 동료들은 묻는다. "2주 동안 힘들었겠다." 앤디는 답한다. "가장 편한 시간이었다. 모차르트가 함께 있었거든." 그는 자기 머릿속에 음악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이 빼앗을 수 없는 공간.

셋째, 가장 결정적으로, 앤디는 19년 동안 매일 밤 벽을 팠다. 레드가 구해다 준 작은 록 해머로 조금씩, 조금씩. 그는 그것을 리타 헤이워스 포스터 뒤에 감췄고, 나중에는 마릴린 먼로, 나중에는 라켈 웰치의 포스터로 교체됐다. 포스터가 바뀔 때마다 세월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레드는 처음 록 해머를 봤을 때 탈출에는 600년이 걸릴 것이라고 농담했다. 앤디는 19년 만에 해냈다.

이 19년이라는 시간이 기투의 가장 깊은 차원이다.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매일 새로 갱신되는 결단.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익숙함에 마비되지 않고, 의존에 무너지지 않고 매일 자신을 미래로 던지는 것. 하이데거가 결단성(Entschlossenheit)이라 부른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탈출의 밤,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앤디는 500야드 길이의 하수관을 기어서 빠져나온다. 영화는 그가 하수관을 뚫고 나와 빗속에서 웃통을 벗고 양팔을 벌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번개가 친다. 쇼생크에 갇혀 있던 19년의 세월이 비에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탈출이 아니라 19년에 걸친 기투의 외적 완성이다. 그가 누구로 존재하기로 결단했는지가 마침내 세계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니체가 말한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는 문장이 여기에 겹친다. 앤디는 울타리 안에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았다. 그는 제도화되지 않았다. 울타리 안에 있었지만, 울타리가 되지는 않았다.

장자의 소요유에서 대붕은 구만리 창공을 난다. 작은 매미와 비둘기는 그것을 비웃는다. "우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왜 그렇게 멀리 가려 하는가." 울타리 안에 길들여진 자들은 울타리 너머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앤디는, 그리고 대붕은, 울타리 너머를 본다.

결론, 지와타네호를 향하여

앤디가 탈출하기 전, 그는 레드에게 지와타네호(Zihuatanejo) 이야기를 한다. 멕시코 태평양 연안의 작은 어촌. 기억이 없는 곳. 따뜻한 곳. 푸른 바다. 앤디는 거기서 작은 호텔을 열고 싶다고 말한다. 낡은 배를 한 척 사서 수리하고 싶다고. 레드는 그를 말린다. "앤디, 그런 꿈은 여기선 사람을 미치게 해. 포기해."

앤디의 대답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사 중 하나다. "Get busy living, or get busy dying. 그게 전부야." 살기 위해 분주하든지, 죽기 위해 분주하든지. 이 말은 브룩스의 선택과 앤디의 선택을 가르는 결정적 지점이다. 브룩스는 죽기 위해 분주했다. 앤디는 살기 위해 분주했다. 같은 울타리, 다른 선택.

탈출 후 앤디는 레드에게 약속했던 메시지를 남긴다. 그가 처음 쇼생크에 왔을 때 언급했던 메인주의 한 들판, 그 들판의 참나무 아래 돌담에. 레드가 출소 후 그곳을 찾아가자 돌 밑에 편지와 돈이 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

"Remember, Red. 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and no good thing ever dies." 희망은 좋은 것이다, 레드.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이다.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레드는 가석방 조건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다. 그가 버스를 타고 멕시코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 그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설레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한 가지 생각에 머무를 수도 없다. 이것은 자유인만이 느낄 수 있는 설렘이다. 결말이 불확실한 긴 여정의 시작에 선 자유인의 설렘. 국경을 넘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친구를 만나 악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태평양이 내 꿈속에서처럼 푸르기를 희망한다. 나는 희망한다."

브룩스가 새겼던 "브룩스가 여기 있었다"는 문구 옆에 레드는 "레드도 여기 있었다"고 새겨 두고 떠났다. 같은 하숙집, 같은 들보. 그러나 한 사람은 그 방에서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방을 떠나 태평양으로 향했다. 차이를 만든 것은 희망이라는 단어 하나였다.

레드의 마지막 행보는 기투의 회복이다. 출소 후 마트에서 화장실 갈 때마다 허락을 구하던 그는 사실상 기투할 능력을 잃은 자였다. 그를 구한 것은 앤디가 남긴 편지, 그리고 그 편지가 약속하는 지와타네호다. 다시 말해, 앤디의 기투가 레드에게 기투의 가능성을 빌려준 것이다. 가석방 조건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 그 결단, "나는 희망한다"고 거듭 말하는 그 순간이 레드 자신의 기투의 시작이다.

레드의 3단계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자각하지 않은 자의 운명이다. 울타리가 울타리임을 계속 자각하는 자, 익숙함 속에서도 낯섦을 잃지 않는 자, 의존 속에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자. 그런 자만이 앤디처럼 벽에 숟가락을 대고 조금씩 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울타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쇼생크 없는 세상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떤 울타리 안에 있는지, 그것이 나를 보호하는지 가두는지, 내가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일이다. 앤디가 19년간 록 해머로 벽을 두드렸듯이, 매일 조금씩.

희망한다는 것은 울타리 너머를 인정하는 것이다. 익숙함의 마비를 깨고, 의존의 공포를 이겨내는 유일한 동사. 희망. 그리고 그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 담장이란 게 웃기는 거야. 처음엔 다들 미워하지. 그러다 익숙해지는 거야.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거기에 의존하게 돼. 그걸 길들여진다고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