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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아버지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

by 변리사 허성원 2019. 4. 18.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

 

*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자주 듣던 말이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니 덕과 실력을 쌓으라는 뜻이다'라고만 대충 말씀해주셨다.

나름 혼자 생각으로,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짙게 하라'라는 뜻이리라고 짐작만 했었다. '갓'은 '가지'에서 왔을 것 같고, '가지'는 '숲'을 이루는 것이니까 궁극적으로 숲을 가리킨다고 여겼다.

매사 따지기를 좋아하는 결벽증 증세가 있었던 내 성격 탓에, 주위 친구들과 잘 다투었고, 남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거나 포용하는 능력이 많이 모자랐던 것 같다. 지금도 그런 덕이 부족하다고 항상 느끼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부족한 덕을 보충하도록 하기 위해 그런 가르침을 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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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 전에 김수언 교수의 글 " ‘산’에게 잡아먹혀 사라져 버린 우리 토박이말 ‘뫼’와 ‘갓’과 ‘재’"을 보고,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내용 해석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갓'의 의미는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는 조림하여 가꾸는 뫼'다. 김수언 교수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갓’은 집을 짓거나 연장을 만들거나 보를 막을 적에 쓰려고 일부러 나무를 가꾸는 뫼를 뜻한다. ‘갓’은 나무를 써야 할 때가 아니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오가면서 늘 지키면서 가꾼다. ‘갓’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일부러 ‘갓지기’를 세워 그에게 맡겨서 지키게 한다. ‘갓’은 소리로나 글자로나 머리에 쓰는 ‘갓’과 헷갈리니까 ‘묏갓’이라 하다가 요즘 국어사전에는 아주 ‘멧갓’으로 올려놓았다. "

 

그리고 '짓어라'는 '짓다'의 명령형이다. '짓다'는 '집을 짓다', '약을 짓다', '글을 짓다'처럼 무언가를 새로이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범'은 호랑이를 가리키고, '청치 말고'는 '청하지 말고'의 뜻이니, 범에게 오라고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따라서, 범을 청치 말고 갓을 짓어라'를 제대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범을 오라고 부르지 말고, 숲을 만들어라"

숲이 만들어지면 초식동물부터 작은 육식 동물이 모여들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생태계가 구축될 것이니, 최상위 포식자인 범이 자연스레 찾아들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내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딱 필요한 금언이 아닐 수 없다. 

 

<멋진 아우 장천 김성태에게 여러장 써달라고 부탁하여,
주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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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도리불언하자성혜()와 같다.
복숭아나무와 자두나무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맛을 찾아 오는 사람들 때문에 나무 아래에 절로 길이 나게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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