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수범이가 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에 다니는 놀이학교에서 회보에 낼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무척 바쁜 시기였음에도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급히 써서 보낸 글이다.
~~~~~~~~~~~~~~~~~~~~~~~~~~~~~~~~~~~~~~~~~~~~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이 마흔을 불혹이라 한다.
아마 그 정도 나이면 인생을 충분히 살아서 세상살이를 알 만큼 알기에 그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불혹을 훌쩍 넘긴 요즘에 와서, 똘이 덕분에 문득 무릎을 치는 새로운 깨달음과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특별한 감동을 비로소 경험한다.
그래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
올해 초에 1박 2일로 친한 부부들과 제주도를 여행했었다.
골프 여행인지라 어른들끼리만 갔다.
똘이는 이모집에 맡겨두고....
그런데, 다음 날 아침 골프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아내가 문득 처량한 얼굴로 말한다.
“똘이가 보고 싶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사슴을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아내의 눈가가 붉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는,
“겨우 12시간도 안됐는데... 바보같이...”
라고 말하면서도, 내 코끝이 찡해져옴을 느낀다. 혹 아내가 눈치 챌새라 고개를 얼른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지금껏 하루도 똘이와 헤어져 있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러네.. 나도 똘이가 엄청 보고 싶네..
언제 우리가 한 인간을 이토록 그리워해 본 적이 있었던가?
..
얼마 전 사무실의 직원이 똘이가 쓰던 식탁의자를 물려받으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참 동안 현관문을 두드렸는데도 안에서는 소란스런 소리만 나고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스스로 열고 들어왔단다.
문이 열려 있었나 보다.
그 때 똘이와 나는 치열하게(?)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내 모습과 너무나 달라 도저히 믿을 수 없단다.
그러고 보니 나 스스로도 내가 어쩌다가 이토록 유치하게 망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의아스럽다.
똘이와 과자를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가 삐치기도 하고,
유치한 논쟁거리로 한참동안이나 어금버금 핏대 올리며 다투기도 하고....
근데, 똘이와 공유하는 유치함에서 얻는 즐거움과 행복은 무엇이 대신할 수 있으랴...
..
그저께 시골에서 아버지께서 올라오셨다.
새 집에 이사를 들어간다니까 액막이를 위해 당신께서 새 집에 들어가서 하루 주무시겠단다.
새 집의 액을 당신이 걷어가셔서 자식들이 편해지도록 하시겠다는 거다.
하지만 아내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여러 가지로 잘 구비된 곳으로 이사하는 터라, 불가피하게 버리고 가야할 물건도 많은데...
매사에 야물기로 정평이 나신 분인지라, 응당 이사일에 사사건건 참견하실 건 뻔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어른을 모시고 함께 올라온 제수씨의 재치로 하루만 주무시고 내려가셨다.
그런데, 액막이 해주고자 불원천리로 올라오신 저 팔순을 앞둔 노인네의 정성과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똘이를 키워보지 않았었더라면, 나는 단순히 노인의 극성으로만 여기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철없던 시절에 부모님의 그 극성스런 사랑을 귀찮아하고 거부하고 급기야는 어른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 적도 많았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안다.
목숨을 바쳐주어도 아깝지 않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부모님이 베풀어주신 맹목적인 사랑의 의미를 이 나이가 되어서야 똘이를 통해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
요즘 똘이 녀석 말솜씨가 부쩍 늘었다.
어차피, 당연히, 물론 등과 같은 부사를 적재적소에 쓴다.
말도 어찌나 많아졌는지 시끄러워 귀가 아파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다.
슬그머니 피해서 도망가면 따라다니며 귀에다 대고 더 큰 소리로 떠들어댄다.
글도 제법 읽고, 곧잘 쓰기도 한다. 간혹 글을 거꾸로 쓰거나 순서가 맞지 않기도 하지만...
체중도 초등학교 입학한 사촌형만큼이나 나가고, 팔다리를 만져보면 제법 실팍하다.
자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잠시 생각만 해도 가슴 찌르르한 뜨끈한 감동이....
이런 행복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불혹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똘아!
넌 우리에게 올 때부터 생명의 신비와 고귀함을 알게 해주었고,
지금까지 감당하기 벅찰 만큼 많은 가치와 새로운 깨달음과 귀한 감동을 선물로 주었다.
그 많은 선물에 대한 고마움만으로도 우린 너에게 평생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 우리는 네가 건강하게 자라서 따뜻하고 멋있는 완숙한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희망이라는 더 큰 선물을 키우고 있다.
똘아! 고맙다. 항상 씩씩하게!!!!!
(2004년 가을)
'時習_아테나이칼럼 > 아버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똥장군 (0) | 2018.08.11 |
---|---|
아버지에게서 배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법 (1) | 2018.07.21 |
아버지와 산소 (0) | 2017.07.28 |
아버지의 돈을 훔친 적이 있었다. (0) | 2017.07.28 |
아들에게 첫 면도를 해주며.. (0) | 2014.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