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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네타냐후가 히틀러보다 더 나쁘다고?

by 변리사 허성원 2026. 3. 30.

네타냐후가 히틀러보다 더 나쁘다고?

_ 피해자가 더 심한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철학적 명제


서론: 비교의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도덕적 위치다

"네타냐후가 히틀러보다 나쁘다"는 명제는 희생자 수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홀로코스트로 학살된 600만 명과 가자 전쟁의 사망자를 저울에 올려 누가 더 많이 죽였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명제의 진짜 무게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 그것은 도덕적 배반(moral betrayal)의 문제다.

히틀러는 인류가 아직 만들지 않은 규범을 위반했다. 그는 제노사이드 협약도, 국제형사재판소도, 세계인권선언도 없던 시대에 야만을 자행했다. 반면 네타냐후는 바로 그 야만에 대한 응답으로 세워진 모든 규범과 제도의 최대 수혜자다. 유대인 희생자들의 피 위에 쌓아 올린 80년의 인권 진보를, 그 피해자 집단의 대표자가 스스로 짓밟고 있다는 것, 이것이 이 명제의 핵심이다.

이 글이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의 철학적 원칙이 있다.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가해자가 될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의 역사를 아는 자가 같은 고통을 타인에게 가할 때, 그 도덕적 책임은 배가된다. 이 원칙을 중심으로 동서고금의 철학과 현재의 사실들을 살펴본다.


제1장: 누가 "네타냐후가 히틀러보다 나쁘다"하는가

이 글이 제기하는 철학적 명제는 추상적 사변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이 공개 연설에서 반복적으로, 점점 더 강한 언어로 같은 비교를 내놓고 있다. 그 중 가장 일관되고 광범위한 사례는 터키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다.

에르도안은 2023년 12월 "네타냐후는 히틀러보다 나쁘다"고 처음 공개 선언한 이후, 이 비교를 국제 무대에서 반복적으로 강화해왔다. 2024년 3월 터키 의회 연설에서 그는 "네타냐후와 그의 행정부는 가자에서의 반인도적 범죄로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옆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다. 그들은 현대의 나치다"라고 말했다. 2024년 5월에는 "네타냐후는 자신의 제노사이드적 방법으로 히틀러가 질투할 수준에 도달했다"고 밝혔으며, 같은 달 터키는 이스라엘과의 모든 교역을 전면 중단했다.

2024년 7월 터키 외무부는 공식 성명을 통해 "제노사이드적 히틀러의 최후가 왔듯, 제노사이드적 네타냐후의 최후도 그렇게 될 것이다. 제노사이드적 나치들이 심판받았듯, 팔레스타인인들을 말살하려는 자들도 심판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2024년 9월, 에르도안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70년 전 히틀러가 인류의 연대에 의해 저지되었듯, 네타냐후와 그의 살인 네트워크도 인류의 연대에 의해 저지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것은 유엔 총회라는 인류 최대의 다자 외교 무대에서 발화된 비교였다.

2025년 6월 터키 의회 연설에서 그는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제노사이드에 있어 이미 오래전에 히틀러를 뛰어넘었다"고 재차 밝혔다. 2025년 7월 이스탄불 방산 박람회 개막 연설에서는 네타냐후가 59,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공격으로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를 능가했다"고 발언했다. "가자에서의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 자는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반인도적 범죄의 공범"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2025년 9월에는 카타르 정상회의에서 귀국하며 "이념적으로 네타냐후는 히틀러의 친척 같은 존재다. 히틀러가 자신을 기다리는 패배를 예견하지 못했듯, 네타냐후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르도안만이 아니다. 유대계 미국 배우 월리스 숀은 2025년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이 "나치가 저지른 것만큼 거대한 악을 행하고 있다"며, "어떤 면에서는 더 나쁘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유사한 목소리가 나왔다. 전직 IDF 부참모총장 야이르 골란은 2016년 홀로코스트 추모일 연설에서 홀로코스트 시대 유럽에서 일어난 과정들의 징후가 이스라엘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암시했다.

이 비교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수사적 과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구체적 근거들이 있다. 2026년 초 현재 가자 사망자는 최소 75,000명, 최대 126,000명으로 추산되며 어린이가 전체의 27%를 차지한다. 가자 주택 인프라의 90% 이상이 파괴되었다. ICC 체포 영장은 "전쟁의 방법으로서의 아사(starvation as a method of warfare)"를 죄목으로 명시했다. 국제 제노사이드 학자 협회는 86% 찬성으로 이것이 제노사이드의 법적 정의를 충족한다고 결의했다. 이 비교들의 핵심은, 피해자 집단이 세운 국가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들에 의해 심판받고 있다는 구조적 역설에 있다.


제2장: 홀로코스트가 건설한 도덕적 건축물

홀로코스트를 단순한 역사적 범죄로 이해하면 이 글의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홀로코스트가 인류 문명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독일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1989)에서 홀로코스트는 근대 문명의 이탈이 아니라 그것의 논리적 산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관료적 효율성, 합리적 도구주의, 민족국가의 배타성이 한데 모이면 집단학살이 가능하다. 이 인식이 1945년 이후 새로운 국제 질서의 도덕적 토대가 되었다. 인류는 문명 자체가 악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그 배움을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래파엘 렘킨은 가족 49명을 홀로코스트로 잃은 후 "제노사이드"라는 개념 자체를 창안하고 1948년 유엔 제노사이드 협약을 이끌어냈다. 뉘른베르크 원칙은 국가 지도자도 개인으로서 형사 책임을 진다는 혁명적 원칙을 확립했다.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지는 권리를 선언했다. 2002년 설립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이 모든 것의 제도적 완성이었다. 이 전체가 하나의 서약의 표현이었다.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

독일 역사학자 단 디너는 홀로코스트를 Zivilisationsbruch, 즉 "문명적 단절"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인류의 자기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서구는 집단적 죄의식 속에서 유대인을 역사상 가장 보호받아야 할 집단으로 자리매김했고, 반유대주의는 문명에 대한 범죄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네타냐후가 세습한 도덕적 자산의 규모다. 그리고 바로 그 규모가, 그것을 스스로 부수는 행위의 무게를 결정한다.


제3장: 피해자가 가해자가 될 때 — 도덕 붕괴의 철학적 구조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명제에 도달한다. 피해자였다는 경험이 어떻게 가해자의 자격으로 전환되는가, 그리고 왜 그것이 외부인의 가해보다 더 심각한 도덕적 위반인가를 살펴볼 차례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는 『익사자와 구조자』(1986)에서 "그레이 존(gray zone)"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극한의 억압 체제 속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흐려지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레비의 답은 "판단에 앞서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이해는 용서가 아니다. 이해는 판단의 전제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더 나아갔다. 그녀는 나치에 협조한 유대인 평의회(Judenräte)를 분석하면서 억압의 구조가 피해자 자신을 억압의 도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도덕적 진지함의 요건이라는 것이 아렌트의 핵심이었다.

이 철학적 통찰을 오늘의 이스라엘에 적용하면 섬뜩한 구조가 드러난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집단이 세운 국가가, 홀로코스트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들에 의해 심판받고 있다. 2024년 11월 ICC는 네타냐후와 전 국방장관 갈란트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뉘른베르크의 유산이 이스라엘을 향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학자 오메르 바르토프는 2025년 7월 "나는 제노사이드 학자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하며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이 제노사이드의 법적 정의를 충족한다고 결론지었다.

바로 여기에 "히틀러보다 나쁘다"는 명제의 핵심 논리가 있다. 히틀러는 법이 없던 시대에 범죄를 저질렀다. 네타냐후는 그 범죄 때문에 만들어진 법을 어기고 있다. 법의 존재를 알면서도 위반하는 것이, 법의 부재 속에서 위반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더 무겁다. 더 나아가 그 법이 바로 자신의 선조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 배반의 무게는 어떤 언어로도 다 표현하기 어렵다.


제4장: 피해의 역사를 아는 자의 책임 — 동서 철학의 증언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네타냐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것은 동서양 철학이 오랫동안 다루어온 보편적 명제다.

공자는 『논어』에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했다. 고통을 경험한 자는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해야 한다. 고통의 경험이 오히려 더 큰 잔혹함의 동기가 된다면,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근원적 배반이다.

칸트의 도덕철학은 더 엄격한 잣대를 제공한다. 행위의 도덕성은 그 결과가 아니라 의도에 달려 있으며, 그 의도는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판단된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이 "우리가 당한 것을 다른 민족에게 행할 수 있다"는 원칙을 채택한다면, 그것은 칸트가 말한 도덕적 보편화 가능성의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다. 이 원칙이 보편화된다면 모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될 권리를 가지며, 그것은 도덕 자체의 붕괴다.

불교 철학의 연기론(緣起論)적 관점도 이 문제를 조명한다. "원한은 원한으로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직 무원한(無怨恨)으로만 사라진다"는 담마파다의 가르침은, 피해의 기억이 복수의 동기가 되는 순간 그 순환은 끊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phronesis) 개념도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지식이 있음에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덕의 완전한 결여다. 알면서도 행하는 잘못은 모르고 행하는 잘못보다 무겁다.


제5장: 트라우마의 세대 간 전승 —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

이 비극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심리학이 필요하다. 피해자 집단이 가해자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베셀 반 데어 콜크는 트라우마가 행동적, 감정적, 신경생리학적 수준에서 반복된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결정적인 관찰을 남겼다. "트라우마의 행동적 재연에서 자아는 피해자 역할도, 가해자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집단 수준에서도 작동한다. 정신의학자 바밀 볼칸은 이것을 "선택된 트라우마(chosen trauma)"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 집단이 과거의 대규모 희생을 현재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을 때, 과거와 현재가 합쳐지는 "시간 붕괴(time collapse)"가 일어난다. 밀로셰비치가 1389년 코소보 전투를 600년 후에 재활성화하여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정당화한 것이 전형적 사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는 후생유전학적으로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연구까지 나와 있다. 한 생존자 정신분석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35세 아들이 게슈타포가 계단을 올라오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내 아들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런데 그는 나의 악몽을 꾼다." 이것은 트라우마가 시간을 건너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증언이다.

전 크네세트 의장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인 아브라함 버그는 이 병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진단했다.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을 무장하고 강력하면서도 스스로를 작고 약하고 취약하다고 인식하는 국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분노를 나치에서 아랍으로 전이시켰으며, 친구와 포식자를 더 이상 구별하지 못하는 무한한 편집증에 감염되었다고 그는 진단했다.

그러나 이해가 곧 용서가 아님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트라우마가 이 행위를 설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면죄부가 아니다. 치유되지 않은 트라우마가 새로운 가해를 낳는 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책임이 따른다. 그것이 "Never Again"이 본래 요청했던 것이다.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위하여.


제6장: 개인 이익을 위해 전쟁을 연장한 자 — 가장 냉소적인 형태의 악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것이 도덕적 배반이라면, 개인의 형사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을 연장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 타락한 형태의 악이다. 적어도 히틀러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의 가해자였다. 네타냐후에 대한 핵심 의혹은 그가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네타냐후는 2019년 11월 사기, 배임, 뇌물 수수 혐의로 기소되었다. 케이스 4000은 최대 10년 징역형에 해당하는 뇌물 혐의로, 통신 규제 특혜의 대가로 긍정적 미디어 보도를 받은 것과 관련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공판은 14개월 이상 중단되었다. 뉴욕타임스의 6개월 심층 조사는 110명 이상의 관리들을 인터뷰한 끝에 네타냐후가 "주로 개인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전시 결정을 내렸다"고 결론지었다. 이스라엘인의 50% 이상이 인질 협상을 지지한다는 말에 그는 "내 유권자의 50%는 아니다"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칸트의 윤리학으로 보면, 이것은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만 취급하는 행위의 극단적 형태다. 이데올로기적 확신을 가진 가해자는 최소한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타인의 죽음을 도구화하는 자는 그것이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행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가장 타락한 형태의 부덕(vice)이다.


제7장: 개인 죄와 집단 죄의 구분 — 분석의 가장 중요한 한계선

이 모든 분석이 올바르게 작동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한계선이 있다. 한나 아렌트와 칼 야스퍼스가 전후 독일을 대상으로 확립한 원칙이다.

야스퍼스는 1946년 『독일의 죄 문제』에서 죄를 네 가지로 구분했다. 형사적 죄(개인에게만 귀속), 정치적 죄(체제를 가능하게 한 집단의 연대 책임), 도덕적 죄(개인의 양심), 형이상학적 죄(인류 전체와의 연대)가 그것이다. 이 중 형사적 죄는 결코 집단에게 전가될 수 없다. 아렌트는 더 간결하게 말했다. "모든 사람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집단적 죄의 논리는 실제 범죄자들을 희석시키는 도덕적 화이트워시다. 전쟁 중에도 거리로 나온 수십만 이스라엘 시민들, 자국 군대의 범죄를 문서화한 단체들, 이스라엘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유대인 학자들에게 집단적 죄를 돌리는 것은 철학적으로 불가능하고 도덕적으로도 부당하다. 네타냐후 자신이 역설적으로 이 오류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는 "이스라엘은 유대 민족 전체를 대표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만드는 정치적 방패를 구축한다. 그러나 이 전략은 전 세계 유대인들을 자신의 정책과 동일시시키는 효과를 낳으며, 그 결과 무관한 유대인들이 반유대적 공격의 표적이 된다.

ADL에 따르면 미국 내 반유대적 사건은 2024년 9,354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그 중 58%가 이스라엘 또는 시오니즘과 연관되었다. 네타냐후의 행위가 전 세계 유대인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유대인이 지구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통찰의 현실적 근거다.


결론: "다시는 안 된다"는 서약은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이 글의 모든 논의는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한다.

피해자였다는 사실은 도덕적 면죄부가 아니다. 공자의 황금률도, 칸트의 정언명령도, 불교의 연기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도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알면서도 행하는 잘못은 모르고 행하는 잘못보다 무겁고,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자의 잘못은 더더욱 무겁다.

히틀러는 문명이 아직 정립하지 않은 기준 앞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네타냐후는 그 범죄로 인해 만들어진 기준을, 그 기준의 최대 수혜자로서,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 600만 희생의 대가로 얻어낸 "다시는 안 된다"는 서약을 그 희생자들의 후예가 배반할 때, 그 배반은 단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류의 도덕적 진보 자체에 대한 공격이며, 미래의 모든 피해자 집단이 스스로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전례의 확립이다.

그러나 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내의 반전 시위, 양심적 학자들의 고발, ICC와 ICJ의 작동 — 이것들은 문명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다. 홀로코스트의 극복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을 현재의 윤리적 나침반으로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다.

"다시는 안 된다"는 서약은 처음부터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그 서약의 진정한 계승자는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그 정신을 살아있게 하려는 모든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