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연합국의 선물이라고?
(**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상황에서 독립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크게는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외부적으로는 연합군의 승리와 일본의 패망이고, 내부적으로는 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과 투쟁이다. 한 마디로 외적 기회와 내적 노력이 줄탁동시의 상호 작용하여 독립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 중 어느 하나가 없었어도 독립이 가능했을까? 일본의 패망은 곧 우리의 독립이었을까? 일본이 패망하지 않고 식민 상태가 더 지속되었을 때 우리의 독립에 대한 의지와 노력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독립을 하게 되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 글을 가져왔다.)
<박찬승 님의 글>
8월 15일 독립기념관 관장의 기념사가 논란이 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비판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맞는 말"이라는 반응도 있다. 논란의 초점이 된 것은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광복'은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라 한 대목이다. 자신의 이야기인지, 다른 이의 이야기인지 조금 애매하게 썼는데, 이어서 함석헌 선생도 이런 입장에서 "해방은 하늘이 준 떡"이라 했다고 하여,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민족들은 과연 2차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으로부터 선물로서 독립을 얻을 수 있었을까.
영국은 인도에 대해 종전 후에도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고 버티다가 인도인들의 강력한 독립운동에 부딪혀 결국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을 인정하였다. 프랑스는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포한 베트남 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결국 프랑스와 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들어갔고,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남북 베트남의 분단 독립을 인정하고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필리핀은 1898년 스페인 대신 들어온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필리핀인들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미국은 1934년에 10년 뒤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결국 종전 후 미-필 협상과정을 거쳐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은 독립하였다. 네덜란드는 종전 후 인도네시아 다시 네덜란드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고, 여기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1949년까지 4년의 전쟁을 거친 뒤 유엔이 중재에 나서 결국 인도네시아는 1949년 12월 독립하게 된다.
반면 일본에 1879년 병합된 류큐는 오키나와현이 되었는데, 독립운동이 거의 없어 2차대전 후에는 미국이 군사기지로 사용하다가 1972년 일본에 돌려주었다. 독립운동을 제대로 하지 않은 류큐는 독립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지만 그것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그 과정이란 바로 신탁통치였다. 미국은 30-4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3년 뒤 남북에 분단정부가 들어선다. 연합국은 한국에 온전한 형태의 독립을 선물로 가져다 준 적이 없다. 그나마 분단정부라도 건진 것은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서 전개된 광복운동 덕분이었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안다면, 한국을 비롯한 구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이 연합국 승리의 선물로 주어졌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구 식민지의 독립 혹은 광복은 오랜 세월에 걸친 피압박 민족의 독립투쟁, 광복운동이 그 결정적인 원동력이요, 계기였다는 것이 역사적 팩트다. 연합국의 선물론 내지 시혜론은 사실과도 맞지 않는 것이며, 자기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스스로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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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님의 글>
독립은 하늘이 준 떡?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구한말 구국운동부터 일제강점기 수십년간의 투쟁이 없었다면 왜 연합국이 #카이로회담 을 통해 #한반도의독립 을 보장했고 그것이 #얄타회담 과 #포츠담회담 에서 반복 확인되었을까요?
사료발굴까지 이루어진 상식적인 이야기를 잊지않았으면 합니다. 1940년대 #충칭임시정부 는 #김구 주석, #조소앙 외무상 등을 중심으로 #장제스 총통을 강력히 설득하여 한반도의 즉각 독립을 요청하였고 그것이 카이로회담 때 실현됩니다. 처칠의 반대와 루스벨트의 조건부 수용을 통해 "적당한 시기에 독립"으로 명문화되었고요. 이를 통해 2차세계대전 이후 독립을 조약으로 보장받은 유일한 곳이 우리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성취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떡일까요 아니면 35년을 치열하게 싸워온 노력의 결과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외교적 성취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1932년 #이봉창 과 #윤봉길 의거의 성공. 1919년 #31운동 과 #임시정부 의 수립. 그리고 1909년 #안중근 의거와 이에 앞선 #헤이그특사활동 그리고 그 밖에 무수한 항일투쟁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서, 외국인들 사이에서 우리가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적입니다.
그리고 강하게 묻겠습니다. 도대체 순수한 자력으로 독립을 이룬 식민지가 있기나 할까요? 그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이라도 한 발상일까요? 그리고 순수한 자력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순수한 타력이었을까요? 도대체 그러한 역사발전이 어디에 있을까요?
베트남의 독립은 힘을 잃은 프랑스와 냉전의 승리를 추구하려는 미국의 방해와 동남아 공산화를 꿈꾼 소련, 중국의 지원이라는 복잡한 길항 관계 속에서 얻어진 성취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외부적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결국 베트남의 역사는 호치민과 베트남 국민들이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이 당연한 역사의 보편법칙을 무시하는 황당한 발상이 사라졌음 합니다.
충분히 숙의하고 새로운 역사인식을 갖고자 열린 자세를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의 민족적, 국가적 자존을 가능케 해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대한민국은 마땅히 지켜야할 예의라는 것,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광복절을 광복절답게, 위대함을 위대하게 지키는 오늘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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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님의 글>
‘광복은 연합군이 준 선물’이라는 독립기념관장의 무식한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대한민국의 현행 헌법은 노태우와 전두환이 준 ‘선물’이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식민지 체제가 해체된 것은, 제국주의자들이 순간적으로 대오각성한 때문이 아니라 전 세계의 식민지 피압박 민족들이 끊임없이 독립운동과 해방투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진전시키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든 것은, 언제나 ‘불의를 타파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의미를 축소, 왜곡하는 자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이 ‘불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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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님의 글> 2021년
이십년쯤 전에 서양사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교수님께서 일제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가운데 3.1운동 이외에 들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3.1운동 이후에는 일제 통치에 대부분 다 복종하고 살았던 것이 아니냐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은 그 이후에 오히려 더 활발한 독립운동, 항일운동을 펼쳤고, 아마도 전 세계 식민지 민족 가운데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고 답했다. "그럼 그 말에는 증거가 있느냐" 해서, "매년 평균 1천 명 이상이 체포되고 감옥에 가는 사람이 수백 명씩 되었다"고 답했다.
정말 그럴까. 정말 그렇다. 요즘은 통계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으니, 통계를 통해서 한 번 살펴보자. 당시 경찰당국의 통계와 <조선총독부통계연보>의 경찰 부분과 감옥 부분 통계를 보면, 그 숫자가 대체로 나와 있다. 경찰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1919년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검거된 이가 2만7천 명 정도이고, 검사에 송치된 이가 1만 9천명, 그리고 재판에서 형을 언도받은 이가 약 3천2백 명, 그밖에 태형이 수천 명이 되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주로 '보안법'을 적용했고, 이후의 독립운동에는 주로 3.1운동 발발 직후에 만든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령'(제령 7호)을 적용했다. 1921년 워싱턴 회의에 즈음하여 만세를 부르거나 다른 독립운동으로 체포된 이들은 약 6천5백 명이었고, '정치범죄처벌령'으로 실형을 언도받은 이는 약 1500명이었다.
1925년에는 일본 정부가 사회주의 운동을 단속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공포했는데, 이는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이후에는 이와 관련하여 체포되고 형을 언도받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예를 들어 1930년에는 보안법 위반자 107명,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자 46명, 치안유지법 위반자 256명이 실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갔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거하여 대체로 통계를 내보면, 1921년부터 1938년 사이에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이는 3298명,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으로 체포된 이는 10,528명,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 이는 17,561명이었다. 이를 합하면 31,387명이 된다. 1년에 평균 1740여 명이 체포된 셈이다. 엄청난 숫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실형을 언도받은 이는 보안법 위반자가 488명, 정치범죄처벌령 위반자가 2071명,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3544명이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자가 가장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38년까지 독립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이들은 모두 약 6100명 정도가 된다. 1년에 평균 338명이 감옥에 간 셈이다.
위의 6100여명과 3.1운동기의 수형자 약 3200명과 합하면 약 9300명이 된다. 이는 집행유예나 태형을 받은 이를 제외한 숫자이다. 이들까지 다 합하면 1만 수천 명이 될 것이다.
실형이나 집행유예를 언도받지 않은 이들 가운데에도 감옥에 미결수로 1년 이상 갇혀 있는 이들도 많았다. 구속기간에 사실상 제한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무작정 가두어 놓고 괴롭히는 경우도 많았고, 거짓이라도 뭔가 말할 때까지 고문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1년이 지난 뒤에 기소유예나 면소로 풀려난 경우도 있었지만, 옥고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이도 많았다. 따라서 체포된 이들의 숫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1921년부터 1938년까지 체포된 이는 3만1천여 명이었다. 여기에 3.1운동기에 체포된 2만7천여 명을 합하면 5만8천여 명이 된다. 거의 6만 명 정도가 되는 셈이다. 참고로 현재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은 이는 1만6천여 명이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결론을 지어보자. 위에서 제시한 숫자들은 3.1운동 이후에도 국내에서도 수많은 항일독립운동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체포된 이들, 감옥에 간 이들은 수만 명에 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국인들은 이와 같이 끈질기게 그리고 가열차게 독립을 위해 싸웠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결코 대충 산 게 아니다. 그리고 일제에 모두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산 것도 아니다. 타협하고 협력하면서 살았던 이들은 오히려 소수였다. 다수의 민중들은 저항은 하지 못했지만, 나서서 협력하지도 않았다. 또 생각이 있는 지식인들은 은거하며 살았다. 타협하고 협력하며 살았던 이들의 후손이 "그때는 다 그랬다"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이들을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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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_ 250909
8.15 해방이 독립운동 결과라고 생떼를 쓰는 사람들
*다시 고쳐 쓰느라 좀 긴 글이 되고 말았다. 재미있는 대목도 많으니 일독을 권한다.
-김형식 독립기념관장 내몰기 위한 민주당의 억지 투쟁
-일부 의원과 시민단체 연합, 출근 저지 투쟁 등 20여일
-독립투쟁론 내세우며 연합국 해방 역사적 사실 거부
-역사를 사실 아닌 희망회로 돌려 구축하려는 광기
-연합국 해방의 큰 선물, 이제 한국인이 갚을 때다
해방은 자력투쟁의 결과라는 망상은 박근혜 때 시작되었다
오늘 김형식 독립기념관장의 기자회견은 일단의 시위자들에 의해 엉망이 됐다.
김형식이 기자회견을 가진 것은 “우리나라 광복은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이라는 종전의 발언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하는 기회를 갖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기자회견은 광복회 회원과 관련 시민단체에 속한 2,30명이 기자회견장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김형식은 사퇴하라고 외치는 실력행사 때문에 엉망이 됐다는 것이다. 이들은 “광복은 독립투쟁의 결과로 쟁취한 것이라는 소위 공식 입장을 요구하고 있고 이에 동의하지 않는 독립기념관장은 필요 없다, 그러니 사퇴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광복이 자력 투쟁의 결과로 쟁취한 것이라는 주장은 최근 들어 이런 주장 자체를 기정 사실화하려는 일단의 인물들에 의해 강요되는 것으로 이는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집단의 행동을 통해 특정한 오류의 역사 인식을 사실로 만들려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역사왜곡이요 일종의 역사 창작 내지 역사 날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거듭 생각해도 해방의 그날이 우리의 자체적인 독립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투쟁적 사건들이 이를 스스로 증거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런 근거의 제시도 없이 해방은 자력투쟁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아적 세계관일뿐더러 태평양에서 일본과 싸우며 피흘린 수십만 연합국 병사들의 노고를 무화하는 것이며, 연합국들이 굳이 노예 상태인 조선의 독립시키기로 결정한 카이로에서의 국제적 결론을 부인하는 매우 무례한 주장이다.
우리가 오늘날 독립투쟁에 대해 기억하고 강조하려는 것은 다시는 식민지된 처지로 전락하지 말기를 각오하는 것이며, 20년대 혹은 3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적지 않은 국민들이 나름 치열한 개인적 결단을 통해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려왔음을 기리자는 것이지 그런 독립의 의지들이 곧바로 45년8월의 광복을 쟁취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르다.
정당들이 역사를 놓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역사적 사실이 강자의 해석으로 전락한다면 역사는 한낱 소설로 격하될 뿐이다.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지만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역사학조차 "주장하기 나름"이라는 악성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길을 잃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전체주의자들은 종종 역사를 무기로 삼는다. 그들은 '대화'이기 때문에 과거를 고쳐 오늘의 투쟁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유혹을 종종 받게된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45년8월15일에 이른 해방의 과정이다. "해방은 연합국이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는 독립기념관장의 주장에 대해 민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은 "사퇴하라"며 반발하고 있다. 아니 이 엄연한 이야기에 무슨 토를 달며 시비를 건다는 말인가.
1. 문제의 발단은 87헌법이다.
일단의 임정주의자들이 헌법 개정 과정의 핵심 통로에 접근해 헌법 전문에 '상해임정 법통'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데 성공한다. 이 자들은 일본에 유학가 학도병이 되자, 탈영이라는 방법으로 해방 후 정국에서 명성을 날린 사람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탈영을 설명하기에 앞서 왜 일본의 학도병으로, 간부후보로 지원해 갔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2. 해방은 투쟁을 거쳐 자력 쟁취했다는 주장의 진실 여부
이 주장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8,15기념사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상해 임정의 역할을 지지하거나 독립운동을 자찬하면서 내부의 요인만을 말했을 뿐 세계전쟁이나 일본의 패전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3.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해방은 우리가 (일제와) 싸워서 쟁취한 것"이라고 (아마도 2016년 연설에서부터) 명백하게 언급하고 말았다. 오류의 출발이었다. 박의 오류는 문재인 정권이나 이재명 정권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4. "우리가 싸워서 독립을 쟁취했다"는 주장은 검증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된다. 식민지 조선은 미국의 '작은 소년(리틀 보이)'과 '뚱뚱이(팻맨) 두방에 일본이 두 손을 들면서 아무도 모르게, 마치 도둑처럼(이는 함석헌 선생의 표현이다) 급속하게 주어졌다.
5. 이승만 같은 이들은 일본의 패망을 사전에 예측하였으나 대부분 국내에 머물던 인사들의 역사적 시선은 철저하게 국내적이어서 일본의 제국주의 패망과정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함석헌 같은 분들조차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는 성경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6. 투쟁하여 쟁취한 일은 아무도 모를 수가 없다. 투쟁 지도부가 팡파르를 울리면서 역전의 용사들을 앞세워 개선해야 마땅하다. 꼭 무력투쟁이 아니어도 투쟁이라고 주장하려면 무언가의 구심점 혹은 정치적 실체가 있어야 한다. 만일 민족개량 운동 혹은 계몽운동을 독립투쟁에 포함시킨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력의 해방 쟁취론은 설 자리가 없다.
7.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김구조차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고 말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앉아서 해방을 맞게 되었다“는 김구의 이 유명한 자탄은 무엇을 증언하는가. 자력 해방론을 주장하려면 이 질문부터 답해야 한다. 김형식 관장은 어제 바로 이 김구의 비탄을 언급하면서 소위 독립쟁취론을 반박했다.
8. 해방 직후 남한은 미 군정으로, 북한도 소련군의 지도하에 장악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북이 모두 아무런 정치, 군사적 구심의 준비도 없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쟁취한 나라를 다시 외국 군대의 점령과 통제에 맡긴다는 우스운 말을 지금 민주당과 자력 투쟁론자들은 하자는 것인가.
9.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한(일본인의 평화적인 철수를 위한) 유사경찰 조직의 준비를 요청할 정도였다. 스스로 쟁취한 투쟁의 결과가 여운형에게 상당한 자금과 권력을 쥐어주면서 일본인 퇴로와 거주의 안전을 부탁하는 지경이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상해 임정은 어떤 조직적 군사 역량도 없었기 때문에 식민 당국에는 아예 접촉의 대상도 아니었다.
10. 상해임정은 처음부터 대표성도 없었고 분열과 사실상의 와해, 지도부 부패, 무분별하게 테러리즘에 경도된 노선 등이 문제로 지적되어 정치적 자격과 지위를 전혀 갖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조직의 이름 아닌 개별 자격의 자유 귀국만 가능했던 것이다.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부풀려진 억지 논리다. 상해임정이 해방의 그날까지 간판을 유지하면서 광복군이라는 이름이나마 지켜낸 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고 높이 기릴 일이다. 그러나 상해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라고 말하는 것은 종이 위의 정부를 현실의 정부라고 주장하는 언어적 착각이다.
11.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의회에서 ”임시정부“라고 언급한 것은 한성 정부였다. 상해임정을 정부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난립한 저간의 사정을 감안 하더라도 종이 위에 그린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12. 일본조차 불시에 맞은 항복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조선 거주 일본인 사회는 적지 않은 혼란이 발생했고 뒤늦게 지역마다 일본인 자치회(世話會라고 불렀다)같은 것들이 조직된다. 총독부 당국조차 제대로 한반도 탈출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총독의 아내는 해방 당일 저녁에야 부산을 거쳐 그녀의 컬렉션과 더불어 일본으로 건너가려다 선박이 항만에서 좌초하면서 실패해 체면을 구겼다.
13. 식민지 조선 사회도 해방 당일엔 조용했다.
해방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고 가르치지만 첫날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조용했다. 이것은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고종의 손자요 의친왕 이강의 둘째 아들인 일본군 중좌 이우는 제2군 총사령관이었다. 히로시마에서 8월6일 원폭을 맞았고 8월7일 죽었다. 장례는 바로 8월15일 천왕의 항복 연설이 끝난 뒤 서울의 경성운동장에서 진행되었다.
이 장례식에는 아베 노부유키 총독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고즈키 요시오 조선군관구 사령관 등이 참석했다. 장례는 아무런 사고 없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해방의 그날에!?
14. 국가기록원은 얼마 전 해방 이후 80년의 기록전을 열었다. 옛 사진들이 전시되었지만 해방이라는 글씨도 선명한 그 날의 환희를 증명하는 사진이야말로 그날이 아닌 그 다음 날 건준의 집회 및 소련군 환영대회의 모습과 9월9일 연합국의 서울 진입과 영국군 포로 석방을 구경하고 있는 군중의 사진을 합성해 ‘그날의 환호’라고 조작하고 있다.
소련군 환영대회 사진의 소련군이라는 휘갈겨 쓴 현수막 글씨는 교묘하게 지워졌다.
15. 광복군의 조선반도 진격이 준비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질문은 실로 상해 임정에 대한 오늘날의 상상이 겹쌓인 결과였다. 우선 광복이라는 단어부터가 장제스가 정해준 단어일 가능성이 있다. 장제스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광복군이 포함된 중국군"을 투입해 일본을 일축하면서 중국과 조선을 해방하고, 조선은 다시 청 제국 시대의 지위로 돌려놓는다는(그는 이것을 광복이라고 불렀다) 허황된 계획을 세웠을 뿐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다. 미군에 편성돼 한반도 진입을 준비한 소규모 훈련 및 전투 조직도 있었지만 역시 실행된 적이 없다.
16. 장제스는 이를 위해 자신도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김구와 광복군, 상해 임정 등에 적지 않은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아무도 장제스의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밀려나면서 급히 진해에서 이승만과 회담하고 제주도 할양 등을 논의하였다는 소문도 있다. 물론 이승만이 거부하였다. 장제스의 계힉은 완전히 실패했다. 장제스는 주한 중국대사 유어만을 통해 김구를 이승만의 부통령으로 삼는 방안(김구를 통해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제안하였으나 이는 김구에 의해 거부되고 김구는 북과의 합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정상회담에서 아시아평화를 위한 회의체의 구성을 안건으로 공식 제안했다.
16. 이런 경과가 해방 전후의 흐름이다. 이를 놓고 독립역량이 누적되면서 자력 투쟁을 통해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이승만과 독립노선을 놓고 투쟁했던 무장투쟁파 박용만은 상해 임정 세력(김구)에 의해 북경에서 살해당했다. 이런 지경이므로 한국의 독립운동은 개인의 테러리즘으로 흘러갔을 뿐 무력투쟁의 역량으로 형성될 수도 없었다.
17. 오히려 일본군에 포함된 조선인 군속 혹은 병사들 문제로 한국은 자칫 동경재판에서 전범국가로 몰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항복조건을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협정의 서명 당사자조차 되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자력투쟁? 독립을 쟁취했다는 주장은 국제사회를 우롱하는 망상이다.
18. 샌프란시스코 협정의 당사자는 당연히 미국, 중국(대만),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버마, 스리랑카 등 아시아국들과 미국 캐나다 쿠바 멕시코 등 미주국가들, 영국 프랑스 터키 등 모두 49개국이었다. 한국은 아니었다. 자력 해방이었다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영국 등에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샌프란시스코 협정에 이름을 올릴 자격조차 얻지도 못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풀릴 일조차 아니다.
19. 차제에 김구를 영웅화하고 해방 전후사를 전설로 만든 과정은 이승만을 질시했던 박정희시대의 다양한 노력 덕분이었다. 김구와 상해 임정을 부풀려서 무언가 항구적인 투쟁조직으로서의 정규조직 혹은 준정부적 성격을 가진 한국인의 단일적 독립 투쟁조직인 것처럼 분식하면서, 이를 기초로 다시 자력 투쟁론을 만들어 이어 붙이는 것은 실로 오류에 오류를 더하는 것이다.
20. 최근 김구에 대한 실체도 서서히 연구가 구체화되고 있다.
21. 문제는 해방이 주어진 선물이나 행운이라는 초라한 정황을 지금의 한국인들은 못 견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 올린 대한민국의 위대성을 단 일획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모른다.
22. 족보가 거창하지 않아도, 그리고 조상의 선택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하는 일과 행동이 진정 한국인을 규정하게 된다.
<보충>
추가1: 루부르 박물관에서 어떤 한국 교수가 우리 조상은 저런 위대한 그림 한장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말했다. "무슨 말씀. 저 그림을 열심히 찍고 있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저 수많은 핸드폰을 보세요. 조상은 위대하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갤럭시를 만들어 세계인에게 판매하는 위대한 국민입니다"
나는 조상의 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우리가 위대성에 도전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추가 2;
위 10번 항목에서 썼듯이 장제스는 김구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증국의 지도력과 장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지대했다. 때문에 김구와 상해임정을 유지하는데 거금을 지원했고 광복군이라는 내부조직을 중국군 조직 내에 두도록 독려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은 김구에게 파견된 유어만의 보고서에도 잘 나와 있듯이 김구로 하여금 이승만의 부통령으로 가면 어떻겠는지를 타진하는 경교장의 대화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는 북한과의 연공노선으로 돌아서면서 그리고 암살사건이 터지면서 김구는 장제스에게 실망만 안기게 된다.
장제스는 49년 본토에서 완전히 축출되기 전 진해로 찾아와 이승만과 표면적으로는 반공아시아 연대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들고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8월초)
여기서 장제스는 중국국민당의 피난처로 제주도 할양(조차)설, 인천항구 중국에 허용 등의 요구도 내놨다고 하지만 이는 비공식적인 전문이다. 김구의 정치역정은 장제스의 제국적 발상을 제외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추가 3: 지금 김형식 독립기념관장을 윽박지르는 여권의 행동은 지극히 개탄스럽다. 이는 토론과 사실에 기반하여 논할 것을 사회적 압력과 다중의 겁박으로 해결하려는 얄팍한 발상이다. “김형식 관장이 윤석열 전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기 때문에 새 대통령에 의해 새로운 인물이 임명되어야 한다”고 누구라도 주장한다면 이는 충분히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해방을 연합국의 전쟁승리가 아닌 독립투쟁에 의해 쟁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김형식 관장을 겁주고 또 그것을 이유로 교체를 시도하는 것에는 극력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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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t8q03G8Rk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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