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 역사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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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역사기행을 다녀왔다. 아내가 다니는 창원대 박물관대학에서 함양으로 역사탐방을 간다기에 따라 나섰다. 생면 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끼여간다는 게 좀 뻘쭘하긴 했지만, 약 15년 전에 가봤던 함양의 아름다운 풍광이 떠올라 거기에 어떤 역사적인 배움꺼리가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만에 아내와 바람쐬러 가고 싶기도 하여 따라 가겠다고 했다.
정말 귀한 경험을 하였다. 평소 가져볼 수 없는 멋진 시간을 즐기고 왔다. 함께 간 그 분들은 평소 자주 경험해서인지 비교적 덤덤하게 다니셨는데, 나 혼자서만 신이 나서 이리저리 나다니며 사진을 찍어대고 한마디 한마디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옛날 경상도의 어른들은 먼 산골오지의 생활을 예로 들 때 '저 해명산청에 가면'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해명산청'이 지리산 자락의 함양과 산청이라는 것을 다 자라서 알게 되었다. 약 15년 전 인산죽염 김인세 대표의 초대로 지리산 높은 곳에 자리한 인산죽염 연수원을 방문했을 때, 마침 함양의 산길 도로를 따라 벚꽃이 너무나도 화려하게 피어있어 산골 꽃마을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던 적이 있다. 그곳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창원대 박물관의 학예사가 자료를 꼼꼼히 많이도 준비해왔다. 근데 이제 눈이 가버려서 작은 글씨의 글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료는 옆으로 제쳐두고 학예사의 설명을 귀로 듣고 눈으로 들어오는 실물 정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번 기행의 타이틀이 흥미롭다.
"함양을 弄하다"
학예사가 설명한다. 농(弄)은 '희롱할 농' 자로 불리지만, 구슬 옥(玉)과 받들 공(廾)으로 이루어져, 정성을 들여 솜씨있게 다룬다는 의미로서, 농현(弄絃), 농월(弄月) 등으로 활용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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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1019년 7월 13일 아침 8시반. 창원대.
기행 동선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용추폭포 -> 2. 옛 장수사 터 -> 3. 연암 박지원의 물레방아 시원지 -> 4. 광풍루 -> 5. 거연정 -> 6. 군자정 -> 7. 동호정 -> 8. 농월정 -> 9. 남계서원 -> 10. 일두고택 -> 11. 상림.
하루에 모두 소화하기에 만만치 않은 스케줄이있지만,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학예사의 열정에 고마움의 탄사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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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행을 다녀보면 일정 중에 많이 듣고 많이 보고 많이 찍어두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 잘 남아있지 않다. 기억이 따끈따끈하게 남아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두면 언젠가는 자료로서 요긴하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항상 주장하는 것!
"기억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는다."
그럼 이제부터 사진을 보면서 기억을 되새겨본다.
1. 용추폭포
첫 방문지 용추(龍湫)폭포. 시원한 물소리가 참 좋다.
여기에도 어느 폭포에나 가면 들을 수 있는 가련한 이무기의 전설이 있다.
108일의 금식 수련 기간을 단 하루 착오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추락한...
어떤 분이 그래서 용이 추락하였다고 '용추'라고 하는가 보다라고 말씀하신다. 찾아보니 용추의 추(湫)는 웅덩이를 의미한다.
용추계곡 들어가는 길에 이런 귀한 말씀이 있다.
"사흘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 탐한 재물은 하루 아침의 먼지라오."
2. 옛 장수사 터
다음 들른 곳은 옛 장수사 터.
이마 사라져버린 옛 절의 역사보다는
절 일부를 지키던 일주문(一柱門)의 내력이 더 흥미롭다.
일주문은 말 그대로 기둥을 좌우 하나씩의 기둥으로 세운 문으로서,
속세로부터 부처님의 세계로 드는 첫 관문을 의미한다.
이 일주문이 특별한 것은 그 기둥과 지붕이 대단히 웅장하다는 데 있다.
당시 이 절의 위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통나무(직경이 1.2m)로 된 한 쌍의 기둥이 생긴 모습 그대로 투박하게 세워져 있고, 주춧돌 역시 자연상태 그대로의 모습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지역 출신 한 분이 말씀하시길,
기둥 하나는 칡이고 다른 하나는 싸리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기둥의 하단은 주춧돌의 형성에 맞추어 요철 가공되어 있다.
이러한 맞춤 방식을 '그랭이질'이라 부른다고 학예사가 일러준다.
3. 연암 물레방아 시원지
연암 박지원의 물레방아 시원지
물레방아는 실학자이신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현감으로 재임하던 중에
함양의 안의에 처음으로 보급하였다고 한다.
그 참.. 그럼 그 이전(1792년)에는 조선에 물레방아가 없었다는 말인가?
학예사도 그 점을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여하튼 이 때문에 함양에서는 해마다 물레방아 축제가 열린다고..
박지원 선생의 '호곡장론'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놓은 글이 있다.
4. 광풍루
삼일식당에서 안의에서 유명한 갈비탕(무려 14,000원)을 맛있게 먹고 나오니,
바로 그 식당 옆에 광풍루(光風樓)가 있다.
바로 앞에 큰 내가 있고 그 내에 널려있는 닳고 닳은 크고 작은 몽돌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은 역사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은 옛모습이 다 사라졌겠지만, 당시에 그 풍광이 대단했을 것이다.
5. 거연정
이제 화림동 계곡으로 갔다.
이 계곡은 가히 정자의 계곡이라 할만하다.
계곡 전반에 암반이 두텁고 넓은데다, 물이 풍부하다.
계곡, 바위, 물이 제공하는 풍광이 워낙 아름답기에
누구라도 정자를 세워 풍류를 즐기고 싶어할 딱 그런 곳이다.
상류의 거연정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정자들을 차곡차곡 답습하는 동선이다.
거연정(居然亭). 엄지 척!
자연에 머무른다는 뜻.
주위의 풍광과 이토록 잘 어우러진 정자를 일찌기 본 적이 없다.
거연정에서 이런 멋진 경치를 즐기며 사나흘 쯤 퍼질러 지내면,
만병이 달아나고,
서너달 운기조식을 하면
신선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6. 군자정
거연정의 바로 아래에 군자정이 있다.
군자(君子)가 머무는 정자라서 그런지,
매우 투박하고 주위의 풍광도 거연정에 비하면 담백하다.
7. 동호정
군자정에서 몇 분 거리에 동호정(東湖亭)이 있다.
동호정은 정자 그 자체도 누각처럼 크고 화려하지만,
그 앞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자연암반인 차일암이 인상적이었다.
차일암은 수백명이 동시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악기를 연주하는 곳, 시를 읆는 곳, 술을 마시는 곳 등이 구분되어 있다.
차일암(遮日巖)은 태양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큰 바위라는 뜻
너럭바위 차일암에서 본 동호정
동호정의 다리기둥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져다 사용하였습니다.
동호정에서 내다본 너럭바위.
오랫동안 고요히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저 분.. 수련 중이신듯.
8. 농월정
농월정 가는 길목의 식당들..
대낮인데도 취객들의 노래소리로 너무도 시끄럽다. ㅠㅠ..
자연암반 위에 축조된 농월정.
달을 희롱한다고 하지만, 달보다는 물과 바위를 희롱하는 입지이다.
농월정에서 내려다본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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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연정은 외부에서 그 정자를 바라볼 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체가 풍광의 핵심 요소로서 역할한다.
그에 반해 동호정과 농월정은 그 정자들에 올라서 주위의 풍광을 즐기기 위한 곳이기에, 내려다보이는 바위와 물이 정말 아릅답다.
남에게 보여주는 멋의 정자와, 외부를 멋진 경치를 즐기기 위한 멋의 정자..
어느 것이든 귀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화림동 물을 따라 많은 정자가 생겨났는가 보다.
9. 남계서원
남계서원
1주일 전에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축하 현수막이 걸려있다.
마침 오마이뉴스에서 사진기자가 우리를 촬영하여 기사가 실렸다.
남계서원은 다른 서원들에 비해 특별한 멋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체적인 구조가 서원의 대표적인 배치라는 점에서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10. 일두고택
개평마을에 있는 일두고택의 솟을대문
일두(一蠹) 정여창 선생의 고택에 왔다.
일두(一蠹)의 두(蠹)는 좀벌레라는 뜻이다.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은 조선 성종 때의 대학자로 본관은 경남 하동이나 그의 증조인 정지의가 처가의 고향인 함양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함양사람이 되었다. 자녀 균분 상속제가 지켜지던 당시에는 거주지를 옮길 때 처가나 외가로 옮겨가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독서하다가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구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강직한 성품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연산군 1년(1495) 안음현감에 임명되어 일을 처리함에 공정하였으므로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되었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은 백욱(佰勖)이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사신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했다고 한다. 과연 그의 학덕은 출중하여,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5현으로 인정받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사랑채
안채
안채의 툇마루
사랑채 마당가 가산에 있는 노송
가산에서 발견한 청개구리
일두고택 앞 골목길
개평마을에 있는 독특한 북카페. 주말과 휴일에만 문을 연다고..
11. 상림
상림은 신라시대에 최치원 선생께서 함양의 태수로 재임할 때,
치수를 목적으로 조성한 인공림이다.
숲속에는 여러가지 역사 유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상림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연밭.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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