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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경영 리더십

사마천 사기 기행 _ 170914~170917

by 변리사 허성원 2023. 12. 19.

[사마천 사기기행]

#1 _ 0914

중국 시안에 사기 기행왔습니다.
중국의 역사책 사기(史記)를 공부하는 여행입니다.

- 이번에도 세리시이오의 만권만리 프로그램에 동참한 학습 여행입니다.
이 여행을 이끌어주시는 김영수 교수님은 제가 오래 전부터 강의와 책을 통해 가르침을 받아왔던 분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사기(史記) 연구의 최고 권위자이십니다.

- 사기는 중국의 고대 전설의 시대부터 BC 약90년까지의 역사를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입니다.
130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총 52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수많은 인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지요.
경영자들에게 대단한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손자병법이 겨우 6천자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엄청난 컨텐츠 규모가 짐작 가실 겁니다.

- 이런 엄청난 기록이 중국의 무거운 내공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사기가 완성될 시기에 우리 땅에서는 신라 등 삼국이 아직 건국되기도 전이었으니, 중국 역사의 무게는 우리가 어찌해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소화시키면 우리의 영혼에 녹아들어 그것만큼은 오로지 우리 것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최대한 많이 챙겨 소화시키고 가겠습니다.

- 오늘 첫날은 서안함양 공항에 내려서 바로 머지 않은 곳에 있는 한경제의 묘(양릉)를 관람하였습니다. 역시 중국의 엄청난 스케일은 입이 딱 벌어집니다.
한경제는 한고조 유방의 손자로서 한나라 4대 황제입니다. 3대 한문제와 함께 나라가 안정되어 그 치세를 문경지치라 부릅니다.

- 양릉을 나와 한성시를 향해 갑니다. 한성시에는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이 태어난 용문이 있습니다.
서안은 카이로, 로마, 아테네와 함께 세계 4대 고대 역사 도시 중 하나입니다.
서안 인근의 함양은 진나라의 수도이고, 서안의 옛 지명은 장안으로 한나라와 당나라 등 여러 왕조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중국 최고 권력자 시진핑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서안 지역은 2천 수백년 전의 과거와 최고권력자를 배츌한 현재,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미래 모두가 배움과 관심의 대상인 곳입니다.

- 사마천은 그 개인의 삶 자체만으로도 후인들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이릉의 화'에 연루되어 죽음과 궁형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상황에서, 죽음보다 치욕스런 궁형을 택합니다. 궁형은 남자의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이지요.
그런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홍모보다 가벼운 죽음보다는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택하였습니다.
사마천을 낳은 한성시는 어떻게 사마천을 도시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3박4일간 틈나는 대로 여행기를 올리겠습니다.


#2 _ 0914

한경제의 양릉 내에서 본 유물들입니다.

-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의 무덤 중에서 정부가 정식으로 발굴한 곳은 단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북경의 명대 13황제 능 중 신종의 무덤입니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돕는다고 파병을 했던 황제입니다.
중국정부는 이 발굴을 크게 후회하여 왔고, 그 이후로 단 하나의 무덤도 파헤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발굴은 또 다른 파괴라 여기는 것이지요.
중국 정부의 인식. 정말 대단하죠?
진시황능 등 황제들의 무덤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발굴하면 어마어마한 관광상품이 될텐데요.
이렇게 자중하고 기다릴 줄 아는 것도 중국 대륙의 내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래서 한경제의 무덤은 전혀 손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주변의 갱도만 발굴되어 관광에 제공되고 있지요. 갱도는 총 24개. 각 갱도는 창고, 주방, 감옥 등 기능 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황제의 무덤은 진시황 때 처음으로 봉분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전의 춘추전국시대에는 왕의 무덤은 모두 평탄하게 조성되었는데, 진시황 때부터 이릉위산(以陵爲山, 능으로 산을 만들다)하게 되었고, 후대에는 이산위릉(산을 능으로 만들다)하였답니다.

- 한경제는 한나라의 세번째 황제인 한문제의 아들이고, 사마천을 태사령으로 데리고 있던 한무제의 아버지입니다.
한문제는 유방의 큰 아들인데, 여태후가 낳은 아들이 한혜제로서 먼저 황제에 올랐으나 그가 일찍 죽는 바람에 황제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태후는 유약한 혜제를 앞세워 섭정을 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정통 권력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하고 몰락하지요.

- 각 갱도에는 토용들이 많습니다.
진시황능에는 토용들이 실물 크기였지만, 여기에는 팔길이 정도의 작은 토용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적게 주기 위한 것 같습니다.
토용은 전체적으로 가늘고 깁니다. 그리고 팔이 없습니다. 아마도 팔 부분만을 나무로 만들어 부착하였었는데, 지금은 그 부분이 썩어 없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3 _ 0914

- 한경제 능에서 한성으로 가는 길..
두어시간을 달려도 그저 평탄하다.
산이 거의 보이지 않으니 오히려 답답하다.
이 지역은 초한지나 삼국지에 '관중' 땅이라 불리는 곳이다.
여기를 차지하여야만 천하를 실질적으로 차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곳의 토질은 순전히 황토다. 서북 쪽의 사막에서 날아온 미세 황토 입자가 퇴적되어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깊은 계곡이나 절개지가 보인다. 토질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가 집중적으로 오면 땅의 형태가 바뀐다. 어떤 데는 작은 그랜드캐년처럼 깊게 파인 지형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가면 400킬로미터 정도를 달려도 끝없이 옥수수 밭만 이어져 있다고 한다.

- 이런 평탄한 땅을 보니, 고대 중국의 전쟁이 왜 병차(兵車)를 기반으로 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병차는 네 마리의 말이 끌고 3명이 승차한다. 마부는 전차를 운전하고, 차우(車右)는 창으로 근접전을 주로 담당하며 차좌(車左)는 활로 원거리 공격을 맡는다. 차좌가 최상급자이다.
이러한 마차는 평지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산악지대와 같이 병차의 이동이 원활하지 못한 곳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 이런 병차를 이용한 전투방식을 개혁한 사람이 조나라의 무령왕이다.
조무령왕이 도입한 것은 호복기사(胡服騎射).
호복기사는 오랑캐의 바지를 입고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을 말한다. 몇 백 년 후의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것처럼.

당시 중원에서는 남자들이 치마를 입었다. 치마를 입었으니 말을 탈 수가 없다. 반면에 북쪽 오랑캐들은 바지를 입고, 한 사람씩 말을 타고 어디든 달리며 활을 쏘고 창칼을 다루니 그 기동성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조무령왕은 그 점을 간파하고 호복기사를 도입하려 했으나 오랑캐 풍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하들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끈질기고도 절묘한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여 끝내 호복기사를 관철함으로써 중원의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혁신은 지난하다. 그래서 잭 웰치는 하나의 변화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700번을 반복해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병차(兵車)
고구려 무용총

#4 _ 0915

- 아침에 김영수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사마천의 후손들은 사마천이 처형(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답니다) 당한 후 성씨를 바꾸어 살고 있답니다. 동씨와 풍씨. 각각 '사'자와 '마'자에 획을 추가한 것이다. 司 -> 同, 馬 -> 馮.

- 사마천의 묘와 사당에 왔다.
묘와 사당으로 가는 길에는 사기의 12본기 내용을 담은 거대한 조형물들이 좌우 양측에 건축되어 있고, 중앙에는 사마천의 동상이 서있다.
동상은 높이 12m, 무게 26톤(52만근)의 청동제입니다. 사기의 12본기와 총 글자 수 52만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동상 앞에 우리를 환영하는 한성시의 현수막을 두 아가씨가 들고 있다.

- 저런 새 조형물들을 보면서.. 중국은 새로운 유물(?)을 끝없이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조형물들이 언젠가는 몇십년 몇백년 지나면 역사적인 유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기존의 여러 역대 황제들의 묘는 손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보존할 것은 철저히 미발굴 상태로 두고, 새로운 것은 계속 만들어낸다.
이를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바탕으로 새것을 창조한다)이라 해석해도 될라나..

- 사마천 묘에서 내려다보면, 중국 정부가 사마천을 얼마나 비중있게 생각하고 띄우려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수로를 끌어들여 유람선 뱃길까지 만들고 있다.

사마천의 묘이다. 시신이 아니라 의관을 묻은 곳이다.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선조들과 함께 묻히지 못했다. 묘의 위에는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수령이 1700년이라고. 이 나무는 여기에 기도하면 장원 급제한다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이 사진에라도 기도하면 적잖은 효험이 있을 것 같다. 집안에 시험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를 해보시도록. Believe or not! 그 효험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뭐 손해볼 거 없으니 함 빌어보시라~~
모택동의 지시로 설치한 기념비. 사마천의 탄생과 아픔, 업적 등을 짧지만 명쾌하게 쓴 명문장이라고 한다.

사마천묘 가까이의 화장실에도 멋진 글이 붙어있다.
"욕구하되 만족을 모르면 그 욕구한 것을 잃게 되고, 가지되 멈출 줄 모르면 그 가진 바를 잃게 된다."
欲而不知足(욕이부지족) 失其所以欲(실기소이욕) 有而不知止(유이부지지) 失其所以有(실기소이유)

이 말은 사기(史記) 범수채택열전(范睡蔡澤列傳)에 나온다.
범수(范睡)는 진소양왕 때의 재상. 원교근공 정책을 유세하여 재상이 된 후 이를 시행하여 진나라를 강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채택(蔡澤)은 연나라 출신으로서 범수를 찾아와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조언한다.
"군의 공이 극에 달하여(君之功極矣)있습니다.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으면(如是而不退), 상군, 백기, 오기, 대부 문종과 같이 될 것입니다"(則商君, 白公, 吳起、大夫種是也)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높이 오른 용은 뉘우침이 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오르되 내려올 줄 모르고, 펼치되 굽힐 줄 모르며, 나아가되 스스로 돌아올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원컨데 군께서는 부디 이를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亢龍有悔(항룡유회) 此言(차언) 上而不能下(상이불능하) 信而不能詘(신이불능굴) 往而不能自返者也(왕이불능자반자야) 願君孰計之(원군숙계지)"

 

#5

- 한성은 인구 서울의 3배 정도 되는 면적에 약 50만명이 사는 매우 작은(?) 도시이다.
이 시골에 중국의 3대 고대 건축에 속한다는 문묘(文廟)가 있다. 문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
문묘는 송대에 건설되어 원, 명, 청을 지나며 중건되거나 개축되어 송, 원, 명, 청의 문화가 모두 반영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 눈으로는 당최 구분해낼 수가 없다.

- 1500년 된 측백나무. 여기에 학운을 빌면 영험하게 듣는다고 한다. 나도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놈이 좀 덜 놀고 공부를 제대로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빌었다.

- 문묘 내에는 유교 성현들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도교 사당에 해당하는 성황묘와 장사(상인)의 신으로 모셔진 관우의 관제묘도 있다.
관우가 장사 혹은 상인의 신으로 받들여지는 것은 의리와 신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장사의 핵심 가치는 신뢰에 바탕을 두어야 함을 가르친다.

- 문묘 앞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네들이 있다.
근데 장기알이 엄청 크다. 작은 호떡 사이즈.. ㅎ..


- 문묘 부근은 잘 조성된 상업 거리이다. 밤에는 조명과 빔프로젝터를 이용한 다양한 조명 볼거리를 보여주고, 공연도 여기저기서 벌어진다고 한다.
이런 조그만 변방의 작은 소도시에까지 변화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중국이 이룬 경제적 부흥 및 풍요와 그것을 활용한 문화 정책의 추진 성과가 피부로 느껴진다.

#6 _ 0915

병마용갱은 재작년에 왔을 때 충분히 돌아봤기 때문에, 일행들이 그쪽으로 가는 동안 나는 박물관을 관람하기로 했다.

마침 고대 중산국 유물이 특별 전시되고 있다.
중산국은 열국지에서 가끔 등장하는 나라. 북쪽 오랑캐인 적족이 세운 나라이기에 사기 등 중국 역사서에서는 직접적으로 그 나라의 역사가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전시에서도 '신비왕국 고대 중산국'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중산국은 조나라와 연나라 사이에 끼어있어 조나라의 침공을 자주 받다가 끝내 호복기사를 도입한 조무량왕에 의해 멸망했다. 조나라 뿐만 아니라 위나라와 제나라의 공격도 적잖이 받았었다.

열국지에서는 중산국 출신 악의의 활약이 매우 재미있다. 악의는 중산국이 멸망한 후 연나라로 가서 연합군을 아끌고 제나라를 거의 멸망 시킬 상황까지 갈 정도로 크게 활약한 명장이다. 뒤에 모함을 받아 조나라로 넘어간다.

- 진나라의 병차(兵車)와 온량거는 청동으로 제조되었다.
아직 철기가 충분히 보급되지 않은 때였다.
사진의 병차와 온량거는 정확히 2분의1로 재현한 것이다.
온량거는 진시황이 전국을 순례할 때 타는 마차인데 냉온 온도 조절 기능이 있다고 한다. 진시왕은 마지막 순례 중에 이 온량거에서 죽는다.
마지막의 도표는 마차에 사용된 부품들의 성분 함량이다.
청동 부품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성분의 청동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부품의 특성 즉 요구되는 강도, 내마모성 등에 따라 함량을 달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조 등 성형기술도 현대의 기술에 비추어 보아도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 매우 놀라운 수준이라고 한다.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청동검의 날이 당시의 날카로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인을 확인해보니 검의 표면에 니켈 크롬 도금이 처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도금은 금속이온의 정전기를 이용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전기가 있어야 한다. 당시에 전기는 없었을텐데, 어떤 대체 방법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청동기 시대를 생각하니 이런 격언이 떠오른다.

"석기시대는 돌이 떨어졌기 때문에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격변의 시기에 잘 새겨들을만한 말이다.
또 달리 생각하면..
"청동기 시대는 구리가 없어서 늦게 온 것이 아니다."
변화가 이미 가까이 와있어도 인지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석기시대인 셈이다.

 

#7

장한가 공연을 보았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공연이 없어 보질 못했었다. 겨울에 왔었는데..추워지면 공연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된다. 물위에서 무대를 수면 위아래로 출몰시켜 가며 공연을 하고 분수도 많이 활용한다. 공연자들이 물에 많이 접촉하기 때문에, 추울 땐 불가능하다.

장한가는 원래 당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의 로맨스 이야기를 다룬 백거이의 시 제목이다. 그 시의 내용을 기초로 그들이 단꿈을 꾸었던 화청궁 내 화청지에서 공연이 열리는데, 그 스케일이 방대하다. 그리고 온갖 기교를 다 부리고 많은 인력이 동원된다. 관중도 수천명.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사진과 짧은 동영상도 몇 개 첨부.

공연의 거대함과 화려함에 비해 감동은 좀 떨어지는 편.
공연자들은 예술이 아닌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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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뒤에 보이는 산의 이름이 여산이다.
여산은 또 다른 경국지색과 관계가 있다.

포사의 웃음을 얻기 위해 주유왕이 봉화로 장난을 쳤던 곳이 바로 이 여산 봉화대이다. 주유왕은 포사를 무척 아꼈으나 그녀는 웃을 줄 몰랐다. 그녀를 웃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는데.. 비단 찢기가 약간 효과가 있었지만, 이마저도 그 효력이 얼마 가지 않았고, 그 다음에 채택된 방법이 봉화 올리기였다. 여산 꼭대기에서 봉화를 올리면 외적의 침략이 있는 것으로 알고 주변의 제후들이 군사를 달려왔다. 하지만 곧 속은 것을 안 제후들은 크게 실망하며 되돌아갔고, 이 장면이 포사를 크게 웃게 만들었다. 이 놀이는 여러번 반복되어 포사를 그 만큼 웃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북쪽의 오랑캐가 진짜 쳐들어왔을 때에는 가짜 봉화에 여러번 속았던 제후들이 오지 않아 나라가 완전히 짓밟히고 왕은 죽게 된다.
이를 계기로 주나라는 낙양으로 천도하여 동주시대가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이 여산에는 특별한 기운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참 기구한 운명이다.
여기에서 포사와 양귀비가 약 1500년의 시간을 넘어 나라를 위태롭게 했고, 양귀비로부터 약 1400년 지나 지금 수많은 미희들이 춤을 추고 불을 밝혀 산이 조용히 지낼 틈을 갖지 못한다.
산도 여난을 겪는다.

- 당현종과 양귀비 이야기 및 장한가 공연에 대해서는 아래 기사를 보면 간단히 잘 기록되어 있다.

 

[월요마당] 화청궁(華淸宮)의 장한가(長恨歌) 쇼

화청궁에 어둠이 깔리자 장한가 공연의 막이 올랐다.궁전 앞의 특설 무대만 보고 있던 시선이 순간 충격으로 놀랐다.광대한 자연공간에서 펼쳐지는 장엄함에 넋을 잃을 듯 했다.장중을 압도하

www.kado.net

- 장한가는 여길 참고.

https://namu.wiki/w/%EC%9E%A5%ED%95%9C%EA%B0%80

 

장한가 - 나무위키

<長恨歌> <장한가>(긴 아쉬움의 노래)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한나라 황제가 미색을 중히 여겨 경국지색을 찾는데,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다스리는 오랜 동안 얻지 못하였도다.

namu.wiki

화장실에 붙어 있는 표어.
대충 이런 뜻.
"한 발 조금 더 앞으로 나가면, 문명은 크게 한 발 더 진보한다."
문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소변기에 바싹 다가가서 볼 일을 보라는 말.

#8 _ 0916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마천 이전에 역사학은 없었다.
그는 역사학의 조물주다"
_ 양계초

이 위대한 역사학의 창시자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음 글 정도는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여행을 안내하시는 김영수 교수님의 블로그 글.

https://m.blog.naver.com/allchina21/130089857400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기원전 약90년)

▶사마천의 어린 시절. 용문에서 태어난 사마천은 어린 시절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고 공부를 하며 지냈다....

blog.naver.com

 

#9 _ 0916

오늘 아침에는 진시황의 리더십을 주제로 김영수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
오늘 강의에서 특히 가슴을 때리는 한마디는..

"진나라 군사력은 헤어스타일에서 나왔다"

병마용갱의 병사들을 자세히 살며보면, 그들의 머리와 수염의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머리와 수염으로 자신을 표현했고 그것을 매우 중시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머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전사들을 시중드는 사람이 적어도 1명 이상 2명 정도 배속되었을 것이다.

이런 헤어스타일 문화로부터 두 가지 점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첫째, 투구를 쓰지 않았다.
병마용갱에서 투구는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뛰어난 기동성과 그만큼 뛰어난 전투력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의 자율과 명예를 중시했다.
개성이 존중되었고 전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매우 명예롭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전사들은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손질하면서 전쟁에 임하는 마음 자세를 경건히 가다듬었을 것이다.

그러니 진나라는 그런 군사들의 자부심에 찬 사기가 결집된 군사력에 기초하여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병마용의 신발바닥 사진이다. 친구 최경효 회장이 내게 알려줘서 알게된 것이라 사진을 찾아 올린다. 병마용의 신발 바닥을 보면 미끄럼 방지 패턴이 형성되어 있다. 놀랍지 않은가?

#10 _ 0916

진나라 2세 황제 호해의 묘와 그 옆의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호해의 묘 입구에는 후사지사(後事之師, 뒷 일의 스승)이라 씌어 있다.
진시황이 이룬 통일의 업적을 통일 후 불과 15년, 진시황 사후 4년도 채 지키지 못한 호해의 행적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찾아야 할 것인가.

우선.. 후계 시스템의 구축이 미흡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진시황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환관 조고와 이사가 후계 농간을 부리게 된 데에서 이미 조짐이 있었다. 호해가 조고 등이 제안한 악마의 유혹을 받아들일 수 있던 상황이 문제였다는 것.
진시황이 태자 부소를 멀리 하지 않고 믿음을 주어 적절히 권한을 위임랬더라면 그런 농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권력 승계를 위한 설계가 미비하거나 명확하지 못하여 큰 혼란을 초래하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제환공이나 조무령왕의 전례에서 배웠어야 했다.

그 다음 한 가지는.. 호해의 최대 잘못으로 권력을 신하와 나누었다는 것.
한비자는 신하를 까마귀를 길들이듯 하여야 한다고 가르친 바 있다. 까마귀를 기를 때는 까마귀의 날개깃을 잘라야만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게 된다.
날개깃을 자르고 먹이를 주는 것은 권한을 제한하고 말을 잘 들을 때 주인이 주는 보상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 즉 당근과 채찍으로 다스리라는 가르침이다.

한 때 황제였던 호해의 묘는 일반인의 무덤으로 격하되어 아파트 앞의 마을 가운데에 썰렁하게 보존되고 있다.

"前事之不忘 后事之师也。" (전사지불망 후자기사야)
과거를 잊지 말고 미래의 스승으로 삼으라.

사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纪)에서 사마천이 언급한 말입니다.
시진핑이 일본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인용한 바 있고,
우리나라의 독립기념관, 난징대할살 기념관 등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전사물망 후사지사".

#11 _ 0917(끝)

오늘은 대체로 서안 시내 관광으로 하루를 보냈다.
호해묘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지만 이족 거리, 대안탑, 장안성 등은 좀 따분한 느낌.
이들 관광 코스는 저번에도 다 돌아봤기도 하고, 이번 사기기행 주제와는 좀 거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다.
하지만 대명궁은 나름 강렬한 자극을 준다. 대명궁이라고 해서 단순히 명나라 시대의 궁전인가 했는데.. 당나라 시대에 건축되어 대부분의 당나라 황제가 생활했던 곳이다.
규모는 자금성의 4.5배 정도였다고 한다. 번성했을 당시 장안의 인구가 100만이었다고 하니 대충 그 영화를 가늠할 수 있겠다.
지금은 대명궁의 유적지와 축소재현된 모형만 남아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중국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다시 한번 체험하였다. 아이맥스 영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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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 재현된 대명궁. 그 시절 당나라의 영화를 가늠할 수 있다.

땅에는 무게가 있다.
그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의 무게이다.
장안, 이 서안은 세계 어느 곳도 그 무게를 감히 겨뤄보자고 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땅에서 며칠 여행을 이제 마무리한다.
서안의 거대한 중력장을 아쉬움없이 잘 벗어날 수 있으려나..

"여행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것. 돌아가지 않는 것은 방황이다."
지난 번 만권만리 그리스기행 때 김상근 교수께서 하신 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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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할 여행기
https://m.blog.naver.com/1997only/222944286782

 

西安을 거쳐 사마천의 고향 한성시(韓城市) 의 지천진 (芝川鎭)을 방문

2010년 서안을 찾은 이후로 이번이 4번째인데 그림에 보이는 건물의 숙소에 매번 묵었는데 올 적마다 삐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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