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반대말 _ 수희(隨喜),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
질투의 반대말은 무덤덤함이 아니다. 불교는 그 자리에 수희(隨喜), 곧 남의 기쁨을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두었다. 붓다고사는 이 마음이 하는 일을 시기하지 않음이라 정의하고, 가장 가까운 벗의 기쁨부터 함께 기뻐하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질투가 가까운 데서 시작되니 해독제도 가까운 데서 길러야 한다. 『법화경』은 전해 들은 쉰 번째 사람이 한 번 따라 기뻐한 공덕이 80년간의 큰 보시보다 크다고 말한다. 남의 공덕을 기뻐하면 나도 얻고 상대는 잃지 않는다. 질투는 남의 것을 탐내고 내 것을 움켜쥐는 두 손의 병이지만, 수희는 그 두 손을 풀어 합장하게 한다. 함께 우는 것보다 함께 웃는 것이 더 어렵다. 그래서 수희는 질투가 없는 사람의 덕이 아니라, 질투가 일어난 자리에서 마음을 돌리는 사람의 수행이다.
I. 사두, 사두, 사두
태국이나 스리랑카의 절에 가면 낯선 장면을 보게 된다. 누군가 스님께 공양을 올리거나 절에 보시를 하면,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합장하고 소리를 낸다. "사두, 사두, 사두." 장하다, 장하다, 장하다는 뜻이다. 보시를 한 사람은 그들의 가족도 친구도 아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남이 지은 선행을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함께 기뻐한다.
우리의 장면은 조금 다르다. 동창 단체 대화방에 누군가의 승진 소식이 올라온다. 손가락은 "축하해!"를 치는데, 그 손가락이 이상하게 무겁다. 이모티콘 하나를 고르는 데 평소보다 오래 걸린다. 축하의 말은 보냈지만 마음은 아직 보내지 못했다.
질투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흔히 무덤덤함을 떠올린다. 남이 잘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마음이다. 또는 자족을 떠올린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마음이다. 둘 다 질투를 멈추게는 한다. 그러나 불교는 질투의 반대말로 훨씬 높은 자리를 내놓았다. 수희(隨喜), 남의 기쁨을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이다. 무덤덤함이 질투를 0으로 돌리는 것이라면, 수희는 질투가 있던 자리를 기쁨으로 채운다. 사두를 외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마음을 소리로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II. 두 개의 이름
사무량심의 셋째 마음
불교에는 한없이 넓혀 가야 할 네 가지 마음이 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곧 자비희사(慈悲喜捨)다. 자(慈)는 남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비(悲)는 남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마음이다. 희(喜)는 남의 행복과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고, 사(捨)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고요한 마음이다.
셋째인 희의 원어는 팔리어 무디타(muditā)다. 영어로는 흔히 '공감의 기쁨(sympathetic joy)'이라 옮긴다. 남의 슬픔에 함께 우는 공감은 익숙한데, 남의 기쁨에 함께 웃는 공감이라는 말은 낯설다. 서양 말에 이 감정을 가리키는 정확한 단어가 오래 없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증거다. 그만큼 드문 감정이라는 뜻이다.
공덕을 따라 기뻐함
수희라는 한자어는 산스크리트어 아누모다나(anumodanā)를 옮긴 말이다. 사두를 외치는 그 행동의 이름이 바로 아누모다나다. 무디타가 남의 행복 전반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라면, 아누모다나는 특히 남이 지은 선행과 공덕을 따라 기뻐하는 마음이다. 두 말은 결이 조금 다르지만 뿌리는 같다. 남에게 좋은 일이 생긴 바로 그 순간, 나의 마음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묻는다.
III. 붓다고사의 해부
네 줄의 정의
5세기 스리랑카에서 활동한 학승 붓다고사는 『청정도론』이라는 두꺼운 수행 안내서를 남겼다. 그는 무디타를 의사가 병을 기록하듯 네 줄로 정리했다. 그 특징은 남의 성공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그 작용은 시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모습은 싫어하고 불쾌해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일으키는 가까운 원인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둘째 줄이 핵심이다. 무디타가 하는 일이 곧 '시기하지 않음'이다. 불교는 이 마음을 막연히 착한 감정으로 두지 않고, 처음부터 시기를 정면으로 겨냥한 수행으로 설계했다. 넷째 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마음을 일으키는 원인은 남이 잘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질투를 일으키는 원인도 똑같다. 같은 장면을 보고 어떤 마음은 질투로, 어떤 마음은 수희로 간다. 장면이 마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장면을 정한다.
가까운 적과 먼 적
붓다고사는 이 마음에 적이 둘 있다고 했다. 먼 적은 정반대 감정, 곧 싫어함과 불쾌함이다. 남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고 지겨운 마음이다. 이것은 알아보기 쉽다.
무서운 것은 가까운 적이다. 붓다고사는 그것을 세속의 기쁨이라 불렀다. 남의 성공을 보고 함께 들뜨는 마음이다. 겉모습이 수희와 꼭 닮아서 헷갈린다. 둘 다 남의 성공을 보고 웃는다. 그러나 하나는 상대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성공에 덩달아 흥분하는 것이다. 회식 자리에서 승진한 동료를 둘러싸고 건배를 외치는 소리는 크다. 그 소리 가운데 얼마가 수희이고 얼마가 들뜸일까.
붓다고사는 판별 기준도 남겼다. 싫어하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이 수행은 성공한 것이고, 들뜬 즐거움만 생기면 실패한 것이다. 박수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박수 친 뒤 내 마음이 얼마나 고요해졌는가가 기준이다. 크게 축하하고 돌아와 밤에 혼자 곱씹는다면, 그날의 축하는 실패였다.
IV. 가장 가까운 벗에서 시작하라
붓다고사가 일러 준 수행 순서는 뜻밖이다. 그는 무디타를 닦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사람으로 '늘 기쁘게 지내는 아주 친한 벗'을 꼽았다. 그 벗의 행복을 떠올리며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먼저 키우고, 그다음에 좋지도 싫지도 않은 사람에게로, 마지막에 미운 사람에게로 넓혀 가라고 했다.
질투는 가까운 사람을 향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거지는 백만장자를 시기하지 않고 형편이 조금 나은 다른 거지를 시기한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벗은 가장 위험한 질투의 과녁이 아닌가. 그런데 불교는 바로 그 사람에게서 수행을 시작하라고 한다.
이 순서에는 깊은 지혜가 있다. 가까운 사람의 기쁨은 질투의 용광로가 될 수도 있고, 함께 기뻐함의 첫 계단이 될 수도 있다. 갈림길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이다. 친한 벗이 좋은 일을 겪을 때 우리 마음은 아직 비교 이전의 자리에 서 있을 때가 많다. 그가 웃으면 나도 그냥 웃게 된다. 그 순수한 순간을 붙잡아 근육처럼 키우라는 것이다. 질투는 가까운 데서 시작되니, 그 해독제도 가까운 데서 길러야 한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본부의 성과를 축하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 정말 어려운 것은 같은 팀 동료, 입사 동기의 성과를 축하하는 일이다. 그러니 수희의 훈련은 거기서부터 해야 한다. 먼 사람을 향한 축하는 예의로도 충분하지만, 가까운 사람을 향한 축하는 수행이 필요하다.
V. 쉰 번째 사람의 기쁨
보현보살의 다섯째 서원
대승불교로 오면 수희는 더 적극적인 서원이 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보현보살은 열 가지 큰 서원을 세운다. 그 다섯째가 수희공덕(隨喜功德)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지옥과 아귀와 축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가 짓는 공덕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빠짐없이 함께 기뻐하겠다는 서원이다. 한국 사찰에서 널리 읽히는 경문이어서, 이 다섯째 서원은 우리 불자들의 입에도 익숙하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라는 대목이 중요하다. 질투는 큰 성공에만 반응하지 않는다. 동료가 받은 칭찬 한마디, 후배가 올린 작은 성과에도 반응한다. 그러니 수희도 작은 것에서부터 해야 한다.
오십전전의 비유
『법화경』에는 아예 「수희공덕품」이라는 장이 따로 있다. 거기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이 법회에서 경을 듣고 기뻐하여, 법회가 끝난 뒤 다른 사람에게 들은 대로 전한다. 그 사람도 기뻐하여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한다. 이렇게 전하고 전해 쉰 번째 사람에게 이른다. 이 쉰 번째 사람은 원래 법회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전해 들은 이야기 가운데 한 구절을 듣고 기뻐했을 뿐이다.
부처님은 이 사람의 공덕을 한 대시주와 견준다. 이 대시주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의 중생에게 80년 동안 보석과 코끼리와 수레와 궁전을 원하는 대로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이 늙어 죽음이 가까운 것을 보고는 가르침을 전해 모두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게 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 엄청난 공덕도 쉰 번째 사람이 한 번 따라 기뻐한 공덕의 백분의 일,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처음 듣고 기뻐한 사람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다.
과장된 셈법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산수가 아니다. 남의 선을 기뻐하는 마음 한 번이 산더미 같은 보시보다 귀하다는 것, 그리고 그 기쁨은 원래 자리에서 쉰 번이나 멀어져도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것
여기에 불교 특유의 계산법이 있다. 남이 지은 공덕을 진심으로 따라 기뻐하면 그 공덕이 내게도 생긴다. 그런데 상대의 공덕은 조금도 줄지 않는다. 티베트 스승들 사이에는 이런 농담 섞인 말이 전해진다. 수희는 게으른 사람이 공덕을 쌓는 가장 쉬운 길이다. 돈도 들지 않고 힘도 들지 않는다. 마음 하나만 돌리면 된다.
질투의 계산법은 정반대다. 질투는 남이 얻으면 내가 잃는다고 계산한다. 자리가 하나뿐이고 파이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다. 수희는 남이 얻으면 나도 얻는다고 계산한다. 하나는 모두가 지는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가 이기는 게임이다. 빵은 나누면 줄지만 기쁨은 나누면 늘어난다. 쉰 번째 사람의 비유는 바로 그 사실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그림이다.
VI. 두 손의 병
불교가 질투를 어떻게 진단했는지를 보면 수희가 왜 해독제인지 더 선명해진다. 유식불교는 마음을 흐리는 번뇌를 아주 세밀하게 분류했다. 그 목록에 질(嫉)과 간(慳)이 나란히 놓여 있다.
『성유식론』은 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자기 이름과 이익에 목숨을 걸어 남의 영화를 견디지 못하고, 시기를 그 본성으로 하며, 근심과 괴로움을 그 작용으로 한다. 간은 이렇게 정의한다. 재물과 가르침에 집착해 내놓지 못하고, 감추고 아끼는 것을 본성으로 하며, 비루하게 쌓아 두는 것을 작용으로 한다.
질은 남의 것을 향한 병이고, 간은 내 것을 향한 병이다. 하나는 남이 가진 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하나는 내가 가진 것을 놓지 못한다. 이 둘은 늘 함께 다닌다. 남의 영화가 아픈 사람은 대개 자기 것도 내놓지 못한다.
서양에도 이 두 병을 한 몸에 그린 그림이 있다. 14세기 초 조토가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에 그린 「질투(Invidia)」다. 그림 속 여인은 한 손으로 자기 재물 주머니를 꽉 움켜쥐고, 다른 손은 갈고리처럼 앞으로 뻗어 무언가를 낚아채려 한다. 움켜쥔 손이 간이고, 뻗은 손이 질이다. 동양의 번뇌론과 서양의 그림이 질투를 똑같이 '두 손의 병'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여인의 발밑에는 불길이 타오른다. 『성유식론』이 질의 작용을 근심과 괴로움이라 한 것과 같다. 질투는 남을 태우기 전에 질투하는 사람을 먼저 태운다.
수희는 이 두 손을 동시에 푼다.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는 순간, 남의 것을 낚아채려던 손이 멈춘다. 그리고 남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니, 내 것을 움켜쥐던 손도 힘이 빠진다. 지킬 필요도 빼앗을 필요도 없는 자리에서 두 손은 비로소 합장할 수 있다. 사두를 외치는 사람들이 손을 모으는 데는 이유가 있다.
VII. 함께 우는 것보다 함께 웃는 것이 어렵다
비 다음에 희가 오는 이유
사무량심의 순서를 다시 보자. 자, 비, 희, 사. 남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비가 남의 기쁨을 함께하는 희보다 앞에 놓였다. 여러 가지로 읽을 수 있지만, 한 가지 해석은 우리의 경험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함께 슬퍼하기보다 함께 기뻐하기가 더 어렵다.
친구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진심으로 아파한다. 친구가 큰 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우리는 축하한다고 말하지만, 마음 한쪽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의 고통은 내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남의 기쁨은 비교를 부른다. 그래서 위로는 쉽고 축하는 어렵다.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도 같은 것을 보았다. 그는 '함께 기뻐함'을 '함께 슬퍼함'보다 더 높고 더 드문 감정으로 꼽았다. 질투를 평생 몸으로 겪은 철학자가 그 모든 일 끝에 남긴 단어가 원한이 아니라 함께 기뻐함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동양의 수행 전통과 서양의 철학자가 서로를 모른 채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이다.
산티데바의 따끔한 물음
8세기 인도의 승려 산티데바는 『입보리행론』의 인욕을 다룬 장에서 질투하는 마음에 따끔한 물음을 던진다. 그 논지는 대략 이렇게 요약된다. 너는 모든 중생이 행복해지기를 서원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행복을 얻으면 왜 화를 내느냐. 남이 칭찬받을 때 함께 기뻐하면 너도 기쁠 텐데, 왜 그 기쁨을 스스로 걷어차느냐.
이 물음은 수행자만 겨냥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말한다. 회사가 잘되기를, 동료가 성장하기를, 후배가 크기를 바란다고. 그런데 정작 동료가 성장하고 후배가 크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산티데바는 그 모순을 정면으로 짚었다. 남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남이 행복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내가 바란 것은 남의 행복이 아니라 내가 베푸는 행복이었던 셈이다.
셸러와 불교가 갈라지는 자리
다만 셸러와 불교는 결이 조금 다르다. 셸러에게 함께 기뻐함은 비교를 넘어 가치 그 자체를 보게 된 정신이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감정이다. 남과 비교하기 전에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먼저 보는 사람은 남이 그 일을 해냈을 때 기뻐할 수 있다. 불교의 수희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비교하는 '나'라는 경계 자체를 엷게 만든다. 남의 공덕이 곧 나의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나와 남이 생각만큼 단단히 나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셸러가 비교의 순서를 바꾸라고 한다면, 불교는 비교의 주어를 지우라고 한다.
VIII. 수희를 닦는 다섯 가지 방법
수희는 마음먹는다고 바로 생기지 않는다. 불교가 그것을 수행이라 부르는 이유다. 일상에서 해 볼 만한 방법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 본다.
소리 내어 축하하라
사두를 외치는 사람들에게서 배울 첫째는 소리다. 마음속으로만 기뻐하겠다고 하면 그 기쁨은 대개 오지 않는다. 먼저 말로 꺼내라. 말이 마음을 끌고 온다. 동료의 성과를 회의 첫머리에서 이름을 불러 축하하는 것도 조직판 사두다.
들뜨지 말고 물어라
붓다고사가 경계한 가까운 적은 들뜸이었다. 크게 박수 치는 것보다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묻는 것이 낫다. 어떻게 해냈는지,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그 순간 기분이 어땠는지. 물음은 상대의 기쁨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박수는 문밖에서 칠 수 있지만 물음은 안으로 들어가야 할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의 성공을 축하하는 연습으로는 수희가 자라지 않는다. 붓다고사의 순서대로 가장 가까운 벗의 기쁨부터 시작하라. 거기서 길러진 마음이 무덤덤한 사람으로, 마침내 껄끄러운 사람에게로 넓어진다.
작은 것까지
보현보살은 아무리 작은 공덕도 빠뜨리지 않겠다고 했다. 후배의 작은 개선, 동료의 짧은 칭찬, 아이가 받아 온 별것 아닌 상장. 작은 것에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이 큰 것에 기뻐할 수는 없다.
질투가 일어난 자리에서 돌려라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수희는 질투가 없는 사람의 덕이 아니다. 질투가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마음을 돌리는 사람의 수행이다. 단체 대화방의 승진 소식 앞에서 손가락이 무거워지는 그 순간을 부정하지 말라. 그 무거움을 알아차리고, 그대로 인정하고, 그다음에 한 번 더 축하의 말을 보내라. 질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질투가 지나가는 길을 기쁨 쪽으로 틀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돌린 마음 한 번이 쉰 번째 사람의 기쁨이 된다.
IX. 나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
수희의 수(隨)는 따른다는 뜻이다. 내가 앞장서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기쁨을 뒤따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앞에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야 한다. 수희는 겸손의 다른 이름이다.
맹자는 순임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大舜有大焉 善與人同 舍己從人 樂取於人以爲善
"위대한 순임금은 더 위대한 점이 있었다. 선을 남과 함께하여,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으며,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였다."
맹자는 이어서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하는 것은 남과 더불어 선을 행하는 것이니, 군자에게 남과 더불어 선을 행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다(取諸人以爲善 是與人爲善者也 故君子莫大乎與人爲善)"고 했다. 사기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던 시절부터 천자가 된 뒤까지 순임금은 남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남의 좋은 점을 시기하는 대신 즐거이 가져와 함께 누렸다. 사기종인(舍己從人), 나를 버리고 남을 따른다는 이 네 글자가 바로 수희의 수다. 인도의 수행자와 중국의 성인이 다른 언어로 같은 마음을 가리킨 셈이다.
태국의 절에서 처음 보는 사람의 보시에 사두를 외치던 사람들은 무엇을 잃었을까.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남의 공덕을 한 푼도 빼앗지 않고 자기 몫의 기쁨을 얻었다. 질투는 남의 것을 가져오려다 내 것까지 태우고, 수희는 남의 것을 그대로 둔 채 내 것을 늘린다.
오늘 누군가의 좋은 소식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진심으로 사두를 외쳤던가. 무거웠던 손가락은, 결국 어느 쪽으로 움직였던가..


慈 : 사랑할 자, 남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주려는 마음
悲 : 슬플 비, 남의 괴로움을 안타깝게 여기고 덜어 주려는 마음
喜 : 기쁠 희, 남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거나 좋은 일을 하면 함께 기뻐하는 마음
捨 : 버릴 사, 좋아하고 미워하는 집착을 내려놓고,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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