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사슬, 노예의 자랑거리가 되다>
"노예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그들은 자신의 발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그런 한편, 쇠사슬에 묶여있지 않은 자유인들을 비웃기까지 한다.
노예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은
그저 한 가닥의 쇠사슬에 불과하고,
노예는 그저 한 사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노예는 정신의 자유까지 빼앗기지는 않았고,
그들은 언제나 벗어나려 노력했다.
그러나
현대의 노예는 스스로 자진해서 노예가 되고
그럼에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히려 노예라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_ 아민 바라카(Amiri Bar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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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 르로이 존스)가 말하는 '현대판 노예'는
물리적인 속박이 아닌, 정신적, 사회적 억압 상태에 갖힌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대판 노예들은 자유를 상실했음에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억압 상태를 자랑으로 여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리킨다.
- 소비주의의 노예: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소비와 물질적 소유에 얽매여 자신들의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끊임없이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본질적인 자유와 정신적 여유를 잃고 산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자진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현대인은 자신의 '사슬'(소유물, 지위)을 자랑하면서,
오히려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초연히 살아가는 고결한 사람들을 비웃기도 한다. - 사회적 성공의 노예:
현대 사회에서는 성공과 지위가 인생의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되어 있다.
직장, 명성, 권력 등에 묶여 처절하게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지독히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이 성취한 작은 성공과 권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만하게 살아간다.
그런 성공에 얽매여 정신적 자유를 저당잡힌 상태라면, 성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슬이 된다.
성공이라는 사슬에 얽메인 사람은 그런 사슬을 벗어던진 사람을 열등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 관습과 규범에 얽매인 사람들: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나 고정관념, 혹은 정치적 사상적 도그마의 틀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도 현대판 노예의 한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박된 틀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틀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기도 한다.
결국 바라카는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과거의 노예들은 부단히 자유를 갈망했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스스로 그 속박을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더 깊이 파고 들면서 그것에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점을
바라카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쇠사슬을 모두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찾으면 정말 행복하게 될까?
발목을 죄고 있는 족쇄나 쇠사슬이 열심히 땀흘려 살아야 할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 그래서 인생이란 참으로 불가해(不可解)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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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살이 센 개울을 건널 땐
떠내려 가지 않으려면
무거운 짐을 져야만 한다."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은
대체로 자신의 어깨에 진 짐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가족, 나를 따르는 사람들..
그 짐이 없다면 어려움을 견뎌야할 이유도 없다.
이런 짐이 곧 족쇄다.
그 족쇄가 리더의 인내와 성취의 동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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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어떤 사람은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 쫓겨 끊임없이 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야망이나 돈에 대한 탐욕에 쫓겨 끊임없이 일한다.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은 열정의 노예이고 쫓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은 사실 '수동적'이다.
곧 그들은 '행위자(Doer)'가 아니라 '수난자(Sufferer)'이다."
에리히 프롬의 말을 참고하면,
노예의 정의는 불안이나 고독감 혹은 야망이나 탐욕에 기인한 열정에 동기되어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들은 능동적인 행위자(Doer)가 아니라 고통을 견디는 '수난자(Sufferer)'가 된다.
그러면 '수난자(Sufferer)'는 항상 불행할까?
뛰어난 재능을 타고한 시지프스는 그 재능으로 신을 농락하여 신으로부터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 벌은 무거운 바위를 산의 정상에까지 밀어올리는 일이다. 바위는 정상까지 올라놓으면 바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다. 시지프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다시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한다. 그 무의미한 짓을 영원히 반복하여야 하는 것은 끝나지 않는 형벌이 것이다.
하지만 알베르 까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스 신화'에서, 시지프스가 그 형벌을 내린 신에게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형벌을 즐기는 것뿐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인간은 삶의 무의미한 반복마저도 자신의 것으로 사랑하고 그 자체를 삶의 이유로 삼아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수난자(Sufferer)'의 삶이라 하여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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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리 바라카 (1934.10.7 ~ 2014.1.9)는 누구인가
미국의 극작가·시인·소설가. 아프로-아메리카 문화의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반백인의 시점에서 흑인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론을 제창·실천하였다. 소설 《단테의 지옥 조직》, 희곡 《더치먼》등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뉴저지주(州) 뉴어크 출생. 하워드대학 및 컬럼비아대학을 마치고, 공군에 복무한 후 컬럼비아대학에서 작시법(作詩法)을, 버펄로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쳤다. 아프로-아메리카 문화(Afro-America 文化)의 지도자로 알려졌다. 이전에 에버렛 르로이 존스(Everett LeRoi Jones)로 불렸다.
비트·뉴레프트·블랙내셔널리즘·마르크스주의 등 입장을 갖가지로 바꾸지만, 일관적으로 반백인(反白人)의 시점에서 흑인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론을 제창·실천하였다. 반자서전적 소설 《단테의 지옥 조직 The System Dante’s Hell》(1965), 희곡 《더치먼 Dutchman》(1964) 《노예 The Slave》(1964) 등 자유분방한 문체로 알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미리 바라카 [Amiri Baraka]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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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갖힌 죄수들은..
그들을 감시하는 간수를 희화화하여 비웃으며 즐거움과 우월감을 누린다.
노예가 자신의 족쇄(쇠사슬)를 자랑하는 것과 동일한 심리적 작동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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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족쇄에 길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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