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통수권⑫ 싸울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움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이렇게 예조판서 김상헌이 인조에게 말하자, 그에 이어 이조판서 최명길이 말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斥和派) 김상헌과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은 이렇게 상반된 주장으로 논쟁을 하였다. 최명길은 청에 항복하여 화친을 맺고 삶을 도모해야 한다고 임금을 설득하고, 김상헌은 항복이란 삶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죽음으로 항전하여야 한다고 고집한다. 욕됨을 무릅쓰고 나라의 사직을 보존할 것인가, 나라의 절개를 지키는 무거운 삶을 위해 가벼운 죽음을 택할 것인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명분들이다. 삶을 도모하자 함도 옳고 결기로 절개를 지키자 함도 옳으니, 이들은 타협 불가한 서로 다른 옮음이다.
기업 활동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특허 공격을 받았을 때 특히 그렇다. 회사의 주력 제품에 대해 어느 특허권자가 특허침해를 주장하며 경고장을 보내오거나 소송이 걸어왔다면 어찌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울 것인가 혹은 항복할 것인가. 물론 그 결정을 하려면 철저하게 승산을 따져보고 비즈니스의 중장기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판단하겠지만, 아무리 치밀하게 고심하여도 승산 예측과 항전 여부 선택이 언제나 명쾌하고 합리적일 수 없다. 사람의 일이니 모든 변수를 항상 완벽히 고려할 수 없고, 의사결정권자의 정서나 감정에 의해 어느 쪽으로 쏠리기도 하며, 무엇보다 그들을 지켜보는 고객이나 관계자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전'을 결정할 때는 그 결정을 뒷받침하는 유리한 전략이 명백히 존재하여야 한다. 특허분쟁은 형사 고소, 민사 소송 및 특허 심판이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분쟁 수행에 소요되는 노력과 비용이 만만치 않고, 패배의 결과가 기업 활동에 과도히 가혹할 수 있기에 어설프게 감정을 앞세워 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특허권자의 특허침해 주장이 잘못되었음이 명백하거나, 그 특허가 무효로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싸워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혹은 우리가 보유한 특허를 특허권자도 침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면 당당하게 맞불을 지펴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분쟁 실무를 하다 보면, 그런 대응 전략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막무가내로 대들고 뻗대다 곤경에 처하는 딱한 기업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래서 비침해 확신, 무효가능성, 맞대응 역량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면, 부득이 머리를 숙이고 항복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항복은 특허침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남은 절차는, 지난 침해에 대해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와, 미래의 특허 실시에 대해 어떻게 대가를 지불할 것인지를 협의하는 일이다. 이 협의는 협상의 영역이니,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협상 자원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노련한 협상 역량을 가졌다면 좀 수월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카드가 빈곤하면 상대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협상은 사실, 항복의 마무리 과정이라기보다는, 항전과 항복 사이의 창의적 대안이다. 특허권자에 대항할 승산이 낮을 때는 달리 선택의 길이 없겠지만, 승산이 높을 때에도 절차와 노력 등을 줄여 경제적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무엇보다 양측의 리스크를 최소화하여 비즈니스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특허분쟁은 협상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협상으로 특허료를 결정하고 지불하여 다툼을 평화롭게 마무리한 기업들을 지극히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 그것은 다른 침해자가 특허권자와 합의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서 최종적으로 이겨버린 경우이다. 이런 일을 종종 발생한다. 십수 년이 지난 일이지만, 이스트만 코닥이 동영상으로부터 정지영상을 추출하는 기술과 관련한 특허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그 특허에 대해 로열티를 지불하고 라이센싱을 하는 데 합의하였다. 우리나라의 삼성과 LG도 합쳐서 10억불이 넘는 로열티를 코닥에 지불했었다. 그런데 애플은 합의를 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고 결국 코닥의 특허를 무효로 만들어버렸다. 이미 막대한 돈을 지급해버렸던 여러 기업들은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하이닉스는 2011년에 미국 반도체 기업인 램버스와의 특허 분쟁에서 승소한 적이 있다. 하이닉스는 당시 1심에서 패소하여 4억 달러를 배상금을 물고서 그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항소심에서 승소의 쾌거를 이룬 것이다. 미리 내놓았던 배상금도 되돌려 받았다. 정말 통쾌한 승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승리를 쓰린 마음으로 지켜봐야 하는 기업들이 있었다. 삼성은 동일한 특허 소송에서 그 전 해에 근 1조 원 가량의 막대한 합의금을 지불하고 합의를 하고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반대의 사례도 적지 않다. 과감히 맞서 싸우다가 패소하여, 이미 합의를 마무리한 다른 기업들에 비해 훨씬 더 큰 배상 덤터기를 쓰기도 한다. 세상살이가 다 그렇듯 모든 옳고그름과 승패를 어찌 미리 명쾌히 예측할 수 있겠나. 그래서 기업의 경영은 선택과 결정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다. 항전인가 항복인가, 척화(斥和)인가 주화(主和)인가의 선택은 리더가 피할 수 없는 고뇌의 결단이다. 간혹 쓰라린 상처를 겪기도 하겠지만, 그 역시도 미래의 더욱 좋은 결정을 위한 씨앗이자 거름이 된다. 흔들리지도 않고 비에 젖지도 않고서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련 없이 성장하는 기업은 없다.
여하튼 아무리 뭐라 해도 조직의 생존만큼 귀중한 것은 없다. 그러니 특허통수권자는 모든 의사결정에 앞서 반드시 최명길의 충언을 상기해야 한다. "특허통수권자여,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전 직원들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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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_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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