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_ 파우스트
_ 파우스트의 '순간(Augenblick)'과 구원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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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희곡 『파우스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구절로,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영혼을 건 내기(Wager)를 할 때 제시한 패배의 조건이다. 이 문장에는 인간 욕망의 본질, 근대적 성취 지향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1. 내기의 성격: 쾌락이 아닌 '멈춤'에 대한 도박
일반적으로 악마와의 계약은 "부와 명예를 주면 영혼을 주겠다"는 식이지만, 파우스트의 제안은 훨씬 철학적이고 역설적이다. 파우스트는 지상의 어떤 쾌락이나 권력도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채울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는 악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너는 나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현실에 안주하여 '이만하면 됐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나의 삶이 더 이상 의미가 없으니 나를 데려가도 좋다."
즉, 이 문장은 파우스트가 자신의 '불만족'과 '끊임없는 노력(Striving)'에 건 도박이다. 그에게 멈춤(Verweile)은 곧 정체이자 죽음을 의미했다.
2. '순간(Augenblick)'의 철학적 의미
여기서 파우스트가 멈추라고 말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순간'은 단순한 쾌락의 시간이 아니다.
- 시간의 초월: 이 주문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영원성을 체험하는 찰나를 의미한다. 괴테에게 진정한 행복은 지속되는 상태가 아니라, 찰나의 순간 속에서 느끼는 완전한 충족감이다.
- 근대적 주체의 비극: 현대 문학 비평가들은 이 대목을 근대적 인간(Modern Man)의 초상으로 해석한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만 존재 가치를 느끼는 현대인은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파우스트에게 "멈추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거부했던 '안주'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므로, 이는 곧 파멸(죽음)로 이어지는 조건이 된다.1
3. 결말의 아이러니와 구원
이 내기의 결말은 『파우스트』 2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매우 드라마틱하고 아이러니하게 완성된다.
- 눈먼 자의 착각: 파우스트는 죽기 직전, 눈이 먼 상태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괭이질 소리를 듣는다. 그는 자신의 명령대로 인부들이 늪지대를 개간하여 수백만 명이 자유롭게 살 터전을 만드는 소리라고 착각하고, 그 미래의 비전에 감격하여 마침내 금지된 주문을 외친다.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 비극적 현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실 악마의 수하들(렘무어)이 파우스트의 무덤을 파는 소리였다. 그는 현실적인 성취가 아닌, 자신의 내면에서 그려낸 이상향(Utopia)을 보며 만족감을 느꼈고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 역설적 구원: 메피스토펠레스는 내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하고 영혼을 가져가려 하지만, 신은 파우스트를 구원한다. 비록 그가 '멈추어라'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현실의 쾌락에 빠져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한 숭고한 노력의 정점에서 외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명제처럼, 그의 끊임없는 투쟁 자체가 구원의 근거가 되었다.
요약
따라서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문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더 나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치열한 의지를 상징하는 동시에, 그 질주를 멈추게 할 만큼의 완전한 충족과 아름다움은 오직 죽음의 순간, 혹은 영원한 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비극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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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괴테의 필생의 과업과 파우스트적 내기(Wette)의 현대적 위상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파우스트(Faust)》는 단순한 문학 작품의 범주를 넘어, 근대 서구 문명의 정신적 궤적을 추적하고 인간 존재의 모순과 초월 가능성을 탐구한 거대한 철학적 기획이다. 20대 초반의 '우르파우스트(Urfaust)' 시기부터 82세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장장 60여 년에 걸쳐 집필된 이 대작은 계몽주의의 낙관성,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격정, 고전주의의 조화, 그리고 낭만주의의 무한 동경을 모두 포괄하는 문학적 우주를 형성한다.1
본 보고서는 파우스트 연구의 핵심 난제이자 작품의 주제 의식이 응축된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라는 발화의 다층적 의미를 해부하고, 이에 따른 구원의 논리적 정당성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텍스트 내적인 문헌학적 분석에서 시작하여, 법리적 해석, 니체와 아도르노의 철학적 비평, 마셜 버먼의 사회학적 근대성 이론, 그리고 펠라기우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신학적 대립 구도를 망라하는 통섭적 접근을 시도한다.
특히 파우스트 1부에서 체결된 '계약(Pakt)'과 '내기(Wette)'가 2부의 결말에서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해소되는지, 그리고 파우스트의 구원이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Streben)'과 신의 '은총(Gnade)'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규명할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발전'과 '파괴', '욕망'과 '만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2. 텍스트의 법리적 해부: 계약의 조건과 '순간'의 존재론
파우스트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일차적인 기준은 그와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에 맺어진 계약의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법리적 해석이다. 전통적인 파우스트 전설이나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의 《닥터 파우스투스》가 24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의 기한을 둔 '영혼 매매 계약'에 기초했다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만족의 순간'이라는 심리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을 내건 '내기'의 형식을 취한다.3
2.1 1부 '서재 장면(Studierzimmer)'의 계약 분석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이 대목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조항으로서, 파우스트의 실존적 태도와 욕망의 본질을 드러낸다.
"내가 어느 순간에게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 자네는 나를 결박해도 좋다. / 나는 기꺼이 파멸하겠다! /... / 시계바늘은 떨어지고, 시간은 내게 멈출 것이다!" (1699-1702행) 5

이 내기의 전제는 파우스트의 '절대적 불만족'이다. 파우스트는 유한한 지상의 쾌락이나 권력이 자신의 무한한 정신적 갈증(Streben)을 결코 채울 수 없음을 확신한다. 따라서 이 내기는 표면적으로는 악마와의 거래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인간의 욕망이 정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인간학적 실험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를 안주(Behagen)와 나태의 침상으로 유혹하려 하지만, 파우스트는 끊임없는 활동(Tätigkeit)을 통해 이를 거부한다.7
여기서 '순간(Augenblick)'은 시간의 연속선상에 있는 물리적 점(point)이 아니라, 주체가 완전한 충족감을 느끼며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투사된 '질적 시간(Qualitative Time)'이다. 1부의 계약은 파우스트가 이러한 정지 상태를 갈망하는 즉시 패배한다는 조건을 명시한다.
2.2 2부 5막의 발화와 접속법 2식(Konjunktiv II)의 법적 효력
파우스트 2부 5막, 100세에 이른 파우스트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그는 마침내 문제의 대사를 발화한다. 그러나 이 발화의 문맥과 문법적 구조는 1부의 계약 조건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 서고 싶다. / 그 순간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Zum Augenblicke dürft' ich sagen): /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11579-11582행) 5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법적 장치는 독일어의 **접속법 2식(Konjunktiv II)**인 **'dürft' ich'**이다. 이는 직설법(Indikativ)인 "말한다(sage)"나 "말했다(sagte)"가 아니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말해도 좋으리라"는 가정, 가능성, 혹은 소망을 나타낸다. 법리적으로 해석할 때, 파우스트는 '현재'의 순간에 만족하여 멈추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간척 사업을 통해 건설하고자 하는 미래의 유토피아("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더불어")를 '예감(Vorgefühl)'하며, 그 미래의 시점이 도래한다면 이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상의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6
이어지는 대사 "이러한 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Im Vorgefühl), / 나는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노라(Genieß' ich jetzt den höchsten Augenblick)" (11585-86행)는 파우스트가 현재의 물리적 쾌락이 아니라, 미래의 비전에 대한 선취적 향유(Anticipatory Enjoyment) 속에 있음을 확증한다.10 따라서 메피스토펠레스가 계약 문구의 문자적 일치만을 근거로 승리를 주장하는 것은, 계약의 실질적 내용인 '현실 안주' 조건을 간과한 오독이다. 파우스트는 죽는 순간까지도 안주하지 않았으며,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사하는 '노력하는 자(Strebender)'로서 존재했다.11
2.3 법적 진보와 중재(Arbitration)의 실패
하버드 대학교 등의 연구에 따르면, 파우스트 2부의 결말은 1부의 명확한 계약법적 세계에서 벗어나 "경계를 알 수 없는 법적 질서(gränzunbewußte legal order)"로의 이행을 보여준다.5 1부의 세계가 엄격한 문서주의와 계약 이행의 논리를 따랐다면, 2부의 종결부는 지상의 계약법이 상위의 우주적 질서(신성한 사랑과 은총) 앞에서 무력화되는 과정을 그린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피로 서명된 증서"를 들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누구에게 내가 불평을 해야 하나?(Bei wem soll ich mich nun beklagen?)"라고 항변한다.5 그러나 천사들은 이러한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파우스트의 불멸의 본질(Entelechie)을 탈취해 간다. 이는 파우스트의 구원이 계약의 내재적 논리(내기에서의 승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계약 자체를 초월하여 무효화하는 '위로부터의 중재'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시사한다.3 즉, 파우스트 구원 논리의 법적 타당성은 '내기의 승리'라는 1차적 층위와 '계약의 무효화'라는 2차적 층위가 중첩되어 작동한다.
| 구분 | 1부 계약 (The Pact) | 2부 최후의 발화 (The Final Utterance) | 법적 효력 분석 |
| 핵심 문구 | "Werd' ich zum Augenblicke sagen: /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 "Zum Augenblicke dürft' ich sagen: /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 | **접속법 2식(Dürft' ich)**의 사용으로 직설적 선언이 아닌 가정/가능성으로 전환됨. |
| 조건의 성격 | 현실 안주, 나태, 정지 (Stasis) | 미래의 비전에 대한 예감 (Anticipation) | '현재'에 대한 만족이 아니므로 계약 위반이 아님. |
| 대상 | 쾌락, 향락, 권력 등 유한한 대상 | 인류 공동체의 자유와 활동 (Tätigkeit) | 이기적 욕망 충족이 아닌 공적 가치의 실현 지향. |
| 결과 해석 | 패배 조건 명시 | 승리 혹은 무승부 | 메피스토펠레스의 패배 (안주시키지 못함). |
3. 순간의 현상학: 니체의 영원회귀와 파우스트적 시간의 대립
파우스트가 갈망한 '순간'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사상과의 비교 분석이 필수적이다. 두 사상가는 모두 '순간'과 '영원'의 관계를 탐구했지만, 그 지향점은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3.1 니체: 순간의 절대적 긍정과 영원회귀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수없이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유의 실험이다. 여기서 '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는 찰나가 아니라, 영원히 반복될 가치를 지닌 절대적 무게를 지닌다.12 니체에게 구원이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고통과 기쁨이 무한히 반복되는 이 삶의 순간을 "너는 신이다!"라고 외치며 긍정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에 있다.14
니체의 관점에서 파우스트의 "멈추어라"는 다소 모호하다. 만약 그것이 현재의 상태가 너무나 완벽하여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니체적 긍정에 근접한다. 그러나 파우스트가 1부에서 보여준 태도는 현재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음'을 향해 나아가는 부정의 변증법이었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한다"고 말하며 순간의 깊이를 긍정하지만, 파우스트는 순간의 정지를 통해 시간의 파괴적 속성으로부터 탈출하려 한다.15
3.2 파우스트: 생성으로서의 영원과 '성스러운 거짓말'
파우스트 2부의 결말에서 파우스트가 긍정한 '순간'은 정지된 상태(Stasis)가 아니라 역동적인 활동(Becoming)의 상태였다. "매일매일 자유와 생명을 정복하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그의 마지막 통찰은, 완결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끊임없는 투쟁과 노력의 과정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2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는 니체의 영원회귀와 미묘하게 겹치면서도 갈라진다. 니체가 '동일한 것의 반복'을 견뎌내는 초인적 의지를 요구했다면, 파우스트는 '새로운 것의 창조'를 통해 시간을 초월하려 한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순간은 객관적 현실(무덤 파는 소리)과는 무관한 주관적 환상(간척 공사)에 기반하고 있다. 로버트 숄즈(Robert Scholes)가 언급한 "구원하는 거짓말(Saving Lie)"의 개념이 여기에 적용된다.18 과학적/객관적 진실(죽음)은 파괴적이지만, 예언적/주관적 거짓(유토피아의 비전)은 구원적이다. 파우스트는 이 '성스러운 거짓말'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고 자기 존재의 의미를 완성한다.
4. 발전의 비극과 근대성의 변증법: 마셜 버먼의 해석
마셜 버먼(Marshall Berman)은 그의 저서 《현대성의 경험(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에서 파우스트를 근대화(Modernization)와 발전(Development)의 비극적 영웅으로 독해한다. 그의 분석은 파우스트 2부 5막의 '필레몬과 바우키스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파우스트의 구원 논리에 사회역사적 층위를 더한다.19
4.1 파우스트: 근대적 개발자(Developer)의 원형
버먼에 따르면, 파우스트는 1부의 '몽상가(Dreamer)'와 '연인(Lover)' 단계를 거쳐 2부에서 '개발자(Developer)'로 변모한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정복하고 개조하여 인간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근대적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바다를 막아 땅을 넓히는 간척 사업은 근대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의 상징이다.20
이 과정에서 파우스트는 "파괴 없이는 창조도 없다"는 근대적 명제를 체화한다. 그는 자신의 거대한 개발 계획에 방해가 되는 낡은 오두막의 주인, 필레몬과 바우키스를 강제로 이주시키려 한다. 이 노부부는 전근대적 가치, 환대, 자연과의 조화를 상징한다. 파우스트는 그들에게 보상을 주고 더 좋은 곳으로 보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기를 거부한다. 결국 파우스트의 명령(혹은 묵인) 하에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들을 살해하고 오두막을 불태운다.21
4.2 필레몬과 바우키스: 진보의 희생양과 파우스트의 자기기만
이 에피소드는 '발전의 비극(Tragedy of Development)'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파우스트는 "나는 그들의 소유를 원했지, 피를 원한 것은 아니다"라고 변명하며 메피스토펠레스를 탓하지만, 버먼은 이것이 근대 주체의 전형적인 위선과 자기기만이라고 지적한다.22 파우스트는 발전의 혜택(자유로운 땅)은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폭력(철거, 살인)에 대한 책임은 악마에게 전가한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비전("자유로운 백성")은 이러한 피 묻은 땅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가 맹목(Blindness) 상태에서 느끼는 '최고의 행복'은 자신이 저지른 파괴를 보지 못하는(혹은 보지 않으려는) 대가로 얻어진 것이다. 버먼은 이를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와 같은 20세기 도시 개발자들의 행태와 연결하며, 현대 문명이 타자의 희생 위에 구축된 거대한 파우스트적 거래임을 폭로한다.21
5. 아도르노와 '가상(Schein)'의 미학: 맹목의 통찰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면을 미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가상(Schein)'이 지닌 진리 내용을 구명한다. 2부 5막에서 파우스트는 '근심(Sorge)'에 의해 눈이 멀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내면은 밝게 빛난다"고 선언한다.17
5.1 맹목(Blindness)의 이중성: 현실 부정과 내면의 빛
파우스트가 듣는 괭이 소리는 사실 메피스토펠레스의 르무어(Lemuren)들이 그의 무덤을 파는 소리이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이를 자신의 지시대로 제방 공사가 진행되는 소리로 해석한다. 아도르노적 관점에서 이 '오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다. 파우스트는 경험적 현실(무덤 파기, 죽음의 임박)을 부정하고, 자신이 투사한 미적/이념적 가상(자유로운 땅의 건설)을 진실로 받아들인다.23
이 맹목은 외부 세계의 참혹한 현실(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죽음, 자신의 임박한 파멸)을 차단함으로써, 내면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방어기제이자 초월의 동력이다.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의 '관리되는 세계(Administered World)'에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하며, 오직 예술적 가상 속에서만 그 가능성이 보존된다고 보았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독백은 현실과 불화하는 주체가 스스로 만들어낸 예술작품과도 같다.25
5.2 '마지막, 나쁜, 공허한 순간'의 역설적 승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죽자 "마지막, 나쁘고, 공허한 순간(Den letzten, schlechten, leeren Augenblick)을 붙잡으려 했다"고 조소한다.10 악마의 눈에 파우스트의 최후는 기만당한 노인의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괴테는 이 '공허한 순간'을 구원의 계기로 전환시킨다.
파우스트가 붙잡은 것은 '비어 있는(leeren)' 순간이었기에, 오히려 그 안에 무한한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었다. 확정된 현실(Fact)이 아니라 가능성의 영역(Fiction/Vision)에 머물렀기에, 그의 영혼은 고정되지 않고 상승할 수 있었다. 아도르노에게 있어 '가상'은 거짓이 아니라, 억압적 현실 너머를 지시하는 '약속'이다. 파우스트의 맹목적인 희망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절망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 정신의 자율성을 증명하며, 이것이 그가 구원받을 수 있는 내재적 근거가 된다.27
6. 구원의 신학적 아키텍처: 펠라기우스주의와 은총의 시너지
파우스트 구원 논리의 정점은 천상에서의 신학적 판결에 있다. 괴테는 기독교 신학의 오랜 논쟁인 '행위(Works)'와 '은총(Grace)'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파우스트의 구원을 설명한다.
6.1 "언제나 노력하는 자": 펠라기우스주의적 구원론
천사들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들어 올리며 구원의 핵심 논리를 노래한다:
"언제나 노력하며 애쓰는 자(Wer immer strebend sich bemüht), /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11936-37행) 29
이 구절은 명백히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적 색채를 띤다. 4-5세기의 신학자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능력을 강조하며, 원죄에 의한 인간 본성의 전적인 부패를 부정했다. 그는 인간이 신의 은총 없이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선을 행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다.32
괴테는 젊은 시절부터 펠라기우스주의에 깊은 공감을 표했으며, 인간의 자율적인 활동성(Tätigkeit)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35 파우스트는 수많은 죄(그레트헨의 파멸, 살인 교사 등)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망하거나 후회 속에 주저앉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활동을 모색했다. 이러한 '멈추지 않는 노력(Streben)'은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부정하는 영)에게 잠식되지 않게 하는 방패였으며, 구원의 필요조건으로 작용한다.
6.2 "위로부터의 사랑": 아우구스티누스적 은총의 개입
그러나 괴테는 펠라기우스주의의 한계를 인지하고 있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악마적 계약과 죄의 무게를 완전히 씻을 수 없다. 천사들의 노래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에게 위로부터의 사랑이(Und hat an ihm die Liebe gar / Von oben teilgenommen) / 관여하였을 때, /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환영하노라." 30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ism)**적 입장, 즉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Sola Gratia)이라는 교리와 연결된다.32 파우스트를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낚아채는 결정적인 힘은 그의 노력이 아니라, 그레트헨(Gretchen)의 중보 기도로 촉발된 '신성한 은총'이다.
6.3 괴테의 신인협력설(Synergism)과 '영원히 여성적인 것'
결국 파우스트의 구원은 인간의 극한적 노력(Werke)과 신의 절대적 은총(Gnade)이 결합된 **신인협력(Synergism)**의 결과이다. 알브레히트 쇠네(Albrecht Schöne)는 이를 두고 괴테가 펠라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변증법적으로 화해시켰다고 분석한다.36
- 인간의 몫: 오류를 범하더라도 멈추지 않는 활동.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 lang' er strebt)." (317행)
- 신의 몫: 방황하는 인간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랑.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끌어올린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12110-11행)
여기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남성적 원리(파우스트적 투쟁, 논리, 정복)를 포용하고 정화하는 우주적 자비와 사랑의 원리를 상징한다.1 1부의 피해자였던 그레트헨이 2부의 구원자로 등장하는 것은, 파우스트의 일방적인 팽창 욕망이 타자와의 화해와 사랑을 통해 비로소 완성됨을 의미한다.
| 신학적 입장 | 핵심 교리 | 파우스트 텍스트 적용 | 비고 |
| 펠라기우스주의 | 자유 의지, 인간의 도덕적 노력 강조, 원죄 부정 | "언제나 노력하며 애쓰는 자" (Streben) | 파우스트의 활동성(Tätigkeit) 긍정 |
| 아우구스티누스주의 | 전적 타락, 오직 은총(Sola Gratia), 예정설 | "위로부터의 사랑이 관여하였을 때" (Liebe von oben) | 그레트헨과 성모 마리아의 개입 |
| 괴테의 종합 (Synergism) | 노력 + 은총 = 구원 | 인간의 의지와 신의 자비의 협력 | 현대적/인본주의적 구원론 모델 제시 |
7. 결론: 미완의 프로젝트로서의 인간과 구원의 현대적 의미
파우스트의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순을 응축한 철학적 명제이다. 파우스트는 멈추고 싶어 했지만 멈추지 않았고, 만족을 원했지만 불만족 속에 죽어갔다. 그러나 괴테는 이 '불가능한 갈망' 자체를 인간의 존엄성으로 격상시킨다.
본 연구의 분석을 종합하면, 파우스트의 구원은 다음과 같은 다층적인 논리로 정당화된다:
- 법적 논리: '미래 예감'이라는 조건부 발화를 통해, 현실 안주를 금지한 계약을 위반하지 않았다.
- 철학적 논리: 정지된 쾌락이 아니라 생성하는 활동을 긍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니체적 의미의 생의 긍정에 도달했다.
- 사회역사적 논리: 근대적 발전의 파괴성(필레몬과 바우키스)을 내포하고 있지만, 인류 공영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적 진보의 주체로 인정받았다.
- 신학적 논리: 인간의 치열한 노력(펠라기우스)과 신의 무조건적 사랑(아우구스티누스)이 결합하여, 죄 많은 인간을 빛의 세계로 이끈다.
오늘날 성과 사회(Achievement Society)의 피로와 기후 위기의 재앙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는 현대 문명은 파우스트의 후예들이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단죄하지 않고 구원함으로써, 이 위험한 질주 속에서도 인간이 지향해야 할 빛(사랑, 화해, 공공의 선)이 있음을 역설한다. 파우스트의 구원은 완성된 도덕적 승리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인류의 도덕적, 영적 진화에 대한 희망의 메타포이다.
"지나가는 자(Der Vorübergehende)"로서의 인간은 영원 속에서만 멈출 수 있다. 그러나 그 멈춤은 죽음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것(Das Unzulängliche)"이 "여기서 실현되는(Hier wird's Ereignis)" 새로운 차원으로의 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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