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그 메커니즘과 승화의 기술
인간은 다른 인간과 비교하지 않고 살 수 없다. 같은 비교의 에너지가 벤 존슨에게서는 세계신기록을 지웠고, 루츠 롱에게서는 우정을 남겼다. 지라르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남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질투는 항상 가까운 사람을 향한다. 셸러는 부러움을 눌러 두고 곱씹으면 마음속에서 독이 된다고 보았다. 그 독은 "저건 별것 아니다"라며 상대를 깎아내리게 만든다. 인간은 자기 욕심에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안다. 그 "아니오"를 상대에게 쏘면 시기가 되고, 내 욕심에 쏘면 성장이 된다. 그러니 부러우면 부럽다고 인정하고, 그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 따져 보고, 자리나 돈보다 실력과 품격을 놓고 겨루자.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질투를 없앤 사람이 아니라 질투를 이겨 낸 사람이다.
I. 9.79초와 도약판의 표시
1988년 9월 24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 캐나다의 벤 존슨이 100미터를 9.79초에 달렸다. 세계신기록이었다. 결승선을 지나며 그는 오른손 검지를 하늘로 치켜들었는데, 그 손가락이 향한 곳은 관중석이 아니라 옆 레인의 칼 루이스였다고 전해진다. 훗날 그는 오랫동안 자신을 움직인 것은 기록이 아니라 루이스를 이기는 일 하나였다는 취지로 고백했다. 사흘 뒤 그의 소변에서 금지 약물이 검출되었다. 금메달은 박탈되었고, 9.79초는 기록에서 지워졌다.
그보다 52년 앞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미국의 제시 오언스는 멀리뛰기 예선에서 두 번 연속 파울을 범해 탈락 직전에 몰려 있었다. 그때 그에게 다가온 사람은 독일의 금메달 후보, 그러니까 오언스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루츠 롱이었다. 롱은 도약판 몇 센티미터 앞에 표시를 해 두고 거기서 뛰라고 일러 주었다고 전해진다. 오언스는 결선에 올라 금메달을 땄고, 은메달에 그친 롱은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히틀러가 지켜보는 관중석 앞이었다.
두 사람 모두 최고의 라이벌을 곁에 두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경쟁심은 자신을 무너뜨렸고, 다른 사람의 경쟁심은 우정과 역사를 남겼다. 똑같은 비교의 에너지가 왜 정반대의 운명으로 갈라지는가. 이 글은 이 질문 하나를 붙들고 간다.
우리 곁의 장면들
질문을 일상으로 옮겨 오면 훨씬 가까워진다.
어느 그룹 회장이 석 달 전 검토 끝에 접은 인수 매물이 있다. 값이 너무 비쌌고 시너지도 불투명했다. 본인이 직접 서명하고 덮은 건이다. 그런데 어제 경쟁사가 바로 그 회사를 사들였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 매물, 다시 볼 수 없나. 석 달 사이 그 회사의 가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단 하나, 경쟁자가 그것을 원했고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장면. 임원 회의에서 신설 사업부장 인사가 안건에 오른다. 한 임원이 조목조목 반론을 편다. 경력이 부족하다, 이런 선례를 만들면 승진 질서가 무너진다. 하나하나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는 그 후보와 입사 동기다. 질투는 결코 자기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저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지 않고 "저 사람은 원칙에 어긋난다"고 말한다.
마지막 장면은 오래된 우화다. 두 사람이 탄 배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둘은 기도한다.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응답이 온다. 그러자 두 사람은 다시 기도한다. 그렇다면 저놈이 있는 쪽부터 가라앉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 기도에서는 살아남는다는 목적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상대가 먼저 죽는 꼴을 보겠다는 마음뿐이다.
이 장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질투의 상대가 모두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옆 레인의 라이벌, 같은 업계의 경쟁사, 입사 동기, 같은 배에 탄 동승자. 이 장면들을 풀기 위해 두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한 사람은 독일 철학자 막스 셸러(1874~1928)다. 그는 질투가 왜 독이 되는지를 설명한다. 다른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 사상가 르네 지라르(1923~2015)다. 그는 질투의 에너지가 애초에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한다. 이 글의 주연은 셸러이고, 지라르는 그 곁을 지키는 조연이다.
II. 질투를 몸으로 산 철학자
셸러는 질투를 서재에서 연구하지 않았다. 삶이 그에게 질투를 떠안겼다. 그의 생애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그는 평생 질투의 피해자였고, 질투의 당사자였으며, 질투가 들끓는 시대의 증인이었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
셸러는 1874년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신교도였고 어머니는 유대계 집안 출신이었으며, 그 자신은 청년기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개신교 사회의 유대계 혈통, 유대 집안의 개신교 부계, 그리고 스스로 택한 가톨릭. 반유대주의가 짙어 가던 독일 학계에서 그는 늘 비교당하고 평가받는 자리에 있었다.
훗날 그는 곪은 원한, 곧 르상티망이 가장 잘 자라는 자리를 이렇게 짚는다. 비교는 강요되는데 동등한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 자리. 그것은 사회학적 관찰이기 이전에 그 자신의 성장 체험이었다. 조직으로 옮기면 쉽게 이해된다. 질투가 가장 많이 고이는 곳은 바닥이 아니다. "너도 될 수 있다"는 말은 듣지만 실제로는 안 되는 자리다. 형식상 열려 있으나 실제로는 닫혀 있는 승진 사다리가 원한의 양식장이 된다.
피해자이면서 유발자
1899년 셸러는 일곱 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했다. 아내는 극단적인 질투심의 소유자였고, 셸러는 실제로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었다. 10년 넘게 그는 질투가 한 인간을 의심과 감시와 폭로와 복수로 끌고 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질투에 불을 붙인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셸러를 질투의 순수한 피해자로 그리는 것은 왜곡이다. 그는 질투당하는 쪽이면서 질투를 일으키는 쪽이었다. 바로 이 이중의 체험 덕분에 그의 분석은 한쪽의 원망이나 다른 쪽의 변명이 아니라 냉정한 해부가 될 수 있었다.
그가 결혼 생활에서 날마다 본 것이 하나 있다. 질투는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되감아 다시 느끼면서 독은 점점 짙어진다. 회의에서 한 번 상처받은 임원은 그 장면을 퇴근길에, 주말에, 다음 회의 직전에 다시 재생한다. 리더가 본 것은 한 번의 언쟁이지만, 당사자 안에서는 백 번의 언쟁이 일어나고 있다.
도덕의 칼에 베이다
1910년, 셸러의 사생활에 관한 의혹이 뮌헨의 한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는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가 졌고, 대학은 그의 강의 자격을 박탈했다. 서른여섯 살, 철학자로서 가장 왕성해야 할 나이에 그는 하루아침에 강단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의 세부 경위는 전기마다 서술이 조금씩 다르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12년, 그는 『르상티망』을 발표했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질투가 도덕의 옷을 빌려 입는다는 것이다. 질투하는 사람은 "나는 저 사람이 부럽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부도덕하다"고 말한다. 셸러는 바로 그 도덕적 단죄의 칼날을 맞은 직후에 이 책을 썼다. 그에게 르상티망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방금 자신을 베고 지나간 칼이었다.
쫓겨난 자의 전성기, 그리고 다시 쫓겨남
역설적이게도 강단에서 쫓겨난 시기가 그의 최고 전성기였다.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윤리학』,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같은 대표작이 이때 나왔다. 1919년 그는 신설된 쾰른 대학의 교수로 복귀했다. 억울함을 곱씹는 대신 그것을 창조로 바꾸는 길을, 그는 이론으로 정리하기 전에 먼저 살아 냈다.
그러나 1920년대에 그는 다시 재혼했고, 가톨릭 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를 '가톨릭의 니체'라 떠받들던 지식인들이 등을 돌렸다. 어제의 찬양자가 오늘의 고발자가 되는 것을 그는 두 번 겪었다. 1928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부임한 직후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쉰셋이었다.
왜 질투가 그의 핵심 개념이 되었나
이유는 넷이다. 첫째, 그는 질투의 세 자리, 곧 피해자와 유발자와 경계인의 자리를 모두 살았다. 한 자리에서만 겪은 사람은 원망이나 변명밖에 쓰지 못한다. 둘째, 그가 산 시대의 독일은 산업화와 계급 갈등, 패전과 굴욕이 겹친 거대한 원한의 실험실이었다. 셋째, 기독교 도덕 전체가 약자의 원한에서 나왔다고 선언한 니체에게 가톨릭 철학자로서 답해야 했다. 넷째, 그의 윤리학 체계 자체가 질투 이론을 필요로 했다. 가치에 객관적 높낮이가 있다고 주장하려면, 사람들이 왜 그 높낮이를 그토록 다르게 보는지, 곧 가치를 보는 눈이 어떻게 비뚤어지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시력 이론에 착시 이론이 필요한 것과 같다.
셸러에게 질투는 연구 주제로 '고른' 개념이 아니었다. 삶이 그에게 '강요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 모든 일 끝에 남긴 단어는 원한이 아니었다. '함께 기뻐함'이었다. 이 단어는 글의 마지막에서 다시 만난다.
III. 이름부터 바로잡자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다(名不正 則言不順)"고 했다.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면 처방은 반드시 엉뚱한 곳으로 간다. 셸러는 감정을 '정확하게 보는 것'을 철학의 첫 과제로 삼은 사람이었다. 그 정신을 따라 먼저 낱말을 가려 보자.
부러움, 얄미움, 시샘, 시기, 질투
부러움은 "저 집 아들 참 부럽네" 할 때의 감정이다. 다섯 가운데 유일하게 적의가 없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지, 저 사람이 저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시험이 있다. 부러움은 면전에서 말할 수 있다. "부럽습니다"는 자연스럽지만 "시기합니다"는 입 밖에 내기 어렵다.
얄미움은 본래 상대가 가진 것이 아니라 상대의 처신을 향한 가벼운 미움이다. 그런데 실제로 얄미운 대상은 거의 언제나 '잘나가는 가까운 사람'이다. 얄미움은 질투가 자기 이름을 감출 때 가장 즐겨 쓰는 가면이다.
시샘은 "동생만 예뻐한다고 시샘한다" 할 때의 감정이다. 관계가 전제되어 있고 강도가 약하며, 종종 귀엽게까지 쓰인다. 관계를 끊지 않는다.
시기는 가장 무겁다. 다섯 가운데 유일하게 적의를 분명히 품는다. 상대가 내려가기를 바라고, 그래서 숨는다. '시기하는 무리'라는 말이 있듯 집단으로도 번진다.
질투는 본래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에 가깝다. 다만 우리말에서는 "경쟁사를 질투한다"처럼 시기의 자리에도 넓게 쓰인다.
이 낱말들의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것이 보인다. 부러움의 반대는 스스로 넉넉함을 아는 자족이고, 시기의 반대는 신뢰다. 그런데 질투의 반대말로 불교는 수희(隨喜)라는 말을 내놓았다. 남의 기쁨을 '따라서 기뻐함'이다. 질투의 반대를 무덤덤함이 아니라 함께 기뻐함으로 잡았다는 점이 놀랍다. 서양에는 이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오래 없었다. 그런데 서양 철학에서 이 감정에 가장 깊은 자리를 준 사람이 바로 셸러다. 그는 '함께 기뻐함'을 '함께 슬퍼함'보다 더 높고 더 드문 감정으로 보았다.
하나 더 물어보자. 다섯 감정 가운데 없으면 오히려 문제인 감정은 무엇인가. 시샘은 없어도 된다. 시기는 없을수록 좋다. 그런데 부러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어떤가.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욕심이 없다는 것은 성숙일 수도 있지만, 생기를 잃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두 사람의 감정, 세 사람의 감정
영어는 이 감정을 사람의 수로 나눈다. envy는 두 사람의 감정이다. 나,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 "쟤는 있는데 나는 없다." jealousy는 세 사람의 감정이다. 나, 내가 가진 것, 그리고 그것을 빼앗아 갈 제3자. "내 것을 뺏길 것 같다."
이 구분이 실무에서 중요한 이유는 처방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envy에는 내가 올라가거나 비교를 끊는 것이 약이고, jealousy에는 내가 가진 것을 실제로 지키는 조치가 약이다. 경쟁사의 성공에 방어 조치를 하면 우스워지고, 핵심 고객이 떠날 조짐에 "비교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회사를 잃는다.
옛사람들의 구분
옛 그리스인들은 이 감정을 둘로 갈랐다. 하나는 프토노스(phthonos), 남이 좋은 것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아픈 감정이다. 다른 하나는 젤로스(zēlos), 남이 가진 좋은 것을 보고 나도 가지려고 애쓰는 감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의 것을 나쁜 사람의 특징으로, 뒤의 것을 좋은 사람의 특징으로 보았다. 출발점의 아픔은 같다. 갈라지는 것은 그 아픔이 향하는 방향이다. 이 두 낱말은 이 글 끝까지 나침반 노릇을 한다.
라틴어 invidia는 '적대적으로 바라보다', 곧 노려본다는 뜻에서 왔다. 질투가 '봄', 곧 비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말 자체가 알려 준다. 한자 羨(선)은 양고기를 보고 침을 흘리는 모양이다. 미움이 섞이지 않았으니 선망(羨望)은 다섯 감정 가운데 가장 가볍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는 방패인가 감옥인가
우리는 흔히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쓰기에 따라 전혀 다른 일을 한다.
방패로 쓸 때 이 말은 이런 뜻이다. 저 사람이 저것을 가졌다는 사실이 내 삶의 값을 정하지는 않는다. 하루에도 수없이 남과 비교당하는 세상에서, 비교에 나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는 것은 마음을 지키는 중요한 기술이다. 노자가 "만족을 아는 자가 부자다(知足者富)"라고 한 것과 같다.
감옥으로 쓸 때는 다르다. 부러워하는 것 자체가 패배이니 나는 절대 부러워하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부러움은 금지된다. 그런데 감정은 금지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금지된 부러움은 땅속으로 숨고, 땅속에서 시기로 썩는다. 셸러가 말한 르상티망의 핵심 조건이 바로 이 '억압'이다. 그에게 르상티망은 감정이 있어서 생기는 병이 아니라 감정을 억눌러서 생기는 병이었다.
이 말이 조직 문화가 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 벤치마킹이 불가능해진다. 벤치마킹은 "저들이 우리보다 낫다"는 인정에서 출발하는데, 그 인정이 패배로 여겨지는 조직에서는 아무도 그 말을 꺼내지 못한다. 대신 "저들은 운이 좋았다", "저 방식은 우리와 안 맞는다"는 말만 남는다. 공자가 공문자를 칭찬하며 든 이유가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는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不恥下問)".
그러니 이 말의 올바른 교정판은 이렇다. 부러워하되, 그 사람과 같은 것을 놓고 다투지는 말라.
IV. 왜 하필 가까운 사람인가
비교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먼 옛날 무리 속에서 내 순위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기의 어느 부위를 받는지, 누구와 짝을 이루는지, 위험할 때 누가 먼저 보호받는지가 순위로 정해졌다. 순위는 비교로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절대량보다 '남과 비교한 몫'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졌다.
이것을 보여 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두 사람에게 10만 원을 주고, 한 사람이 나누는 비율을 정하면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거부하면 둘 다 한 푼도 못 받는다. 계산상으로는 1원이라도 받는 게 이득이다. 그런데 8 대 2처럼 기울어진 제안이 오면 거부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난다. 내 몫 2만 원을 버리면서까지 상대가 8만 원을 갖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공자가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않은 것을 근심한다(不患寡而患不均)"고 한 말 그대로다. 조직의 불만은 절대량이 아니라 분포에서 나온다.
질투는 일종의 경보기다. 내 상대적 위치가 내려가고 있다고 알려 주는 장치다. 문제는 이 경보기가 옛날에는 수십 명을 상대로 울렸는데, 지금은 화면 속 수천만 명을 상대로 울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는 질투의 상당 부분은 실제 손실의 크기가 아니라 경보기의 기본 설정값이다. 질투는 신호이지 판결이 아니다.
거지는 백만장자를 시기하지 않는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 있다. "거지는 백만장자를 시기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는 시기하겠지만." 부장은 회장을 질투하지 않는다. 옆자리 부장을 질투한다. 중견기업 오너는 세계적인 빅테크 창업자를 질투하지 않는다. 같은 업종, 같은 규모, 같은 골프 모임의 다른 오너를 질투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 그대로다.
왜 그럴까.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자기와 비슷한 사람하고만 비교한다는 것을 밝혔다. 또 질투는 두 조건이 겹칠 때 가장 커진다. 상대가 가까울 것, 그리고 그 분야가 내 정체성에 중요할 것. 친구가 화가로 성공하면 자랑거리가 되지만, 친구가 나와 같은 업계에서 성공하면 밤잠을 설친다. 일본의 한 뇌 연구에서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잘되는 이야기를 읽을 때 통증과 관련된 뇌 영역이 반응했고, 그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야기를 읽을 때는 보상과 관련된 영역이 반응했다. 반응의 세기를 가른 것은 '얼마나 나와 비슷한가'였다.
그래서 친구가 최대 경쟁자가 된다. 입사 동기는 제도가 만들어 준 완벽한 질투의 짝이다.
15세기 피렌체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대성당의 거대한 지붕을 올리는 공모에서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가 맞붙었는데, 두 사람은 20년 전 다른 공모에서도 맞붙은 사이였다. 시는 두 사람을 공동 감독으로 세웠다. 전해지는 바로는 브루넬레스키는 설계의 핵심을 공유하지 않았고, 그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자 공사가 멈췄다고 한다. 후대 전기에 기댄 이야기라 극적으로 다듬어진 부분이 있지만 구조는 분명하다. 유능한 두 사람을 같은 일, 같은 지위, 같은 명예 위에 세우자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정보였다. 공동 대표나 투톱 체제를 만들 때 리더는 협력을 설계했다고 믿지만, 실은 질투의 조건을 제도로 만들었을 수 있다.
정의감인가, 질투인가
여기서 중요한 반론이 나온다. 남과 비교해 억울하다고 느끼는 것이 다 질투인가. 공정이나 분배 정의도 모두 비교에서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 그래서 "비교하지 말라"는 처방은 정의감까지 죽인다. 문제는 비교 자체가 아니라 비교가 무엇을 겨냥하느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를 구분했다. 부당하게 얻은 행운에 대한 의로운 분노는 덕이다. 정당하게 얻은 행운에도 아파하는 시기는 악덕이다. 남의 불운을 기뻐하는 마음도 악덕이다. 그러니 판별은 한 질문으로 된다. 그가 정당하게 얻었는데도 나는 아픈가. 실제 연구에서도 상대의 우위가 정당하다고 느낄 때는 나를 끌어올리려는 노력으로, 부당하다고 느낄 때는 상대를 끌어내리려는 행동으로 기울었다.
더 쉬운 시험도 있다. 규칙이 공정하게 바뀌고 내 몫이 회복된 뒤에도 그 사람이 여전히 미운가. 그렇다면 그것은 박탈감이 아니라 질투였다.
셸러는 이 대목에서 근대의 어떤 평등 요구는 정의감이 아니라 남이 나보다 높은 것을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비판했다. 다만 이것을 "평등 요구는 다 질투다"로 읽으면 심각한 오독이다. 그가 겨냥한 것은 정의를 향한 요구가 아니라 정의의 옷을 입은 시기였고, 그 비판에는 그 자신의 보수적 입장이 짙게 묻어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적었다. 탁월한 덕을 지닌 사람이 승진할 때는 시기를 덜 받는다, 그 행운이 마땅히 그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리더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조직의 시기는 승진 그 자체보다 승진이 얼마나 설명 가능한가에 달려 있다. 설명되지 않은 행운은 정의감을 부른다. 그러나 설명된 행운 앞에서도 남는 아픔, 그것은 질투다. 리더는 앞의 것은 없앨 수 있어도 뒤의 것은 없앨 수 없다. 이제 그 남는 아픔이 왜 어떤 사람에게는 독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날개가 되는지, 셸러의 우주로 들어가 보자.
V. 엔진과 내비게이션: 셸러가 본 인간
셸러는 세상을 떠나던 해에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라는 얇은 책을 냈다. 그 안에 그의 세계관이 다 담겨 있다. 질투를 심리학이나 윤리학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구조에서부터 설명한다는 점이 셸러를 다른 질투 이론가들과 갈라놓는다. 어렵게 들리지만 비유 하나면 충분하다.
충동과 정신
셸러는 세계의 밑바닥에 두 가지 힘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충동이다. 방향은 모르지만 밀어붙이는 힘은 엄청나다. 먹어라, 가져라, 이겨라. 생명을 움직이는 모든 에너지가 여기서 나온다. 다른 하나는 정신이다.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높은지를 볼 줄 안다. 그런데 그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다. 아무리 고귀한 생각도 스스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다.
자동차로 생각하면 쉽다. 충동은 엔진이고 정신은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은 차를 한 뼘도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엔진의 힘이 어디로 갈지는 정한다. 엔진만 있는 차는 빠르게 엉뚱한 곳으로 가고, 내비게이션만 있는 차는 제자리에 서 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셸러는 생명이 감각, 본능, 습관, 영리한 문제 해결의 단계를 차례로 밟아 올라간다고 보았다. 아무리 영리한 침팬지도 여기까지다. 인간만이 그 위에 정신을 가졌다. 정신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배고픈 개에게 세상은 먹을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만 나뉜다. 동물은 자기 욕구와 관련된 것만 보는 '환경'에 갇혀 산다. 인간은 사물을 내 욕구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환경을 넘어 '세계'를 가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은 자기 안의 충동이 "가져라, 이겨라"라고 외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셸러의 가장 유명한 문장이 이것이다.
"두려워 도망칠 때조차 언제나 현실에 '예'라고 말하는 동물과 비교할 때, 인간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단순한 현실에 맞서는 영원한 항의자이다."
승화: 힘을 빌려 쓰는 정신
그렇다면 힘없는 정신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셸러의 답은 승화다. 정신은 충동에 "아니오"라고 말해 그 에너지를 붙잡은 다음, 그 에너지를 자신이 본 가치의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정신은 힘을 직접 만들지 않고 충동의 힘을 빌려 쓰는 조타수다.
여기서 꼭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앞에서 본 '억압'과 여기서 말하는 '억제'는 다르다. 억압은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땅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억제는 감정을 인정한 채 그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억압된 질투는 원한으로 썩고, 억제된 질투는 승화된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가 어떤 때는 감옥이 되고 어떤 때는 방패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셸러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충동과 정신이 만나 하나가 되는 유일한 장소가 인간이며, 인간이 충동을 정신의 방향으로 돌릴 때마다 우주는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고 보았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조직에 옮기면 단순하다. 실적 압박, 경쟁심, 승진욕, 질투는 조직의 엔진이다. 비전과 가치와 원칙은 조직의 내비게이션이다. 엔진만 있는 조직은 빠르게 엉뚱한 곳으로 가고, 내비게이션만 있는 조직은 벽에 비전 액자만 걸어 둔 채 서 있다. 리더의 일은 엔진을 끄는 것이 아니라 엔진의 힘이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것이다.
VI. 신 포도가 독이 되기까지: 르상티망
마음이 스스로 만든 독
르상티망(ressentiment)은 프랑스어다. 니체도 셸러도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이 낱말만은 번역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풀면 '다시(re) 느낌(sentiment)'이다. 한 번 겪은 감정을 끝내지 못하고 되풀이해 다시 느끼는 것, 그러면서 그 감정이 점점 짙어지고 한 사람을 향하던 미움이 그 사람이 대표하는 모든 것으로 번지는 것이다.
셸러는 이것을 '마음의 자가중독'이라 불렀다. 독이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새벽 서재의 회장을 떠올려 보자. 경쟁사 회장은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독은 회장 자신의 안에서 만들어졌다.
르상티망이 생기는 데는 네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쉽게 곱셈으로 적으면 이렇다.
적대적 감정 × 무력감 × 억압 × 반복
복수심이나 시기 같은 적대적 감정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풀 힘이 없다는 무력감이 있어야 하며, 그 감정을 인정하지도 표현하지도 않는 억압이 있어야 하고, 같은 장면을 되풀이해 곱씹는 반복이 있어야 한다. 곱셈이므로 하나라도 0이 되면 독은 생기지 않는다. 따라잡을 힘이 있으면 행동으로 풀리고, 털어놓으면 해소되고, 곱씹지 않으면 시간이 옅게 만든다. 이 공식은 처방의 지도이기도 하다. 네 요소 가운데 무엇이든 하나를 0으로 만들면 된다.
여우의 두 단계
이솝의 여우는 높이 매달린 포도를 따려다 실패하자 말한다. "저 포도는 시다." 여우는 달콤함이라는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저 포도가 달지 않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이 첫 단계, 대상을 깎아내리기다. 조직에서는 "그 프로젝트? 운이 좋았지"라는 말이나 경쟁사를 깎아내리는 보고서로 나타난다.
그런데 여우가 계속 곱씹다 보면 말이 바뀐다. "달콤한 걸 원하는 것 자체가 천박하다." 이제 여우는 포도가 아니라 가치의 순서 자체를 뒤집었다. 이것이 둘째 단계, 가치의 전도다. 조직에서는 "이 회사에서 승진한다는 건 영혼을 판다는 뜻이지"라는 말이나 "튀면 손해" 문화로 나타난다.
무서운 것은 둘째 단계에 이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셸러에 따르면 그의 가치 감각 자체가 바뀌어서, 자기가 닿을 수 없는 것을 진심으로 무가치하게 느낀다. 그래서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순서의 차이: 고귀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
셸러는 이렇게 말했다. "'고귀한 인간'은 모든 비교에 앞서 가치를 체험하고, '범속한 인간'은 오직 비교 안에서, 비교를 통해서만 가치를 체험한다."
고귀한 사람도 비교한다. 차이는 순서다. 고귀한 사람은 먼저 가치를 본다. 이 일이 아름답다, 이 문제는 풀 만하다. 그다음에 비교한다. 그래서 남이 나보다 잘해도 그 일의 가치는 여전히 가치로 남는다. 평범한 사람은 비교가 먼저다. 그에게 무엇이 가치 있는 이유는 남이 그것을 가졌기 때문이고, 남보다 내가 더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나보다 많이 가지면 그 가치는 고통이 되고,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가치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신 포도다.
여기서 말하는 고귀함은 혈통이나 신분이 아니라 태도다. 그러니 훈련할 수 있다. 새벽 서재의 회장은 그 물류 기업이 좋은지를 먼저 묻지 않았다. 경쟁사 회장의 웃는 얼굴을 먼저 보았다. 비교가 먼저였고, 가치는 나중에 만들어졌다.
셸러는 가치에 높낮이가 있다고 보았고, 높은 가치일수록 나누어도 줄지 않는다고 했다. 빵은 나누면 줄지만 진리는 만 명이 알아도 줄지 않는다. 질투가 가장 격렬하게 불붙는 대상이 자리, 돈, 명품, 윗사람의 눈길처럼 나누면 줄어드는 것들인 이유가 여기 있다.
"아니오"를 엉뚱한 과녁에 쏘다
셸러의 형이상학 위에 르상티망을 올려놓으면 질투의 정체가 한층 선명해진다. 그가 보기에 질투는 정신을 가진 존재만 걸리는 병이다. 개 두 마리는 뼈다귀를 두고 싸우지만, 진 개는 곧 다른 뼈다귀를 찾아간다. 경쟁자의 뼈다귀를 사흘 동안 곱씹으며 잠 못 이루는 개는 없다. 남을 나와 비교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세워 보는 능력, 그리고 남이 가진 것이 값지다는 것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어야 시기가 가능하다. 시기는 정신의 능력이 충동의 심부름꾼으로 끌려간 상태다.
그리고 시기는 "아니오"의 방향이 뒤집힌 것이다. 정신의 위대함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 "아니오"는 두 방향으로 쏠 수 있다. 하나는 자기 안의 충동을 향한 "아니오"다. "이기고 싶은 나의 욕망아, 멈춰라." 그러면 에너지는 가치를 실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다른 하나는 타인 안의 가치를 향한 "아니오"다. "저 사람의 탁월함은 가짜다." 그러면 가치는 부정되고 충동은 그대로 남는다.
벤 존슨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의 정신은 루이스를 이기고 싶은 충동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대신, 육상이라는 스포츠의 가치, 곧 공정한 경쟁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는다는 가치에 "아니오"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의 9.79초는 사람의 성취가 아니라 약물의 성취가 되었다.
세계가 좁아진다
시기에 사로잡힌 사람을 관찰해 보자. 그의 세계는 급격히 좁아진다. 모든 뉴스, 모든 대화, 모든 성과가 '그 사람'과의 비교라는 단 하나의 축으로 재편된다. 동료의 승진 소식을 들은 날 저녁밥이 맛이 없는 이유다. 음식은 그대로인데 세계가 사라졌다. 배고픈 개에게 세상이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으로만 나뉘듯, 시기하는 사람에게 세상은 나를 이기게 하는 것과 지게 하는 것으로만 나뉜다. 시기는 '세계'를 가진 존재가 다시 '환경'으로 퇴행한 상태다. 동물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동물처럼 보도록 스스로를 좁힌 것이어서 더 딱하다.
사람이 물건이 된다
시기하는 사람에게 상대는 더 이상 무언가를 사랑하고 이루어 가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로 쪼그라든다. 동료는 '내 자리를 차지한 자'가 되고, 경쟁사는 '내 시장을 가져간 자'가 된다. 이렇게 사람을 소유물의 담지자로만 보는 순간, 그에게서 배울 길이 닫힌다. 사람에게서는 배울 수 있지만 물건에게서는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라지는 에너지
한 사람이 동료의 성공을 시기하며 그를 끌어내리는 데 에너지를 쓸 때, 그 에너지는 다른 곳에 쓰일 수 없다. 그 에너지로 만들 수 있었던 작품, 풀 수 있었던 문제, 도울 수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지워진다. 9.79초가 기록에서 지워졌듯이.
니체와의 논쟁
르상티망이라는 개념을 철학의 무대에 올린 사람은 니체였다. 그는 기독교 도덕 전체가 약자의 원한에서 나왔다고 선언했다. 복수할 수 없는 자가 복수하지 않는 것을 '관용'이라 부르고, 이길 수 없는 자가 싸우지 않는 것을 '겸손'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셸러는 니체에게서 이 개념을 물려받았고, 바로 그 개념으로 니체에게 반박했다. 진정한 사랑은 약함이 아니라 넘치는 충만함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넘치는 자만이 기꺼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셸러가 니체에게 내놓은 판별 질문은 리더에게 가장 실용적인 자기 진단이 된다. 겉으로는 똑같이 약자 편에 서 있어도 속의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는 다르다. 그 강자가 무너질 때 기쁜가, 그 약자가 올라설 때 기쁜가. 앞의 사람은 원한 속에 있고, 뒤의 사람은 충만 속에 있다.
공정하게 덧붙이자면, 두 사람 모두 르상티망을 특정 계급의 병으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었다. 니체는 노예 계급과 기독교에, 셸러는 근대 부르주아와 평등주의에. 그러나 르상티망은 계급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아래에 있는 사람의 병이 아니라, 자기가 남보다 아래에 있다고 느끼는 순간의 병이다. 매출 수천억 원의 회장도 새벽 다섯 시 반에는 그 자리에 선다.
VII. 욕망은 빌려 온 것이다: 지라르의 삼각형
셸러가 질투가 '왜 독이 되는지'를 설명했다면, 지라르는 그 독의 원료가 '어디서 들어오는지'를 설명한다. 셸러는 위아래로 놓인 사다리를 그렸고, 지라르는 옆으로 펼쳐진 삼각형을 그렸다.
나와 대상 사이에 누군가 서 있다
지라르는 원래 중세 문서를 공부한 사람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게 되면서 급하게 소설을 읽어야 했는데, 세르반테스, 스탕달,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처럼 시대도 나라도 다른 작가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구조를 발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우리는 흔히 욕망을 나와 대상을 잇는 직선으로 생각한다. 내가 저것을 원한다. 지라르는 아니라고 했다. 욕망은 나, 매개자, 대상의 삼각형이다. 우리는 대상을 보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원하는 누군가를 보고 원하게 된다. 시장을 보고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진입한 사람을 보고 시장을 보게 된다.
돈키호테가 갑자기 편력 기사가 되겠다고 나선 것은 기사도 소설 속 영웅 아마디스를 흉내 내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욕망의 대상을 스스로 고르지 않았다. 아마디스가 대신 골라 주었다. 새벽 서재의 회장도 마찬가지다. 석 달 전에는 그 물류 기업을 원하지 않았다. 경쟁사 회장이 원하자 비로소 원하게 되었다. 지라르의 말대로 "대상을 향한 충동은 궁극적으로 매개자를 향한 충동이다."
그렇다고 지라르가 흉내 내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모방은 인간이 배우고 문화를 쌓는 엔진 그 자체이며, 인간은 피조물 가운데 가장 모방을 잘하는 존재다. 문제는 모방 자체가 아니라 모방의 구조다.
멀리 있는 모델, 가까이 있는 라이벌
지라르는 매개자와 나 사이의 거리에 주목했다. 핵심 질문은 하나다. 매개자와 내가 같은 것을 놓고 다툴 수 있는가.
다툴 수 없을 만큼 멀면 지라르는 이것을 '외적 매개'라 불렀다. 아마추어 화가와 세잔, 오늘의 기업과 100년 전의 위대한 기업이 그렇다. 이때 매개자는 모델이 되고,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감탄하며 영감을 얻는다.
다툴 수 있을 만큼 가까우면 '내적 매개'다. 입사 동기 두 사람, 같은 시장의 경쟁사가 그렇다. 이때 매개자는 모델이면서 동시에 장애물이 된다. 나에게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 바로 그 사람이 내가 그것을 얻는 길을 가로막는다. 존경과 증오가 한 사람을 향해 뒤엉킨다.
러셀의 거지가 백만장자를 시기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서 풀린다. 백만장자는 멀리 있는 매개자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도 풀린다. 사촌은 가까이 있는 매개자다.
서로 닮아 가는 적
가까운 매개가 작동하면 되먹임 고리가 생긴다. 내가 상대의 욕망을 흉내 내면, 내 욕망이 상대에게 "그거 정말 좋은 거구나"를 다시 확인시켜 주고, 상대는 그것을 더 세게 움켜쥔다. 그러면 나는 더 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누가 원본이고 누가 흉내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지라르는 이 상태를 '이중자'라 불렀다. 경쟁이 격해질수록 두 라이벌은 점점 서로 닮아 간다. 갈등은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사라지는 데서 온다.
간단한 진단법이 있다. 격렬하게 경쟁하는 두 회사의 전략 보고서에서 회사 이름만 지우고 읽어 보라. 구별이 안 된다면 두 회사는 이미 이중자다. 그리고 이 고리가 끝까지 가면 대상은 사라진다. 남는 것은 상대의 패배 자체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가라앉는 배 위의 두 번째 기도가 바로 그 끝이다.
감탄과 시기는 한 뿌리다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감탄은 행복한 자기 내어줌이요, 시기는 불행한 자기주장이다." 감탄하는 사람은 그 순간 자기를 잊는다. 그래서 상대가 보이고 배울 수 있다. 시기하는 사람은 그 순간 자기를 내세운다. 그래서 상대는 안 보이고 상대와 나의 간격만 보인다. 키르케고르는 시기를 '숨겨진 감탄'이라고도 불렀다.
경쟁사가 큰 성공을 거뒀을 때 조직이 쓰는 보고서를 보면 둘의 차이가 드러난다. 감탄의 보고서는 "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가, 우리가 못 본 것은 무엇인가"를 묻고 다음 주에 할 일을 적는다. 시기의 보고서는 "그들의 약점은 무엇인가, 그들이 운 좋았던 지점은 어디인가"를 묻고 폄하의 목록을 적는다. 시기의 보고서가 틀린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보고서를 읽고 나서 조직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기의 보고서는 정보가 아니라 진정제다. 셸러가 말한 신 포도의 조직판이다.
질투가 쓰는 다섯 가면
질투는 결코 자기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섯 가지 가면을 쓴다. 정의감("이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원칙론("선례가 됩니다"), 건설적 비판("회사를 위해 말씀드립니다"), 걱정("그 친구, 너무 빨리 올라가서 걱정입니다"), 겸손("저야 그 사람 발끝에도 못 미치죠"). 알아채기 어려운 이유는 이 말들이 대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불공정할 수 있고, 실제로 선례가 되며, 실제로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세 가지 시험이 필요하다. 첫째, 대칭성 시험. 같은 일이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일어났어도 나는 같은 반론을 폈겠는가. 둘째, 시점 시험. 이 반론의 근거를 나는 그 사람의 승진이 거론되기 전부터 갖고 있었는가. 셋째, 성공 시험.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크게 성공한다면 나는 기쁘겠는가. 마지막 시험이 셸러가 말한 '함께 기뻐함'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붙여야 할 경고가 있다. 이 세 시험은 자기 자신에게만 써야 한다. 남에게 들이대며 "그거 질투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의 정당한 반대 의견을 감정 문제로 깎아내린 것이 된다. 셸러 자신이 1910년 뮌헨에서 도덕의 칼에 베였다. 질투 분석을 남에게 겨누는 것은 그 칼을 다시 드는 일이다.
얄미움으로 돌아가 보자. 얄미움은 가까운 질투의 초기 단계에서 쓰는 가장 흔한 가면이다. 질투를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은 상대가 가진 것 대신 상대의 처신을 겨냥한다. 다만 얄미움은 아직 상대의 추락을 바라지는 않는다. 작은 실수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얄미움은 질투의 입구이고,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자리다. 경계선은 하나다. 그의 작은 실수를 바라던 마음이 그의 추락을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
키르케고르는 누가 감탄하고 누가 시기하는지를 인격의 문제로 보았다. 지라르는 다르게 본다. 그것을 가르는 것은 인격이 아니라 거리다. 우리가 세잔을 시기하지 않는 것은 고결해서가 아니라 세잔과 같은 전시 자리를 놓고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이 관찰에는 희망이 숨어 있다. 인격은 쉽게 바꾸지 못해도 매개자는 고를 수 있다.
세 소설가의 진료 기록
지라르는 소설가들을 이 병의 초기, 중기, 말기를 기록한 의사로 읽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 주인공 쥘리앵은 레날 부인을 사랑해서 유혹하는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을 흉내 내며 전투를 치르듯 유혹한다. 그녀의 손을 잡는 데 성공한 밤에 그가 느끼는 것은 사랑의 기쁨이 아니라 임무를 마친 안도감이다. 허영의 단계다. 조직에서는 집무실 크기, 의전 서열, 회의 좌석, 주차 자리를 둘러싼 다툼으로 나타난다. 이런 다툼이 잦아지는 조직은 대개 실질적 권한의 경계가 흔들리고 있는 조직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세련된 미술 애호가 스완은 자기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여인 오데트에게 빠진다. 그의 사랑에 불이 붙은 것은 그녀가 곁에 있을 때가 아니라 어느 저녁 약속 장소에 없었을 때, 다른 남자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열렸을 때였다. 세월이 흐른 뒤 스완은 탄식한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내 취향도 아니었던 여자 때문에 인생의 몇 해를 허비했다고. '내 취향도 아니었다'는 이 한마디가 욕망이 내 안에서 저절로 솟는다는 믿음의 사망 선고다. 인수 협상에서 상대가 애를 태울수록 빛나 보이던 매물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 평범해 보인 경험이 있다면, 스완의 물음을 의사결정의 첫 문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이것은 정말 우리 취향인가, 우리 전략인가.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주인공은 선술집에서 한 장교가 자기를 가구처럼 슬쩍 밀어내고 지나가는 일을 겪는다. 결투를 신청할 용기도 없는 그는 몇 년 동안 그 장교 생각에 사로잡힌다. 장교가 산책하는 길에 나가 관찰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비키지 않고 어깨를 부딪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 복수를 위해 봉급을 가불해 새 외투 깃까지 장만한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침내 어깨를 부딪치고 그는 승리감에 도취된다. 장교는 그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셸러의 공식, 곧 적대적 감정과 무력감과 억압과 반복이 완벽하게 작동한 진료 기록이다. 여기서 쓸 만한 자기 진단이 하나 나온다. 내가 경멸한다고 말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하루에 몇 번 생각하는가. 경멸의 횟수가 많다면 그것은 경멸이 아니라 예속이다.
이 소설가들은 어떻게 이 병을 그토록 정확히 알았을까. 그들 자신이 환자였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작가가 자기 욕망이 남에게서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을 '소설적 회심'이라 불렀다. 셸러가 질투의 세 자리를 모두 살았기에 구조 전체를 볼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조직의 병을 진단하는 리더의 권위도 자기 삼각형을 먼저 털어놓는 데서 나온다.
사다리와 삼각형을 겹치면
셸러에게도 지라르의 매개자와 꼭 같은 자리에 놓인 개념이 있다. 모범이다. 셸러는 사람이 규칙을 배워서가 아니라 모범이 되는 사람을 따르면서 변한다고 보았다. 사람은 명령은 따르지만 모범에게는 이끌린다. 둘 다 인간은 남을 통해 원하고 남을 통해 변한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두 사람이 갈라진다. 지라르에게 모방은 위험하다. 매개자가 가까워지는 순간 모델은 장애물이 되고 감탄은 증오로 썩는다. 셸러에게 모방은 구원이다. 올바른 모범을 따르면 사람은 높아진다. 모방이 질투로 썩는 것은 모방 탓이 아니라 엉뚱한 층위의 모범을 골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생각을 겹치면 쓸모 있는 좌표가 하나 생긴다. 지라르에게서는 거리를, 셸러에게서는 높이를 가져온다. 가로축은 매개자가 가까운가 먼가이고, 세로축은 다투는 대상이 돈과 지위처럼 나누면 줄어드는 낮은 가치인가, 진리와 품질과 사명처럼 나누어도 줄지 않는 높은 가치인가다.
가깝고 낮은 칸은 질투의 용광로다. 벤 존슨과 루이스, 새벽 서재의 회장이 여기 있다. 멀고 낮은 칸은 공허한 선망이다. 모르는 부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 그렇다. 멀고 높은 칸은 순수한 감탄이다. 100년 전의 위대한 장인을 우러르는 마음이다.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칸이 가깝지만 높은 칸, 생산적 라이벌십이다. 루츠 롱과 오언스가 여기 있다.
질투의 세기는 거리가 정하고, 질투의 독성은 높이가 정한다. 벤 존슨과 루츠 롱은 둘 다 가장 가까운 라이벌을 두었다. 거리는 같았다. 다른 것은 높이였다. 존슨이 원한 것은 루이스를 이기는 것, 곧 순위였고, 롱이 지킨 것은 공정한 경쟁 속의 인간 한계 극복이라는 스포츠의 가치였다.
그러니 처방도 두 갈래다. 지라르식 처방은 용광로 칸에서 매개자와의 거리를 넓히는 것이다. 방어적인 처방이다. 셸러식 처방은 용광로 칸에서 경쟁의 높이를 올리는 것이다. 공격적인 처방이다. 리더에게 경쟁에서 물러나라는 처방은 현실성이 없다. 경쟁의 층위를 올리라는 처방은 실행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주연이 조연을 넘어선다.
VIII. 아래에서, 위에서, 옆에서
질투의 삼각형은 한 모양이 아니다. 매개자가 나보다 아래에 있었는지, 위에 있었는지, 같은 줄에 있었는지에 따라 얼굴이 다르다.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
공자는 "뒤에 태어난 자가 두렵다(後生可畏)"고 했다. 이 말은 본래 경고가 아니라 기대를 담은 말이다. 그것을 기대로 읽을 수 있느냐가 리더의 시험이다.
위에 사람이 별로 없는 자리에 있는 리더의 진짜 감정 문제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사람이다. 한 임원 밑에 아주 유능한 팀장이 있다. 3년 전만 해도 분명히 아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보고서가 임원의 것보다 낫고, 회장이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임원은 그를 아낀다고 믿는다. 다만 그의 승진 건이 올라올 때마다 이상하게 "아직 이르다"는 말이 먼저 나온다.
이것은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운 질투다. 그리고 셸러의 공식으로 보면 르상티망과는 다른 길로 간다. 무력감이 없기 때문이다. 아래를 향한 질투에는 인사, 평가, 예산, 프로젝트 배정이라는 권력이 있다. 감정에 머무는 시기와 달리, 권력을 쥔 시기는 제도가 된다. 게다가 정당한 언어를 갖는다. "아직 이르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자주 옳은 말이라 반박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래를 향한 질투는 아프지 않고 오히려 책임감처럼 느껴진다. 위를 향한 질투로 조직이 잃는 것은 한 사람의 에너지지만, 아래를 향한 질투로 잃는 것은 다음 세대 전체다.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상사가 부하에게 느끼는 시기를 조사했더니, 어떤 상사는 부하를 괴롭히는 쪽으로 갔고 어떤 상사는 자기 계발로 갔다. 갈림길은 그 상사가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얼마나 크게 느꼈는가였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인지 능력이 높은 구성원이 직장 내 괴롭힘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게 나타났다. 몇 가지 조건이 붙은 결과지만, 함의는 분명하다. 조직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이 가장 안전한 사람은 아니다.
역사에도 거울이 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는 열여덟 살에 이미 기병대를 지휘한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있었고, 전해지는 바로는 한 전투 이후 부자 사이가 급격히 나빠졌다. 후대 자료에 기댄 이야기이고 왕비 문제와 파벌이 얽혀 있어 질투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다. 아들이 무능했다면 갈등은 없었을 것이다. 400년 뒤 로마는 다른 길을 택했다. 2세기 초 여러 황제가 친아들 대신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고, 살아 있는 동안 권한의 일부를 실제로 넘겼다. 후계자에게 자기와 겹치지 않는 영역을 주면 가까운 매개가 먼 매개로 바뀐다.
아래를 향한 질투를 풀어내는 장치는 다섯이다. 후계자를 키운 사람의 다음 자리를 먼저 보장할 것. 사람을 키운 실적을 평가표에 넣을 것. 상위 성과자가 회사를 떠날 때는 최고경영자가 직접 30분을 내어, 설득하지 말고 듣기만 할 것. 한 사람의 평가가 한 상사에게만 달려 있지 않도록 평가 경로를 여럿으로 만들 것. 그렇지 않으면 아래를 향한 시기는 완전 범죄가 된다. 그리고 자기 점검. 나보다 어리고 유능한 사람의 성공 소식을 들었을 때 첫 3초의 감각을 관찰하라. 따뜻해지는가, 서늘해지는가. 그 3초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라르는 이 관계가 뒤집히는 순간을 이렇게 요약했다. 제자는 스승의 모델이 되고, 스승은 제자의 제자가 된다. 내가 키운 사람이 나를 앞서는 순간 나는 그의 제자가 된다. 셸러의 말로 하면, 그 순간 그는 나의 모범이 될 수 있다. 인정하면 계승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 닮아 가는 적이 된다.
위로 더 멀어지는 사람
나보다 나은 사람이 더 나아질 때의 질투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쟁심, 곧 젤로스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고 '우리 자신도 얻을 수 있는' 좋은 것이 있는 것을 보고 느끼는 고통. 핵심은 '우리 자신도 얻을 수 있는'이라는 대목이다. 젤로스는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나타나고, 프토노스는 그 가능성의 감각을 잃은 사람에게서 자란다. 셸러가 말한 무력감의 옛 판본이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아예 멀어져 다른 세계로 가 버리면 질투는 감탄으로 바뀐다. 그런데 그가 여전히 내 세계 안에 있으면서 격차만 벌어지고, 내가 따라잡을 수 있다는 감각을 잃으면, 경쟁심은 시기로 썩는다. 위를 향한 질투의 관건은 격차의 크기가 아니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감각'이 살아 있느냐다.
그래서 조직에서 "요즘은 승진에 관심 없습니다"라는 말이 늘어나면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성숙일 수도 있지만 절망일 수도 있다. 올라갈 수 없다고 느끼면 사람은 올라가는 것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선언한다. 셸러가 말한 가치 전도의 입구다.
18세기 영국의 경도 문제가 좋은 예다. 바다 위에서 배의 위치를 알려면 경도를 알아야 했는데, 왕립 천문대의 학자들은 달의 위치를 관측해 계산하는 방법을 밀었고, 시골 목수 출신 시계공 존 해리슨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방법에 평생을 걸었다. 그런데 상금을 심사하는 위원회에 천문학적 방법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해리슨의 시계는 시험 항해에서 요구 정밀도를 맞췄지만, 상금 지급은 거듭 미뤄지고 새 조건이 계속 붙었다. 위원회의 지연에는 재현성과 양산 가능성이라는 정당한 기술적 이유도 있었다. 질투한 학자들이 천재를 박해했다는 단순한 이야기로 만들면 그것이야말로 뒤에서 볼 희생양 이야기가 된다. 그래도 구조는 남는다. 심사자와 심사받는 자가 같은 문제를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우리 회사 신사업 심사위원회에, 그 신사업이 성공하면 자기 사업부 예산이 줄어드는 사람이 앉아 있지는 않은가. 해법은 그를 빼는 것이 아니라 반대 의견의 근거를 미리 등록하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시점 시험을 제도로 만드는 것이다.
알고 보니 앞서 있던 친구
세 번째는 같은 줄에 있던 사람이다. 학교 때 나보다 못했던 동기, 조용하던 옆 부서 과장이 어느 날 엄청나게 잘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질투가 유난히 아픈 데는 이유가 셋 있다. 첫째, '별것 아닌 친구'는 내 기준점의 아래쪽을 받치던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나보다 높이 올라가면 나는 한 사람에게 진 것이 아니라 내 자리 전체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 둘째, 이 소식은 동창회에서, 기사에서, 아이의 한마디에서 한꺼번에 온다. 기대가 낮았을수록 충격은 크다. 셋째, 질투이기 전에 수치심이다. 내가 그를 잘못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 그가 나를 어떻게 보았을지 모른다는 것.
17세기 런던의 로버트 훅은 왕립학회의 실험 책임자이자 당대 영국에서 가장 다재다능한 과학자였다. 1672년 케임브리지의 서른 살 젊은이가 빛과 색에 관한 논문을 보내오자 훅은 그것을 자기 이론의 아류쯤으로 깎아내렸다. 그 젊은이가 뉴턴이다. 14년 뒤 '별것 아니던' 젊은이가 『프린키피아』를 내놓자 훅은 핵심 법칙의 우선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고, 뉴턴은 격노해 책에서 훅의 이름을 지웠다. 훅이 죽고 뉴턴은 왕립학회 회장이 되었다. 오늘날 훅의 초상화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뉴턴이 일부러 없앴다는 설은 증거가 없고, 학회 이전 과정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구조는 남는다. 훅이 젊은 뉴턴을 '별것 아닌 후배'로 본 순간부터 두 사람은 서로 닮아 가는 적이 되었고, 영국 과학에서 가장 생산적인 두 두뇌가 30년 동안 서로를 지우는 데 힘을 썼다. 셸러가 말한 '세상에서 지워진 에너지'의 과학사판이다.
처방은 셋이다. 이런 질투를 느끼는 순간 먼저 다시 볼 것은 그 친구가 아니라 내 기준점이다. 공자의 후생가외를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 그에게 묻는 것이다. 어떻게 했는가. 반전의 질투가 감탄으로 바뀌는 유일한 문은 그 질문이고, 그 문을 막는 것은 자존심이다.
세 방향은 고정된 역할이 아니다. 같은 사람이 세 자리를 오간다. 셸러가 질투의 세 자리를 모두 살았던 것처럼.
IX. 희생양과 가라앉는 배
욕망의 저작권을 착각할 때
조직에서 질투가 고장 나는 모습은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강렬하게 원하는데 언제부터 원했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석 달 전 접은 안건이 경쟁자가 가져간 순간 다시 뜨거워지는 경우, 아래를 향한 시기, 질투가 정의감이나 원칙론의 가면을 쓰는 경우, 모든 전략 회의에 경쟁사 이름이 등장하고 우리 전략을 우리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생양이다.
이 여섯은 모두 욕망의 저작권을 착각한 것이다. 첫째는 저작권자를 모르고, 둘째는 저작권자가 바뀐 것을 모르며, 셋째는 저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고, 넷째는 저작권을 숨기며, 다섯째는 조직 전체가 남의 저작권으로 살고, 여섯째는 저작권 분쟁을 제3자에게 뒤집어씌운다.
몇 가지는 처방이 간단하다. 갑자기 뜨거워진 욕망 앞에서는 종이에 삼각형을 그리고 세 꼭짓점에 이름을 써 보라. 경쟁자가 가져간 뒤 다시 뜨거워진 안건은 최소 2주를 식히고, 다시 다룰 이유는 그 대상에 관한 새로운 사실뿐이며 경쟁자의 새 움직임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규정에 넣어라. 품의서 양식에서는 '경쟁사 동향'과 '독립적 근거'를 나누고 뒤의 것만으로 심의하라. 회의에서 "우리도"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세어 보는 것도 좋은 진단이다.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미움
지라르의 후기 사상은 질투가 개인 사이를 넘어 집단 전체로 번질 때를 다룬다. 모방된 욕망이 공동체에 전염병처럼 퍼지면 모두가 모두의 라이벌이 되는 위기가 온다. 그런데 이 위기는 대개 전면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느 순간 흩어져 있던 모든 적개심이 한 사람에게 모인다. 모두가 한 사람을 지목하는 순간,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는 갑작스러운 평화가 찾아온다. 이것이 희생양이다.
희생양은 죄가 커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지목하기 쉬워서 선택된다. 남들과 다르다는 표시, 편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 너무 뛰어나거나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 그 표시다. 이것은 셸러의 생애 그 자체다. 유대계 혈통의 경계인이었고, 정식 교수가 아닌 강사여서 보호해 줄 세력이 없었으며, 강의실을 가득 채운 뛰어난 신진 학자였다. 1910년 그를 끌어내린 것은 한 사람의 질투가 아니라 그의 추락을 즐긴 동료들과 대중의 집단 감정이었다. 셸러는 희생양 이론을 쓰지 않았지만 몸으로 두 번 겪었다.
19세기 중반 빈의 젊은 의사 제멜바이스는 산모들이 열병으로 많이 죽는 병동이 의사들이 시신 해부를 마치고 곧장 들어오는 병동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손 씻기를 도입했다. 사망률은 크게 떨어졌다. 그런데 그의 발견이 맞다면, 그때까지 아이를 받아 온 모든 의사가 병을 옮긴 사람이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기술적 반박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고발로 들렸고, 그는 배척되었다. 물론 그가 결과를 정리해 발표하는 데 오래 걸렸고 대인 관계가 거칠었다는 사정도 있어 질투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교훈은 남는다. 개선안을 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과거의 판단은 당시 정보로는 합리적이었다, 지금 새로운 정보가 생겼다. "지금까지 우리가 틀렸다"로 들리는 순간 개선안은 고발이 된다.
반대로 이 메커니즘을 의식적으로 끊어 낸 사례도 있다. 1970년대 항공 사고를 조사하던 사람들은 같은 패턴을 거듭 발견했다. 조종실 녹음에는 부기장이나 기관사가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거나 너무 돌려 말했다. 항공업계는 아래 직급이 위 직급에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를 표준화했고, 자기 실수를 스스로 보고하면 일정 조건에서 처벌을 면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보고가 늘었고, 지목의 대상이 사람에서 시스템으로 옮겨 갔다.
위기에 빠진 조직이 던지는 첫 질문이 "누구 책임인가"이면 그 조직은 희생양을 얻고 교훈을 잃는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는가"이면 교훈을 얻는다. 빠르고 후련한 만장일치는 진실의 신호가 아니라 제사의 신호다. 지라르가 경고했듯 희생양 위에 세운 평화는 거짓 위에 서 있고, 그 거짓은 계속 지켜져야 한다. 그러니 희생양을 한 번 세운 조직은 그다음부터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누가 더 불행한가
질투하는 사람과 질투받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불행한가. 서양 전통의 일곱 가지 큰 죄 가운데 여섯은 적어도 저지르는 순간에는 즐거움을 준다. 시기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이다. 그 고통의 원인이 밖에 있어 내가 통제할 수 없고, 한 사람을 이겨도 다른 사람이 있다.
그런데 질투받는 사람의 불행도 있다. 셸러가 1910년에 겪은 불행이다. 그는 자기가 왜 미움받는지 모른다. 그가 듣는 말은 "당신을 시기합니다"가 아니라 "당신 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이고, 그래서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치려 애쓴다. 연구에 따르면 남에게 위협적인 비교 대상이 되었다고 느낀 사람은 성과를 줄여 보고하거나, 실제로 성과를 낮추거나, 능력을 감춘다. 그리고 결국 떠난다.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떠나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가장 유능한 사람이다. 개인으로 보면 질투하는 사람이 더 불행하지만, 조직으로 보면 질투받는 사람의 불행이 더 비싸다.
누군가 나를 심하게 질투할 때 할 수 있는 일은 다섯이다. 성과를 숨기지 말고 공을 나누어라. 성과는 그대로 보고하되 기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불러라. 그 사람에게 무언가를 물어라. 질문은 무시의 반대말이고, 상대의 무력감을 가장 빨리 덜어 준다. 그의 논거는 진지하게 다루되 동기는 입에 올리지 마라. 같은 것을 놓고 다투지 않도록 영역을 나누어라.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설계다. 그러나 굴복하지는 마라. 시기에 굴복해 성과를 낮추면 조직은 "여기서는 튀면 손해다"를 배운다. 셸러가 말한 가치 전도가 조직 문화가 되는 순간이다.
두 개의 기도, 두 마리 호랑이
가라앉는 배로 돌아가자. 두 번째 기도에서 사라진 것은 생존이라는 목적이다. 그가 얻는 것은 자기 죽음을 몇 초 미루고 상대의 죽음을 보는 것뿐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했다. 같은 배, 같은 신, 같은 기도. 지라르가 말한 서로 닮은 적이다. 셸러의 말로 하면 두 사람 모두 "아니오"를 상대의 생존에 쏘았다. 조직으로 옮기면 그림이 선명하다. 시장이 줄고 예산이 줄 때, 처음에는 "시장을 키웁시다"라고 기도하다가 구조조정 소식이 오면 "저 부서부터 줄이십시오"라고 기도한다. 모든 부서가 같은 논리로 서로를 지목한다.
다만 반드시 덧붙일 것이 있다. 배는 실제로 가라앉고 있다. 그러니 이 우화의 교훈은 단순히 "협력하라"가 아니다. 첫 번째 기도에 쓸 수 있는 힘을 다 쓰기 전에 두 번째 기도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직이 저지르는 실수는 두 번째 기도를 너무 일찍 시작하는 것이다.
정반대의 배도 있다. 전국시대 조나라에 백전노장 염파가 있었다. 말솜씨로 공을 세운 문신 인상여가 하루아침에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자 염파는 공공연히 떠들었다. 나는 목숨 걸고 싸웠는데 저자는 혀나 놀렸을 뿐이다,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 상대의 가치를 깎는 말, 신 포도의 첫 단계다. 인상여는 염파를 피해 다녔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가신들이 떠나겠다고 하자 인상여가 말했다.
强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 徒以吾兩人在也 今兩虎共鬪 其勢不俱生 吾所以爲此者 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군사를 내지 못하는 까닭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두 호랑이가 서로 싸우면 형세상 둘 다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나라의 급한 일을 앞세우고 사사로운 원한을 뒤로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웃옷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진 채 인상여의 집 문 앞에 이르러 죄를 청했다. 부형청죄(負荊請罪)다. 두 사람은 목을 내줄 만큼 깊은 사귐,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
인상여가 한 일은 지라르의 말로 하면 삼각형을 허문 것이고, 셸러의 말로 하면 경쟁의 높이를 올린 것이다. 지위라는 낮은 층위에서 나라의 존립이라는 높은 층위로. 그런데 염파의 위대함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시기는 좀처럼 자백되지 않는 감정이다. 그는 그것을 온 세상 앞에서 몸으로 자백했다. 셸러의 공식에서 '억압'을 0으로 만든 것이다. 시기를 자백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감정의 주인이 아니다.
배 위의 두 사람은 서로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고, 염파와 인상여는 승화했다. 회의실에서도 우리 앞에는 매번 두 개의 문이 열린다. "누구 때문인가"와 "우리의 진짜 대상은 무엇인가".
X. 질투는 모두가 지는 게임이다
왜 악덕인가
질투와 시기는 왜 악덕인가. 남의 불행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답은 반만 맞다. 더 정확한 답은 그 결과가 모두가 지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자기 돈을 내고 남의 돈을 태워 없앨 기회를 주었더니, 약 3분의 2가 그 기회를 썼다. 양쪽 모두 가진 돈이 줄었다. 바뀐 것은 순위뿐이다. 조직에서 이 게임은 눈에 띄지 않는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정보를 늦게 넘긴다. 회의에서 입을 다문다. 시킨 것만 정확히 한다. 문제를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어느 것도 규정 위반이 아니어서 잡히지 않는다.
흥미로운 연구가 하나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게 하는 간단한 활동을 시켰더니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 줄었다. 도덕 교육을 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가치를 확인시켜 준 것이다. 셸러의 공식으로 말하면 무력감을 줄이자 독이 줄었다.
감사, 축하, 격려가 미덕인 이유
반대로 감사와 축하와 격려는 모두가 이기는 게임이다.
감사는 질투의 정확한 해독제다. 질투는 내 역량의 원인을 빼앗겼다고 계산하고, 감사는 내 역량의 원인이 남에게 있음을 정직하게 적는다. 사람들은 감사 편지를 받는 상대가 얼마나 기뻐할지를 늘 과소평가하고 쓰는 어색함은 과대평가한다는 연구도 있다. "그에게서 배웠다"고 말할 수 있으면 그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모범이 된다.
축하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커플들이 좋은 소식을 나눌 때의 반응을 조사한 연구에서, 관계의 질을 가장 잘 예측한 것은 나쁜 일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하며 더 물어봐 주는 반응이었다. 셸러가 함께 슬퍼함보다 함께 기뻐함을 더 높이 둔 이유를 실험실이 확인한 셈이다. 그런데 조직에서 가장 흔한 반응은 "좋긴 한데 이 부분은 걱정이네"다. 질투의 다섯 가면 가운데 '걱정'이다.
격려는 축하의 미래형이다. 경쟁심은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고 했다. 격려란 상대에게 바로 그 믿음을 주는 일이다. 무력감을 직접 덜어 주는 일이고, 그래서 시기를 경쟁심으로 되돌리는 가장 직접적인 장치다.
금메달이 든 소포, 그리고 볼트 하나
호주의 론 클라크는 장거리 세계 기록을 열일곱 개나 세웠지만 올림픽 금메달은 없었다. 1966년 그가 체코의 육상 영웅 에밀 자토페크를 찾아갔을 때, 자토페크는 공항에서 작은 소포를 건네며 비행기에서 열어 보라고 했다. 안에는 자토페크의 1952년 헬싱키 10,000미터 금메달이 들어 있었다. 우정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라는 뜻의 쪽지와 함께였다. 메달은 소유였고, 자토페크의 역량은 메달을 내주어도 줄지 않았다. 낮은 층위의 것을 내주고 높은 층위의 것을 얻었다.
19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이탈리아의 에우제니오 몬티는 세계 챔피언을 아홉 번 지낸 최고의 조종수였다. 영국 팀은 첫 주행 뒤 썰매 뒤축의 볼트가 부러진 것을 발견했지만 예비 부품이 없었다. 몬티는 자기 썰매에서 같은 볼트를 빼서 건넸다. 영국 팀은 금메달을 땄고 몬티는 동메달에 그쳤다. 이탈리아 언론이 비난하자 그는 영국 팀이 이긴 것은 볼트 때문이 아니라 가장 빨리 달렸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답했다. 몬티의 볼트와 롱의 도약판 표시는 같은 동작이다. 라이벌의 실패를 바라는 충동에 "아니오"라고 말하고, 그 에너지를 스포츠의 가치 쪽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공자는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고, 남의 악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고 했다. 맹자는 군자의 세 즐거움 가운데 하나로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 가르치고 기르는 것을 꼽았다. 사람을 키우는 기쁨이 모두를 이기게 하는 이유는 나누어도 줄지 않기 때문이다. 악덕과 미덕을 가르는 것은 감정의 종류가 아니라 게임의 합이다. 남의 상승을 내 하강으로 계산하는 감정은 모두가 지는 게임으로 끝나고, 남의 상승을 내 상승으로 계산하는 감정은 모두가 이기는 게임으로 끝난다.
한 마을, 두 회사, 60년
독일 바이에른의 작은 마을 헤르초게나우라흐에서 1920년대 다슬러 형제가 어머니의 세탁실에서 운동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 형제는 갈라섰다.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형이 강 북쪽에 세운 회사가 푸마, 동생이 강 남쪽에 세운 회사가 아디다스다. 마을도 둘로 갈라졌다. 두 회사 직원들은 다른 술집에 가고 다른 빵집에서 빵을 샀으며 서로 결혼하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면 먼저 신발부터 내려다보고 어느 편인지 확인했다고 해서 '목이 굽은 사람들의 마을'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런데 이 60년 전쟁 속에서 두 회사 모두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갈아 끼우는 축구화 스터드, 선수 후원이라는 산업 자체가 두 형제가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 다투는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가도 컸다. 형제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고 같은 마을 묘지에서 서로 가장 먼 자리에 묻혔다. 두 회사 모두 한때 심각한 경영 위기를 겪었다. 서로만 노려보다가 등 뒤의 다른 경쟁자를 놓친 것이다.
셸러의 눈으로 보면 이 사례는 두 층으로 나뉜다. 아래층은 사람을 향한 경쟁이었다. 상대의 존재 자체가 모욕이었고, 마을 전체가 그 원한에 감염되었다. 이 층에서 남은 것은 없다. 위층은 제품을 향한 경쟁이었다. 형제는 서로를 이기려고 더 좋은 신발을 만들었다. 이 층에서 남은 것이 오늘의 스포츠 용품 산업이다. 등 뒤의 제3자를 놓친 것은 앞에서 본 '세계가 좁아지는' 퇴행 그 자체다. 질투도 건설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질투가 좋아서가 아니라 에너지의 일부가 우연히 높은 층위로 흘렀기 때문이다. 조직의 60년을 우연에 걸 수는 없다.
경쟁의 축과 협력의 축을 나눈 사람들
대조되는 사례가 1970년대 히말라야의 등반가들이다. 당시 고산 등반은 수백 명의 인력과 고정 로프와 산소통을 쓰는 대규모 원정대 방식이 표준이었다. 여기에 반대해 최소 인원, 최소 장비, 산소 없이 오르는 방식을 고집한 소수의 등반가들이 있었다. 그 세계는 극도로 좁았고, 가까운 라이벌끼리의 경쟁이 펼쳐지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는 한 가지 규범이 있었다. 먼저 오른 사람이 루트 정보, 실패 지점, 위험 구간을 다음 사람에게 공개하는 관행,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는 문화. 경쟁은 극도로 치열했지만 경쟁의 축과 협력의 축이 분리되어 있었다. 경쟁의 축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올랐는가였고, 협력의 축은 산에 대한 지식이었다. 산에 대한 지식은 나누어도 줄지 않는다.
조직에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두 사업부가 경쟁한다면, 무엇을 놓고 경쟁하고 무엇은 반드시 공유하는지를 문서로 정해 두어야 한다.
시기를 경쟁심으로 바꾸는 한 문장
경쟁자의 성공 소식 앞에서 첫 충동을 관찰해 보자. "우리도 저 수준에 가려면 뭘 해야 하나"는 경쟁심이다. "저들 성공에 흠집 낼 방법 없나"는 시기다. "저건 운이었다"는 가면을 쓴 시기, 곧 신 포도의 첫 단계이고, "우리는 저런 거 안 해"는 합리화한 시기, 곧 둘째 단계다.
경쟁사의 성공이 발표된 직후 첫 회의에서 처음 10분 동안 나온 말을 '배움'과 '폄하' 두 줄로 나누어 적어 보라. 폄하 쪽이 길다면 이 한 문장을 던지면 된다. 저들의 성공이 전부 실력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낱말은 완벽한 나침반이지만 어떻게 시기를 경쟁심으로 바꾸는지까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지라르의 답은 모방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시기는 경쟁심이 된다. 셸러의 답은 한 걸음 더 간다. 인정한 뒤에, "아니오"의 과녁을 상대의 가치에서 나의 충동으로 옮기고, 경쟁의 높이를 올리라는 것이다. 지라르는 문을 보여 주었고, 셸러는 그 문 너머의 계단을 보여 주었다.
XI. 질투를 통과하는 법
동양의 세 처방
노자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사람에게 말한다. "어짊을 높이 사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다투지 않게 한다(不尙賢 使民不爭)." 이 구절은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라는 뜻으로 오해되어 왔지만, 지라르를 거쳐 읽으면 인류 최초의 모방 욕망 이론에 가깝다. 시스템이 무엇이 높이 살 만한지를 지정하는 순간, 그것은 모두의 매개자가 되고 모두는 서로의 라이벌이 된다. 셸러를 거쳐 읽으면 하나가 더 보인다. 시스템이 높이 사는 것이 나누면 줄어드는 것일 때 다툼은 가장 커진다. 조직 안 시기의 총량은 구성원의 인격이 아니라 그 조직이 무엇을 높이 사는가의 설계가 정한다.
순자는 반론을 편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욕망이 있고, 얻지 못하면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구하는 데 경계가 없으면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다툼의 원인은 욕망이 아니라 경계가 없는 데 있다는 것이다. 순자와 셸러는 같은 출발점에 선다. 욕망은 인간 본성의 정상적인 부분이고, 문제는 그 욕망이 흐를 길이다. 순자는 경계를 그었고, 셸러는 방향을 그었다.
장자는 경쟁의 한가운데 선 개인에게 말한다. 기성자라는 사람이 왕을 위해 싸움닭을 길렀다. 열흘 만에 왕이 다 되었느냐고 묻자, 아직이라고 답했다. 괜히 교만해서 제 기운만 믿는다는 것이다. 열흘 뒤에는 다른 닭의 울음과 그림자에 반응한다고 했다. 또 열흘 뒤에는 상대를 노려보며 기운이 성하다고 했다. 다시 열흘이 지나서야 기성자가 답했다.
幾矣 雞雖有鳴者 已無變矣 望之似木雞矣 其德全矣 異雞無敢應者 反走矣
"거의 됐습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이제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바라보면 나무로 깎은 닭 같으니 그 덕이 온전해졌습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맞서지 못하고 돌아서 달아납니다."
앞의 세 단계는 모두 남에게 반응하는 단계다. 목계(木雞)는 다른 닭이 울 때 반응하라는 충동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닭이다. 다만 목계를 '아무 반응도 하지 말라'로 읽으면 안 된다. 목계는 정보를 무시하는 닭이 아니라 도발에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는 닭이다. 반응성을 걷어 낸 존재 앞에서는 흉내 내기 게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셸러의 다섯 처방
셸러의 처방은 시기를 없애라가 아니라 승화하라다. 이 차이가 결정적이다.
첫째, 시기의 에너지를 부정하지 마라. 시기 속에는 강력한 충동의 힘이 있고, 정신은 그 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억누르기만 하면 그 힘은 땅속으로 숨어 원한으로 썩는다.
둘째, "아니오"를 올바른 과녁에 쏘라. 남의 가치가 아니라 나의 충동에 "아니오"라고 말하라. "저 사람은 가짜다"가 아니라 "저 사람을 끌어내리고 싶은 내 마음아, 멈춰라."
셋째, 경쟁자를 모범으로 다시 세워라. 시기의 대상이 가진 가치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순간, 아래로 향하던 에너지가 위로 방향을 튼다. 숨겨진 감탄을 드러난 감탄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리고 경쟁의 높이를 올려라. 같은 사람을 매개자로 두되, 그가 가진 것이 아니라 그의 역량과 품격을 목표로 삼으라.
넷째, 세계를 되찾아라. 비교라는 단 하나의 축에서 빠져나와 사물을 그 자체로 보는 연습을 하라. 내 일의 가치는 그 사람과의 비교에서가 아니라 일 그 자체에서 나온다. 고귀한 사람은 비교하기 전에 가치를 본다.
다섯째, 함께 기뻐하라. 남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기는 비교적 쉽다. 그 고통이 나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기는 훨씬 어렵다. 남의 기쁨은 비교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승화가 완성되었다는 표시다. 동양은 이것을 수희라 불렀다.
결정하기 전 5분, 다섯 개의 질문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마음이 뜨거울 때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 다섯이 있다.
이 욕망의 세 번째 꼭짓점, 곧 매개자의 자리에 누구의 이름을 쓸 수 있는가.
이 욕망은 라이벌이 원하기 전부터 있었는가, 라이벌이 원한 뒤에 생겼는가.
나의 "아니오"는 상대의 가치를 향하는가, 나의 충동을 향하는가.
이 욕망은 나누면 줄어드는 것을 향하는가, 나누어도 줄지 않는 것을 향하는가.
라이벌이 내일 사라져도 이 목표는 여전히 남는가.
이 다섯 질문을 통과한 욕망은 더 이상 감정이 아니다. 전략이다.
조직의 차원에서는 욕망이 흐르는 길 자체를 설계해야 한다. 승진 사다리가 하나뿐인지, 칭찬이 단 하나의 지표에 몰려 있는지 점검하라. 비교의 기준을 '동료와 비교한 나'에서 '여섯 달 전의 나와 비교한 지금의 나'로 옮겨라. 배움의 기회, 무대, 재량, 공개적인 감사처럼 인정의 화폐를 여러 가지로 만들어라. 보상과 승진만이 인정의 화폐인 조직에서 인정은 늘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 잃는 게임이 된다. 화폐가 여럿인 조직에서 인정은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게임이 된다. 회의의 첫 5분을 동료의 성취를 함께 기뻐하는 시간으로 써 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질투하시는 거 아닙니까"라는 말은 결코 입에 올리지 마라. 이 말을 하는 순간 논쟁에서는 이길지 모르지만 영원한 적을 만들고, 다음 회의부터 반대 의견을 잃는다. 셸러의 분석은 거울로만 써야 한다. 칼로 쓰면 안 된다.
XII. 루츠 롱의 편지
루츠 롱은 1943년 시칠리아 전투에서 독일군 병사로 전사했다. 그가 전선에서 제시 오언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전쟁이 끝나면 자기 아들을 찾아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들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오언스는 전쟁이 끝난 뒤 그 약속을 지켰다.
1936년 베를린의 모래밭에서 루츠 롱의 안에도 분명 충동이 있었을 것이다. 이기고 싶은 마음, 금메달에 대한 욕망, 라이벌이 탈락하기를 바라는 마음. 지라르의 말로 하면 오언스는 롱에게 가장 가까운 매개자였다. 같은 종목, 같은 결선, 같은 금메달. 그런데 롱의 정신은 그 충동에 "아니오"라고 말했고, 그 에너지를 스포츠의 진정한 가치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는 은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셸러의 말로 하면, 그날 베를린에서 세상은 한 걸음 더 완성되었다.
같은 비교의 에너지가 벤 존슨에게서는 9.79초를 지웠고, 루츠 롱에게서는 우정을 영원히 새겼다. 차이는 충동의 크기가 아니었다. 정신이 "아니오"를 어디에 쏘았느냐였다.
처음의 장면들로 돌아가 보자. 새벽 서재의 회장에게는 삼각형을 그려 보게 해야 한다. 세 번째 꼭짓점에 경쟁사 회장의 이름이 적히는 순간, 그 물류 기업의 광채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셸러의 질문을 하나 더 건네야 한다. 그 매물이 좋은지를 먼저 보셨습니까, 경쟁사 회장의 얼굴을 먼저 보셨습니까. 회의실의 임원에게는 그의 논거를 진지하게 다루되 동기는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 배 위의 두 사람에게는 첫 번째 기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해 주어야 한다.
지라르는 평생 하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자기 욕망의 저자가 아니다. 불편한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에는 뒷면이 있다. 우리가 욕망의 저자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편집자는 될 수 있다. 셸러는 그 편집의 도구를 쥐여 주었다.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이다. 욕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충동은 엔진이고, 엔진을 끄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그러나 엔진의 힘이 어디로 갈지는 고를 수 있다.
셸러는 질투가 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다. 경계인으로 태어나 평생 비교당했고, 아내의 질투 속에서 10년을 살았으며, 동료와 언론의 시기로 강단에서 쫓겨났고, 교회의 단죄로 다시 공동체를 잃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 끝에 그가 남긴 단어는 원한이 아니었다. 함께 기뻐함이었다. 남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질투를 없앤 사람이 아니라 질투를 통과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음껏 부러워하고도 끝내 이기는 법은 무엇인가. 이제 답할 수 있다. 부러움을 숨기지 마라, 억압이 독을 만든다. 부러움의 출처를 확인하라,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매개자에게서 왔을 수 있다. 부러움이 일으키는 "아니오"를 상대의 가치가 아니라 나의 충동에 쏘라. 부러움의 높이를 올려라, 나누어도 줄지 않는 가치 앞에서 질투는 사다리가 된다. 그리고 부러움이 다 지나간 자리에서,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라. 그렇게 이긴 사람만이 이기고 나서도 기쁘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속으로 스스로를 돌아본다."
훌륭한 상대 앞에서 나와야 할 첫 문장은 평가가 아니라 배움의 계획이다. 2,500년 뒤 셸러는 같은 자리를 이렇게 적었다. 인간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 단순한 현실에 맞서는 영원한 항의자라고. 공자의 견현사제(見賢思齊)가 상대를 향한 "예"라면, 셸러의 "아니오"는 그 "예"를 가로막는 내 안의 충동을 향한다. 둘은 한 동작의 앞뒤다.
오늘 하루, 나는 누구의 성공 앞에서 "아니오"를 말했던가. 그 화살은 그 사람을 향했던가, 내 안의 충동을 향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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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
작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년경~1337)의 「질투(Invidia)」
조토는 피렌체 근교 출신의 화가이자 건축가로, 서양 회화사에서 중세와 르네상스를 가르는 첫 이름으로 꼽힌다. 단테는 『신곡』 연옥편에서 "치마부에가 그림판을 쥐었다 여겼으나 이제는 조토가 명성을 누린다"는 취지로 스승을 넘어선 제자를 언급했다. 일화는 전설에 가깝지만, 당대에 이미 시대를 바꾼 화가로 여겨졌다는 증거다. 만년에는 피렌체 대성당 종탑 설계를 맡았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파도바의 부유한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가족 예배당이자 자신과 아내의 장례 기념물로 지은 건물이다. 조토의 작업은 두 해 동안 이루어졌고, 당시 그는 서른여섯에서 서른여덟 살 무렵이었다.
예배당 양쪽 벽 맨 아래 띠에 열네 개의 인물상이 회색 단색으로 그려져 있다. 북쪽 벽에 악덕 일곱(어리석음, 변덕, 분노, 불의, 불신, 질투, 절망), 남쪽 벽에 덕 일곱(지혜, 정의, 절제, 용기, 믿음, 사랑, 희망)이 놓였고, 각 인물은 거울처럼 생긴 대리석 틀 안에 라틴어 이름을 머리에 이고 서 있다. 악덕이 놓인 북쪽 벽은 입구 벽 「최후의 심판」에서 지옥 쪽과 이어지는 방향이다.
마주 보는 짝도 확인됩니다. 질투(Invidia)의 맞은편에 사랑(Karitas)이 있고, 사랑은 질투의 재물 주머니를 발로 밟고 서 있으며, 맞은편 질투의 발밑에서는 붉은 불길이 타오른다. 사랑은 이기심과 질투를 고치는 약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름 'Invidia'는 라틴어 invidere, 곧 '이웃을 악의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는 뜻에서 왔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2021년 파도바의 다른 14세기 프레스코 건물들과 함께 '파도바의 14세기 프레스코 연작'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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