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리더십의 경전, 반야심경
새해 들어 반야심경을 깊이 읽었다. 그저 절에서 자주 읊어대는 염불의 일종이겠거니 정도로만 여겼는데, 우연히 어떤 글을 따라가다 반야심경에 이르러 잠시 그 내용을 엿보고는 그 짧은 경전에 심오한 가르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 하나의 경전만이 허용된다면 반야심경을 선택하겠다'고 한 분들도 여럿 있을 정도이니, 한번쯤은 제대로 이해를 해둬야겠다 싶어 팔을 걷어붙였다.
몇 권의 책과 여러 글을 읽고 동영상 강의들도 찾아서 들어 보았다. 하지만 불교 지식이 일천한 생짜 중생에겐 역시 만만찮은 진입장벽이 있었고, 책이나 강의에 아무리 집중해도 끝내 미진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러다 그럭저럭 결국 내 나름의 해석으로 어스름한 깨달음이 느껴졌다. 먼저 깨친 분들이 보면 좁고도 얕은 덜떨어진 미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나마 여기까지라도 왔으니 호된 죽비를 맞을 각오를 하고 정리해본다.
반야심경의 정식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으로서 '서유기'에 등장한 삼장법사라고도 불리는 현장법사(玄奘, 602~664)가 번역한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근간이 되는 600권 분량의 반야경(반야바라밀다경)을 260자로 추린 핵심 경전으로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수행한 것을 사리자(舍利子)에게 말해주는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다양한 우리 말 번역이 있지만 충분히 와 닿지 않아 내친 김에 마음대로 번역도 해보았다.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행할 때 '오온(五蘊)'이 '공(空)'인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 부분만 잘 이해하기만 하면 심경의 상당 부분을 소화한 셈이다. '반야바라밀다'는 '지혜로운 저쪽으로 건너가기' 혹은 '지혜로운 변화 실천'을 뜻한다. '오온(五蘊)'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인식 방법으로서 물질, 느낌, 생각, 의지 및 인식을 각각 가리키며, 이들은 인간이 감각하고 경험하는 존재 형식에 해당한다.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공(空)'의 개념이다. 이는 단지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교의 기본 교리인 '연기(緣起)'를 상징적으로 함축한 말이다. '연기(緣起)' 즉 '공'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로 설명된다. 무상(無常)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생멸 변화한다는 뜻이며, 무아(無我)는 모든 것은 다른 것들과 시공간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존재하기에 제 고유의 본성을 고집할 수 없다는 뜻이다. 불변의 상태가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없고, 또 다른 존재와 상관없이 홀로 고유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 '공'의 개념을 수긍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다. 이 '공(空)'의 개념은 붓다 이전부터 존재하던 거대한 우주 만물의 가동 원리로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이 원리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반야심경은 이러한 '공(空)'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한다. 우주의 가동 원리에 비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강가의 수초에 붙어 사는 피라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감각하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五蘊, 十八界), 연기의 순환 및 상호 관계에 관련된 십이연기(十二緣起)와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라는 것은, 우주 질서의 관점에서 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주의 원리가 인간을 세세히 배려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 존재 형식이 모두 '공'하여 무상(無常) 및 무아(無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기(緣起)니 고집멸도(苦集滅道)니 하는 그런 추상적인 관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현실에서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괴로움을 벗어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 반야심경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라 여긴다. 그리고 그 실천 내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하면 걸림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뒤집힌 헛된 생각을 멀리하게 되어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반야심경은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하여야 할 '반야바라밀다'란 과연 무엇인가? 반야바라밀다에는 몇 가지 구체적인 실천 항목들을 포함한다. 통상 6바라밀로 규정된 것에는,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및 반야(般若) 바라밀이 있다. 이들 각각을 현대의 리더들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바꾸어 간단히 말하면, 베품, 절제, 역경 극복, 성장, 균형, 통찰에 해당할 것이다. 이 내용들을 깊이 실천하는 것이 바로 바라밀다 즉 '저쪽으로 건너가기'이다.
이 바라밀다 즉 '건너가기'는 자신의 변화를 위한 부단한 움직임으로서 그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 그래서 목표가 무엇이며 그곳에 여하히 도달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반야심경이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 목표라는 것도 정해지고 나면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 무아의 이 세상에서 불변과 고유함에 집착하는 것이 모든 고통의 원인임을 알기에, 부단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변화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 요령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반야심경을 풀어 다시 써본다.
세상 만물은 부단히 변하고 있고 모두 서로 관계로 엮여 있으니,
이를 무상(無常) 및 무아(無我)라 하며, 한 마디로 '공(空)'이라 이른다.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 방식들은 언제나 변하고 다른 존재와의 상호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니 바로 '공'이다.
또한 '공'이 그들을 만들어내니 '공'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우주의 가동 원리인 이 '공'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 무엇에 대한 직간접적인 인연의 윤회를 따지는 것,
고통과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인과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 앎이나 얻음을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의미가 없다.
그런 무의미하고도 추상적인 생각은 제쳐두고, 오직 인간으로서 언제나 실천 가능한 '반야바라밀'에 의존하라.
반야바라밀은 베풂, 절제, 역경 극복, 성장, 균형, 통찰과 같은 실천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들을 깊이 실천하면 매사에 걸림과 두려움이 없어지고,
뒤집어진 헛된 생각도 멀리하게 되어 지극한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 함께 주문을 외워보자.
가자 가자 저기로 건너가자 저기로 건너가 드높은 깨달음을 이루자!
그러면 이 반야심경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넓고도 깊은 거대한 사상을 가벼이 몇 마디로 단정하는 불경을 범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하게 감지한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건 현재에 머무르지 말고 쉼 없이 '바라밀다' 즉 베풂, 절제, 역경 극복, 성장, 균형 및 통찰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렇게 내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실행하면, 외적인 변화에 이끌려가지 말고 모든 변화를 스스로 이끌 수 있게 되며, 그런 주도적인 삶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뜻으로 새긴다. 이런 관점에서 반야심경은 '주도적 변화 리더십'의 경전이라 불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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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약해)
세상 만물은 부단히 변하고 있고 모두 서로 관계로 엮여 있다.
이 우주의 진리를 무상(無常) 및 무아(無我)라 하며,
한 마디로 '공(空)'이라 이른다.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 방식들은
언제나 변하고 다른 존재와의 상호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니
바로 '공'이다.
또한 '공'이 그들을 만들어내니 '공'이 곧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그리고 우주의 가동 원리인 이 '공'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감각하고 경험하는 것,
무엇에 대한 직간접적인 인연의 윤회를 따지는 것,
고통과 해탈에 이르기까지의 인과를 풀어보고자 하는 것,
앎이나 얻음을 추구하는 것 등은 모두 의미가 없다.
그런 무의미하고도 추상적인 생각은 제쳐두고,
오직 인간으로서 언제나 실천가능한 '반야바라밀'에 의존하라.
반야바라밀은 베풂, 절제, 역경 극복, 성장, 균형, 통찰과 같은
실천 항목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들을 깊이 실천하면 매사에 걸림과 두려움이 없어지고,
뒤집어진 헛된 생각도 멀리하게 되어 지극한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
이를 잘 수행하기 위해 함께 주문을 외워보자.
가자 가자 저기로 건너가자 저기로 건너가 드높은 깨달음을 이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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