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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산해경(山海經)

by 변리사 허성원 2025. 12. 29.

산해경(山海經)

_ 동아시아 신화적 사유의 원형과 문화적 변용에 관한 종합 연구

(* 『산해경』은 중국 선진 시기에 형성된 동아시아 최고의 지리서이자 신화집으로, 총 18권에 걸쳐 고대인의 세계관, 무속적 사유, 기이한 동식물과 이국적인 나라들을 방대하게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이한 책으로만 여겨졌으나, 현대에는 동아시아 판타지 콘텐츠(영화, 웹툰, 게임)의 핵심 원천 소스(OSMU)로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고조선 등 동이족 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한국 문화의 원형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오늘날 창작자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하는 상상력의 보고이다.)

1. 서론: 신화와 지리의 경계에 선 텍스트

『산해경(山海經)』은 중국 선진(先秦) 시기에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지리서이자, 방대한 신화적 상상력을 담고 있는 문화적 원천(Archetype)이다. 이 텍스트는 단순한 고대 문헌을 넘어, 고대인들이 세계를 인식했던 인식론적 틀(Episteme)과 그들이 조우했던 자연, 그리고 그 자연 속에 투영한 초자연적 존재들에 대한 기록을 집대성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산해경』은 유교적 합리주의가 지배했던 중국 지성사에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다룬 기서(奇書)로 치부되거나, 정통 지리서의 범주에서 배제되는 등 굴곡진 수용의 역사를 겪었다. 사마천(司馬遷)조차 『사기(史記)』 대완열전에서 "『우본기』와 『산해경』에 있는 괴물들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라고 언급하며 이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바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산해경』은 문학, 역사, 지리, 민속학, 종교학 등 학제간 연구의 필수적인 1차 사료로 재조명받고 있다. 특히 21세기 문화 콘텐츠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이 텍스트는 영화, 게임, 웹툰, 드라마 등 다양한 매체에서 판타지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핵심적인 원천 소스(Source Material)로 활용되고 있다.1 본 연구 보고서는 『산해경』의 서지학적 구조와 성립 배경을 면밀히 분석하고,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세계관과 우주론을 해부한다. 나아가 텍스트에 등장하는 신화적 제재들을 상세히 분류하여 그 상징성을 도출하고, 이것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화권, 특히 현대의 대중문화 콘텐츠에 미친 심층적인 영향을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텍스트의 고고학: 서지 구조와 전승의 역사

2.1. 18권의 체계와 다층적 구성

현존하는 『산해경』은 총 1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크게 『산경(山經)』과 『해경(海經)』이라는 두 가지 거대한 축으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는 단순한 물리적 분할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와 성립 시기의 이질성을 내포하고 있다.3 전한(前漢)의 유흠(劉歆)이 교정하고 정리한 체계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후대에 이르러 청나라의 학자들에 의해 더욱 정밀한 고증이 이루어졌다.

대분류 중분류 권수 상세 분류 주요 내용 및 특징
산경(山經) 오장산경(五藏山經) 5권 남산경, 서산경, 북산경, 동산경, 중산경 비교적 사실적인 지리 정보, 산천의 위치, 광물, 약초, 서식 동물에 대한 실용적 기록이 주를 이룸. 거리와 방위가 구체적으로 명시됨.
해경(海經) 해외경(海外經) 4권 해외남경, 해외서경, 해외북경, 해외동경 중국 본토 바깥의 이국적인 나라와 기이한 종족들에 대한 묘사. 신화적 색채가 짙어짐.
  해내경(海內經) 4권 해내남경, 해내서경, 해내북경, 해내동경 중국 내부 혹은 인접 지역의 지리와 신화적 사건 기술.
  대황경(大荒經) 4권 대황동경, 대황남경, 대황서경, 대황북경 가장 늦게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태양과 달의 운행, 신들의 전쟁 등 우주적 사건을 다룸.
  해내경(보유) 1권 해내경 독자적인 1권으로 제왕의 계보 등이 포함됨. 후대에 편입된 것으로 간주됨.

『산경』은 총 5권으로, 구체적인 방위와 거리(예: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를 명시하고 있어 고대 지리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5 반면 『해경』은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공간이 혼재된 신화적 공간을 다루며 기이한 인간 종족(The Strange)과 신들의 계보를 다루는 데 치중한다.6 학계에서는 『대황경』 이하의 내용이 『산경』이나 『해내외경』보다 후대에, 어쩌면 전국시대 이후 초나라 지방의 무속 신앙과 결합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4

2.2. 저자 논쟁과 판본의 진화

『산해경』의 저자 문제는 수천 년간 지속된 미스터리이자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전통적인 관점, 특히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때까지의 학자들은 이 책이 하(夏)나라의 우(禹) 임금과 그의 신하 백익(伯益)이 치수(治水) 사업을 하며 국토를 돌아보고 기록한 것이라고 믿었다.4 우 임금이 9개의 솥(九鼎)을 주조할 때 온갖 사물의 형상을 새겨 백성들이 산천에 들어갔을 때 도깨비나 괴물을 만나도 해를 입지 않게 했다는 전설은 『산해경』의 성립 목적과 밀접하게 닿아 있다. 명나라의 양신(楊愼)은 그의 저서 『산해경후서』에서 우 임금이 그 나라의 기이한 산과 동식물의 형상을 그린 『산해도(山海圖)』가 먼저 있었고, 그 그림을 글로 풀어낸 것이 바로 『산해경』이라는 도설(圖說) 기원론을 제기했다.7

그러나 현대의 문헌학적 연구는 『산해경』이 단일 저자에 의해 특정 시기에 쓰인 책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오장산경』은 전국시대 중기나 후기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나, 『해경』의 일부 내용은 그보다 늦은 시기, 심지어 한나라 초기에까지 걸쳐 무당(Shaman)이나 방사(方士) 계급에 의해 지속적으로 가필되고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

2.2.1. 주요 판본과 주석의 역사

『산해경』은 텍스트의 난해함으로 인해 역대로 수많은 학자의 주석을 필요로 했다.

  • 곽박(郭璞)의 주석: 동진(東晉) 시대의 곽박은 『산해경』 연구의 중시조로 평가받는다. 그는 난해한 원문에 상세한 주석(산해경주)을 달아 텍스트의 생명을 연장시켰으며, 『산해경도찬』을 통해 그림에 대한 찬양시를 남겼다. 곽박은 서문에서 "세상 사람들이 산해경을 기이하고 허황된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그들이 아는 세계가 좁기 때문"이라며 텍스트의 사실성을 옹호했다.5
  • 양신(楊愼)의 보주본: 명나라의 양신은 『산해경보주』를 간행하였는데, 이는 18권 3책의 선장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은 반곽이 세로 25.3cm, 가로 17cm이며, 반 페이지에 12행, 행마다 24글자로 구성된 정교한 목판본이다.7 양신은 후대 학자들이 『산해경』의 지리적 비정이 실제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위서(僞書) 취급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의 근본을 일깨우기 위해 주석 작업을 수행했다.
  • 황비열과 학의행: 청나라 때에 이르러 황비열은 『산해경교감기』를 저술하여 기존 판본들을 교차 검증하였고, 학의행은 『산해경전소』를 통해 고증학적 연구의 정점을 찍었다.3

2.3. 무속적 기원설: 무당들의 핸드북

정재서 교수를 비롯한 현대 신화학자들은 『산해경』이 고대 무당(Shaman)들의 실용적인 '핸드북'이었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제기한다.8 이 책의 서술 방식은 매우 기능주의적이다. "어느 산에 가면 어떤 괴물이 있고, 그 괴물을 먹으면 어떤 병이 낫고, 어떤 나무를 차고 다니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식의 기술은 여행자가 낯선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지침이자, 재앙을 물리치고(벽사), 복을 구하는(구복) 주술적 매뉴얼의 성격을 띤다.

  • 제사 매뉴얼: 산마다 모시는 산신(山神)의 형상(몸은 용이고 머리는 새 등)과 그들에게 바쳐야 할 제물(쌀, 짐승, 옥 등), 제사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8
  • 약초와 주술: 닥나무와 비슷하나 가지가 검은 '미곡(迷谷)'을 차고 다니면 길을 잃지 않으며, '축여(祝餘)'라는 풀을 먹으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식의 기록은 고대 채집 사회나 유랑 무당 집단의 경험적 지식이 축적된 결과로 보인다.9

3. 산해경의 우주론과 세계관

3.1. 중심과 주변의 동심원적 구조

『산해경』의 세계는 중앙의 문명 세계에서 멀어질수록 기이함(Strangeness)의 농도가 짙어지는 동심원적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엄격히 구분하는 유교적 화이관(華夷觀)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산해경』은 주변부의 존재들을 도덕적으로 타락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묘사하기보다는,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생태적 사실(Fact)로 담담하게 기술한다.6 예를 들어, 저인국(인어의 나라)이나 관흉국(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의 나라)은 괴물의 땅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를 가진 이국적인 국가로 그려진다. 이는 『산해경』이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확립되기 이전, 다양한 종족과 문화가 공존하던 원시적 사유가 지배하던 시기의 산물임을 반증한다.

3.2. 혼종성(Hybridity)과 변형(Metamorphosis)의 미학

『산해경』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존재는 인간과 동물, 혹은 동물과 동물이 결합된 하이브리드(Hybrid)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혼종성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괴물'로 분류되지만, 고대적 사유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 혹은 신적인 권능을 가진 상태를 의미했다.6

  • 인면수신(人面獸身):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몸을 한 존재들이 다수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인면조(人面鳥), 강량, 그리고 동해의 신인 우호(禺號)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의 지성과 짐승의 힘이 결합된 초월적 능력을 상징한다.
  • 신체적 결핍과 과잉: 팔다리가 하나뿐이거나(기), 눈이 하나뿐인 존재(일목국), 혹은 머리가 아홉 개인 존재(구미호, 장우) 등은 신체적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특히 서구 신화가 반인반수(예: 켄타우로스)를 야만적 본능의 상징으로 그리는 반면, 『산해경』에서 인류의 시조인 복희와 여와가 뱀의 몸을 하고 있다는 점은 이러한 혼종성이 신성(Divinity)의 표지였음을 시사한다.6

3.3. 생태적 상상력과 기능주의

『산해경』의 서술은 현대의 생물학 도감이나 약학 사전과 유사한 형식을 띤다. 각 항목은 [이름 - 서식지 - 생김새 - 소리 - 습성 - 효능/징조]의 순서로 정형화되어 있다.5

  • 징조(Omen)로서의 동물: 특정 동물의 출현은 길흉을 예고한다. 예를 들어, '비(朱厭)'라는 짐승이 나타나면 천하에 큰 전쟁이 일어나고, '추오(騶吾)'가 나타나면 어진 정치가 펼쳐진다는 식이다.5
  • 실용적 효능: "이것을 먹으면 옴이 낫는다", "이것을 차면 악몽을 꾸지 않는다" 등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이 자연물을 약용 자원으로 깊이 탐구했음을 보여준다.

4. 주요 신화적 제재와 캐릭터 분석: 상상의 분류학

『산해경』은 수많은 신과 요괴, 이국적인 민족들의 전시장이다. 이 중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지속적으로 변주되고 소비되는 주요 캐릭터들을 심층 분석한다.

4.1. 창조와 전쟁의 신들

  • 여와(女媧)의 이중성: 여와는 일반적으로 인류를 흙으로 빚어 만든 창조신이자 문명을 전파한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산해경』의 다른 기록(『북산경』 등)에서는 염제(炎帝)의 딸로 등장하여 동해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죽은 뒤 '정위(精衛)'라는 새가 되어 바다를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는 비극적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6 이는 여와가 단일한 신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여러 층위의 전승이 중첩된 복합적인 신격임을 보여준다.
  •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탁록 대전: 『산해경』은 고대 중국 신화의 최대 사건인 황제와 치우의 전쟁을 다루는 핵심 텍스트다. 황제는 중앙의 지배자로, 치우는 그에 대항하는 불굴의 전사로 묘사된다. 치우는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동두철액 銅頭鐵額)를 가진 대장장이의 신이자 전쟁의 신으로, 풍백(비바람의 신)과 우사를 부려 황제의 응룡(용)과 맞서 싸운다.6 황제는 가뭄의 신인 '발'을 불러 응룡의 비를 멈추게 하고 치우를 제압한다. 이 전쟁은 훗날 중화족(화하족)과 동이족 간의 패권 다툼을 신화적으로 변용한 것으로 역사학계에서는 해석한다. 한국의 '붉은 악마' 응원단이 치우천왕을 마스코트로 삼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닿아 있다.

4.2.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 비익조(比翼鳥)와 연리지(連理枝)

『산해경』 「해외남경」에 등장하는 비익조는 신화적 괴물이 문학적 메타포로 가장 성공적으로 진화한 사례다.

  • 원전의 묘사: "비익조가 그 동쪽에 있는데 그 새는 몸빛이 푸르고 붉으며 두 마리 새가 날개를 나란히 하고 있다.".13 이 새는 눈도 하나요, 날개도 하나뿐이어서 암수 한 쌍이 합쳐야만 날 수 있다. 초기에는 홍수나 가뭄을 예고하는 징조로 해석되기도 했으나, 점차 상호의존적인 관계의 상징으로 변화했다.
  • 문화적 변용: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 사랑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에서 비익조를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승화시켰다.14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천지는 영원해도 다하는 때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한은 이어져서 끊어질 수 없으리라)
    이후 비익조와 연리지는 '비익연리'라는 사자성어로 굳어지며 부부의 금슬이나 남녀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산해경』의 기괴한(Grotesque) 이미지가 인간의 보편적 감정(Pathos)을 담는 그릇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4.3. 환상종(Phantasmal Species)의 생태학

  • 구미호(九尾狐): 청구국(靑丘國)에 사는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초기 『산해경』 텍스트에서는 "그 소리가 어린아이와 같고 사람을 잡아먹는다. 이것을 먹으면 요사스러운 기운에 빠지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5 즉, 초기에는 사람을 홀리는 요물이 아니라, 태평성대에 나타나는 상서로운 짐승 혹은 약용 가치가 있는 맹수로 인식되었다.6 후대로 갈수록 달기(妲己) 전설 등과 결합하며 요염하고 위험한 여성(Femme Fatale)의 이미지로 변질되었다.
  • 추오(騶吾): 『산해경』 「해내북경」에 등장하는 신수로, 호랑이와 비슷하지만 꼬리가 몸보다 길고, 살아있는 짐승을 먹지 않는 인자한 짐승(仁獸)이다. 천 리를 단번에 갈 수 있다고 한다.5 현대 웹툰 <호랑이형님>에서는 맹수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원전에서는 덕(德)을 갖춘 영수다.
  • 기린(麒麟)과 봉황(鳳凰): 성군이 다스릴 때만 나타나는 대표적인 길조(吉鳥)와 길수(吉獸). 봉황은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를 갖추고 오색의 깃털을 가졌으며, 인의예지신의 덕목을 상징한다.10

4.4. 이형(異形)의 국가들: 타자성의 기록

  • 저인국(氐人國)과 교인: 인어들의 나라. 서구의 인어와 달리 남녀 구분이 뚜렷하지 않거나 차별이 없으며, 베를 짜고 눈물을 흘려 진주를 만드는 생산적인 존재로 묘사된다.6 "교인은 물에서 나와 인가에 머물면서 여러 날 동안 비단을 판다"는 기록은 이들이 인간과 교역이 가능한 지적 생명체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 관흉국(貫匈國)과 삼묘국: 가슴에 구멍이 뚫려 막대기로 꿰어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사는 관흉국, 사람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삼묘국 등은 고대인들이 타자(Otherness)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상상력이 개입된 결과물이다.8

5. 산해경과 한국(동이) 문화의 상관성

『산해경』은 중국의 고전이지만, 한국 고대 문화, 특히 동이(東夷)계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 학계의 일부 시각과 달리, 한국 학계(예: 정재서 교수)는 『산해경』을 "동아시아 상상력의 원천"이자 "잃어버린 한국 신화의 파편을 간직한 텍스트"로 평가한다.1

5.1. 지리적 비정과 '조선'의 등장

『산해경』 「해내북경」에는 '조선(朝鮮)'이라는 국명이 직접 등장한다.

"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나라에 속한다." 5

이 밖에도 숙신, 부여와 관련된 지명이나 부족명도 산재해 있다. 이는 『산해경』의 성립 과정에 고조선을 비롯한 동이계 종족들의 지리적 지식과 전승이 깊이 개입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이 텍스트는 황하 문명 중심의 기록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문화적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보아야 한다.6

5.2. 신화적 모티프의 공유: 조류 숭배와 태양 신화

동이족의 대표적인 문화적 표지(Marker)는 '새 토템(Bird Totem)'이다. 『산해경』에는 우민국(깃털 달린 사람), 인면조, 삼족오(태양 속에 사는 까마귀) 등 새와 관련된 신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한다.6

  • 고구려 고분 벽화와의 일치: 평남 강서군 덕흥리 고분, 무용총, 오회분 등의 고구려 벽화에는 『산해경』에 묘사된 존재들이 대거 등장한다. 인면조, 길광(수레의 신), 농업의 신 염제, 대장장이 신 치우, 바람의 신 풍백 등의 형상이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6 이는 고구려인들이 『산해경』의 세계관을 공유했거나, 혹은 『산해경』의 기록 자체가 동이계 신화에서 유래했음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고구려 벽화 속의 인면조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신성한 존재로, 『산해경』 속 '우민국'이나 '인면조' 기록과 도상학적으로 일치한다.

5.3. 치우(蚩尤) 숭배의 재발견

중국 신화에서 치우는 황제에게 패배한 반역자이자 흉신으로 묘사되지만, 한국의 민속 신앙과 현대 문화에서는 강력한 수호신이자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는다. 『산해경』에 묘사된 치우의 강력한 무력과 금속을 다루는 능력은 고대 한국의 청동기/철기 문명과 연결된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악마'의 상징이 된 치우천왕의 이미지는 『산해경』의 묘사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단절되었던 신화적 기억이 현대에 복원된 대표적인 사례다.6

6. 현대 문화 콘텐츠(OSMU)에서의 재해석과 활용

20세기 중반까지 『산해경』은 황당무계한 미신으로 치부되기도 했으나, 21세기 판타지 장르의 부상과 함께 가장 핫한 IP(지식재산권)의 원천으로 부상했다. 현대의 창작자들은 『산해경』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현대적 서사 구조 속에 재조립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8

6.1. 문학: 보르헤스에서 K-판타지 소설까지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는 『산해경』의 분류학적 상상력에 큰 빚을 지고 있다.8 한국 문학에서는 정세랑 작가의 소설이자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된 **『보건교사 안은영』**이 주목할 만하다.

  • 젤리(Jelly)의 정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젤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욕망의 찌꺼기나 영적인 존재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산해경』이 자연 속의 정령이나 요괴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포착하려 했던 시도와 맞닿아 있다.19 안은영이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칼로 젤리를 퇴치하는 모습은 고대 샤먼(무당)의 의식을 현대적, 키치(Kitsch)적으로 변용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안은영은 "아, 18"이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운명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사람들을 지키는 무녀의 역할을 수행한다.21

6.2. 영상 매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한국 드라마

  •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마블 스튜디오는 동양 판타지를 구현하기 위해 『산해경』을 적극 차용했다. 영화 속 신비의 마을 '탈로'에는 구미호, 기린, 혼돈(제강), 용, 사자(해태와 유사) 등이 뛰어노는데, 이들의 디자인과 생태는 『산해경』의 묘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6 특히 날개 달린 돼지처럼 생겼으나 얼굴이 없는 귀여운 생물 '모리스'는 『산해경』의 '제강(帝江)'을 모델로 했다. 제강은 눈, 코, 입, 귀가 없고 날개가 넷, 다리가 여섯인 혼돈의 신이다. 영화는 이를 주인공의 조력자로 재해석하여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했다.
  • 드라마 <구미호뎐>: 한국의 토종 요괴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이 드라마는 『산해경』과 한국 구비문학 속의 존재들을 대거 등장시켰다.23
  • 세계관의 현대화: 삼도천의 문지기인 탈의파와 현의옹을 '내세 출입국관리사무소'의 공무원으로 설정하여, 고전적인 저승관을 관료제적 시스템으로 치환했다.
  • 요괴 도감: 주인공 이연(구미호) 외에도 이무기, 어둑시니, 불가사리, 여우누이, 우렁각시(복혜자) 등이 등장한다. 드라마는 요괴들을 단순한 악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을 가진 존재 혹은 인간 사회에 섞여 사는 이웃으로 그려낸다. 예를 들어, 우렁각시는 한식당 사장으로 정보상의 역할을 하며, 구미호의 충신인 구신주는 수의사로 살아간다. 이는 『산해경』이 이족(異族)을 바라보던 가치 중립적 시선과 일맥상통하며, 요괴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묻는 서사 전략이다.25

6.3. 웹툰과 게임: 크리처(Creature)의 보고

네이버 웹툰 **<호랑이 형님>**은 한국형 판타지 웹툰의 정점을 보여준다. 작가는 산군(호랑이)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추오, 무커, 짐조, 산신, 비위 등 다양한 신수들을 등장시킨다.16 작가는 『산해경』의 묘사를 기반으로 하되, 액션 판타지 장르에 맞게 각색하여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했다. 예를 들어, 『산해경』의 '추오'가 인자한 짐승인 것과 달리 웹툰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는 원전의 창조적 파괴와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7. 결론: 21세기 신화학의 르네상스와 산해경

『산해경』은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서(奇書), 지리서, 소설의 소재집 등으로 불리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이 텍스트의 진정한 가치는 과거의 사실을 기록했다는 역사적 측면보다, 인류가 세계와 타자를 인식하는 초기 단계의 **'야생적 사고(The Savage Mind)'**를 날것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데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듯, 신화적 사고는 과학적 사고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논리적 체계이다.

현대 사회에서 『산해경』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학과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거세된 '신비(Mystery)'와 '경이(Wonder)'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독창적인 아카이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서구적 인간중심주의의 표상이라면, 『산해경』은 인간과 자연, 문명과 야만이 위계 없이 뒤섞인 포스트 휴먼(Post-Human)적 상상력의 원형을 제공한다.

한국인에게 『산해경』은 단순한 중국 고전이 아니다. 그것은 고조선과 고구려를 잇는 잃어버린 고대사의 퍼즐 조각이자, 우리 문화의 심층 무의식을 구성하는 뿌리다. 비익조와 연리지의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구미호의 변신, 그리고 현대의 웹툰과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산해경』의 유전자는 끊임없이 자가복제하고 변이하며 살아 숨 쉬고 있다. 앞으로도 『산해경』은 학술적 연구의 대상을 넘어, 무한한 스토리텔링의 광맥으로서 동아시아 문화 콘텐츠의 미래를 이끌어갈 것이다.

Works cited

  1. 산해경과 한국 문화 | ICAS, accessed December 29, 2025, https://icas.asia/ko/ibp2021/sanhaegyeonggwa-hangug-mun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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