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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지혜로운삶

누실명(陋室銘) _ 집은 덕으로써 향기롭다(실이덕형室以德馨)

by 변리사 허성원 2022. 8. 13.

누실명(陋室銘) _ 집은 덕으로써 향기롭다(실이덕형室以德馨)

_ 유우석(劉禹錫)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아야 이름을 얻고,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아야 신령스러워지는 법이니,
이 누추한 집에는 오직 내 덕의 향기가 있을 뿐이다.
섬돌 위에는 이끼 자국이 거뭇거뭇하고,
풀빛은 주렴 사이로 푸릇푸릇 들어온다.
담소할 고고한 신비들이 있고, 보통 사람들이 들락거리지 않으니,
거문고 뜯으며 좋은 책들을 읽기 좋다.
악기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지 않고, 애써 읽을 관청의 서류도 없으니,
남양 땅 제갈공명의 초려요, 서촉 땅 양자운의 정자로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셨지.
'군자가 사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으랴'.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斯是陋室 惟吾德馨.
苔痕上階綠 草色入簾靑. 談笑有鴻儒 往來無白丁.
可以調素琴 閱金經. 無絲竹之亂耳 無案牘之勞形.
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孔子云, 何陋之有.
_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

 

**
실이덕형(室以德馨) _
집은 덕으로써 향기롭다.

'실이덕형(室以德馨)'이라는 성어가 누실명(陋室銘)으로부터 나왔다. 

선비의 집은 그 선비가 갖춘 덕(德)의 향기로 품격이 결정된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하더라도 고귀한 선비가 머무는 곳이면, 이미 그곳은 고귀한 품격을 갖추게 된다.

기업이나 국가의 품격도 그러하리라. 

 

** 유우석(劉禹錫)은?

유우석은(劉禹錫, 772 ~ 842)은 당(唐)나라 때의 시인이자 정치인이다. 79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5년 후인 798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한다. 이때 평생의 벗인 유종원(柳宗元)을 만난다. 감찰어사(監察御史) 등 다양한 관직을 두루 거친다. 순종이 즉위하였을 때, 왕숙문(王叔文)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환관의 세력을 누르고 황권을 복권하는 정치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태자를 앞세운 환관과 보수 세력에 의해 순종이 쫒겨나자, 805년 왕숙문은 실각되고, 유우석은 연주의 책사, 낭주의 사마 등으로 좌천된다.  이후 잠시 복귀하기도 하지만 다시 책사 등으로 좌천되어 소주 등 여러 지방을 전전한다. 842년 태자빈객(太子賓客)을 마지막으로 71세에 사망한다. 
유명한 작품으로 누실명(陋室銘) 외에도,
농민의 생활을 그린 죽지사(竹枝詞)가 있다. 만년에 백낙천(白樂天)과 교유하며 시문(詩文)에 정진하여 ‘유백(劉⽩)’이라고도 불렸으며, 시문집 유몽 득문집(劉夢得文集)(30권) 등이 있다.

 

** 누실명(陋室銘)배경

유우석(刘禹锡)은 감찰어사(监察御史) 재임기간에 王叔文의 “永贞革新”에 참가하여 宦官과 藩镇의 割据势力에 반대하였다. 革新이 실패한 후, 安徽 和州县의 小小한 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通判은 응당 县의 관아 내에서 三间三厢의 집에 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和州知县이 看人下菜碟(사람을 보고 대접하다)한다고, 刘禹锡이 위로부터 좌천되어온 软柿子(물러터진 놈)로 보고 일부러 못살게 굴었다. 처음에는 그를 城南에서 江을 바라보는 곳에 거주하게 하였다.

刘禹锡은 怨言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오히려 매우 즐거워하고, 또한 마음이 내키는 대로 두 구절을 적어 문 위에 걸어놓았는데 : 面对大江观白帆, 身在和州思争辩。”(큰 강을 마주하니 흰 돛단배를 관상할 수 있고, 몸은 화주에 있으나 쟁변을 생각한다.)

和州 知县이 이를 알고는 매우 화가 나서 관아 아전에게 刘禹锡의 거처를 县城 南门으로부터 县城 北门으로 옮기도록 명령하였다. 面积은 원래의 三间보다 줄여 一间 半으로하였다. 새로운 거처는 德胜河边에 위치하였으나,부근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져 환경 또한 마음에 들어,刘禹锡은 여전히 따지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는 见景生情(경치를 보고 마음이 동하다)하여, 또 문 위에 두 구절을 적어 놓았는데 : 垂柳青青江水边,人在历阳心在京。” (늘어진 버들은 강변에서 짙푸르고, 몸은 역양(화주)에 있으나 마음은 서울에 있다.)

그 知县은 그가 여전히 悠闲自乐하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또 사람을 보내 그를 县城 中部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단지 一间을 주었는데 침상 한 개, 탁자 한 개, 의자 한 개만 들어 갈 수 있는 小屋이었다. 半年 사이에 知县은 刘禹锡을 강박하여 세 차례나 이사하도록 하였고, 面积은 옮길수록 적어지도록 하였고,  마지막에는 코딱지만 한 방이 되었다. 저 势利眼(지위나 재산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사람)의 狗官(개 같은 관리)을 보니, 实在欺人太甚(남을 지나치게 업신여기다.), 마침내 愤然히 붓을 들어 超凡脱俗(범속함을 벗어나다)하고、情趣高雅한 《陋室铭》을 지었다. 그리고는 사람을 청해 石碑에다 새기고, 门前에 세워 두었다. [출처] 陋室铭(누실명) - 刘禹锡(유우석)     

실이덕형(室以德馨), 산불재고(山不在高) 유선즉명(有仙則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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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云, 何陋之有'(공자운 하루지유)

'論語 子罕篇'에 나오는 말이다.
<子欲居九夷. 或曰: "陋, 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공자께서 동이(東夷)의 나라들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누추한 곳일 터인데 어찌 그곳에서 사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가 그곳에 사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느냐?">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면서 이상을 펼치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중국에서는 가망이 없음을 실망하고, 동이의 땅으로 가서 뜻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염원을 가졌던 듯하다.


'論語 公冶長篇'에 관련 문구가 나온다.
<子曰: "道不行, 乘桴浮於海, 從我者其由與!" 子路聞之喜. 子曰: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도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로 간다면 나를 따를 사람은 유(由)이리라." 이 말을 듣고 자로가 기뻐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는 용맹을 좋아함이 나를 능가하지만, 재목(材木)을 취할 것이 없다.">

'재(材)'는 '뗏목의 소재'와 '자로의 재능' 두 가지를 내포한 중의적인 개념인 듯하다. 성정이 거칠고 용맹하여 무모하게 뗏목을 타고 함께 바다에 나갈 수는 있지만, 그의 학문적 재능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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