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대하는 리더의 태도
경영인 등 리더는 수시로 위기에 부닥친다. 그 위기는 다양한 얼굴로 찾아오지만, 가끔 그것은 한 통의 경고장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업무상 누군가의 대리인으로서 경고장을 보내야 하는 역할을 종종 하게 된다. 오래 이 일을 하다 보면, 경고장을 받아든 리더의 반응에서 그 사람에 대한 많은 것이 보인다. 위기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태도가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과 결말, 그리고 미래를 결정한다.
경고장을 받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그것을 보낸 쪽을 증오하는 리더가 있다. 의외로 이런 리더가 적지 않다.
사실 경고장이란 것은 매우 짜증스러운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경고장을 받으면 그 내용을 따져보기도 전에 화욕을 하면서 감정부터 폭발시키기도 한다. 그 짜증과 분노는 이해할 수 있다. 평온한 지금의 상황이 크게 흔들릴 뿐만 아니라, 자기가 쌓아온 것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로 시작한 대응은 그리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 것이다. 영화 '대부'에서 마이클 콜레오네는 이렇게 말한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진다."
분노는 무엇보다 자신의 눈과 귀를 막는다. 경고장에는 법적인 요구가 적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 요구의 이면에는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상대가 정말 원하는 것이 금전적 보상인지, 기술의 사용 중단인지, 아니면 협력 관계의 재설정인지, 그저 진솔한 사과인지, 이 숨은 욕구들을 감지할 수 있는 귀중한 센서가 분노 속에서는 작동을 멈춘다.
동시에, 분노는 자신과 상대의 입도 막는다. 이쪽의 해결 의지나 양보 가능한 범위를 상대에게 은근히 흘려보낼 수 있는 채널마저 스스로 닫아버리니, 듣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그 사건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일을 원만히 해결할 좋은 연결마저 잘라버린 꼴이 된다. 경고장을 보낸 쪽의 대리인에게까지 적대감을 드러내면, 그 대리인이 슬쩍 건네줄 수 있었던 힌트도, 합리적 해결의 실마리도 송두리채 함께 사라진다. 그러면 양쪽 사이에는 그저 딱딱한 창과 칼만이 남아 서로를 겨누고 있을 뿐이다.
반면, 합리적인 리더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경고장을 받아 들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는가. 그로 인해 상대는 정말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었는가. 그 고통을 어떻게 완화시켜 줄 수 있는가 등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물론 그 전에 따져볼 것은 따져봐야 한다. 상대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 우리에게 진정 귀책이 있는지를 냉정하게 검토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이다.
그러나 그 검토의 출발점이 "상대가 나쁘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나"인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그리고 이 리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우리는 무엇을 고치고,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상대와 우리 모두가 최적의 해결에 이를 수 있을까를 부단히 고민한다. 이 고민은 그 조직의 미래를 바꾼다.
이런 리더는 위기를 가르침과 배움으로 전환하는 사람이다. 경고장 한 통에서 사업의 취약점을 읽고, 조직의 체질 개선을 구상하고, 나아가 상대방과의 관계까지 재설계한다. 이런 리더 앞에서는 위기가 위기로 끝나지 않는다. 위기가 도약의 발판이 된다.
그런데 많은 리더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두려움과 교만이다.
두려움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경고장은 거울이다. 그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두려운 사람은, 거울을 깨뜨리는 것으로 반응한다. 상대를 비난하고, 대리인을 적대하고, 사건 자체를 부정한다. 거울을 깨뜨리면 당장 자기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지만, 얼굴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교만은 "내가 틀렸을 리 없다"는 확신에 갇히는 것이다. 자기가 옳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면, 경고장은 오직 상대의 악의로만 해석된다. 상대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그 주장에 근거가 있는지를 살펴볼 여유가 없다. 교만한 리더 앞에서 경고장은 정보가 아니라 모욕이다. 모욕에 대한 반응은 보복뿐이고, 보복은 분쟁을 소모전으로 끌고 간다.
두려움과 교만은 얼핏 반대처럼 보이지만 뿌리가 같다. 둘 다 자기 객관화의 실패이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 상황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냉정하게 가늠하지 못하는 것. 두려움은 자기를 너무 작게 보아 현실을 회피하고, 교만은 자기를 너무 크게 보아 현실을 왜곡한다. 어느 쪽이든, 거울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은 같다.
경고장 앞에서 자기에게 물을 수 있는 리더는 유연한 사람이다. 유연하다는 것은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혜롭다는 뜻이다. 도덕경 76장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나,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나,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경고장 앞에서 굳어버리는 리더는, 이미 죽은 자세를 취한 것이다. 분노로 경직되고, 교만으로 굳어지고, 두려움으로 얼어붙는다.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다.
경고장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리더는, 살아 있다. 부드럽게 받아들이되 꺾이지 않고,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되 휩쓸리지 않으며, 위기 속에서 배움을 끌어낸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삶의 무리이다.
바람에 꺾이는 것은 굳은 나무이지,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 아니다.
결국, 경고장은 공격이 아니다. 질문이다.
그 질문에 분노로 답하면 분쟁이 되고, 성찰로 답하면 성장이 된다. 같은 경고장이 누구에게는 재앙의 시작이 되고, 누구에게는 전환의 계기가 된다. 차이는 경고장에 있지 않다. 그것을 받아든 사람의 태도에 있다.
두려워하지 마라. 교만하지 마라. 거울 앞에 서라.
마이클 콜레오네는 또 이렇게 말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적을 가까이 둔다는 것은 적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판단력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미움에 눈이 멀면 적의 진짜 의도를 읽지 못한다. 가까이 두어야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거울 앞에 서는 용기. 내가 틀렸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용기. 상대를 미워하는 대신 이해하려 드는 용기. 두려움과 교만을 넘어서는 것은 결국 지혜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이다. 위기 앞에서 굳어지기는 쉽다. 부드러운 채로 서 있기가 어렵다.
기억하라 — 지금 그 문제의 해결에 가장 중요한 열쇠는, 상대방에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을.
"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強. 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強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 도덕경 제7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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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強. 草木之生也柔脆, 其死也枯槁. 故堅強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나, 죽으면 굳고 강해진다. 풀과 나무가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하나, 죽으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 도덕경 제7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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