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문은 동양고전DB에서 가져옴.
** 이 篇은 말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여 남을 설득시키고 목적을 이룬 事例들을 모아 編成하였다. 談論을 잘하는 방법으로 荀子의 주장을 들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태도를 엄숙히 하여 자기의 말이 진실임을 믿도록 할 것, 둘째 말을 정직하고 정성스럽게 하여 과장하거나 축소하거나 숨기지 말고 진실되게 할 것, 셋째 자신의 觀點을 굳게 지켜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않으면 중지하지 말 것, 넷째 比喩法을 잘 활용하여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고 허락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 것, 다섯째 對比法으로 사리를 분석하여 정반대의 논리를 세워서 이해시킬 것, 여섯째 상대방의 감정을 자극하여 기쁘게 하거나 분노하게 하여 설득할 것 등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의 言術로 국가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에게 닥친 환난에서 벗어난 인물과 사례들을 수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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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夫談說之術,齊莊以立之,端誠以處之,堅強以持之,譬稱以諭之,分別以明之,歡欣憤滿以送之,寶之珍之,貴之神之,如是則說常無不行矣。
孫卿曰:「夫談說之術,齊莊以立之,端誠以處之,堅強以持之,譬稱以諭之,分別以明之,歡欣憤滿以送之,寶之珍之,貴之神之,如是則說常無不行矣。」夫是之謂能貴其所貴。傳曰:「唯君子為能貴其所貴也。」詩云:「無易由言,無曰苟矣。」鬼谷子曰:「人之不善而能矯之者難矣。說之不行,言之不從者,其辯之不明也;既明而不行者,持之不固也;既固而不行者,未中其心之所善也。辯之明之,持之固之,又中其人之所善,其言神而珍,白而分,能入於人之心,如此而說不行者,天下未嘗聞也。此之謂善說。」子貢曰:「出言陳辭,身之得失,國之安危也。」詩云:「辭之繹矣,民之莫矣。」夫辭者人之所以自通也。主父偃曰:「人而無辭,安所用之。」昔子產脩其辭,而趙武致其敬;王孫滿明其言,而楚莊以慚;蘇秦行其說,而六國以安;蒯通陳說,而身得以全。夫辭者乃所以尊君、重身、安國、全性者也。故辭不可不脩而說不可不善。
孫卿이 말했다. “말을 하는 방법은 엄숙하고 장중하게 임하며, 단정하고 성실하게 대하며, 자기의 주장을 굳고 강하게 지키며, 비유하는 말로 깨우쳐주며, 사리를 분별하여 밝히며, 기쁨과 분노하는 감정을 전하여, 듣는 사람이 보물로 여기고 진귀하게 여기며 귀중하게 여기고 신묘하게 여기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면 내가 하는 말이 언제나 통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傳에 ‘君子라야 자기가 귀중히 여기는 것을 귀중히 여긴다.’ 하였다.”《詩經》에 “가볍게 말하지 말며, 구차하게 말하지 말라.” 하였고,
鬼谷子는 “사람의 不善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어렵다. 설득하는 말이 시행되지 않고, 해준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 말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고, 명백하게 말했는데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며, 지키는 것이 견고한데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좋게 여기는 것을 적중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말하고 명백하게 말하며,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견고하게 지키며, 또 그 사람이 좋게 여기는 것을 적중시키면 그의 말이 신묘하고 진귀하며 명백하고 조리가 있다고 여겨 사람의 마음에 먹혀들어가게 된다. 이와 같이 했는데도 그의 말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은 천하에서 일찍이 듣지 못하였으니, 이를 ‘善說’이라고 한다.” 하였다.
子貢은 “말을 하여 언론을 발표하는 것은 자신의 得失과 국가의 安危에 관계된다.” 하였고, 《詩經》에 “말이 온화하면 백성이 편안하다.” 하였으니, 말은 사람이 스스로 소통하는 도구이다.
主父偃은 “사람이 조리 있는 말을 하지 못하면 어디에 쓰겠는가.”라 하였다. 예전에 子産이 말을 잘하자 趙武가 공경을 표하였고, 王孫滿이 大義를 분명하게 말하자 楚 莊王이 부끄러워하였으며, 蘇秦이 合縱說을 진행하자 여섯 諸侯國이 편안해졌고, 蒯通이 그의 처지를 잘 말하자 몸이 보전되었다. 말은 곧 임금을 높이고, 자신을 귀중하게 하며,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性命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수식하지 않을 수 없으며, 談論을 잘하지 않을 수 없다.
2. 與其以死痤市,不如以生痤市
<죽은 범좌를 가지고 거래하는 것보다는 산 범좌를 가지고 거래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趙使人謂魏王曰:「為我殺范痤,吾請獻七十里之地。」魏王曰:「諾」。使吏捕之,圍而未殺。痤自上屋騎危,謂使者曰:「與其以死痤市,不如以生痤市,有如痤死,趙不與王地,則王奈何?故不若與定割地,然後殺痤。」魏王曰:「善」。痤因上書信陵君曰:「痤故魏之免相也。趙以地殺痤而魏王聽之,有如強秦亦將襲趙之欲,則君且奈何?」信陵君言於王而出之。
趙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魏나라 安釐王에게 말했다. “우리를 위해 范痤를 죽여주면 우리는 70리의 땅을 바치겠습니다.”魏王은 “좋소.” 하고 관리를 보내 범좌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포위는 하였으나 죽이지는 못했다. 범좌가 스스로 지붕에 올라가 용마루를 타고 앉아 使者에게 말했다.
“죽은 범좌를 가지고 거래하는 것보다는 산 범좌를 가지고 거래하는 것이 나을 것이오. 만일 나를 죽였다가 조나라가 왕에게 땅을 주지 않는다면 왕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땅을 분할해주는 절차를 확정하고 나서 나를 죽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위왕이 “좋다.” 하였다. 범좌는 이어 信陵君에게 편지를 올려 말했다. “나는 원래 위나라의 면직된 재상이오. 조나라가 땅을 떼어 준다는 조건으로 나를 죽이려 하는데 위왕이 따르려 하니, 만일 강한 秦나라가 趙나라가 하려는 방법을 답습하면 그대는 장차 어찌하시겠소?” 신릉군이 위왕에게 말하여 범좌를 구출하였다.
3. 吳未有福,荊未有禍
<오나라의 福은 아직 올 때가 아니고, 초나라의 禍도 아직 올 때가 아니다>
吳人入荊,召陳懷公,懷公召國人曰:「欲與荊者左,欲與吳者右。」逄滑當公而進曰:「吳未有福,荊未有禍。」公曰:「國勝君出,非禍而奚?」對曰:「小國有是猶復,而況大國乎?楚雖無德,亦不斬艾其民,吳日弊兵,暴骨如莽,未見德焉?天其或者正訓楚也!禍之適吳,何日之有?」陳侯從之。
吳나라 군대가 荊(楚)나라를 침입했을 적에 吳王(闔廬)이 陳 懷公을 불렀는데, 懷公은 都城 사람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초나라와 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왼쪽에 서고, 오나라와 친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오른쪽에 서라.”逢滑이 懷公의 정면으로 나아가 말했다. “오나라는 〈興할 만한〉 福이 없고, 초나라는 〈衰할 만한〉 禍가 없습니다.”
懷公이 말했다. “吳나라는 승리하고 초나라 군주는 달아났는데, 禍가 아니고 무엇인가?” 방활은 이렇게 대답했다. “작은 나라에 이런 사태가 있어도 오히려 회복할 수 있는데, 하물며 큰 나라이겠습니까? 초나라가 德은 없지만 그래도 백성을 마구 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吳나라는 날마다 전쟁으로 피폐해져서 군사의 시체가 들판에 잡초처럼 버려져 있으니, 덕을 보인 것이 없습니다. 하늘이 아마 초나라를 바르게 훈계하는 것인 듯합니다. 禍가 오나라로 가는 데 얼마나 걸리겠습니까.”이에 陳侯가 그 말을 따랐다.
4. 善吾者入門而右,不善吾者入門而左。」有中門而立者
桓公立仲父,致大夫曰:「善吾者入門而右,不善吾者入門而左。」有中門而立者,桓公問焉。對曰:「管子之知,可與謀天下,其強可與取天下。君恃其信乎?內政委焉;外事斷焉。驅民而歸之,是亦可奪也。」桓公曰:「善。」乃謂管仲:「政則卒歸於子矣,政之所不及,唯子是匡。」管仲故築三歸之臺,以自傷於民。
齊 桓公이 管仲을 仲父로 세우고 大夫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잘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에 서고, 내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문으로 들어와 왼쪽에 서시오.” 그러자 문의 중앙에 서 있는 이가 있었다.
桓公이 그 까닭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관중의 지혜는 천하의 큰일을 의논할 수 있고, 그의 강함은 천하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그의 誠信을 믿으십니까? 국내의 정치를 그에게 맡기시고, 외교의 일을 그에게 결단케 하시며, 백성을 몰아 그에게 귀의하게 하셨으니, 이런 권력을 좀 빼앗아야 될 것입니다.”
환공이 “좋은 말이다.” 하고, 곧 관중에게 말했다. “정사를 모두 그대에게 돌려주겠소. 그러나 정사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면 다만 그대를 바로잡겠소.” 관중이 이 때문에 三歸臺를 지어 스스로 백성들의 재물에 손해를 끼쳤다.
** 三歸(之臺) 이야기는 논어에 등장한다. 조금 다르게 해석되는 듯하다. 공자는 이를 들어 관자의 사치를 지적한다.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 曰: "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공자께서 "관중의 기량은 작도다!"라고 하시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관중은 검소하였습니까?"라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관씨는 집을 세 군데나 가지고 있었고 그의 가신들은 수가 많아 관직을 겸직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검소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셨다. _ 논어 八佾(팔일)
** 마지막 문장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제환공이 관중의 권력을 제한하여야 한다는 간언을 듣는다. -> 간언에 동의하면서도 정사를 관중에게 그대로 돌려주면서, 잘못되면 관중만을 바로 잡겠다고 한다. -> 관중은 그 때문에 삼귀대를 건축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 백성들에게 손해를 끼친다?
5. 望得壽於大王,望得富於大王,望得貴於大王
<이는 대왕에게서 長壽함과 부유함과 존귀함을 얻기를 바란 것입니다.>
齊宣王出獵於社山,社山父老十三人相與勞王,王曰:「父老苦矣!」謂左右賜父老田不租,父老皆拜,閭丘先生不拜。王曰:「父老以為少耶?」謂左右復賜父老無徭役,父老皆拜,閭丘先生又不拜。王曰:「拜者去,不拜者前。」曰:「寡人今觀父老幸而勞之,故賜父老田不租,父老皆拜,先生獨不拜,寡人自以為少,故賜父老無徭役,父老皆拜,先生又獨不拜,寡人得無有過乎?」閭丘先生對曰:「惟聞大王來遊,所以為勞大王,望得壽於大王,望得富於大王,望得貴於大王。」王曰:「天殺生有時,非寡人所得與也,無以壽先生;倉廩雖實,以備災害,無以富先生;大官無缺,小官卑賤,無以貴先生。」閭丘先生對曰:「此非人臣所敢望也。願大王選良富家子,有修行者以為吏,平其法度,如此臣少可以得壽焉;春秋冬夏,振之以時,無煩擾百姓,如是臣可少得以富焉;願大王出令,令少者敬長,長者敬老,如是臣可少得以貴焉;今大王幸賜臣田不租,然則倉廩將虛也。賜臣無徭役,然則官府無使焉,此固非人臣之所敢望也。」齊王曰:「善。願請先生為相。」
齊 宣王이 社山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사산에 사는 13명의 노인들이 서로 선왕을 위로하였다. 선왕은 “노인들이 고생하는구려.” 하고는, 측근의 관리에게 “노인들에게 田稅를 징수하지 않는 혜택을 주라.” 하였다. 노인들은 모두 사례하였으나 閭丘先生만 사례하지 않았다. 宣王은 “노인들은 혜택이 적다고 여기는 것이오?” 하고는 측근의 관리에게 “다시 노인들에게 勞役을 면제하는 혜택을 주라.” 하였다. 노인들은 모두 사례하였으나 여구선생만 또 사례하지 않았다.
宣王은 “사례한 사람은 가고 사례하지 않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하고, 이어서 “寡人이 오늘 와서 보니 노인들이 사랑으로 위로하기 때문에 노인들의 田稅를 면제하는 혜택을 주었소. 노인들이 모두 사례하였으나 선생만 또 사례하지 않았으니, 寡人에게 혹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오?” 하였다. 여구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대왕께서 이곳에 와 사냥하신다고 들었기에 대왕을 위로한 것이니, 이는 대왕에게서 長壽함과 부유함과 존귀함을 얻기를 바란 것입니다.”
선왕이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은 정해진 때가 있어 寡人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선생을 장수하게 할 수가 없고, 창고가 가득 찼으나 재해를 방비하는 데 쓰는 것이니 선생을 부유하게 할 수가 없고, 높은 관직은 결원이 없고 낮은 벼슬은 卑賤하니 선생을 존귀하게 할 수가 없소.” 이에 여구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는 臣이 감히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왕께서는 선량한 부자 집안의 자제 중에 행실을 수양한 자를 뽑아 관리로 삼아서 법도를 공평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신이 조금은 장수함을 얻을 것입니다. 봄‧가을‧겨울‧여름에 때에 맞게 구휼하시어 백성을 번거롭고 소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신이 조금은 부유함을 얻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명령을 내리시어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고 어른은 노인을 공경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이 하시면 신이 조금은 존귀함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 신들에게 田稅를 면제하는 혜택을 주셨는데 그렇게 하면 창고가 비게 되고, 신들에게 노역을 면제하는 혜택을 주셨는데 그렇게 하면 官府에 부릴 사람이 없게 되니, 이것은 진실로 신들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제 선왕은 “좋은 말이오. 선생을 宰相으로 삼겠소.” 하였다.
6. 此天之所以予漢,乃漢鼎,非周鼎也!
孝武皇帝時,汾陰得寶鼎而獻之於甘泉宮,群臣賀,上壽曰:「陛下得周鼎。」侍中虞丘壽王獨曰:「非周鼎。」上聞之,召而問曰:「朕得周鼎,群臣皆以為周鼎而壽王獨以為非,何也?壽王有說則生,無說則死。」對曰:「臣壽王安敢無說?臣聞夫周德始產于后稷,長於公劉,大於大王,成於文武,顯於周公,德澤上洞,天下漏泉,無所不通,上天報應,鼎為周出,故名周鼎。今漢自高祖繼周,亦昭德顯行,布恩施惠,六合和同,至陛下之身愈盛,天瑞並至,徵祥畢見。昔始皇帝親出鼎於彭城而不能得。天昭有德,寶鼎自至,此天之所以予漢,乃漢鼎,非周鼎也!」上曰:「善!」群臣皆稱:「萬歲!」是日賜虞丘壽王黃金十斤。
孝武皇帝(漢 武帝) 때에 汾陰 사람이 寶鼎을 얻어 甘泉宮에 바치니, 群臣이 경하하여 祝壽의 술잔을 올리며 “폐하께서 周鼎을 얻으셨습니다.”라 하였다. 그런데 侍中 虞丘壽王만은 “이것은 周鼎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上이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러서 물었다. “짐이 周鼎을 얻어 群臣이 모두 周鼎이라 하는데 壽王만 아니라고 하니, 무엇 때문이오? 수왕 그대에게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살려주겠지만,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죽일 것이오.” 우구수왕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臣 수왕에게 어찌 감히 합당한 이유가 없겠습니까. 臣이 듣자니 周나라의 德은 后稷에게서 나와 公劉에서 자랐고 太王에서 성대해졌으며 文王‧武王에서 완성되고 周公에서 드러났습니다. 덕택(德澤)이 위로는 하늘에 통하고 아래로는 황천에 스며들어 통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늘이 주나라의 德에 보답하여 寶鼎이 주나라를 위해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周鼎이라 했다고 합니다. 지금 漢나라는 高祖로부터 주나라를 계승하여 德을 밝히고 善行을 드러내며 은혜를 널리 베푸시니, 천지 사방이 다 같이 화목하여 폐하의 몸에 이르러 더욱 성대해졌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주는 祥瑞가 겸하여 오고 좋은 징조가 모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전에 始皇帝는 彭城에서 직접 寶鼎을 발굴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했으니, 하늘이 德이 있는 이에게 복을 주어 寶鼎이 저절로 온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한나라에 준 것이니, 바로 한나라 寶鼎이지 周鼎이 아닙니다.” 上이 “좋은 말이다.” 하니, 群臣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날 우구수왕에게 황금 열 근을 하사하였다.
7. 食肉者已慮之矣,藿食者尚何與焉?
<고기를 먹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고려하고 있는데, 나물을 먹는 백성이 어찌 참여하겠는가.’>
晉獻公之時,東郭民有祖朝者,上書獻公曰:「草茅臣東郭民祖朝,願請聞國家之計。」獻公使使出告之曰:「肉食者已慮之矣。藿食者尚何與焉?」祖朝對曰:「大王獨不聞古之將曰桓司馬者,朝朝其君,舉而宴,御呼車,驂亦呼車,御肘其驂曰:『子何越云為乎?何為藉呼車?』驂謂其御曰:『當呼者呼,乃吾事也,子當御正子之轡銜耳。子今不正轡銜,使馬卒然驚,妄轢道中行人,必逢大敵,下車免劍,涉血履肝者固吾事也。子寧能辟子之轡,下佐我乎?其禍亦及吾身,與有深憂,吾安得無呼車乎?』今大王曰:『食肉者已慮之矣,藿食者尚何與焉?』設使食肉者一旦失計於廟堂之上,若臣等藿食者,寧得無肝膽塗地於中原之野與?其禍亦及臣之身。臣與有其憂深。臣安得無與國家之計乎?」獻公召而見之,三日與語,無復憂者,乃立以為師也。
晉 獻公 때 城 동쪽에 사는 祖朝라는 백성이 있어서 獻公에게 上書하여 말했다. “미천한 저는 城 동쪽에 사는 祖朝라는 백성인데, 국가에 대한 계책을 듣기를 원합니다.” 헌공이 使者를 내보내 일러주게 하였다. “고기를 먹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고려하고 있는데, 나물을 먹는 일반 백성이 어찌 참여하겠는가.”
조조가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유독 桓司馬라는 옛 장군의 일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가 아침 일찍 임금을 뵈러 갈 때 수레 준비가 늦어 마부가 수레를 불렀는데 驂乘이 또 수레를 부르자 마부가 참승을 팔꿈치로 찌르면서 ‘그대는 어찌 越權을 하는 거요? 어찌 거듭 수레를 부르는 것이오?’ 하였습니다. 참승이 마부에게 ‘당연히 불러야 될 사람을 부르는 것은 본래 나의 일이고, 그대는 그대의 말고삐와 재갈을 바르게 잡고 수레를 몰 뿐이오. 그대가 만일 말고삐와 재갈을 바르게 잡지 않았다가 말이 갑자기 놀라기라도 하면 길을 가는 사람을 함부로 치어 죽일 것이오. 만약 敵을 만나서 수레에서 내려 劍을 뽑아 땅에 흘린 피와 간을 밟으며 싸우는 것은 본래 나의 일이오. 그대는 어찌 그대의 말고삐를 놓고 수레에서 내려 나를 도울 수 있겠소? 그러면 그 禍가 내 몸에까지 미치게 되어 함께 깊은 근심이 있을 텐데, 내 어찌 수레를 부르지 않을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고기를 먹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고려하고 있는데, 나물을 먹는 백성이 어찌 참여하겠는가.’ 하셨습니다. 가령 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어느 날 조정에서 계책을 잘못 세우면 저와 같이 나물을 먹는 사람들은 어찌 中原의 들판에서 전투하다 죽어 간과 쓸개로 땅을 적시는 일이 없겠습니까. 그 禍가 저의 몸에 미치게 되어 저도 함께 깊은 근심이 있을 텐데, 臣이 어떻게 국가의 계책에 참여하지 않겠습니까?” 헌공이 그를 불러 만나서 3일 동안 함께 말을 나누었을 때 다시 근심할 일이 없자, 마침내 임명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8. 夫說者固以其所知,諭其所不知,而使人知之
<어떤 일을 설명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본래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일을 비유해 말하여 그 사람이 알도록 합니다>
客謂梁王曰:「惠子之言事也善譬,王使無譬,則不能言矣。」王曰:「諾。」明日見,謂惠子曰:「願先生言事則直言耳,無譬也。」惠子曰:「今有人於此而不知彈者,曰:『彈之狀何若?』應曰:『彈之狀如彈。』諭乎?」王曰:「未諭也。」「於是更應曰:『彈之狀如弓而以竹為弦。』則知乎?」王曰:「可知矣。」惠子曰:「夫說者固以其所知,諭其所不知,而使人知之。今王曰無譬則不可矣。」王曰:「善。」
客이 梁王에게 말했다. “惠子가 어떤 일을 말할 때 譬喩를 잘하니, 왕께서 비유를 하지 못하게 하시면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양왕은 “좋다.” 하고, 이튿날 혜자를 만나 그에게 말했다. “선생은 어떤 일을 말할 때 직접 말할 뿐, 비유하여 말하지 마시오.”
이에 혜자가 말했다. “만일 여기에 彈弓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 ‘탄궁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는데, 대답하기를 ‘탄궁의 모양이 탄궁같이 생겼다.’라고 하면 이해하겠습니까?” 양왕이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지요.” 혜자가 말했다. “이때 고쳐 대답하기를 ‘탄궁의 모양은 활과 같은데, 대오리로 시위를 만들었다.’라고 하면 알겠습니까?” 양왕이 말했다. “알 수 있겠지요.” 혜자가 다시 말했다. “어떤 일을 설명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본래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일을 비유해 말하여 그 사람이 알도록 합니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 ‘비유를 쓰지 말라.’고 하시니, 이는 옳지 않습니다.” 양왕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9. 縷因針而入,不因針而急,嫁女因媒而成,不因媒而親
孟嘗君寄客於齊王,三年而不見用,故客反謂孟嘗君曰:「君之寄臣也,三年而不見用,不知臣之罪也?君之過也?」孟嘗君曰:「寡人聞之,縷因針而入,不因針而急,嫁女因媒而成,不因媒而親。夫子之材必薄矣,尚何怨乎寡人哉?」客曰:「不然,臣聞周氏之嚳,韓氏之盧,天下疾狗也。見菟而指屬,則無失菟矣;望見而放狗也,則累世不能得菟矣!狗非不能,屬之者罪也。」孟嘗君曰:「不然,昔華舟杞梁戰而死,其妻悲之,向城而哭,隅為之崩,城為之,君子誠能刑於內,則物應於外矣。夫土壤且可為忠,況有食穀之君乎?」客曰:「不然,臣見鷦鷯巢於葦苕,著之髮毛,建之女工不能為也,可謂完堅矣。大風至,則苕折卵破子死者,何也?其所託者使然也。且夫狐者人之所攻也,鼠者人之所燻也。臣未嘗見稷狐見攻,社鼠見燻也,何則?所託者然也。」於是孟嘗君復屬之齊,齊王使為相。
孟嘗君이 어떤 賓客을 齊王에게 추천했는데, 3년이 되어도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빈객이 돌아와 맹상군에게 말했다. “主君이 저를 추천하여 3년이 되어도 등용되지 못했으니, 저의 죄입니까? 주군의 잘못입니까? 이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맹상군이 말했다. “寡人은 들으니, 실은 바늘에 의지하여 옷 속으로 들어가지만 바늘에 의지하여 긴요함이 되는 것은 아니며, 딸을 시집보낼 적에 중매쟁이를 통하여 婚事가 이루어지지만 중매쟁이를 통하여 부부가 친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오. 그대의 재능이 필시 낮아서 그럴 텐데, 어찌 과인을 원망한단 말이오?”
빈객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자니, 周氏의 嚳과 韓氏의 盧는 천하에서 아주 빠른 개입니다. 주인이 토끼를 보고 바로 지적하면 토끼를 놓치지 않지만, 토끼를 멀리서 바라보며 개를 풀어놓으면 여러 代가 되어도 토끼를 잡지 못합니다. 이는 개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적하는 주인의 잘못입니다.”
맹상군이 다시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예전에 華舟와 杞梁이 전쟁을 하다가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슬퍼하여 城을 향하여 哭하자, 그 때문에 城의 귀퉁이가 허물어지고 城壁이 무너졌소. 君子가 진실로 마음을 禮法으로 이끌면 사물이 밖에서 반응하는 것이오. 저 흙으로 쌓은 담도 忠心에 감동하는 법인데, 더구나 곡식을 먹는 군주이겠소.”
빈객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니 뱁새가 갈대 이삭에 둥지를 틀면서 터럭으로 부착하여 정교하게 지으면 공교한 女工도 그렇게 만들 수 없으니, 완전하고 견고하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불어오면 갈대 이삭이 부러져 알이 깨지고 새끼가 죽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몸을 의탁한 곳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여우는 사람들이 잡아 죽이는 것이고, 쥐는 사람들이 불을 태워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稷廟에 서식하는 여우가 잡혀 죽고 社廟에 숨어 있는 쥐가 불태워지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몸을 의탁한 곳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에 맹상군이 다시 그를 제왕에게 부탁하니, 제왕이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10. 夫善亦有道,而遇亦有時,
<사람과 사람이 잘 사귀는 데도 道가 있고, 서로 만나는 데도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陳子說梁王,梁王說而疑之曰:「子何為去陳侯之國而教小國之孤於此乎?」陳子曰:「夫善亦有道,而遇亦有時,昔傅說衣褐帶劍,而築於秕傳之城,武丁夕夢,旦得之,時王也;寧戚飯牛,康衢擊車輻而歌,顧見桓公得之,時霸也;百里奚自賣五羊之皮,為秦人虜,穆公得之,時強也。論若三子之行,未得為孔子駿徒也。今孔子經營天下,南有陳蔡之阨,而北干景公,二坐而五立,未嘗離也。孔子之時不行,而景公之時怠也。以孔子之聖,不能以時行,說之怠,亦獨能如之何乎?」
陳子가 梁王에게 遊說하자, 양왕이 그를 기뻐하면서도 의심하여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陳侯의 나라를 떠나 이곳에 와서 작은 나라 임금인 나를 가르치는 거요?” 진자가 말했다.
“사람과 사람이 잘 사귀는 데도 道가 있고, 서로 만나는 데도 시기가 있는 법입니다. 예전에 傅說은 거친 옷을 입고 허리에 새끼줄을 매고서 秕傅의 城을 쌓았는데, 武丁이 밤에 꿈에서 보고 아침에 찾아 당시에 王業을 이루었고, 甯戚은 큰길가에서 남의 소를 먹이다가 수레 바퀴통을 두드리면서 〈碩鼠〉를 노래했는데 齊 桓公이 얻어서 당시에 霸業을 이루었으며, 百里奚는 양가죽 다섯 장에 자신을 팔아 秦나라 사람의 노예가 되었는데 秦 穆公이 얻어서 당시에 강력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만일 이 세 사람의 행실을 논한다면 孔子의 걸출한 門徒는 될 수 없습니다. 지금 공자는 천하를 경영하시어 남쪽에 가서는 陳나라와 蔡나라에서 곤경을 당한 일이 있고, 북쪽에 가서는 齊 景公에게 뵙기를 청하여 세 번 앉아서 말하고 다섯 번 서서 말씀하시면서 일찍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공자는 당시에 도를 행하지 못했고, 景公은 당시에 권태를 느꼈습니다. 공자 같은 聖人도 당시에 권태를 느끼는 경공에게 유세를 시행하지 못했는데, 저 같은 사람이 홀로 어찌하겠습니까?"
11. 今臣居廣廷,作色端辯,以犯主君之怒,前雖有乘軒之賞,未為之動也;後雖有斧質之威,未為之恐也;此既之所以為勇悍也.
<지금 臣이 넓은 조정에 있으면서 안색을 엄숙히 하고 말을 바르게 하여 主君의 노여움을 범하고 있으니, 제 앞에 軒車를 타는 상을 내리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제 뒤에 도끼와 모탕으로 형벌하는 위협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용감하고 사나운 이유입니다.>
林既衣韋衣而朝齊景公,齊景公曰:「此君子之服也?小人之服也?」林既逡巡而作色曰:「夫服事何足以端士行乎?昔者荊為長劍危冠,令尹子西出焉;齊短衣而遂偞之冠,管仲隰朋出焉;越文身剪髮,范蠡大夫種出焉;西戎左衽而椎結,由余亦出焉。即如君言,衣狗裘者當犬吠,衣羊裘者當羊鳴,且君衣狐裘而朝,意者得無為變乎?」景公曰:「子真為勇悍矣,今未嘗見子之奇辯也。一鄰之鬥也,千乘之勝也。」林既曰:「不知君之所謂者何也?夫登高臨危而目不眴,而足不陵者,此工匠之勇悍也;入深淵,刺蛟龍,抱黿鼉而出者,此漁夫之勇悍也;入深山,刺虎豹,抱熊羆而出者,此獵夫之勇悍也;不難斷頭,裂腹暴骨,流血中流者,此武士之勇悍也。今臣居廣廷,作色端辯,以犯主君之怒,前雖有乘軒之賞,未為之動也;後雖有斧質之威,未為之恐也;此既之所以為勇悍也。」
林旣가 가죽옷을 입고 齊 景公을 朝見하자, 제 경공이 물었다. “이 옷은 君子의 복장이오? 小人의 복장이오?” 임기는 뒤로 물러나 안색을 바꾸면서 말했다.
“복장을 가지고 어떻게 선비의 품행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옛날 荊(楚)나라는 긴 劍을 차고 높은 冠을 썼으나 令尹 子西가 나왔고, 齊나라는 짧은 옷에 遂偞冠을 썼지만 管仲과 隰朋이 나왔으며, 越나라는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잘랐으나 范蠡와 大夫 種이 나왔고, 西戎은 앞섶을 왼쪽으로 여미고 몽치 같은 상투를 하였으나 由余가 또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만일 임금께서 하신 말씀과 같다면 개가죽 갖옷을 입은 사람은 응당 개처럼 짖어야 하고, 양가죽 갖옷을 입은 사람은 응당 양처럼 울어야 합니다. 또 임금께서 여우 갖옷을 입고 조회를 보시니, 아마도 그렇게 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경공이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용감하고 사납구나! 나는 지금 그대가 말한 것 같은 기이한 변론은 듣지 못했다. 〈그대의 용감함과 사나움은〉 이웃 사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냐? 千乘의 國君과 싸워 이기는 것이냐?”
임기가 말했다. “임금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높은 데 올라 위험한 곳에 있으면서도 눈이 어지럽지 않고 다리가 떨리지 않는 것은 바로 工匠의 용감함과 사나움이고, 깊은 못 속에 들어가 蛟龍을 찔러 죽이고 자라와 악어를 잡아 나오는 것은 漁夫의 용감함과 사나움이며, 깊은 산중에 들어가 범과 표범을 찔러 죽이고 곰과 말곰을 잡아오는 것은 사냥꾼의 용감함과 사나움이고, 머리가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들판에 해골이 나뒹굴고 피를 흘리는 것은 武士의 용감함과 사나움입니다.
지금 臣이 넓은 조정에 있으면서 안색을 엄숙히 하고 말을 바르게 하여 主君의 노여움을 범하고 있으니, 제 앞에 軒車를 타는 상을 내리더라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제 뒤에 도끼와 모탕으로 형벌하는 위협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용감하고 사나운 이유입니다.”
(* 진정한 용기란, 누구와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감투 정신이 아니라, 자신의 직무나 사명을 위해 유혹이나 위협에 꺽이지 않고 소신을 지키며 처신하는 것이라는 가르침.)
12. 前車覆,後車戒
魏文侯與大夫飲酒,使公乘不仁為觴政曰:「飲不釂者浮以大白。」文侯飲而不盡釂,公乘不仁舉曰浮君。君視而不應,侍者曰:「不仁退,君已醉矣。」公乘不仁曰:「周書曰:『前車覆,後車戒。』蓋言其危,為人臣者不易,為君亦不易。今君已設令,令不行,可乎?」君曰:「善。」舉白而飲,飲畢曰:「以公勝不仁為上客。」
魏 文侯가 大夫들과 함께 술을 마실 적에 公乘不仁을 시켜 술 마시는 규정을 만들게 하고서 말하였다. “술잔의 술을 다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큰 술잔으로 罰酒를 주겠다.” 文侯가 술을 마시면서 술잔의 술을 다 마시지 않자, 공승불인이 큰 술잔을 들어 문후에게 벌주를 주니, 문후가 보기만 하고 응하지 않았다. 시종하는 사람이 말했다. “不仁은 물러나시오. 군주께서 이미 취하셨소.”
공승불인이 말했다. “《書經》 〈周書〉에 말하기를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지면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로 삼는다.’ 하였으니, 앞의 위험을 예방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하 노릇이 쉽지 않고, 임금 노릇도 쉽지 않습니다. 지금 임금께서 이미 酒令을 만드셨으면서 임금께서 주령을 시행하지 않으시면 되겠습니까?” 文侯는 “좋은 말이오.” 하고는, 큰 술잔을 들어 다 마시고 나서 말했다. “公乘不仁을 上客으로 삼겠다.”
13. 願以壯少之禮謹受命
襄成君始封之日,衣翠衣,帶玉劍,履縞舄,立於遊水之上,大夫擁鍾錘,縣令執桴號令,呼:「誰能渡王者於是也?」楚大夫莊辛,過而說之,遂造託而拜謁,起立曰:「臣願把君之手,其可乎?」襄成君忿作色而不言。莊辛遷延沓手而稱曰:「君獨不聞夫鄂君子皙之汎舟於新波之中也?乘青翰之舟,極䓣芘,張翠蓋而㩉犀尾,班麗褂衽,會鍾鼓之音,畢榜枻越人擁楫而歌,歌辭曰:『濫兮抃草濫予昌枑澤予昌州州𩜱州焉乎秦胥胥縵予乎昭澶秦踰滲惿隨河湖。』鄂君子皙曰:『吾不知越歌,子試為我楚說之。』於是乃召越譯,乃楚說之曰:『今夕何夕搴中洲流,今日何日兮,得與王子同舟。蒙羞被好兮,不訾詬恥,心幾頑而不絕兮,知得王子。山有木兮木有枝,心說君兮君不知。』於是鄂君子皙乃㩉脩袂,行而擁之,舉繡被而覆之。鄂君子皙,親楚王母弟也。官為令尹,爵為執珪,一榜枻越人猶得交歡盡意焉。今君何以踰於鄂君子皙,臣何以獨不若榜枻之人,願把君之手,其不可何也?」襄成君乃奉手而進之,曰:「吾少之時,亦嘗以色稱於長者矣。未嘗過僇如此之卒也。自今以後,願以壯少之禮謹受命。」
襄成君이 처음 受封하는 날 비취색 옷을 입고 玉劍을 차고 흰 비단신을 신고서 물가에 서 있었다. 大夫들은 鍾의 추를 끼고 縣令은 북채를 잡고 호령하면서 누가 왕을 건너 드리겠느냐고 고함쳐 불렀다. 이때 楚나라 大夫 莊辛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양성군의 미모를 보고 기뻐하여 마침내 핑계하는 말을 만들어 배알하고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君主의 손을 잡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양성군이 분노한 안색을 지으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장신이 몇 걸음 물러나와 손을 씻고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홀로 鄂君子晳이 봄에 새롭게 이는 물결 속에서 배를 탔던 일을 듣지 못했습니까? 靑翰의 배를 타면서 風雨를 가리는 장막을 세우고 푸른색 깃털로 장식한 일산을 펼치며 무소 꼬리를 들고 무늬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는데, 鍾鼓의 연주를 마치는 것에 맞춰 배를 부리는 越人이 노를 잡고 노래를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濫兮抃草濫予昌𣐙澤予昌州州𩜱州焉乎秦胥胥縵予乎昭澶秦踰滲惿隨河湖’ 악군 자석이 ‘나는 越나라 가요를 모르니, 그대는 나를 위하여 楚나라 말로 해석해주시오.’ 하였습니다. 이에 곧 월나라 사람을 불러 통역하였더니, 마침내 초나라 말로 다음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오늘 밤은 무슨 밤인가? 하수 가운데 배를 젓는다네. 오늘은 무슨 날인가? 王子와 함께 배를 탔다네. 맛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받음이여, 남이 비웃는데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네. 내 마음 미련하여 단절하지 못하나, 王子를 알게 되었네. 산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에는 가지가 있네. 나는 마음으로 그대를 좋아하건만, 그대는 내 마음 알지 못하네.’ 이때 악군 자석은 긴소매를 휘날리며 달려가 그를 포옹하고 수놓은 비단 이불을 들어 그를 덮어주었습니다. 악군 자석은 楚王의 친아우입니다.
벼슬은 令尹이고 작위는 執珪이건만, 배를 부리는 일개 越人도 오히려 마음을 다해 즐겁게 사귀었는데, 지금 군주는 악군 자석보다 무엇이 나으며, 저는 유독 배를 부리는 월인보다 무엇이 못합니까? 군주의 손을 잡고 싶은데 안 된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양성군이 곧 손을 받들어 내밀면서 말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미모로 어른들에게 칭찬을 들었고, 갑자기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한 적은 없었소. 지금 이후로는 젊은이의 예절로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14. 譽之猶摩蕭斧而伐朝菌
<비유하자면 잘 벼른 도끼로 아침에 난 버섯을 베는 것과 같다.>
雍門子周以琴見乎孟嘗君。孟嘗君曰:「先生鼓琴亦能令文悲乎?」雍門子周曰:「臣何獨能令足下悲哉?臣之所能令悲者,有先貴而後賤,先富而後貧者也。不若身材高妙,適遭暴亂,無道之主,妄加不道之理焉;不若處勢隱絕,不及四鄰,詘折儐厭,襲於窮巷,無所告愬;不若交歡相愛無怨而生離,遠赴絕國,無復相見之時;不若少失二親,兄弟別離,家室不足,憂蹙盈。當是之時也,固不可以聞飛鳥疾風之聲,窮窮焉固無樂已。凡若是者,臣一為之徽膠援琴而長太息,則流涕沾衿矣。今若足下千乘之君也,居則廣廈邃房,下羅帷,來清風,倡優侏儒處前選進而諂諛;燕則鬥象棋而舞鄭女,激楚之切風,練色以淫目,流聲以虞耳;水遊則連方舟,載羽旗,鼓吹乎不測之淵;野遊則馳騁弋獵乎平原廣囿,格猛獸;入則撞鍾擊鼓乎深宮之中。方此之時,視天地曾不若一指,忘死與生,雖有善琴者,固未能令足下悲也。」孟嘗君曰:「否!否!文固以為不然。」雍門子周曰:「然臣之所為足下悲者一事也。夫聲敵帝而困秦者君也;連五國之約,南面而伐楚者又君也。天下未嘗無事,不從則橫,從成則楚王,橫成則秦帝。楚王秦帝,必報讎於薛矣。夫以秦、楚之強而報讎於弱薛,譽之猶摩蕭斧而伐朝菌也,必不留行矣。天下有識之士無不為足下寒心酸鼻者。千秋萬歲後,廟堂必不血食矣。高臺既以壞,曲池既以漸,墳墓既以下而青廷矣。嬰兒豎子樵採薪蕘者,蹢躅其足而歌其上,眾人見之,無不愀焉,為足下悲之曰:『夫以孟嘗君尊貴乃可使若此乎?』」於是孟嘗君泫然泣涕,承睫而未殞,雍門子周引琴而鼓之,徐動宮徵,微揮羽角,切終而成曲,孟嘗君涕浪汗增,欷而就之曰:「先生之鼓琴令文立若破國亡邑之人也。」
雍門子周가 琴을 가지고 孟嘗君을 뵙자, 맹상군이 말했다. “선생이 琴을 연주하여 나를 슬프게 할 수 있겠소?” 옹문자주가 대답했다.
“제가 어찌 당신을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슬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에는 顯貴하다가 뒤에 卑賤하고, 전에는 부유하다가 뒤에 가난한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품행과 재능이 높고 출중하되 마침 포악하고 무도한 군주를 만나 함부로 무리한 대우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궁벽하고 고립된 환경에 처하여 사방의 이웃 사람들과 왕래하지 않아 좌절하고 배척과 억압을 당하여 곤궁한 골목에 은거하면서 하소연할 데가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여 원한이 없는데 생이별을 하고 아주 먼 타국에 나가 다시 서로 만날 기회가 없거나, 아니면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형제와 이별하며 가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근심과 슬픔이 가슴속에 가득 찬 경우입니다.
이런 때에는 본래 날아가는 새와 빠른 바람 소리도 들을 수가 없으니, 지극히 곤궁하여 진실로 즐거움이란 없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은, 제가 한번 이들을 위하여 琴을 끌어당겨 弦을 조율하고 琴을 연주하면서 길게 탄식하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고 맙니다. 지금 당신 같은 경우는 千乘의 君主입니다. 거처는 넓은 집과 깊숙한 방에 비단 휘장을 드리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노래하고 춤추는 광대들이 앞에서 번갈아 아첨을 합니다. 한가할 때에는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鄭나라 여인의 춤을 보고 높고 낭랑한 楚나라 민요를 들으며, 女色을 뽑아 눈을 방탕하게 하고 흐르는 노랫소리로 귀를 즐겁게 합니다. 물에서 놀 적에는 배를 나란히 연결하고 깃털로 꾸민 旗를 꽂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못 위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들에서 놀 적에는 평탄한 들과 넓은 園囿에서 말을 달리며 사냥하여 맹수를 쳐서 죽이며, 집에 들어오면 깊은 궁중에서 종을 치고 북을 울리며 즐깁니다. 이 당시에 天地를 손가락 하나만도 못하게 여겨서 죽고 사는 것을 잊었을 것이니, 琴을 아무리 잘 연주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진실로 슬프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에 맹상군은 말했다. “아니오, 아니오. 나는 본래 이렇게 하지 않았소.” 옹문자주가 말했다.
“그러나 제가 당신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한 가지 일입니다. 명성이 帝王과 필적하여 秦나라를 곤란하게 한 사람은 君主(孟嘗君)요, 다섯 나라와 연합하여 남쪽을 향해 楚나라를 토벌한 사람도 군주입니다. 천하는 無事할 때가 없어서 合縱하지 않으면 連橫하니, 합종을 하면 초나라가 王을 일컫고, 연횡을 하면 진나라가 帝를 일컬을 것입니다. 초나라가 王을 일컫고 진나라가 帝를 일컫게 되면 반드시 薛에 복수할 것입니다. 강력한 진나라와 초나라가 약소한 薛에 복수할 경우에 이를 비유하면 날카로운 도끼를 갈아 아침에 난 버섯을 베는 일과 같아서 반드시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의 식견이 있는 인사들 중에는 당신을 위해 마음이 처량하고 코가 시큰거리지 않을 사람이 없고,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필시 사당에서 제사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높은 누대는 이미 무너지고 굽은 연못은 벌써 메워지며 무덤은 이미 평지가 되어 푸른 풀만 자라 어린아이와 아이종과 나무하고 꼴을 베는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노래를 부를 겁니다. 여러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고 서글피 당신을 위해 슬퍼하면서 이렇게 말할 겁니다. ‘맹상군의 존귀함으로써 마침내 이처럼 되게 하였는가?’”
이에 맹상군이 눈물을 흘렸으나 눈썹에 맺히고 떨어지지는 않았다. 옹문자주가 琴을 끌어당겨 연주하면서 宮聲과 徵聲으로 느리게 연주하다가 羽聲과 角聲으로 가볍게 휘몰아 한 곡조의 연주를 마치자, 맹상군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더욱 탄식하면서 옹문자주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琴 연주가 나를 즉시 국가가 파멸하고 封邑이 망한 사람 같게 하는구려.”
15. 吾聞上士可以託色,中士可以託辭,下士可以託財
<내 듣자니 上士는 안색만으로 몸을 의탁할 수 있고, 中士는 말로 몸을 의탁할 수 있으며, 下士는 재물로 몸을 의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蘧伯玉使至楚,逢公子皙濮水之上,子皙接草而待曰:「敢問上客將何之?」蘧伯玉為之軾車。公子皙曰:「吾聞上士可以託色,中士可以託辭,下士可以託財,三者固可得而託身耶?」蘧伯玉曰:「謹受命。」蘧伯玉見楚王,使事畢,坐談話,從容言至於士。楚王曰:「何國最多士?」蘧伯玉曰:「楚最多士。」楚王大悅。蘧伯玉曰:「楚最多士而楚不能用。」王造然曰:「是何言也?」蘧伯玉曰:「伍子胥生於楚,逃之吳。吳受而相之。發兵攻楚,墮平王之墓。伍子胥生於楚,吳善用之。釁蚡黃生於楚,走之晉,治七十二縣,道不拾遺,民不妄得,城郭不閉,國無盜賊,蚡黃生於楚而晉善用之。今者臣之來,逢公子皙濮水之上,辭言『上士可以託色,中士可以託辭,下士可以託財,三者固可得而託身耶?』又不知公子皙將何治也。」於是楚王發使一駟,副使二乘,追公子皙濮水之上,子皙還重於楚,蘧伯玉之力也。故詩曰:「誰能烹魚,溉之釜鬵,孰將西歸,懷之好音。」此之謂也。物之相得,固微甚矣。
蘧伯玉이 楚나라에 使臣으로 갔다가 濮水 가에서 公子 晳을 만났다. 子晳이 풀을 뽑으며 기다리다가 말했다. “감히 묻노니, 貴客은 어느 곳으로 가시는 겁니까?” 거백옥이 수레 앞의 가로 막대를 잡고 몸을 숙이며 敬意를 표하였다. 그러자 공자 석이 말했다. “내 듣자니 上士는 안색만으로 몸을 의탁할 수 있고, 中士는 말로 몸을 의탁할 수 있으며, 下士는 재물로 몸을 의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으로 의탁할 수 있습니까?” 거백옥이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거백옥이 楚王을 뵙고 사신의 일을 마치고 난 뒤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적에 조용히 화제가 士에 대한 말에 이르게 되었다. 초왕이 말했다. “士는 어느 나라에 가장 많지요?” 거백옥이 대답했다. “士는 초나라에 가장 많습니다.”그러자 초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거백옥이 말했다. “士는 초나라에 가장 많지만 초나라가 잘 쓰지 못합니다.” 초왕이 안색을 바꾸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이오?” 하였다.
거백옥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伍子胥는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吳나라로 달아났는데 오나라가 그를 받아들여 재상으로 삼아 군대를 출동시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平王의 무덤을 파헤쳤으니,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오나라가 잘 썼습니다. 釁蚠黃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晉나라로 달아나 72縣을 다스렸는데, 길에 흘린 물건을 줍지 않고 백성들이 함부로 재물을 얻지 않으며, 城郭의 문을 닫지 않아도 나라 안에 도둑이 없었으니, 蚠黃은 초나라에서 태어났으나 진나라가 잘 썼습니다.
지금 제가 초나라에 올 때 공자 석을 복수 가에서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上士는 안색만으로 몸을 의탁할 수 있고, 中士는 말로 몸을 의탁할 수 있으며, 下士는 재물로 몸을 의탁할 수 있으니,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것으로 몸을 의탁할 수 있느냐?’ 하였습니다. 공자 석을 장차 어떻게 처분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초왕이 使者의 駟車 한 채와 副使의 수레 두 채를 파견하여 복수 가에 있는 공자 석을 쫓아가서 돌아오게 하였다. 자석이 돌아와서 초나라에 중용된 것은 거백옥의 공이다. 그래서 《詩經》에 “누가 물고기를 삶으려는가? 솥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누가 서쪽으로 돌아가려는가? 좋은 소식으로 위로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사물이 서로 융합하는 것은 본디 매우 미묘한 것이다.
16. 吾聞小人得位,不爭不義,君子所憂,不救不祥
叔向之弟羊舌虎善樂達,達有罪於晉,晉誅羊舌虎,叔向為之奴。既而祁奚曰:「吾聞小人得位,不爭不義,君子所憂,不救不祥。」乃往見范桓子而說之曰:「聞善為國者,賞不過;刑不濫。賞過則懼及淫人;刑濫則懼及君子。(與不幸而過),寧過而賞淫人,無過而刑君子,故堯之刑也,殛鯀於羽山而用禹;周之刑也,僇管、蔡而相周公,不濫刑也。」桓子乃命吏出叔向,救人之患者,行危苦而不避煩辱,猶不能免。今祁奚論先王之德而叔向得免焉,學豈可已哉?
叔向의 아우 羊舌虎가 欒逞과 친하게 지냈는데, 난영이 晉나라에서 죄를 지으니, 진나라는 양설호를 죽이고 숙향을 노예로 삼았다. 얼마 후에 祁奚가 말했다. “나는 들으니, 小人이 높은 지위를 얻었을 적에 가서 諫爭하지 않으면 義롭지 못하고, 君子가 憂患이 있을 적에 가서 구원하지 않으면 상서롭지 못하다 하였다.”
그러고는 곧 范桓子를 찾아가서 그를 만나 설득하였다. “나는 들으니,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賞을 지나치게 주지도 않고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상을 지나치게 주면 사악한 사람에게 주어질까 걱정되고,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면 군자에게 시행될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행하여 지나친 경우에는 차라리 사악한 사람에게 지나친 상이 주어져야지, 군자에게 지나친 형벌이 시행됨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堯임금의 형벌은 羽山에서 鯀을 죽였으나 禹를 등용하였고, 周나라의 형벌은 管叔과 蔡叔을 죽였으나 周公을 재상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러자 범환자는 즉시 관리에게 명하여 숙향을 석방시켰다. 남의 우환을 구원하는 사람은 위험하고 괴로운 행위를 하여 번거롭고 치욕스런 일을 회피하지 않아도 오히려 그 사람을 우환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기해는 先王의 德政을 논하여 숙향의 우환을 면하게 하였으니, 학문의 講習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
17. 此張生之所謂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者也
<이것이 바로 장선생이 말한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한다는 방법이구나!>
張祿掌門,見孟嘗君曰:「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為之有道,君亦知之乎?」孟嘗君曰:「衣新而不舊,則是脩也。倉庾盈而不虛,則是富也。為之奈何?其說可得聞乎?」張祿曰:「願君貴則舉賢,富則振貧,若是則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矣。」孟嘗君以其言為然,說其意,辯其辭,明日使人奉黃金百斤,文織百純,進之張先生。先生辭而不受。後先生復見孟嘗君。孟嘗君曰:「前先生幸教文曰:『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為之有說,汝亦知之乎?』文竊說教,故使人奉黃金百斤,文織百純,進之先生,以補門內之不贍者,先生曷為辭而不受乎?」張祿曰:「君將掘君之偶錢,發君之庾粟以補士,則衣弊履穿而不贍耳。何暇衣新而不舊,倉瘐盈而不虛乎?」孟嘗君曰:「然則為之奈何?」張祿曰:「夫秦者四塞之國也。遊宦者不得入焉。願君為吾為丈尺之書,寄我與秦王,我往而遇乎,固君之入也。往而不遇乎,雖人求間謀,固不遇臣矣。」孟嘗君曰:「敬聞命矣。」因為之書,寄之秦王,往而大遇。謂秦王曰:「自祿之來入大王之境,田疇益辟,吏民益治,然而大王有一不得者,大王知之乎?」王曰:「不知。」曰:「夫山東有相,所謂孟嘗君者,其人賢人,天下無急則已,有急則能收天下雄俊之士,與之合交連友者,疑獨此耳。然則大王胡不為我友之乎?」秦王曰:「敬受命。」奉千金以遺孟嘗君,孟嘗君輟食察之而寤曰:「此張生之所謂衣新而不舊,倉庾盈而不虛者也。」
張祿이 孟嘗君의 집에 가 그를 만나 말하였다.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하는 데 방법이 있으니, 主君은 알고 있습니까?” 이에 맹상군은 물었다.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는 것은 바로 잘 수선한 결과이고,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비지 않는 것은 바로 부유한 결과이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그 설명을 들을 수 있겠나?”
장녹이 설명하였다. “주군께서는 존귀하면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부유하면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십시오. 이렇게 하시면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을 것이며,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맹상군은 그의 말을 옳다고 여겨 그 의견을 좋아하고, 그 말이 분명하다 하여 그 이튿날 사람을 보내 황금 백 근과 文織 백 純을 장선생에게 드렸는데, 선생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뒤에 장선생이 다시 맹상군을 만났는데 맹상군이 말했다. “전에 선생이 나를 가르치기를,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하는 데에 일러줄 방법이 있으니, 당신은 이를 알고 있는가?’ 하기에 나는 그 가르침을 좋아하였소.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 황금 백 근과 文織 백 純을 선생에게 드려 집안의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사람을 도우려 하였는데, 선생은 어찌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소?”
이에 장녹이 말했다. “주군의 재물창고에 쌓아둔 돈을 다 긁어내고, 주군의 곡식창고에 저장한 곡식을 열어서 선비들을 도우려면 옷이 해어지고 신발이 뚫어지도록 해도 넉넉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겨를에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가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하겠습니까?” 맹상군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장녹이 대답했다. “저 秦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둘러싸인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벼슬하려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가 없으니, 주군께서 저를 위해 짧은 편지를 써서 저를 秦王에게 寄託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진나라에 가서 예우를 받으면 이는 본래 주군께서 저를 들어가게 도와주신 덕택이고, 진나라에 가서 예우를 받지 못하면 이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해도 본래 신은 예우받지 못할 사람일 것입니다.”
맹상군이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소.” 그러고는 그대로 편지를 써서 장녹을 진왕에게 기탁하였는데, 장녹이 진나라에 가서 크게 예우를 받았다. 이에 장녹이 진왕에게 말했다. “제가 大王의 국경에 들어오니 논밭은 더욱 더 개간되어 있고, 관리와 백성은 더욱 잘 다스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왕께서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얻지 못하신 것이 있으니, 대왕께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진왕이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장녹이 말했다. “山東의 齊나라에 이른바 맹상군이라는 재상이 있으니, 그는 아주 어진 사람입니다. 천하에 긴급한 일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긴급한 일이 발생한다면 천하의 영웅호걸과 뛰어난 인재를 수용하여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친구 관계를 맺을 사람은 아마 이 한 사람뿐일 것입니다. 그러한데 대왕께서는 어찌 저를 통하여 그와 친구가 되려 하지 않습니까?” 진왕이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소.” 하고는 사람을 보내 맹상군에게 千金을 바치게 하였다.
맹상군이 밥을 먹다가 중지하고 자세히 생각하더니 이내 깨닫고는 말했다. “이것이 바로 장선생이 말한 늘 새 옷을 입고 헌 옷을 입지 않으며,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비지 않게 한다는 방법이구나!”
18. 鮒魚曰:『今吾命在盆甕之中耳,乃為我見楚王,決江、淮以溉我,汝即求我枯魚之肆矣。
莊周貧者,往貸粟於魏,文侯曰:「待吾邑粟之來而獻之。」周曰:「乃今者周之來,見道傍牛蹄中有鮒魚焉,大息謂周曰:『我尚可活也?』周曰:『須我為汝南見楚王,決江、淮以溉汝。』鮒魚曰:『今吾命在盆甕之中耳,乃為我見楚王,決江、淮以溉我,汝即求我枯魚之肆矣。』今周以貧故來貸粟,而曰須我邑粟來也而賜臣,即來亦求臣傭肆矣。」文侯於是乃發粟百鍾,送之莊周之室。
莊周가 가난하여 魏 文侯에게 가서 곡식을 꾸어달라고 하자, 魏 文侯가 말했다. “내 封邑에서 나오는 곡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보내주겠소.”
장주가 말했다. “지금 제가 이리로 올 적에 길 곁의 소 발자국이 난 곳에 있는 붕어를 보았는데, 크게 탄식하면서 저에게 ‘나를 살려줄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저는 ‘내가 너를 위해 남쪽에 가서 楚王을 뵙고 長江과 淮河를 터서 너에게 물을 대어줄 것이니, 기다려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붕어는 ‘지금 나의 목숨은 그저 한 단지나 한 항아리의 물에 달렸을 뿐이오. 그런데 나를 위해 초왕을 뵙고 장강과 회하를 터서 나에게 물을 대어주겠다 하니, 그대는 곧 나를 건어물 가게에서 찾게 될 것이오.’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가난 때문에 곡식을 꾸러 온 것인데, ‘내 봉읍에서 나오는 곡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저에게 주겠다.’고 하시니, 만일 곡식을 보내오면 저 역시 품팔이하는 가게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위 문후가 이에 곡식 백 鍾을 내어 장주의 집에 보내주었다.
晉平公問叔向曰:「歲饑民疫,翟人攻我,我將若何?」對曰:「歲饑來年而反矣,疾疫將止矣,翟人不足患也。」公曰:「患有大於此者乎?」對曰:「夫大臣重祿而不極諫,近臣畏罪而不敢言,左右顧寵於小官而君不知。此誠患之大者也。」公曰:「善。」於是令國中曰:「欲有諫者為之隱,左右言及國吏罪。」
趙簡子攻陶,有二人先登,死於城上,簡子欲得之,陶君不與。承盆疽謂陶君曰:「簡子將掘君之墓,以與君之百姓市曰:『踰邑梯城者將赦之,不者將掘其墓,朽者揚其灰,未朽者辜其尸。』陶君懼,謂效二人之尸以為和。
21. 惟不知,故事之,夫子其猶大山林也,百姓各足其材焉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승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夫子(孔子)는 큰 山林과 같아서 백성들마다 각각 필요한 재목을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子貢見太宰嚭,太宰嚭問曰:「孔子何如?」對曰:「臣不足以知之。」太宰曰:「子不知,何以事之?」對曰:「惟不知,故事之,夫子其猶大山林也,百姓各足其材焉。」太宰嚭曰:「子增夫子乎?」對曰:「夫子不可增也。夫賜其猶一累壤也,以一累壤增大山,不益其高,且為不知。」太宰嚭曰:「然則子有所酌也。」對曰:「 天下有大樽而子獨不酌焉,不識誰之罪也。」
子貢이 太宰 嚭를 만났는데, 태재 비가 물었다. “孔子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태재 비가 다시 말했다. “그대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스승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夫子(孔子)는 큰 山林과 같아서 백성들마다 각각 필요한 재목을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태재 비가 말했다. “그대는 부자(공자)를 높이 올려서 말하는 것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공자는 높이 올릴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한 삼태기의 흙과 같으니, 한 삼태기의 흙을 큰 산에 보태더라도 그 높이를 높일 수 없고, 또 알지도 못합니다.”
태재 비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부자의 학문을 헤아려 취한 것이 있습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천하에 큰 술 단지가 있는데 그대만 헤아려 취하지 않았으니, 누구의 잘못인지 모르겠습니다.”
22. 賜譬渴者之飲江海,知足而已,孔子猶江海也,賜則奚足以識之
<“저는 비유하면 목마른 사람이 강과 바다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갈증을 해소할 줄만 알 뿐이요, 공자는 강과 바다 같으니,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趙簡子問子貢曰:「孔子為人何如?」子貢對曰:「賜不能識也。」簡子不說曰:「夫子事孔子數十年,終業而去之,寡人問子,子曰不能識,何也?」子貢曰:「賜譬渴者之飲江海,知足而已,孔子猶江海也,賜則奚足以識之。」簡子曰:「善哉!子貢之言也。」
趙簡子가 子貢에게 물었다. “孔子의 사람됨은 어떻습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조간자가 불쾌하게 여기면서 말했다. “선생이 공자를 십수 년 동안 스승으로 섬기어 학업을 마치고 떠났기에 寡人이 그대에게 물었건만, 그대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니, 이는 무엇 때문이오?” 자공이 대답했다.
“저는 비유하면 목마른 사람이 강과 바다의 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갈증을 해소할 줄만 알 뿐이요, 공자는 강과 바다 같으니,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조간자가 말했다. “훌륭하구나. 자공의 말이여!”
23. 今謂天高,無少長愚智皆知高,高幾何?皆曰不知也
齊景公謂子貢曰:「子誰師?」曰:「臣師仲尼?」公曰:「仲尼賢乎?」對曰:「賢。」公曰:「其賢何若?」對曰:「不知也。」公曰:「子知其賢而不知其奚若,可乎?」對曰:「今謂天高,無少長愚智皆知高,高幾何?皆曰不知也,是以知仲尼之賢而不知其奚若。」
齊 景公이 子貢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를 스승으로 섬겼소?” 자공이 대답했다. “저는 仲尼(孔子)를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제 경공이 다시 물었다. “중니는 어집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어집니다.” 제 경공이 물었다. “그는 얼마나 어집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알지 못합니다.” 제 경공이 물었다. “그대가 그의 어진 것만 알고 얼마나 어진지는 모른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만일 하늘이 높다고 말하면 어린아이, 어른, 어리석은 이, 지혜로운 이 할 것 없이 모두 하늘이 높은 줄을 알지만, 얼마나 높으냐고 물으면 모두들 모른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니가 어진 줄은 알지만, 얼마나 어진 줄은 알지 못합니다.”
24. 建天下之鳴鐘,而撞之以挺,豈能發其聲乎哉?君問先生,無乃猶以挺撞乎?
“천하에 가장 잘 울리는 큰 종을 세워놓고서 나무줄기로 두드리면 어찌 제 소리를 내겠습니까! 임금께서 선생께 물은 것은 나무줄기로 두드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趙襄子謂仲尼曰:「先生委質以見人主七十君矣,而無所通,不識世無明君乎?意先生之道,固不通乎?」仲尼不對。異日,襄子見子路曰:「嘗問先生以道,先生不對,知而不對則隱也。隱則安得為仁;若信不知,安得為聖?」子路曰:「建天下之鳴鐘,而撞之以挺,豈能發其聲乎哉?君問先生,無乃猶以挺撞乎?」
趙襄子가 仲尼께 말했다. “선생께서 예물을 드리면서 70명이나 되는 임금을 뵈었지만 道가 통한 곳이 없으니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현명한 임금이 없어서입니까? 혹시 선생의 道가 본디 통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중니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후일에 조양자가 子路를 보고 말했다. “내가 일찍이 선생께 道를 물었으나 선생이 대답하지 않으셨소. 알면서 대답하지 않았다면 숨긴 것이니, 숨겼다면 어찌 仁이라 할 수 있겠소? 만일 진실로 道를 모른다면 어찌 聖人이라 할 수 있겠소?”
자로가 말했다. “천하에 가장 잘 울리는 큰 종을 세워놓고서 나무줄기로 두드리면 어찌 제 소리를 내겠습니까! 임금께서 선생께 물은 것은 나무줄기로 두드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25. 窮而事賢則不悔;通而舉窮則忠於朋友,富而分貧則宗族親之;貴而禮賤則百姓戴之
衛將軍文子問子貢曰:「季文子三窮而三通,何也?」子貢曰:「其窮事賢,其通舉窮,其富分貧,其貴禮賤。窮而事賢則不悔;通而舉窮則忠於朋友,富而分貧則宗族親之;貴而禮賤則百姓戴之。其得之,固道也;失之,命也。」曰:「失而不得者,何也?」曰:「 其窮不事賢,其通不舉窮,其富不分貧,其貴不理賤,其得之,命也;其失之,固道也。」
衛나라 장군 文子가 子貢에게 물었다. “季文子가 세 번 궁(窮)하였다가 세 번 현달(通)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가 궁하였을 때는 어진 이를 섬겼고, 현달했을 때는 궁한 사람을 천거하였으며, 부유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고, 顯貴했을 때는 미천한 사람을 예우하였기 때문입니다. 궁했을 때 어진 이를 섬기면 侮蔑을 당하지 않고, 현달했을 때 궁한 사람을 천거하면 벗에게 마음을 다하는 것이며, 부유했을 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종족들이 친애하고, 현귀했을 때 미천한 사람을 예우하면 백성들이 떠받듭니다. 그런 이가 현달한 지위를 얻는 것은 본래의 正道이고, 잃는 것은 운명입니다.”
계문자가 다시 물었다. “잃기만 하고 얻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공이 대답하였다. “그가 궁했을 때 어진 이를 섬기지 않았고, 현달했을 때 궁한 사람을 천거하지 않았으며, 부유했을 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고, 현귀했을 때 미천한 사람을 예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가 현달한 지위를 얻는 것은 운명이고, 잃는 것은 본래의 정도입니다.”
26. 死之則不免為溝中之瘠;不死則功復用於天下,夫何為死之哉?
<죽으면 구렁텅이에서 썩는 해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지 않으면 천하에 功業을 다시 세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죽겠느냐.>
子路問於孔子曰:「管仲何如人也?」子曰:「大人也。」子路曰:「昔者管子說襄公,襄公不說,是不辯也;欲立公子糾而不能,是無能也;家殘於齊而無憂色,是不慈也;桎梏而居檻車中無慚色,是無愧也;事所射之君,是不貞也;召忽死之,管仲不死,是無仁也。夫子何以大之?」子曰:「管仲說襄公,襄公不說,管仲非不辯也,襄公不知說也;欲立公子糾而不能,非無能也,不遇時也;家殘於齊而無憂色,非不慈也,知命也;桎梏居檻車而無慚色,非無愧也,自裁也;事所射之君,非不貞也,知權也;召忽死之,管仲不死,非無仁也。召忽者,人臣之材也,不死則三軍之虜也;死之則名聞天下,夫何為不死哉?管仲者,天子之佐,諸侯之相也,死之則不免為溝中之瘠;不死則功復用於天下,夫何為死之哉?由!汝不知也。」
子路가 孔子께 여쭈었다. “管仲은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大人이다.”
자로가 다시 말했다. “옛날 管子가 襄公에게 유세했을 때 양공이 즐거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말재주가 없는 것이고, 公子 糾를 임금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니 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며, 집안사람이 齊나라에서 해를 입었는데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자애롭지 않은 것이고, 차꼬와 수갑을 차고 檻車에 갇혔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며, 자기가 활을 쏘아 죽이려던 임금을 섬겼으니 이는 忠貞하지 않은 것이고, 召忽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으니 이는 仁德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어찌 대인이라고 하십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管仲이 양공에게 유세했을 때 양공이 즐거워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말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양공이 밝지 못하여 그 말이 즐거운지를 몰랐기 때문이고, 공자 규를 세우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집안사람이 齊나라에서 해를 입었는데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자애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天命이 이와 같음을 알았기 때문이고, 차꼬와 수갑을 차고 檻車에 갇혔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던 것은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자제했기 때문이고, 자기가 활을 쏘아 죽이려던 임금을 섬긴 것은 忠貞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權變을 알았기 때문이고, 소홀은 따라 죽었는데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은 仁德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홀은 남의 신하가 될 재목에 불과하니 따라 죽지 않으면 三軍의 포로가 되고 죽으면 천하에 이름이 날 것이니, 어찌 죽지 않겠느냐. 관중은 天子를 보필할 재목이고, 諸侯의 재상이 될 인물이다. 죽으면 구렁텅이에서 썩는 해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죽지 않으면 천하에 功業을 다시 세울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죽겠느냐. 仲由(자로)야, 너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한다.”
27. 智不知其士眾,不智也;知而不言,不忠也;欲言之而不敢,無勇也;言之而不聽,不賢也。
<지혜가 그의 선비들을 잘 알지 못했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말하고 싶은데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고, 말했는데도 윗사람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현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晉平公問於師曠曰:「咎犯與趙衰孰賢?」對曰:「陽處父欲臣文公,因咎犯,三年不達,因趙衰,三日而達。智不知其士眾,不智也;知而不言,不忠也;欲言之而不敢,無勇也;言之而不聽,不賢也。」
晉 平公이 師曠에게 물었다. “咎犯과 趙衰 중에 누가 더 현명한가요?”
사광이 대답했다. “陽處父가 文公의 신하가 되고 싶어 구범에게 의뢰했더니 3년 동안 추천해주지 않았고, 조최에게 의뢰하자 3일 만에 추천해주었습니다. 지혜가 그의 선비들을 잘 알지 못했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말하고 싶은데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면 용기가 없는 것이고, 말했는데도 윗사람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현명하지 못한 것입니다.”
28. 每變益上
<변할 때마다 더욱 좋아졌다.>
趙簡子問於成摶曰:「吾聞夫羊殖者,賢大夫也,是行奚然?」對曰:「臣摶不知也。」簡子曰:「吾聞之子與友親,子而不知,何也?」摶曰:「其為人也數變,其十五年也,廉以不匿其過;其二十也,仁以喜義,其三十也,為晉中軍尉,勇以喜仁,其年五十也,為邊城將,遠者復親。今臣不見五年矣。恐其變,是以不敢知。」簡子曰:「果賢大夫也,每變益上矣。」
趙簡子가 成摶에게 물었다. “내가 들으니, 羊殖이라는 사람은 어진 大夫라는데, 이 사람의 행실은 어떤가요?” 성단이 대답했다. “저는 알지 못합니다.” 조간자가 말했다. “내가 듣기로는 그대와 친한 친구 사이라던데, 그대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성단이 말했다. “그는 사람됨이 자주 변하여 일정치 않습니다. 그가 열다섯 살 때엔 청렴결백하여 자신의 잘못을 숨기지 않았고, 스무 살 때엔 仁愛하면서 의리를 좋아하였으며, 서른 살 때엔 晉나라의 中軍尉가 되어 용감하면서 인애를 좋아하였고, 그의 나이 쉰 살 때엔 변방의 城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멀리 떠났던 사람을 다시 친근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그를 만나지 못한 지 5년이나 되었으니, 그사이 그가 또 변하였을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이 때문에 감히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조간자가 말했다. “양식은 확실히 어진 대부로구나. 변할 때마다 더욱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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