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1. 서론: 문명의 유전자로서의 《논어》
동아시아 정신사에서 《논어(論語)》가 점유하는 위치는 서구 문명에서의 성서나 플라톤의 대화편에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논어》는 계시된 진리의 기록도, 치밀한 논리적 변증의 체계도 아니다. 이는 B.C. 551년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孔子)라는 인간과 그를 따르던 제자 학단(學團)이 춘추시대(春秋時代)라는 미증유의 난세 속에서 인간다움의 본질과 사회 질서의 회복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로한 ‘대화의 기록’이다. 20편 482장 600여 문장으로 구성된 이 텍스트는 지난 2,500여 년간 중국을 비롯한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윤리적 무의식과 정치적 상상력을 지배해 온 거대한 문화 유전자(Meme)로 기능해 왔다.
본 연구 보고서는 《논어》라는 텍스트를 다층적으로 해부한다. 1차적으로는 문헌학적 접근을 통해 텍스트의 성립 과정과 이본(異本)의 역사를 추적하고, 20편의 구조 속에 숨겨진 편집의 의도를 파헤친다. 2차적으로는 인(仁), 예(禮), 군자(君子), 정명(正名) 등 핵심 개념들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되, 단순한 정의를 넘어 개념 간의 유기적 관계와 긴장을 포착한다. 3차적으로는 이 텍스트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재해석되었는지를 추적한다. 한대(漢代) 훈고학의 주석 작업, 송대(宋代) 주희(朱熹)에 의한 성리학적 형이상학의 정립, 그리고 조선 성리학에서 전개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정약용(丁若鏞)의 실학적 전회(轉回)에 이르기까지, 《논어》 해석의 변천사는 곧 동아시아 지성사 그 자체임을 규명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의 민주주의 담론과 젠더 문제 속에서 《논어》가 갖는 현대적 적실성과 한계를 냉철하게 진단한다.
2. 텍스트의 고고학: 성립, 전승, 그리고 구조적 완결성
2.1. 저자 문제와 편찬의 다층성
통상적으로 《논어》는 공자의 저작으로 오인되기도 하나, 엄밀한 문헌 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공자 사후(死後) 수세대에 걸쳐 형성된 공동 저작물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는 “논어는 공자가 그의 제자 및 당시 사람들과 문답한 것, 제자들끼리 서로 말한 것을 제자들이 각기 기록해 두었다가, 공자가 죽은 뒤에 문인들이 함께 모아 의논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명시한다.
텍스트 내부의 증거들은 이러한 다층적 성립 과정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공자를 ‘자(子)’라고만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유약(有若)과 증삼(曾參)을 각각 유자(有子), 증자(曾子)라 칭하며 그들의 발언을 공자의 말과 동등한 권위로 싣고 있는 대목들은 이 두 제자의 학파가 《논어》의 최종 편집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특히 증자가 공자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것으로 설정되는 후반부의 서술 구조는 증자 학파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방증한다. 학계에서는 공자 사후 1세대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증자의 제자인 2세대, 혹은 그 이후까지 약 30~50년에 걸쳐 현재의 20편 체제가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2.2. 판본의 계보학: 노론(魯論), 제론(齊論), 고론(古論)의 통합
현재 우리가 접하는 《논어》는 단일한 원본의 전승이 아니라, 역사적 선택과 통합의 결과물이다. 한대(漢代) 초기까지 《논어》는 지역적 기반과 학파에 따라 크게 세 가지 판본으로 유통되었다.
| 노논어(魯論語) | 20편 | 공자의 고향 노나라(魯) 학자들에 의해 전승. 현행 《논어》의 모태가 됨. | 하안의 『논어집해』의 저본(底本). |
| 제논어(齊論語) | 22편 | 제나라(齊) 지역 학자들에 의해 전승. 노논어 20편 외에 ‘문왕(問王)’, ‘알자(知者)’ 2편이 더 존재함. | 장구(章句)가 노논어보다 많았으나 한말(漢末)에 실전(失傳)됨. |
| 고문논어(古文論語) | 21편 | 한 경제(景帝) 때 공자의 옛집 벽(공벽, 孔壁)에서 발견된 과두문자(올챙이 문자) 텍스트. | ‘자장(子張)’편 뒤에 ‘요왈(堯曰)’편이 있음. 편차와 글자가 노논어와 상이함. |
전한(前漢) 말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가 노논어를 중심으로 제논어를 참작하여 정리한 ‘장후론(張侯論)’이 유행하였고, 이후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세 판본을 종합하여 주석을 달았다. 위나라의 하안(何晏)이 이를 집대성하여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편찬함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보는 20편 체제의 《논어》가 확정되었다. 이는 경전이 불변의 진리로 고정되기 이전에 치열한 문헌적 투쟁과 타협의 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2.3. 20편의 구조적 분석과 주제 의식
《논어》 20편은 송대 주희 등에 의해 상론(上論, 1~10편)과 하론(下論, 11~20편)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상론은 문체가 간결하고 의미가 함축적이며 공자의 핵심 사상을 원론적으로 제시하는 반면, 하론은 문장이 길고 구체적인 인물 평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이 많으며 제자들의 발언 비중이 높다. 각 편의 제목은 해당 편 첫 장의 첫 두세 글자를 딴 것으로(예: ‘학이시습지’ → ‘학이’), 내용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어는 아니지만, 편찬자들의 의식적인 배열이 엿보인다.
2.3.1. 상론(上論): 사상의 원형과 기초
- 제1편 학이(學而): 《논어》 전체의 서문 격으로, 유교의 학습론과 인간관계의 기초를 다룬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첫 문장은 유교가 ‘배움’의 종교임을 선언한다.
- 제2편 위정(爲政): 덕치(德治)와 정명(正名)을 중심으로 정치의 원리를 설파한다.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으면 뭇 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은 덕치의 비유가 등장한다.
- 제3편 팔일(八佾): 예악(禮樂)의 붕괴를 비판하며, 형식적 예법보다 내면의 진정성(仁)을 강조한다. 계씨(季氏)가 천자의 춤인 팔일무를 추는 것을 보고 공자가 분노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 제4편 이인(里仁): 인(仁)의 가치와 군자의 도덕적 지향(의로움)을 다룬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 제5편 공야장(公冶長) ~ 제10편 향당(鄕黨): 제자들과 당대 인물들에 대한 비평(공야장, 옹야), 공자의 교육관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태도(술이), 문명의 계승 의식(태백, 자한), 그리고 공자의 일상생활과 행동거지(향당)를 기록하여 성인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2.3.2. 하론(下論): 구체적 적용과 학단의 계승
- 제11편 선진(先進) ~ 제15편 위령공(衛靈公): 제자들의 자질 평가(선진), 안연과의 문답을 통한 인의 실천(안연), 자로와 같은 열혈 제자와의 대화(자로), 헌문(憲問), 위령공 등 다양한 군주 및 제자들과의 문답을 통해 난세의 처세와 통치술을 논한다. 특히 안연편의 ‘극기복례(克己復禮)’는 수양론의 정수로 꼽힌다.
- 제16편 계씨(季氏) ~ 제20편 요왈(堯曰): 노나라 실세인 계씨에 대한 비판(계씨), 부도덕한 인물 양화(陽貨)와의 일화, 은자(隱者)들과의 조우(미자), 제자 자장과 자하의 어록(자장)을 거쳐, 마지막 요왈편에서는 요순의 도통을 계승하고 천명을 알 것을 당부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3. 《논어》의 철학적 사상 체계 분석
《논어》는 체계적인 철학 논문이 아니지만, 그 파편적인 언어들 속에는 일관된 사유의 건축술이 내재해 있다. 그 핵심은 ‘인(仁)’이라는 내면의 도덕성을 핵으로 하여, ‘예(禮)’라는 사회적 형식으로 발현하고, ‘정명(正名)’을 통해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며, ‘군자(君子)’라는 이상적 인간상을 통해 이를 담지하는 구조이다.
3.1. 인(仁):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사랑의 현상학
공자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는 ‘인(仁)’이다. 《논어》에서 ‘인’은 109회나 언급되지만, 공자는 단 한 번도 이를 고정된 정의로 가두지 않았다. 질문하는 제자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답변을 달리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취했기 때문이다.
- 애인(愛人): 번지(樊遲)가 인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는 인의 가장 기초적인 정의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의미한다.
- 충서(忠恕): 인의 실천 방법론은 ‘충(忠)’과 ‘서(恕)’다. 충은 자기 내면의 진실성을 다하는 것이며, 서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소극적 황금률이다. 이는 인이 고립된 개인의 덕목이 아니라 철저히 관계 지향적인 윤리임을 보여준다.
- 극기복례(克己復禮): 안연에게 공자는 “나(사욕)를 이기고 예(사회적 규범)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라고 설파했다. 이는 인이 단순한 감정적 온정주의가 아니라, 엄격한 자기 절제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존중을 포함하는 의지적 실천임을 시사한다.
3.2. 예(禮): 인(仁)의 외적 형상화와 사회적 문법
인(仁)이 내면의 도덕성이라면, 예(禮)는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는 양식이자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이다. 공자는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가 무슨 소용이겠는가(人而不仁 如禮何)”라고 하여 예의 형식이 인의 정신에 기반해야 함을 역설했다. 춘추시대의 혼란은 바로 이 ‘예’의 붕괴(예악붕괴)에서 기인했다. 공자에게 예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조율하고 각자의 신분과 역할에 맞는 행동 양식을 규정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는 고도의 통치 기제이자 문화적 문법이었다.
3.3. 정명(正名): 언어의 정립과 정치적 책임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臣臣 父父子子).” (『논어』 안연편)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은 언어(이름)와 실재(역할/본분)의 일치를 추구한다. 자로가 정치를 맡게 되면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고 묻자 공자는 주저 없이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고 답했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言)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事)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결국 예악(禮樂)이 흥하지 못하고 형벌이 공정하지 못하게 되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는 단순한 명분론이 아니다. 정명론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걸맞은 도덕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역할 윤리(Role Ethics)’이며, 언어의 오용과 개념의 혼란이 가져올 정치적 파국을 경계한 언어 철학적 통찰이다.
3.4.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이상적 인간상의 유형학
공자는 도덕적 수양의 목표로 ‘군자’를 제시하며, 이를 ‘소인’과 끊임없이 대비시킨다. 본래 군자는 ‘지배층의 자제’를 뜻하는 신분적 용어였으나, 공자는 이를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체’를 뜻하는 가치적 용어로 전용(轉用)하는 혁명적 의미 변화를 일으켰다.
[표 1]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비교 분석
| 가치 지향 | **의(義)**에 밝음 (喩於義) | **리(利)**에 밝음 (喩於利) | 이인편 |
| 사회적 관계 | 화이부동(和而不同): 조화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음 | 동이불화(同而不和): 부화뇌동하되 조화하지 못함 | 자로편 |
| 책임 귀속 | 구저기(求諸己):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음 | 구저인(求諸人):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음 | 위령공편 |
| 집단 형성 | 주이불비(周而不比): 두루 통하되 파당짓지 않음 | 비이불주(比而不周): 파당짓되 두루 통하지 못함 | 위정편 |
| 타인 영향 | 성인지미(成人之美): 남의 아름다음을 이루게 함 | 성인지악(成人之惡): 남의 악함을 조장함 | 안연편 |
| 내면 상태 | 탄탕탕(坦蕩蕩): 마음이 평탄하고 너그러움 | 장척척(長戚戚): 항상 근심하고 걱정함 | 술이편 |
| 태도 | 태이불교(泰而不驕):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음 | 교이불태(驕而不泰): 교만하되 태연하지 못함 | 자로편 |
이러한 대비는 인간을 선악으로 이분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경향성을 상징한다. 공자는 끊임없는 자기 수양(修己)을 통해 소인적 기질을 극복하고 군자의 경지로 나아갈 것을 촉구했다.
4. 해석학적 전변: 시대정신에 따른 《논어》의 재구성
《논어》는 고정된 텍스트였지만, 그 의미는 시대마다 다르게 읽혔다. 주석의 역사는 곧 동아시아 지성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4.1. 한대(漢代)와 위진남북조: 훈고학적 정리와 현학의 침투
한대의 《논어》 연구는 경전의 자구(字句) 해석과 문헌적 고증에 치중하는 훈고학적 경향을 띠었다. 위나라 하안(何晏)의 『논어집해』는 이러한 한대 훈고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형이상학적 해석보다는 실질적인 의미 파악에 주력했다. 그러나 하안 자신도 위진 현학(玄學)의 영향을 받아 도가적(道家的)인 ‘무(無)’의 개념을 일부 차용하여 유교 경전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이 시기의 《논어》는 정치적 통치 이념이자 문헌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4.2. 송대(宋代) 주희(朱熹): 성리학적 형이상학의 정립
남송의 주희는 《논어》 해석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복시켰다. 그는 한당(漢唐)의 주석을 ‘고주(古注)’라 하고 자신의 해석을 ‘신주(新注)’라 칭하며,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했다. 주희는 이 책에서 공자의 말씀을 리(理)와 기(氣)라는 성리학적 우주론의 틀로 재해석했다.
주희에게 ‘인(仁)’은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이치(心之德 愛之理)”로 정의되며, 우주적 원리(天理)가 인간 내면에 본성(性)으로 내재화된 것으로 격상된다. 그는 공자의 가르침을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存天理 去人慾)’ 엄격한 수양론으로 체계화했다. 또한 《논어》를 《맹자》, 《대학》, 《중용》과 함께 ‘사서(四書)’로 묶어 유교의 핵심 경전 체계를 재편함으로써, 《논어》는 단순한 처세훈을 넘어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철학적 진리서가 되었다.
4.3. 조선 성리학의 심화: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과 《논어》
조선 유학은 주희의 성리학을 수용하여 더욱 정밀한 심성론으로 발전시켰는데, 그 정점이 바로 16세기 퇴계 이황(李滉)과 고봉 기대승(奇大升) 사이의 ‘사단칠정 논쟁’이다. 이 논쟁은 인간의 감정과 도덕성의 기원을 해명하기 위해 《논어》, 《맹자》, 《중용》의 개념들을 극한까지 분석했다.
4.3.1. 논쟁의 핵심과 《논어》의 인용
이황이 “사단(측은, 수오, 사양, 시비지심)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희노애락애오욕)은 기(氣)가 발한 것(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주장하자, 기대승은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의 원칙을 들어 이를 반박했다. 두 학자는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기 위해 《논어》 양화편(17편 2장)의 “성상근 습상원(性相近 習相遠: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습관에 의해 멀어진다)” 구절과 공자가 언급한 ‘호오(好惡)’의 감정을 치열하게 분석했다.
- 이황 (이기이원론적 경향): 사단은 순선(純善)한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므로,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나오는 칠정과는 그 근원이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논어》에 나타난 도덕적 감정을 리(理)의 직접적 발현으로 해석하여 인간 도덕성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근거를 확보하려 했다.
- 기대승 (이기일원론적 경향): 사단도 결국 정(情)의 일종이며, 칠정 안에 사단이 포함된다고 보았다. 리와 기는 현실에서 분리되어 작용할 수 없으므로,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나누어 배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공자가 말한 ‘호오(좋아하고 싫어함)’의 감정조차도 기(氣)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함을 역설하며, 감정의 현실적 통합성을 강조했다.
이 논쟁은 《논어》의 심성론적 함의를 극단까지 밀고 나간 세계 철학사적으로도 유례없는 고도의 지적 탐구였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를 한 차원 높였다.
4.4. 실학적 전회: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저술하여 주희의 성리학적 해석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공자의 원의(原義)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수사학(洙泗學)’을 제창했다.
- 인(仁)의 관계론적 재해석: 주희가 인을 ‘마음속의 이치(理)’라는 정적(靜的)인 본성으로 본 반면, 다산은 글자 모양(人+二)에 착안하여 인을 ‘두 사람(二人) 사이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다산에게 인은 마음속에 고요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行事)으로 성취해 나가는 동적(動的)인 덕목이었다.
- 성기호설(性嗜好說): 다산은 인간의 본성을 선한 이치가 내재된 것으로 보지 않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마음의 경향성(기호)’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본성대로만 하면 저절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선을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는 주체적 도덕 행위자가 된다.
- 상제(上帝)의 재소환: 성리학의 추상적인 ‘천리(天理)’ 대신, 고대 유교의 인격적 주재자인 ‘상제(하느님)’를 다시 불러들여 인간의 도덕적 실천을 감시하는 초월적 존재로 설정했다. 이는 내면의 수양에 머물던 유교를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시도였다.
5. 현대적 관점과 비판적 쟁점: 21세기 《논어》의 재발견
5.1. 유교와 민주주의: 상충인가 친화인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논어》와 유교는 민주주의와의 양립 가능성을 두고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다.
- 비판론: 유교의 가부장적 위계질서(삼강오륜)와 권위주의는 평등과 자유를 기초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시각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유교적 충효 논리를 체제 옹호에 악용한 사례들은 이러한 비판을 강화했다.
- 친화론/보완론: 김상준, 나종석 등 현대 학자들은 유교의 ‘민본(民本)’ 사상과 ‘공론(公論)’ 정치를 주목한다. 《논어》의 “백성을 믿게 해야 한다(民無信不立)”는 가르침이나 맹자의 혁명론은 통치의 정당성이 백성에게 있음을 시사하며, 이는 현대적 주권재민 사상과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유교의 공동체주의와 도덕적 책임 윤리는 서구 민주주의의 원자론적 개인주의가 초래한 사회 해체와 도덕적 무관심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적 가치로 재평가된다. 유교적 입헌주의와 공적 토론(공론)의 전통은 숙의 민주주의의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5.2. 젠더와 위계의 문제: ‘만들어진 전통’의 해체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젠더 갈등과 권위주의적 직장 문화의 원인으로 흔히 유교가 지목된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현재 우리가 ‘전통’이라고 믿는 유교적 관습들(예: 남성 중심의 제사 상속, 여성의 가사 전담 등) 상당수가 조선 후기나 근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강화되거나 왜곡된 ‘만들어진 전통’임을 밝혀내고 있다. 《논어》 텍스트 자체는 성차별적 발언보다는 역할에 따른 상호 존중을 강조했으나, 후대의 해석과 사회 제도가 이를 경직된 위계 서열로 고착화했다는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5.3. 평생학습과 자기계발의 원형
《논어》 첫 구절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는 지식 정보화 시대에 새로운 울림을 준다. 공자의 학습(學)은 출세를 위한 도구적 수단(위인지학 爲人之學)이 아니라, 자아를 완성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기쁨의 원천(위기지학 爲己之學)이었다. 이는 무한 경쟁과 스펙 쌓기에 매몰된 현대인에게 공부의 본질적 의미와 삶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6. 결론: 오래된 미래로서의 《논어》
《논어》는 박물관에 박제된 고전이 아니다. 하안에서 주희로, 다시 이황과 기대승,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치열한 주석의 역사는 《논어》가 시대의 문제에 끊임없이 응답하고 변주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열린 텍스트’임을 증명한다.
성리학자들은 《논어》에서 우주의 원리를 읽어냈고, 실학자들은 사회 개혁의 의지를 읽어냈으며, 오늘날의 우리는 그 안에서 인간관계의 지혜, 리더십의 본질, 그리고 공동체와 공존하는 법을 읽어낸다. 사단칠정 논쟁이 보여준 인간 심리에 대한 정밀한 탐구 정신, 다산 정약용이 보여준 관계 중심의 실천 윤리, 그리고 정명 사상이 던지는 사회적 정의에 대한 메시지는 현대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공동체 붕괴를 치유할 수 있는 풍부한 사상적 자양분을 제공한다.
결국 《논어》를 읽는다는 것은 공자의 말씀에 대한 맹목적 숭배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그 답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논어》가 2,500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이유이며, 우리가 이 오래된 텍스트를 다시 펼쳐 들어야 할 당위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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