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변리사는 태생적으로 타인의 이익을 지켜주는 대리인이다. 특히 분쟁 사건에서 타인을 대리한다는 것은, 이해가 대립하는 또 다른 타인 즉 상대방이란 존재와 불가피하게 연관된다는 뜻이다. 내 고객의 이익을 관철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 상대방에게 불이익을 수반한다. 이것이 변리사 등 분쟁 대리인의 숙명이다.
그 숙명의 대가로 상대방에게서 적대와 비난을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자신의 상황을 곤궁하게 만드는 사람이니 무조건 싫다며 배척하고, 사건의 내용과 관계없이 욕이나 싫은 소리를 직간접적으로 들리게 한다. 이것이 분쟁 대리인으로서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상대방의 모습이다. 오래 일하다 보면 응당 그러려니 하고 무뎌지기도 하지만, 약간의 인연이 있던 사이에서 대뜸 안면을 바꾸어 그럴 땐 당혹스럽다. 내가 개인적 감정을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도 그런다.
그런데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지 않은 진정한 고수들이 있다. 그들은 적대감은커녕 적극적으로 다가와,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든 잘 전달해서 일을 수월히 풀거나 불리함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 애쓴다. 더 드물게는, 분쟁 자체를 배움의 기회로 전환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일이 달라진다. 분쟁의 풍경 전체가 달라진다.
이처럼 상대방의 태도가 분쟁의 질과 분위기를 바꾼다. 그렇다면 그 태도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나 던져야 한다.
"이 분쟁은,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전쟁인가?"
물론 아니다. 이 세상의 어떤 법적 분쟁도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아남는 그런 전쟁이 아니다. 분쟁은 오히려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귀한 절차이다. 내가 죽었거나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나를 상대로 싸우려 들지 않는다. 내가 살아서, 싱싱하게,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잠시 불편하지만, 이 과정이 나를 성장시키고 내 조직을 더 강하게 만든다.
분쟁은 상대와 함께 불편한 갈등 상황을 풀어나가는 상호 협력의 과정이다. 바로 탱고와 같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는 이렇게 말한다.
“탱고를 두려워하지 말아요. 탱고엔 실수가 없어요. 인생과 달리 단순합니다. 그래서 탱고가 멋진 겁니다. 실수를 하고 스텝이 엉키기도 하지요. 그게 바로 탱고입니다.”
분쟁도 그렇다. 다리가 종종 꼬인다. 주장이 빗나가고, 증거가 엇갈리고, 예상 못한 공격이 불쑥 들어온다. 그때 멈추거나 주먹을 쥐며 상대에게 증오심을 가지는 것이 적대형의 하수이고, 스텝이 꼬이더라도 상대의 움직임에 조화를 이루며 계속 추는 것이 우호형인 고수이다. 다리가 꼬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탱고를 제대로 출 수 없다.
탱고에서 두 파트너는 각자의 역할이 다르다. 리드하는 쪽과 따르는 쪽, 공격하는 스텝과 받아주는 스텝이 있다. 그러나 둘 다 하나의 음악에 맞춰 움직인다. 그 음악은 법이고, 사실관계이고, 기술이다. 분쟁이 발생한 순간 음악은 이미 연주되고 있다. 당장 춤을 시작하기엔 몸이 굳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소극적으로,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되더라도, 결국은 적극적으로 추어야 하는 운명이다. 두 사람이 이 음악을 함께 해석하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할 때, 분쟁은 가장 우아하고 합리적인 결과에 도달한다.
그런데 대리인에게는 상대방을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움도, 호의도, 적대감도 없다. 그저 내 고객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대리인은 고용된 프로 무용수이다. 파트너를 미워해서 공격적으로 추는 것이 아니고, 좋아해서 부드럽게 추는 것도 아니다. 의뢰인의 곡을 가장 잘 완성하기 위해 출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태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정이 없는 쪽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적대형의 허망함. 감정 없이 건네는 힌트를 실리로 받아채는 우호형의 현명함. 대리인은 거울과 같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화를 내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감정이 없기에 오히려 보이는 것이 있다. 분쟁의 현장, 탱고의 플로어에서 경험 많은 대리인은 상대방에게 적절한 힌트를 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 탱고를 좀 더 아름답게, 일을 좀 더 합리적으로 풀고 싶은 것이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접점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배신이 아니다. 탱고에서 리드하는 쪽이 파트너에게 다음 스텝의 방향을 슬쩍 알려주는 것과 같다. 그래야 둘 다 넘어지지 않는다.
불필요한 소모전을 줄이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힌트가 전달되려면 상대방이 문을 열고 있어야 한다. 탱고에서 파트너가 손을 뿌리치면 리드 자체가 불가능하다. 상대가 적대적이면 대안이 없다. 더 치열하게 싸우는 것 외에는. 그것은 대리인의 선택이 아니라 상대방이 강제한 구도이다.
탱고의 플로어에서 나의 춤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코치도 관객도 아니다. 지금 내 앞에서 함께 추고 있는 파트너다. 파트너의 마음을 얻으면 탱고는 아름다워진다. 증오심만으로 상대를 끌어안고 있으면 그 탱고는 파탄이 난다. 분쟁도 다르지 않다. 내 분쟁의 결과를 가장 크게 좌우하는 사람은 내 변호사도 심판관도 아니라, 바로 상대방이다.
그러니 춤을 추는 동안 상대방을 미워하지 마라. 비록 적이라 하더라도. 상대방 대리인은 더욱 미워하지 마라. 영화 대부에 이런 멋진 대사가 있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져." 더 멋진 대사도 있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적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같은 음악을 듣겠다는 뜻이다. 미워하면서 추는 탱고는 없다. 상대의 스텝을 읽고, 나의 스텝을 읽히게 하고, 그 교환 속에서 곡을 완성해 나가는 것, 분쟁의 실무란 결국 이것이다.
적을 우호적으로 대하는 차원을 넘어, 분쟁 그 자체에서 배우려는 자세로 임하는 사람이 있다. 진정한 고수다. 상대가 들이미는 공격 자료에서 분쟁의 기술을 읽고, 상대의 현재와 미래를 파악한다. 그는 단 한 번의 분쟁에서 탱고의 깊은 맛을 깨닫고, 다음 곡에서는 한 차원 높은 스텝을 밟는다.
결국, 분쟁에서 가장 큰 손해는 싸움에 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 흐르는데 귀를 막는 것이다. 고수들이 노리는 가장 큰 소득은 당장의 승리가 아니라, 자신의 춤 실력을 한 단계 올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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