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노동(Pseudo-work)'
_ 현대 조직 사회의 노동 환상과 비효율성
(*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아네르스 포그 옌센의 《가짜 노동》은 기술 발전에도 노동 시간이 줄지 않는 현대의 역설을 파헤친다.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노동 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이유는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무의미한 회의나 보고서와 같은 허례허식이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파킨슨의 법칙이나 관리주의의 비대화, 그리고 바쁨을 지위의 상징으로 여기는 사회적 강박에서 비롯된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번아웃과 보어아웃에 노출되고 조직의 생산성은 저하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따라서 칼럼은 진정한 노동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신뢰 기반 경영을 도입하고, 불필요한 과업을 제거하며, 과감하게 노동 시간을 단축할 것을 제안한다. 최종적으로는 기계적인 근면함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과 창조적인 활동에 집중하는 변화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1. 서론: 노동의 약속과 배신, 그리고 현대의 역설
1.1 연구의 배경 및 목적
인류의 역사는 곧 노동의 역사였으나,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는 노동의 본질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인간을 고된 육체노동에서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여가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거대한 약속을 제시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첫 4분의 1이 지난 현재, 이러한 약속은 배신당한 것처럼 보인다. 덴마크의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Dennis Nørmark)와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Anders Fogh Jensen)의 저서 《가짜 노동(Pseudoarbejde)》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1
본 보고서는 이들의 저작을 중심으로 현대 조직 사회에 만연한 '가짜 노동'의 실태와 원인, 그리고 파급 효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단순히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을 넘어, 노동 사회학적 관점과 조직 행동론적 시각을 결합하여 왜 우리가 기술적 풍요 속에서도 여전히 '시간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바쁨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뇌르마르크와 옌센이 제시하는 해결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함의를 도출할 것이다.
1.2 케인스의 실패한 예언과 노동 시간의 미스터리
1930년,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그의 에세이 《우리 후손을 위한 경제적 가능성》에서 대담한 예언을 내놓았다. 그는 기술 진보와 자본 축적 속도를 근거로, 100년 후인 2030년경에는 인류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3 케인스의 논리는 명쾌했다. 생산성이 4배, 8배 증가하면,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케인스의 예측과 정반대로 흘러갔다. 오늘날 우리는 케인스 시대보다 수십 배 높은 생산성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 40시간, 아니 그 이상의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기술은 노동 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업무의 속도를 가속화했고, 스마트폰과 이메일은 퇴근 후의 시간까지 노동의 영역으로 포섭했다. 뇌르마르크와 옌센은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4시간만 일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놓고 왜 8시간이나 일하는가?".5
이 역설에 대한 저자들의 진단은 충격적이다. 일이 줄어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일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잉여 생산력과 남는 시간을 여가로 전환하는 대신, 사회는 무의미한 업무, 즉 '가짜 노동'을 창출하여 그 공백을 메우는 길을 택했다. 이는 경제적 필요가 아닌, 심리적, 문화적, 조직적 기제에 의해 작동하는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다.7
1.3 합리성의 덫과 바쁨의 미학
현대 사회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합리성의 추구가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조직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관리 시스템과 평가 지표를 도입했지만, 이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이 정작 본래의 업무보다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게 된 것이다.1 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이메일, 메신저, 협업 툴은 소통을 돕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끊임없는 알림과 무의미한 참조(CC)의 홍수를 만들어내어 업무 몰입을 방해하는 주범이 되었다.8
더불어, '바쁨' 자체가 사회적 지위의 상징(Status Symbol)이 되었다. 과거 귀족 사회에서 한가함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나는 바쁘다"라는 말이 곧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의미와 동의어가 되었다.5 이러한 문화적 압박은 조직 구성원들로 하여금 실제 업무의 유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바쁜 척을 연기(Perform)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가짜 노동이 번성하는 토양이다.
2. 가짜 노동(Pseudo-work)의 이론적 해부
2.1 가짜 노동의 개념적 정의 및 본질
가짜 노동(Pseudo-work)이란 무엇인가? 저자들은 이를 "자신의 시간을 무의미하고 하등 쓸모없는 일에 낭비하는 것", 혹은 "실제로는 아무런 가치도 창출하지 못하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상태(busy doing nothing)"로 정의한다.1 이는 단순히 일을 게을리하거나 농땡이를 피우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가짜 노동자는 겉보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수많은 문서를 생산하고, 빽빽한 회의 일정을 소화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의 결과물이 조직의 목표 달성이나 사회적 효용과는 무관하다는 점이 핵심이다.
가짜 노동의 핵심 속성은 다음과 같다:
- 비생산성 (Non-productivity): 실질적인 변화나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 자기기만 (Self-deception): 노동자 자신도 이 일이 무의미함을 알고 있지만, 조직 내 생존을 위해 혹은 시스템의 요구에 의해 이를 수행한다.
- 형식주의 (Formalism): 내용보다는 형식을, 결과보다는 절차를 중시한다.
2.2 '진짜 노동'과의 구별: 실재성의 기준
가짜 노동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진짜 노동'이 무엇인지 정의해야 한다. 저자들은 진짜 노동을 "세계와 상호작용하여 변화를 만들어내는 행위"로 규정한다.1 예를 들어, 나무를 베어 의자를 만드는 목수,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의 행위는 대상에 직접적인 변화를 일으키므로 진짜 노동이다. 반면, 의자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진료 행위를 코드로 변환하여 입력하거나, 교육 평가 지표를 관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행위들이 본질적인 노동을 압도하고 주객이 전도될 때, 그것은 가짜 노동이 된다.
2.3 롤랜드 파울세의 '공허한 노동' 유형학
저자들은 스웨덴의 사회학자 롤랜드 파울세(Roland Paulsen)의 '공허한 노동(Empty Labor)' 연구를 인용하여 가짜 노동이 발현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5
| 유형 | 영문 명칭 | 정의 및 특성 | 구체적 사례 및 행동 양식 |
| 1. 빈둥거리기 | Slacking | 업무 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행위. 전통적인 의미의 '농땡이'에 가깝다. | 근무 중 인터넷 쇼핑, SNS 탐색, 동료와의 긴 잡담. |
| 2. 시간 늘리기 | Stretching | 주어진 업무를 완료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여 천천히 수행하는 행위. | 1시간이면 작성할 보고서를 하루 종일 붙들고 있기. 이메일을 천천히 읽고 쓰기. |
| 3. 일 늘리기 | Inflating | 본질적인 업무 외에 불필요한 절차나 형식을 추가하여 업무량을 인위적으로 부풀리는 행위. | 단순한 보고를 위해 화려한 PPT 제작, 불필요한 결재 라인 추가, 수많은 참조인(CC) 포함. |
| 4. 일 꾸며내기 | Inventing | 할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새로운(그러나 무의미한) 업무를 창조하여 바쁜 상태를 유지하는 행위. | 아무도 읽지 않을 연례 보고서 기획, 목적 없는 정기 회의 소집, 보여주기 식 TF팀 구성. |
이 중 '빈둥거리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유형, 특히 **'일 늘리기'**와 **'일 꾸며내기'**가 현대 조직에서 가장 교묘하고 심각하게 나타나는 가짜 노동의 형태이다. 이는 개인의 게으름 탓이 아니라, 조직의 구조적 모순과 관리 시스템의 실패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8
2.4 노동 소외와 현대적 의미
헤겔과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고 자아를 실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가짜 노동은 이러한 노동의 본질적 기능을 파괴한다.1 가짜 노동자는 자신의 행위가 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이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소외(생산수단으로부터의 소외)를 넘어, **'노동의 의미로부터의 소외'**라는 새로운 형태의 실존적 위기를 초래한다. 자신이 만든 보고서가 파쇄기로 직행할 것임을 알면서도 밤새워 작성해야 하는 노동자는 심각한 인지 부조화와 자기 비하에 빠질 수밖에 없다.
3. 현상 분석: 조직 내 가짜 노동의 실태와 사례 연구
《가짜 노동》은 추상적인 이론서가 아니다. 저자들은 수많은 인터뷰와 현장 조사를 통해 실제 조직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짜 노동의 적나라한 실태를 고발한다.
3.1 사례 연구 1: 마케팅 부서의 '보고서 공장' (The Marketing VP)
한 대기업의 마케팅 부서장(VP) 스티브(Steve)의 사례는 '일 꾸며내기'의 전형을 보여준다.7 연초 1월과 2월, 마케팅 부서는 업무 비수기에 접어들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합리적인 조직이라면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거나 단축 근무를 시행해야 했다. 그러나 스티브는 직원들이 한가하게 있는 모습을 상부나 타 부서에 보이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고심 끝에 직원들에게 "시장 트렌드 분석 보고서"와 같은 거창한 프로젝트를 지시했다. 직원들은 이 프로젝트가 실제 마케팅 전략에 반영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지만, 상사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데이터를 수집하고 화려한 그래프를 그렸다. 스티브는 인터뷰에서 "그 보고서들은 아무도 읽지 않을 쓰레기(trash)였지만, 우리 팀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이는 조직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인적 자원과 시간을 고의적으로 낭비한 사례이다.
3.2 사례 연구 2: 변호사 사무실의 '바쁨 연기' (The Lawyer's Office)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한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는 사무실 전체를 지배하는 '연극적 분위기'에 질려 퇴사했다.7 그곳의 변호사들과 직원들은 실제 업무량과 상관없이 항상 뛰어다니거나, 전화를 붙들고 있거나, 서류 뭉치를 들고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는 "모두가 서로에게 자신이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 사람인지를 과시하는 무대 위에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실제 업무는 오전에 다 끝났지만, 정시에 퇴근하는 것은 '헌신 부족'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그는 오후 내내 모니터를 응시하며 문서를 켰다 껐다 하는 '시간 늘리기'와 '빈둥거리기'를 수행하며 퇴근 시간까지 견뎌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피로는 실제 격무보다 더 컸다.
3.3 사례 연구 3: 의료 현장의 행정적 전도 (The Doctor)
가짜 노동은 기업뿐만 아니라 공공 부문, 특히 의료 현장에서도 심각하다.7 한 의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보다 진료 기록을 입력하고, 보험 청구를 위한 코드를 분류하며, 각종 규제 준수(Compliance)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심지어 그는 시스템의 관료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의사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nonsense) 소견서나 참조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시스템은 이러한 문서가 오고 가는 것을 '협진'이나 '절차 준수'로 인식하고 승인을 내리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기 위해 컴퓨터와 싸우고, 가짜 서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내 진짜 일처럼 느껴진다"며 자괴감을 토로했다. 이는 수단(행정)이 목적(의료)을 지배하는 전형적인 가짜 노동의 사례다.
3.4 사례 연구 4: 연례 보고서와 정보의 무덤 (The Annual Report)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인 키어스틴(Kirsten)은 1년 중 무려 4개월을 그룹 경영진을 위한 연례 보고서 작성에 쏟아붓는다.7 그녀는 동료와 함께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문장을 다듬고, 디자인을 입힌다. 그러나 그녀는 "이 보고서는 완성되는 순간 책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경영진은 요약본 몇 페이지만을 볼 뿐이며, 실제 경영 판단은 다른 실시간 데이터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는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반복된다. 이는 조직의 관성이 어떻게 가짜 노동을 영속화하는지를 보여준다.
4. 원인 분석: 우리는 왜 스스로 족쇄를 채웠는가?
저자들은 가짜 노동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강조한다.
4.1 파킨슨의 법칙과 업무의 자기 증식성
1955년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이 주창한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은 "업무는 그것을 완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채울 때까지 팽창한다"는 원리다.11
현대 조직은 하루 8시간, 주 40시간이라는 고정된 노동 시간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업무 처리 속도가 빨라져 4시간 만에 일을 끝낼 수 있게 되었어도, 직원은 남은 4시간을 일찍 퇴근하는 데 쓸 수 없다. 따라서 직원은 남은 4시간을 채우기 위해 업무를 천천히 하거나(시간 늘리기), 불필요한 디테일을 추가하여(일 늘리기) 8시간을 꽉 채운다. 즉, 일이 많아서 늦게까지 있는 것이 아니라,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때까지 일을 늘려서 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4.2 관리주의(Managerialism)의 비대화와 자기 보전
1970년대 이후 경영 효율화를 명목으로 등장한 '신경영 기법'들은 오히려 가짜 노동을 양산했다.5 조직은 효율성을 측정하고 관리하기 위해 중간 관리직(Middle Management)을 대폭 늘렸다. 그러나 1975년의 연구가 지적했듯, 관리직은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생산직을 해고하면서도 자신들의 자리는 보전하거나 오히려 늘리는 경향이 있다.
관리직의 존재 이유는 '관리' 그 자체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관리할 대상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평가 시스템 도입, TF팀 구성, 전략 기획 회의 소집 등은 관리직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대표적인 가짜 노동이다. 실무자들은 이러한 관리직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실제 업무 시간을 뺏기게 된다.
4.3 과잉 교육과 지식 노동자의 딜레마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소위 '상징 분석가(Symbolic Analyst)'들이 대거 노동 시장에 진입했다.1 인류학, 철학, 사회학 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들은 단순한 업무를 수행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업무를 과도하게 지적인 것으로 포장(Over-intellectualizing)하거나, 단순한 문제를 복잡한 프로젝트로 변환시키는 경향이 있다. 저자들 스스로도 과거 컨설턴트로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복잡한 보고서와 워크숍으로 부풀려 비싼 수임료를 받았던 경험을 고백하며, 지식 노동자들이 가짜 노동의 주요 생산자임을 인정한다.7
4.4 '까치발 효과(The Tiptoe Effect)'와 경쟁적 과시
저자들은 경쟁적인 야근 문화를 공연장의 '까치발 효과'에 비유한다.11 맨 앞줄 사람이 더 잘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면(야근을 하면), 뒷사람도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야 한다. 결국 공연장(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까치발을 들고 서 있게 되지만, 누구도 처음보다 더 잘 보지는 못하며 모두가 다리만 아프게 된다.
누군가 늦게까지 남아 일하는 것을 '열정'으로 포장하고 보상하는 순간, 조직 전체는 가짜 노동의 경쟁에 돌입한다. 실제 성과와 무관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충성심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4.5 디지털화의 역설: 기술은 어떻게 일을 늘리는가?
디지털 기술 도입이 항상 효율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10 많은 경우, IT 시스템 도입은 '입력 노동'이라는 새로운 가짜 노동을 창출한다. 과거에는 구두로 보고하거나 수기로 간단히 처리하던 일들이, 이제는 복잡한 ERP 시스템에 접속하여 수십 개의 항목을 입력해야 하는 일로 변했다. 또한, 기술은 언제 어디서나 일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노동과 휴식의 경계를 허물고, 즉각적인 응답을 강요하여 깊이 있는 사고(Deep Work)를 방해한다.
5. 비교 연구: 가짜 노동 vs 불쉿 잡 (Bullshit Jobs)
뇌르마르크와 옌센의 《가짜 노동》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Bullshit Jobs)》과 자주 비교된다. 두 이론 모두 현대 노동의 무의미성을 고발하지만, 그 접근 방식과 초점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4
| 비교 항목 | 뇌르마르크 & 옌센의 '가짜 노동 (Pseudo-work)' |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불쉿 잡 (Bullshit Jobs)' |
| 핵심 대상 | 유의미한 직업 내에 침투한 '무의미한 과업(Task)' | 직업 자체가 사회적으로 무의미하거나 해로운 '직업(Job)' |
| 적용 범위 | 의사, 교사, 간호사 등 필수 직군을 포함한 모든 직장인 | 기업 변호사, PR 컨설턴트, 로비스트, 텔레마케터 등 특정 직군 |
| 발생 원인 | 조직의 비효율, 파킨슨의 법칙, 과잉 관리, 바쁨에 대한 강박 | 금융 자본주의, 봉건적 경영 구조, 정치적 고용 유지 목적 |
| 현상 | 진짜 노동을 방해하는 행정적 잡무, 불필요한 회의, 보고서 | 누군가의 자존감을 위해 존재하는 하인(Flunky), 테이프 붙이는 사람(Duct taper) 등 |
| 해결 방향 | 조직 내부의 업무 방식 혁신, 신뢰 회복, 노동 시간 단축 (Work Hacking) | 기본 소득(UBI), 무의미한 직업군의 철폐, 사회적 가치 재평가 |
차이점 분석:
그레이버는 "PR 컨설턴트나 기업 변호사가 사라져도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직업 자체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한다. 반면, 뇌르마르크와 옌센은 의사나 교사처럼 사회에 필수적인 직업인들조차 가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13 그들은 직업 자체를 없애자는 것이 아니라, 직업의 본질을 훼손하는 '군더더기 업무'를 제거하여 진짜 노동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일반 직장인들에게 더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6. 영향 평가: 가짜 노동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해악
6.1 심리적 비용: 번아웃과 보어아웃
가짜 노동은 개인의 정신 건강에 치명적이다. 과도한 업무량으로 인한 탈진인 **번아웃(Burnout)**뿐만 아니라, 지루함과 무의미함으로 인한 탈진인 **보어아웃(Bore-out)**을 유발한다.1 자신이 하는 일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 상황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 이는 우울증, 무기력감, 그리고 직무에 대한 냉소주의로 이어진다.
6.2 경제적 비용: 혁신의 실종과 자원 낭비
조직 차원에서 가짜 노동은 혁신을 저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직원들이 보고서 작성과 회의에 에너지를 다 소진하면, 정작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창의적인 문제를 해결할 여력(Slack)이 남지 않게 된다.9 또한, 가짜 노동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는 인건비와 시스템 비용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이다. 기업은 가짜 노동을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생산성 향상 기회를 놓치고 있다.
6.3 사회적 신뢰의 붕괴
가짜 노동이 만연한 조직은 근본적으로 '불신'에 기반한다.14 경영진은 직원이 놀지 않을까 의심하여 끊임없이 보고를 요구하고, 직원은 경영진이 자신을 평가 절하할까 두려워 끊임없이 바쁜 척을 한다. 이러한 불신의 악순환은 사회 전체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을 갉아먹는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감시 비용이 증가하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협업이 불가능해진다.
7. 해결 방안: 일 해킹(Work Hacking)과 조직 혁신 전략
저자들은 비판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를 그들은 '일 해킹(Work Hacking)' 혹은 노동의 재설계라고 부른다.9
7.1 개인적 차원의 대응: 용기와 성찰
- 일찍 퇴근할 용기 (The Courage to Leave): 자신의 업무가 끝났다면 눈치 보지 말고 퇴근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휴식을 넘어, 동료들에게 "일찍 가도 괜찮다"는 윤리적 본보기(Role Model)를 보여주는 시민적 불복종 행위다.11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선택처럼, 나의 퇴근은 타인의 퇴근을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 된다.
- 비판적 질문 던지기 (Sapere Aude): 칸트의 '계몽' 표어인 "과감히 알려고 하라"를 실천해야 한다. 상사의 지시에 무조건 순응하기보다 "이 일이 정말 필요한가?", "이 보고서를 누가 읽는가?", "우리가 왜 이 회의를 하는가?"라고 질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11
- 스스로 가짜 노동 중단하기: 자신이 만들고 있는 가짜 노동(불필요한 요청, 과도한 CC 등)을 스스로 인지하고 중단해야 한다.
7.2 조직 및 관리적 차원의 대응: 신뢰와 뺄셈
- 신뢰 기반 경영 (Trust-based Management): 감시와 통제를 위한 보고 절차를 과감히 없애고, 직원을 신뢰해야 한다. 신뢰는 관리 비용을 0으로 만든다. 넷플릭스 등의 기업처럼 휴가 규정이나 비용 결재 규정을 없애는 것이 그 예다.15
- 성과 중심 평가 (Value over Hours):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Presenteeism)이 아니라, 실제 창출한 가치와 결과물로 평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급여를 지급하는 산업 시대의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9
- 뺄셈의 리더십 (Subtraction): 리더의 역할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부하 직원의 업무 몰입을 방해하는 장애물(가짜 노동)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무엇을 더 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그만둘까"를 고민해야 한다.
7.3 제도적 차원의 대응: 시간 단축과 노동의 재정의
- 노동 시간 단축 (Shorter Work Week): 저자들은 파킨슨의 법칙을 역이용할 것을 제안한다. 근무 시간을 줄이면(예: 주 4일제, 하루 6시간 근무), 제한된 시간 안에 핵심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업무 밀도가 높아지고 가짜 노동이 끼어들 틈이 사라진다.11 이는 덴마크와 스웨덴 등의 실험에서 입증된 바 있다.
- 보편적 기본 소득 (Universal Basic Income): 책에서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으나, 생계 유지를 위한 강제 노동에서 벗어나 자발적이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안전망으로서의 가능성을 언급한다.1
8. 한국 사회에의 함의: '빨리빨리'와 '오래오래'의 모순
이 책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시의적절하고 강력하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노동 시간이 긴 나라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노동 생산성은 하위권에 머무르는 '비효율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다.16
8.1 한국형 가짜 노동의 특징
- 상명하복의 위계질서: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부하 직원도 퇴근하지 못하는 문화는 '빈둥거리기'와 '시간 늘리기'형 가짜 노동을 양산한다.
- 보고 문화: 실질적인 업무 내용보다 보고서의 '때깔(형식)'을 중시하고, 대면 보고를 위한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현상은 전형적인 가짜 노동이다.
- 회식과 의전: 업무의 연장으로 간주되는 회식과 과도한 의전 행위 역시 업무 연관성이 낮은 가짜 노동의 일종이다.
8.2 변화를 위한 제언
한국 사회가 가짜 노동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면 성실'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짧고 굵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자신의 삶을 위해 쓰는 것이 진정한 미덕이 되어야 한다. 최근 한국 기업들 사이에서도 주 4일제 실험이나 자율 좌석제, 직급 파괴 등의 시도가 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그러나 제도의 도입보다 중요한 것은 '불신'을 걷어내고 '자율'을 심는 조직 문화의 근본적인 변화다.
9. 결론: 노동의 미래와 인간다운 삶의 회복
《가짜 노동》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가 그토록 바쁘게 보냈던 시간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깨달음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해방감을 준다. 우리가 가짜 노동을 걷어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미 케인스가 예언했던 '주 15시간 노동 사회'를 실현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저자들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인용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계가 발명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총력을 기울여왔다. 어리석었지만 영원히 어리석게 지낼 이유는 없다".11 이제 우리는 기계처럼 일하는 것을 멈추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이고 의미 있는 '진짜 노동'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사랑하고, 놀고, 사유하는 데 써야 한다. 그것이 기술 발전의 진정한 목적이자, 우리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이유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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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eudowork - Gyldendal,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gyldendal.dk/produkter/pseudowork-9788702298802
- Pseudowork - Dennis Nørmark - Apple Books,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books.apple.com/no/book/pseudowork/id1548468897
- Bullshit Jobs - Wikipedia,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en.wikipedia.org/wiki/Bullshit_Jobs
- 가짜 노동 |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 알라딘,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9012769
- [도서정보] 가짜 노동 / 데니스 뇌르마르크, 아네르스 포그 옌센 / 자음과모음 - Daum 카페,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m.cafe.daum.net/dimode100/Hz03/3483?q=%EB%B3%80%ED%95%B4%EA%B0%80%EB%8A%94%20%EC%BD%94%EB%A1%9C%EB%82%98%20%EC%86%8D%EC%9D%98%20%EB%AC%B8%ED%99%94&searchCtx=m7dK8yu74Yx2CltKiWpx3C3hhZbG.O5nJu96zlz-FyQwmfVl5JuvFnSnzaApY7BznrpoEbba29BBb7A5nECginwlsDnR_t4SDvlgrl2.XYrd2Av.7pShMbxieBQ6d.JGupJxqoear9RNrZ6BfcCRbFFErRoLDVgMns8rDGgaKLdh99BDhH.si2tq-lFd__rKJmPHFc5XIY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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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노동 저자 "직장 내 헛일 없애기, 자유로운 의사소통에서 출발" - 한국일보,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70100040004795
- 가짜노동 | 밀리의서재,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millie.co.kr/v3/post/1157489?nav_hidden=y
- "한국사회가 효율적이라고? '시간 주권' 찾아야 가짜노동 사라져" | 한국일보, 1월 12, 2026에 액세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22810040004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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