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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아버지

[아버지] 조손 3대가 성묘를 했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0. 2. 3.

설을 1주일 지난 오늘(2020. 02. 02) 성묘를 했다.
전에는 설날 차례를 지내고 지체 없이 그 당일에 성묘를 다녀왔었다.
그런데 4년 전 서울로 제사를 옮기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뒤늦게 때지난 성묘를 가게 된다.
마침 방학 중인 아들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가니, 드물게 3대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이라 괜히 기분이 좋다.
아들 수범이는 아버지와 용띠 띠동갑이다. 1갑자를 넘어 무려 72년의 나이 차이이다.
수범이가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밀착해서 살갑게 부축하여 모시는 모습이 정겹다.

증조할머니 산소에서는 준비해간 톱으로 주변의 나뭇가지를 제법 많이 쳐냈다.
무성한 가지들이 아깝기는 했지만, 활엽수들이라 낙엽이 잔디를 덮어 생육을 방해하기에 부득이 솎아내야 할 것들이다.
그 중 아름드리 큰 나무 한 그루의 굵은 가지는 키가 닿지 않는다.
허벅지 굵기만한 그 가지를 자를 방법이 없다.
결국 생각해낸 방법이 아들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톱질을 하는 것이다.
좀 미덥지 않기는 했지만, 아들이 해볼만하다고 자신하기에 올라탔다.
녀석이 제법 잘 버틴다.
내 어께에서 목마를 타고 촐랑거리던 놈이 어느새 자라서 이제는 나를 태우다니..

그런데 막상 톱질을 시작하자 문제가 있다. 톱밥이 모조리 아들 머리 위에 떨어지는 거다. 그리고 나무가 질겨서 톱질이 잘 먹질 않는다. 톱질에 힘이 더 들어가게 되니, 아무래도 밑에서 받치는 녀석도 힘이 더 드나보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기로 하고 내려달라고 하는데.. 아들이 무릅을 기울이다 기우뚱하는 바람에, 나는 사정 없이 땅바닥에 내려꽂혀 어깨와 얼굴로 바닥을 찧었다. 어깨에 충격이 갔는지 저녁까지도 제법 얼얼하다. 당시 적잖이 아팠지만, 아들이나 아버지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툭툭 털고 있어났다.

내내 불편했어도 말못하고 있다가, 저녁에 아내에게 아프다고 말했더니, 아들도 무릅이 뒤틀려 많이 아팠다고 엄마에게는 말했단다. 우리 부자는 서로 마음 불편할까봐 서로에게는 말하지 않고 각자의 아픔을 속으로 삼켰던 거다.


그 다음에 어머니 산소로 옮겨갔다.
거긴 가파른 산길을 제법 걸어올라야 한다.
아버지 체력으로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데.. 아들이 부축하며 수도 없이 가다 쉬다를 반복하여 산소에 올랐다.
성묘를 마치고 나서, 아버지는 혼자 어머니 산소에 어중간한 자세로 예를 올리신다. 반절도 아니고 온 절은 아닌..
평소 항상 무심한 듯.. 혹은 무심한 척.. 하셨는데, 이 번에는 제법 긴 시간 머무신다.
나와 아들이 지켜보자 조금 겸연쩍어 하신다.

아마도 어머니께 다시 오기 힘들거라는 말씀을 하셨으리라.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올 듯하여 멀리 하늘을 보며 옆으로 물러났다.

올해 아흔셋이 되시는 아버지는 거동이 편치 않으시니 근래 몇 년 째 산에 오르지를 못하셨다.
오늘 손자 덕분에 증조부모, 조부모, 어머니 산소를 모두 돌았다.
기분이 많이 좋으신 듯하다.
술도 약간 과하게 드시고, 말씀도 많으시다.
특히 손자에게 온갖 말씀을 쉬지 않고 하신다. 옛날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혼자 벌초하러 다닌 이야기, 산소 올라가는 길에 물빼는 고랑은 어떻게 내야 하는지, 산소에 난 아카시아는 어떤 약으로 처리해야 하는지, 산소 둘레에 심어두신 꽃나무가 무엇무엇인지, 산소 관리를 위해 제거해야할 나무들은 뭔지 등등..

아버지, 오늘 힘드셨을 겁니다.
오늘 그 좋은 기분으로 편안하게 주무시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