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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아버지

아버지의 여행 소동

by 변리사 허성원 2018. 9. 2.

아버지의 여행 소동


아버지가 혼자서 여행을 가시겠다고 한다.
동생들이 말리다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그 말을 듣고 부리나케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곧 아흔이 되실 상노인이 우찌 그리 가당찮은 생각을 하셨을까.


어딜 그렇게 가시고 싶습니꺼?
- 새만금도 들러보고 청주에도 가보고,
서울에 너그 집에 가서도 며칠 있다 올란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더.
- 안된다. 니하고 댕기믄 싸워싸서 재미엄따.
그라믄 애미하고 다니시지예.
- 며느리하고 다녀도 재미엄따.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다니고 싶다.

밥은 우짜고예.
- 컵라면 사먹으면 된다. 
잠은요?
- 여인숙에 가서 자믄 되지.
요즘 여인숙 없습니더.
- 그라믄 유곽에라도 가서 잘끼다.
유곽이라는 거 없어진지 수십년도 더 됐습니더.
- 요즘 날씨에는 한데서 자도 된다.


기가 찬다. 
요지부동이시다. 내일 아침부터 보초를 서야 할 판이다.
반쯤 통사정을 하고 반쯤 윽박질러서 일단은 고집을 약간 돌려놓은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수시로 전화를 걸어 현재 계신 위치를 모니터링해야 할 것 같다.

필경 우리 자식들에게 뭔가 서운한 게 많이 쌓여 있으신 것 같은데,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않으시니 그 속내를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앞만 보고 달려오신 당신의 삶에서 허무함을 느끼신 것일까?


오로지 가족들이 굶지 않게 하고 남들 만큼이라도 가르치고 입히려고 온몸을 다바쳐 뼈빠지게 희생하며 살아오신 삶이다. 거기다 별 내세울 거 없는 집안이지만 그래도 나름 물려받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봉제사와 선산 돌보기를 거의 종교 수준으로 수행해오지 않으셨던가. 스스로를 버리고 오로지 가족을 위해 살아온 그 한 평생을 돌아보면 이 연세에 어찌 아릿한 회한이 없으랴. 

가만 생각하니.. 지금까지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녀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워낙 실질(?)을 추구하시는 분이라 비생산적인 것을 몹시도 싫어하셨다.
평생 농사일을 해오신 탓에 허투루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으셨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아버지 앞에서는 음악, 운동, 여행, 외식 등과 같은 말은 금기 단어이다. 지금도 손자들이 학교 생활로 악기를 들고 다니면,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며 음악을 하였던 집안의 한 아재가 무능과 게으름으로 온 집안을 망하게 만든 사례를 들며, 당장이라도 악기를 부셔버릴 듯 흥분하신다. 그 아재의 이야기는 자식 대와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하셨다. 그리고 가벼운 운동이라도 한다고 하면 우리 논이나 한바퀴 둘러보고 오라고 호통을 치시곤 했었다.

그러던 분이 거동이 불편해지고 생각이 흐려져 가는 이제에 와서 세상 구경을 하시겠단다. 못해본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풀고 싶어 조급증을 내시는 듯하다.
그래.. 이제부터 우짜든지 시간을 내서 좀 모시고 다녀야겠다고 반성과 다짐을 한다. 하지만 굳이 혼자 다니시겠다고 저리 고집을 부리시니 어쩐다.


그런데,아버지!

저도 정말이지.. 혼자서 유람 좀 다녀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그야말로 발길 닿는 대로 자유롭게.. 피리부는 사나이처럼..
아버지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그나저나 당장 어떻게 해봐야 하나..

[2015.09. 02. 페이스북 포스팅]

<2011년 1월17일, 외손녀의 안내로 일본 여행 모시고 갈 때 공항에서 찍은 것>


** 그렇게 난리를 치다가 우여곡절 끝에 분당의 우리 집으로 안전하게 모심으로써 여행 해프닝은 마무리되었다. 김해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올라 오셔서, 며칠 동안 서울 인근의 구경도 하고 지내시다가 내려가셨다. 며칠 지나보니 모든 식구들이 바삐 움직이니 어쩔 수 없이 홀로 계셔야 하기도 하고, 출입하기도 어려운 도시의 아파트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영 체질에 맞지 않으신 거다. 고향에 내려가신 후 딸네들과 멀고 가까운 곳을 몇 군데 여행 다니시긴 하셨는데, 최근에는 여행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으신다. 마음이 안정되신 건지 체력이 떨어지신 건지.. 여하튼 내게는 여전히 마음의 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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