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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아버지

아버지의 돈을 훔친 적이 있었다.

by 변리사 허성원 2017. 7. 28.

아버지의 돈을 훔친 적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거다.

70년대 초반인 당시에는 용돈이라는 것을 주고받고 할 그런 형편들이 아니었다. 특히 아버지는 주변에서 누구나 인정해줄 정도로 정말 야물게 안 쓰고 안 입고 모아서 식구들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살림을 일구신 분이다. 그래서 적어도 경제권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오로지 쥐고 계셨다.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식구는 돈을 써야 할 때마다 매번 힘들게 아버지를 설득하여야 했다. 그런 분에게 용돈이라는 말은 손톱도 들어가지 않을 턱도 없는 말이다.

우리 논에서 나온 비닐 등 폐 농자재를 고물상에 팔기도 해서 어느 정도 푼돈을 쓰기도 했지만, 중학교를 들어가 무협지와 만화에 재미를 붙이면서 턱없이 부족한 용돈에 허덕이고 있었다.

 

 

안방에는 아버지의 궤짝이 있었다. 가로 3자 높이 2자 정도 크기에 한 때는 자개 장식이 있었을 것 같은 낡은 옻칠 궤짝으로, 집안일에 관련되는 문서들과 돈을 보관해두는 곳이다. 당시에는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았으니, 그 궤짝이 우리 집의 금고인 셈이다. 이 궤짝에는 주먹만한 다이얼 자물쇠가 달려있는데, 전후로 왔다갔다 돌리며 번호를 맞추는 것이라 그 비밀번호는 알아내질 못했다. 그런데 문짝이 경첩에 의해 열리는데, 이 경첩이 낡아서 간당간당하는 것이다. 그 문짝 틈새 사이로 납작한 드라이버를 넣어 슬쩍 제치니 경첩이 떨어지며 문짝이 열린다.

지폐다발이 눈에 보인다. 아마 백원짜리였겠지. 거기서 한 장을 빼냈다. 그리고 다시 문짝을 밀어 넣으니 별 표시가 남지 않고 원상복구가 되었다.

난 그 돈으로 상당 기간 적어도 몇 달을 정말 알차게 풍족히(?) 썼다. 가방 한쪽을 무협지로 가득 채워서 빌려오면 밤새 읽고 아침에 학교가면서 반납하고, 저녁에는 또 빌려오고.. 그러다 그 돈이 떨어지자 다시 범행을 저질러야 할 운명의 때가 온 것이다.

 

 

거사하기로 마음먹은 날. 주위를 나름대로 살펴본 후 드라이버를 경첩에 밀어 넣고 문짝을 여는 순간, 우찌 이런 일이.. 아버지가 방에 들어오셨다. 어머니도 뒤이어서..

온 세상이 노랗게 변한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하늘이 무너질지, 벼락이 칠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바닥만 보고 멍청히 서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영원 같은 짧은 침묵이 지나고, 결국 어머니가 입을 여신다. “야~야~ 니가 와이라노. 나가봐라.”그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침묵, 그것은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무서운 질책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누구도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을 더 하지 않았다.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애들에 대한 폭력은 일상이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그런데 아버지는 누구에게든 전혀 폭력을 쓰지 않으셨다. 아니 단 한번 있다. 고양이 힘도 빌려야 한다는 그 바쁜 모심기철에 무엇 때문인지 옆에 졸졸 따라다니며 부아를 채운 적이 있었다. 그때 한참을 참고 견디시다가 참다못해 내 귀퉁배기를 한 대 올리셨다. 그게 유일한 아버지에게 당한 폭력의 추억이다.

당시 우리 동네의 이웃들은 다들 형편이 딱했다. 먹고살기 어려우면 가정 폭력도 많은 법이니, 주위 또래 동무들은 그 부모들에게 늘상 맞고 자랐다. 그들이 맞아야 되는 주된 이유는 거짓말, 도둑질, 싸움 등과 같이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응당 벌을 받아야 하는 나쁜 짓이다. 그런 교화를 충분히 많이 받고 자란 그 친구들은 대체로 좋지 않은 길로 빠져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의 어른으로 성장했다.

 

 

가끔 그 사건을 가만히 생각한다.

그때 아버지는 왜 아무 말도 안하셨을까? 자식에 대한 교육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되는 일인데. 나는 상당한 벌을 예상하고 있었었다. 어떤 벌도 달게 받았어야 한다.

내 아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는 둥 최소한의 잔소리라도 좀 했을 거 같은데.

휘어진 나무를 초기에 바로잡아야 한다고, 다른 아버지들처럼 따끔하게 매를 들어 벌을 주었다면, 나는 더 착하고 더 훌륭한 인간이 되었을까? 내 볼촉맞은 성격을 생각하면 그 결과는 그리 좋았을 거 같지 않다. 필시 모나게 대들거나 빚나간 짓을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에게 감사하여야 할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많은 고마움 중에 이 일이 내게는 가장 고마운 일이다. 돈을 훔친 짓을 그냥 말없이 지나쳐주신 것이 그렇다는 말이다.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셨고, ‘용서’의 방법은 아무 말도 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침묵에 의한 용서”를 택하신 것이다.

사실 그 뒤로도 용서받기 힘든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침묵으로 용서를 대신하셨다. 오히려 작은 잘못은 짜증이 날 정도로 반복해서 질책을 하셨지만, 정작 큰 잘못에는 아무 말없이 지나치셨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인간의 언어도 규정하게 되면, 그 시점에서부터 언어에 의해 구속되게 된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아버지가 내가 한 짓으로 벌을 주거나 교육하고자 하는 순간, 나는 그 때부터 명백히 돈을 훔친 도둑놈이 된다. 그리고 내게는 그리고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에서는 도둑질, 도둑놈이라는 관념이 영원히 각인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도둑의 개념이 내게 규정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도둑’이라는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공(子貢)이 공자에서 “평생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其恕乎].”(논어 위령공편)라고 말하였다. ‘서(恕)’는 ‘용서’를 의미한다. 아버지는 40중반의 그 젊은 나이에 공자의 깨달음을 몸으로 실천하신 것이다.

 

용서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어떤 논리나 지식으로 용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저 본능적으로 침묵하고 잊어주도록 행동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용서는 진정 인간이 신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용서는 결국 사랑이다.

사랑 없는 용서가 있을 수 없고, 용서 없는 사랑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마지막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