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흑인 특허권자 토마스 제닝스
_ 드라이클리닝의 발명가, 존엄성의 설계자
실행 요약: 혁신과 해방의 수렴
미국 혁신의 역사는 종종 기술적 진보와 사회 정의의 서사를 분리하여, 전자는 산업 전기의 영역으로, 후자는 정치사의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업가적 자본주의와 급진적 노예 폐지론의 통합을 구현한 인물인 토마스 L. 제닝스(Thomas L. Jennings, 1791–1859)의 업적은 그런 이분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1821년, 제닝스는 현대 드라이클리닝의 전신인 "드라이 스카우어링(dry scouring)" 공정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며 흑인 최초로 미국 특허를 획득했다.1 그러나 제닝스를 단순히 발명가로만 보는 것은 그의 천재성이 가진 전략적 효용을 가리는 일이다. 그는 단순히 부를 축적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 아니라, 힘 - 구체적으로는 뉴욕시의 노예제도와 인종 분리 구조를 해체하는 데 필요한 법적, 재정적 자본 - 을 축적하기 위해 발명했다.
이에 제닝스의 삶과 유산을 포괄적으로 분석한다. 남북전쟁 40년 전 흑인이 연방 특허를 보유할 수 있었던 법적 특이점, "드라이 스카우어링" 방식의 화학과 상업성, 가족을 해방시키고 피선거권자의 법적 방어 자금을 대기 위한 수익의 전개, 그리고 1854년 전차 승리 사건을 통해 20세기 민권 운동을 예고한 딸 엘리자베스 제닝스 그레이엄에게로 이어진 운동가 정신의 세대 간 전승을 탐구한다. 제닝스가 정치 기득권층이 거부하려 했던 시민권을 집행하기 위해 시장과 법원의 메커니즘을 활용한 "자본주의적 노예 폐지론(capitalist abolitionism)"의 모델이었음을 확인한다.
제1부: 자유인의 탄생 (1791–1820)
1.1 혁명 후 뉴욕의 사회학적 풍경
토마스 제닝스의 성취가 가진 규모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태어난 환경을 엄밀히 재구성해야 한다. 제닝스는 1791년 뉴욕시에서 태어났다.1 그의 출생은 북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지위에 대한 심오한 모호성의 시기와 일치했다. 뉴욕은 아직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주(free state)가 아니었으며, 채털 슬레이버리(chattel slavery, 동산 노예제)에서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벗어나는 과도기적 사회였다.
1799년 뉴욕주의 "점진적 노예 해방 법안(Gradual Emancipation Act)"은 제닝스의 어린 시절 동안 흑인의 자유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법은 기존 노예를 해방하지 않았다. 대신 1799년 7월 4일 이후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기술적으로 자유롭게 태어난 것으로 간주했다.3 그러나 이 "자유로운" 아이들은 남성의 경우 28세, 여성의 경우 25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 주인의 계약 하인(indentured servants)으로 봉사해야 했다.4 따라서 19세기 초 뉴욕시는 제닝스와 같은 자유 흑인, 노예 노동자, 계약 하인이 종종 같은 가정이나 가족 내에서 공존하는 지위의 모자이크였다.
제닝스의 "자유 태생(free-born)" 지위는 드문 특권이었다. 이는 그를 즉각적인 매매 위협으로부터 면제해주었지만, 도시의 경제 및 사회 생활에 만연한 구조적 인종차별로부터 그를 보호해주지는 못했다. 그가 소유한 "자유"는 확정된 법적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는 방어가 필요한 쟁점 공간이었다. 이러한 방어적 태도는 그의 전 생애를 특징지었으며, 그가 자신의 자율성을 유형의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직업과 법적 조치로 나아가게 했다.
1.2 재단사 무역: 사회적 이동수단으로서의 장인 정신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체계적으로 거부되었던 정규 고등교육의 선택권이 없었던 제닝스는 기술직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재단사로 도제 생활을 했는데, 이는 당시의 경제적 위계를 예리하게 이해한 선택이었다.1 19세기 초, 재단사는 흑인 남성에게 열려 있는 숙련직 중 소유권을 가질 수 있고 백인 상류층과 교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재단사는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취향에 관한 조언자이자 컨설턴트였다. 양모, 리넨, 실크로 만든 프록 코트, 조끼, 판탈롱 등 그 시대의 복잡한 패션을 재단하고 바느질하는 기술을 마스터함으로써 제닝스는 도시의 권력 중개자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자신을 두었다. 그는 뉴욕에서 가장 호평받는 재단사 중 한 명에게서 도제 생활을 하며 바느질의 기술뿐만 아니라 엘리트들의 예절과 기대치도 흡수했다.1
이 도제 생활은 이중의 목적을 달성했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적 독립을 위한 기술을 제공했다. 사회적으로는 백인이 지배하는 상업 영역을 항해하는 흑인 남성에게 필수적인 존경심의 겉모습(veneer)을 제공했다. 20대 초반에 제닝스는 자신의 가게를 설립했다. 뉴욕 5구(Fifth Ward)의 처치 스트리트(Church Street) 167번지에 위치한 그의 가게는 뉴욕의 번화한 상업 지구 중심부에 자리 잡아 백인 장인들과 직접 경쟁하려는 그의 야망을 알렸다.1
1.3 1812년 전쟁: 시민권의 피의 세금
미국에 대한 제닝스의 헌신은 1812년 전쟁 중에 시험대에 올랐고 증명되었다. 영국군이 동부 해안을 위협함에 따라 뉴욕시의 취약성은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연방 정부와 주 민병대가 종종 흑인의 참여를 배제하거나 소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제닝스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롱아일랜드와 할렘에서 참호를 파고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자원한 "천 명의 유색 시민" 중 한 명이었다.1
이 복무는 제닝스의 이후 법적 주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초기 미국의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서 투표권과 시민권은 국방의 의무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뉴욕을 방어하기 위해 삽을 듦으로써 제닝스는 자신의 시민권을 물리적으로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법의 완전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게 하는 "피의 세금(blood tax)"을 지불하고 있었으며, 이 믿음은 그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특허청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대담함의 원천이 되었다.
제2부: "드라이 스카우어링"의 혁신 (1820–1821)
2.1 19세기 패션의 물질적 위기
제닝스의 발명을 촉발한 것은 19세기 물질문화에 내재된 만연한 소비자 문제였다. 제닝스의 부유한 고객들의 옷장은 관리하기 악명 높은 직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급 양모, 실크, 벨벳은 색이 잘 빠지는 천연 식물성 또는 곤충 기반 염료로 염색되었다.
당시의 표준 세탁 방법인 "웨트 스카우어링(wet scouring)"은 비누나 잿물을 섞은 물에 옷을 담그는 것이었다.1 거친 노동자의 튜닉에는 이 방법이 허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사의 맞춤 양모 코트나 숙녀의 실크 가운에는 재앙이었다. 물은 섬유를 부풀리고 수축시켜 핏을 망가뜨렸다. 마찰은 염료를 번지게 하여 복잡한 패턴을 망쳤다. 기름, 오일, 음식물 얼룩은 종종 영구적으로 남아 비싼 의류를 한 번의 사고로 쓸모없게 만들었다.
시장의 하이엔드급에서 활동하던 제닝스는 옷을 망칠까 봐 더러워진 옷의 세탁을 주저하는 고객들의 불만을 끊임없이 마주했다.3 그는 의류를 유지 관리할 수 있는 재단사가 평생 고객을 확보할 수 있으며, 계절에 따라 새 옷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인 반복 수익 모델을 창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2.2 해결책의 화학
제닝스는 체계적인 실험 과정을 시작했다. 정확한 특허 공식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제3부에서 논의될 비극), 역사적 맥락과 단편적인 기록들은 그가 섬유의 친수성(물과 친한 성질)과 상호 작용하지 않으면서 지질(기름기)을 용해할 수 있는 용매에 집중했음을 시사한다.1
그는 아마도 **캄펜(camphene, 테레빈유 유도체)**이나 유사한 휘발성 유기 화합물을 사용하여 다양한 화학 비율을 실험했을 것이다. 그의 돌파구는 그가 "드라이 스카우어링(dry scouring)"이라고 명명한 공정이었다. 이름의 "드라이(dry)"는 오늘날의 "드라이클리닝"에서처럼 액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물이 없다는 뜻이다. 비수성 용매를 사용함으로써 제닝스는 섬유를 부풀리거나 수용성 염료를 녹이지 않고 얼룩을 용해할 수 있었다.1
이는 급진적인 혁신이었다. 이전에는 망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직물을 되살릴 수 있게 해주었다. 사치품의 수명 주기를 연장시켰으며, 결정적으로 현장에서 신속하게 수행될 수 있었다.
2.3 특허의 경제학
제닝스는 자신이 상당한 가치를 지닌 지적 재산을 창출했음을 인식했다. 뛰어난 사업 감각을 보여주는 움직임으로, 그는 자신의 발명을 독점하고자 했다. 그는 단순히 그 일을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1820년, 그는 미국 특허청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행동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허청은 연방 기관이었고, 흑인 시민권에 대한 연방 정부의 입장은 기껏해야 모호했다. 그러나 제닝스는 법의 문구에 기대를 걸었다. 조지 워싱턴이 서명하고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한 1793년 특허법은 출원인에게 "미국 시민(citizen of the United States)"임을 맹세하는 선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습니다.2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사업에 대해 세금을 납부한 자유인 제닝스는 그 선서에 서명했다.
제3부: 1821년의 특허와 흑인 시민권의 법적 특이성
3.1 특허 3306x의 부여
1821년 3월 3일, 미국 정부는 토마스 L. 제닝스에게 "의류 드라이 스카우어링(Dry Scouring Clothes)"에 대한 특허 제3306x호를 발급했다.1 특허 증서는 공화국에서 가장 강력한 두 사람, 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와 법무장관 **윌리엄 워트(William Wirt)**의 서명이 담긴 강력한 문서였다.1
이 순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닝스의 선서를 수락하고 특허를 발급함으로써 연방 정부의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그를 시민으로 인정했다. 이 인정은 그에게 14년 동안 자신의 발명을 "만들고, 구성하고, 사용하고, 타인에게 판매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와 자유"를 부여했다.
1821년 흑인 남성에게 이것은 숨 막히는 권리 주장이었다. 이는 그를 일라이 휘트니나 로버트 풀턴과 같은 백인 발명가들과 동등한 법적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가장 공식적인 방식으로 그의 지성과 재산권을 입증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나중에 언급했듯이, 이 특허는 제닝스를 "미국 시민"으로 인정했는데,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단지 재산이나 기껏해야 거주 외국인으로 보았던 많은 동시대인들에게 충격을 준 호칭이었다.2
3.2 노예 발명가의 논쟁
제닝스 특허의 독특함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의 성공을 노예 발명가들의 실패와 비교해야 한다. 남북전쟁 전 남부는 흑인의 독창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예들은 농기구, 가공 방법 및 기계 장치를 개선했다. 그러나 법적 시스템은 무자비하게 그들의 공로를 박탈했다.
1793년 특허법은 인종에 대해서는 침묵했지만 시민권에 대해서는 명확했다. 노예는 시민이 아니라 재산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특허 선서에 서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법적 원칙은 "노예의 육체적 노동과 지적 노동의 결실은 모두 주인의 소유"라고 규정했다.6 이는 "특허의 함정"을 만들었다:
- 노예는 시민이 아니므로 발명을 특허 낼 수 없다.
- 주인은 진정한 발명가가 아니므로 발명을 특허 낼 수 없다(특허 선서는 신청인이 원작자임을 맹세해야 함).11
이러한 법적 딜레마는 1850년대 얕은 물을 위한 증기선 프로펠러를 발명한 노예 **벤자민 몽고메리(Benjamin Montgomery)**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신청은 거절되었고, 그의 주인이 시도한 특허 신청 또한 거절되었다.11 마찬가지로 1857년 제러미아 블랙 미 법무장관은 노예가 특허를 보유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표 1: 흑인 발명가의 비교 법적 지위 (1790–1865)
| 발명가 | 법적 지위 | 혁신 | 특허 결과 | 법적 근거 |
| 토마스 L. 제닝스 | 자유 태생 | 드라이 스카우어링 (1821) | 승인됨 | 시민권 선서 수락됨; 드레드 스콧 판결 이전의 유연성. |
| 헨리 보이드 | 해방됨 | 보이드 침대 프레임 | 거절/대리 | 인종 장벽으로 인해 백인 가구 제작자와 파트너십을 맺어 특허 보유. |
| 벤자민 몽고메리 | 노예 | 프로펠러 | 거절 | 시민 아님; 선서 불가. 주인은 발명가가 아니므로 거절. |
| "네드(Ned)" | 노예 | 면화 스크레이퍼 | 거절 | 1857년 법무장관 판결로 노예의 특허권 부재 확인. |
따라서 제닝스는 독특한 기회의 창을 점유했다. 그는 1850년대 노예제 옹호 법적 논쟁이 강화되기 전(특히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이 자유인이든 노예든 흑인은 시민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기 전)에 자유인이었다.13 만약 제닝스가 1858년에 신청했다면 그의 신청은 거절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3.3 "X-특허"와 1836년 화재
제닝스의 특허는 오늘날 "X-특허(X-Patent)"로 알려져 있다. 이 명칭은 1836년 12월 워싱턴 D.C. 특허청에서 발생한 재앙적인 화재로 인한 기록 보관상의 결과물이다.1 화재는 약 10,000건의 특허 기록을 파괴했는데, 이는 그 시점까지의 미국 혁신 역사 거의 전체에 해당한다.
특허청이 기록을 복구하려고 시도했을 때, 발명가들에게 원본 증서를 복사를 위해 반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약 2,800건만이 복구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특허와 구별하기 위해 "X" 접미사를 붙여 다시 번호를 매겼다. 제닝스의 원래 문서는 화재로 소실되어 구체적인 화학 도표와 설명은 사라졌다. 그러나 특허의 존재 사실은 색인 기록과 제닝스가 소중히 여기며 죽는 날까지 침대 옆에 걸어두었던 물리적 증서에 보존되어 있다.1
제4부: 자유의 경제학 (1821–1830)
4.1 "드라이 스카우어링" 비즈니스
특허를 손에 쥐고 제닝스는 자신의 양복점을 수익성 높은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뉴욕에서 가장 효과적인 세탁 방법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다. 부유한 고객들이 비싼 옷을 구하기 위해 프리미엄을 기꺼이 지불하며 처치 스트리트의 매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사업적 성공은 제닝스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다. 그는 자본 축적을 해방을 위한 도구로 보았다. 1820년대에 돈은 흑인 남성이 노예제라는 법적 시스템에 대항해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무기였다.
4.2 아내 엘리자베스의 매입
제닝스의 가장 시급한 "투자"는 자신의 가족이었다. 그는 1798년 델라웨어에서 노예로 태어난 엘리자베스라는 여성과 결혼했다.3 북부의 복잡한 노예법망 아래서 엘리자베스는 뉴욕으로 왔지만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녀는 점진적 노예 해방 법안에 따라 계약 하인으로 분류되었으며 1827년까지 완전한 해방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4
연방 정부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은 남성인 제닝스에게, 법적으로 타인의 재산인 아내를 두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드라이 스카우어링 사업에서 얻은 첫 번째 큰 수익을 사용하여 그녀의 주인과 협상했다. 그는 그녀의 계약을 매입하기 위해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고 즉시 그녀를 해방했다.4
이 거래는 그 시대의 잔인한 아이러니를 강조한다. 제닝스는 자신의 지적 재산(정신의 산물)에서 나온 수익을 사용하여 백인 소유주로부터 물리적 재산(아내의 신체)을 구매했는데, 이는 오로지 그 재산 소유권을 무효화하기 위함이었다.
4.3 다음 세대의 확보
제닝스는 아내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녀들—마틸다(1824년생), 엘리자베스(1827년생), 제임스(1832년생)—이 자유로운 상태로 태어나거나 신속하게 자유를 확보하도록 했다.3 그는 자녀들의 교육에 막대하게 투자했다. 많은 흑인 아이들이 문맹 상태를 강요받던 시절, 제닝스의 자녀들은 음악, 문학, 그리고 기술을 교육받았다. 마틸다는 드레스메이커가 되었고, 제임스는 공립학교 교사이자 음악가가 되었으며, 엘리자베스는 교사이자 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5 이러한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는 자신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흑인 중산층을 구축하려는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제5부: 노예 폐지론자이자 재정가, 조직가 (1830–1850)
5.1 애비시니언 침례교회
제닝스는 경제적 힘이 제도적 힘으로 조직되어야 함을 이해했다. 그는 할렘의 **애비시니언 침례교회(Abyssinian Baptist Church)**의 창립 멤버이자 이사였다.2 이 교회의 설립은 항의의 행위였다. 뉴욕 제일침례교회에서 분리된 좌석("노예 갤러리") 수용을 거부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탈퇴하여 설립한 것이다.
이 독립적인 흑인 기관의 재정을 지원하고 운영을 도움으로써 제닝스는 1세기 넘게 정치적 조직화의 허브 역할을 할 성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교회는 노예 폐지론 연사들의 플랫폼이자 도망 노예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5.2 1831년 유색인종 전당대회
1831년 6월, 자유주 흑인 지도자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연례 유색인종 전당대회(First Annual Convention of the People of Color)**를 위해 모였다. 이는 흑인 정치 조직 역사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제닝스는 단순한 참석자가 아니었다. 그는 대회의 **부서기(Assistant Secretary)**로 선출된 지도자였다.2
이 대회에서 제닝스와 동료들은 인종의 운명을 논의했다. 주요 주제는 자유 흑인을 아프리카(특히 라이베리아)로 보내자는 **미국식민협회(ACS)**의 제안이었다. ACS는 흑인과 백인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고 믿는 많은 백인 정치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제닝스는 확고한 **반식민주의자(anti-colonizationist)**였다. 그는 흑인들이 자신들이 건설한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1828년 뉴욕 상호구제협회(New York Society for Mutual Relief)에서의 열정적인 연설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우리의 권리는 미국에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를 낳은 땅이며, 우리의 출생지입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이곳은 우리 아버지들이 고통받고 땀 흘린 땅입니다... 그들(백인 이민자)은 자발적으로 이주했지만, 다른 이들(흑인)은 강제로 고향과 모든 즐거움에서 끌려왔습니다." 8
이 입장은 급진적이었다. 이는 미국을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타고난 권리(birthright)로 주장한 것이다.
5.3 참정권 투쟁
1830년대와 1840년대 내내 제닝스는 뉴욕에서 투표권을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제닝스가 특허를 획득한 해인 1821년의 뉴욕주 헌법은 불길한 제한을 부과했다. 백인 유권자의 재산 요건은 없앴지만, 흑인 유권자에게는 250달러의 재산 요건을 유지한 것이다.15
재산과 성공적인 사업체를 소유한 제닝스는 실제로 투표할 자격이 있는 소수의 흑인 남성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특권을 자신만을 위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로부터 잘 알고 있는 원칙인 "대표 없는 과세는 폭정"이라고 주장하며 제한 철폐를 위해 끊임없이 로비했다.16 그는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청원서에 서명하고, 흑인 노동계급의 참정권을 회복하기 위한 로비 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
제6부: 딸의 성전 (1854)
토마스 제닝스의 유산은 그의 딸 엘리자베스 제닝스 그레이엄의 행동에서 가장 생생하게 실현된다. 1854년, 그녀는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확립한 원칙을 시험하는 법적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6.1 제3번가 사건
1854년 7월 16일 일요일, 당시 27세의 학교 교사였던 엘리자베스 제닝스는 제1유색인종회중교회(First Colored Congregational Church)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그녀는 늦었습니다. 그녀와 친구 사라 아담스는 펄 스트리트와 채텀 스트리트 코너에서 제3번가 철도 회사(Third Avenue Railroad Company) 소유의 전차를 세웠다.17
뉴욕의 전차는 사유 기업이었다. 인종 분리를 명시적으로 의무화하는 주법은 없었지만, 관습과 회사 규칙은 종종 흑인 승객을 금지하거나 "유색인종 허용(Colored Persons Allowed)"이라고 표시된 특별 차량으로 제한했다.
엘리자베스가 차에 탔을 때, 차장은 그녀에게 내려서 "그녀의 사람들"을 위한 차를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엘리자베스는 거부했다. 그녀는 존경받는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녀의 반항에 격분한 차장은 물리적으로 그녀를 제거하려 했다. 엘리자베스는 창틀과 차장의 코트를 붙잡으며 저항했다. 차장은 경찰관을 불렀고, 그들은 함께 그녀를 차에서 폭력적으로 끌어내어 드레스를 찢고 보닛을 부수며 보도에 타박상을 입은 채로 내동댕이쳤다.17
6.2 법적 대응
엘리자베스는 아버지 토마스 제닝스에게 돌아갔다. 제닝스는 절망을 권하지 않았다. 그는 소송을 권했다. 그는 딸의 폭행 사건에서 대중교통 인종 분리 시스템 전체에 도전할 기회를 보았다.
제닝스는 자신의 부와 인맥을 활용하여 최고 수준의 법무팀을 고용했다. 그는 컬버, 파커, 아서(Culver, Parker, and Arthur) 법률 사무소를 선임했다. 이 사건은 회사의 주니어 파트너인 24세 변호사 **체스터 A. 아서(Chester A. Arthur)**에게 배당되었다.17
아서의 선택은 역사적으로 흥미롭다. 아서는 나중에 미국의 제21대 대통령이 된다. 1854년 당시 그는 노예 폐지론 성향을 가진 젊은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다. 토마스 제닝스는 자금과 원고를 제공했고, 체스터 아서는 법적 논리를 제공했다.
6.3 평결과 인종 분리 철폐
제닝스 대 제3번가 철도 회사(Jennings v. Third Avenue Railroad Company) 사건은 1855년 브루클린 순회 법원에서 재판되었다. 피고 측은 회사가 사기업으로서 인종에 따라 승객을 배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체스터 아서는 전차 회사가 공공 의무를 지닌 "공동 운송인(common carriers)"이라고 주장했다. 윌리엄 록웰(William Rockwell) 판사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배심원 지침을 내렸다:
"유색인종이라도 술에 취하지 않고, 품행이 바르며, 질병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지며, 회사의 규칙이나 힘, 폭력으로 배제될 수 없다." 17
배심원단은 엘리자베스 제닝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손해배상금 225달러(인플레이션을 감안할 때 약 8,400달러)와 법원 비용 22.50달러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17
영향은 즉각적이었다. 제3번가 철도 회사는 바로 다음 날 차량의 인종 분리를 철폐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로자 파크스가 몽고메리에서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하기 정확히 101년 전, 미국 대중교통의 인종 분리를 철폐하기 위한 긴 전쟁에서의 첫 번째 주요 승리였다.
6.4 법적 권리 협회 (1855)
토마스 제닝스는 한 회사에 대한 승리가 시스템 전체에 대한 승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다른 전차 노선들(예: 제8번가 철도)은 계속해서 차별했다. 평결을 활용하기 위해 제닝스는 제임스 맥큔 스미스(Dr. James McCune Smith) 박사, 제임스 W.C. 페닝턴(Rev. James W.C. Pennington) 목사와 함께 1855년 **법적 권리 협회(Legal Rights Association)**를 창설했다.3
이 조직은 널리 NAACP의 전신으로 간주된다. 그들의 전략은 "전략적 소송"이었다. 그들은 변호사를 고용하기 위해 자금을 모았고, 법정에 가져갈 수 있는 "시험 사건(test cases)"을 만들기 위해 흑인 시민들을 의도적으로 분리된 전차에 탑승시켰다. 사법부를 이용하여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이 정교한 이해는 제닝스가 평생 법과 씨름하며 얻은 경험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제7부: 죽음, 추도사, 그리고 유산 (1859)
7.1 거인의 죽음
토마스 L. 제닝스는 1859년 2월 11일 뉴욕 자택에서 사망했다.1 향년 약 68세였다. 그의 죽음은 미국 역사에서 어두운 시기에 찾아왔다. 남북전쟁이 2년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1857년의 드레드 스콧 판결은 흑인이 "백인이 존중해야 할 어떤 권리도 없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제닝스의 벽에 걸린 특허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법적 원칙이었다.
7.2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추도사
제닝스의 죽음은 흑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노예 폐지론의 사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는 *앵글로-아프리칸 매거진(Anglo-African Magazine)*에 추모사를 썼다. 더글러스는 제닝스가 단순한 성공한 사업가가 아니라 흑인의 잠재력을 상징하는 인물임을 인식했다.
더글러스는 제닝스를 **"활동적이고 진지하며 비난받을 데 없는 삶"**을 이끈 **"대담한 유색인(bold man of color)"**으로 묘사했다.8 결정적으로, 더글러스는 특허를 정치적 무기로 포착했다. 그는 특허가 제닝스를 **"미국 시민"**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썼으며, 이는 드레드 스콧 판결의 위선을 드러내는 지정이었다.2 더글러스는 제닝스의 삶을 이용해 흑인 시민권이 대법원이 부여하는 이론적 선물이 아니라, 1821년 행정부가 이미 인정한 역사적 사실임을 주장했다.
7.3 "인권의 수호자"
제닝스는 브루클린의 **사이프러스 힐스 묘지(Cypress Hills Cemetery)**에 안장되었다. 그의 자녀들은 그의 평생 과업을 요약하는 묘비명을 선택했다. 거기에는 "재단사"나 "발명가"라고 적히지 않았다. **"인권의 수호자(Defender of Human Rights)"**라고 적혀 있었다.8
이 묘비명은 그의 삶에 대한 최종 논문 역할을 합니다. 드라이 스카우어링의 발명은 빛나는 기술적 성취였지만, 그 자신의 평가에 따르면 그것은 그의 진정한 소명, 즉 동포들의 인간성을 방어하기 위한 병참 지원일 뿐이었습니다.
결론: 자본주의적 노예 폐지론의 모델
토마스 L. 제닝스의 이야기는 미국 역사의 단순화된 서사에 대한 교정입니다. 그것은 노예제에 대한 투쟁이 강단, 전장, 언론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특허청과 은행 등 다양한 전선에서 벌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제닝스는 자본주의적 노예 폐지론의 모델을 개척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에는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는 지적 재산을 활용하여 가족을 속박에서 구해내고 법원이 흑인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강제할 변호사를 고용하는 데 필요한 부를 창출했습니다.
그의 유산은 결국 모든 인종에게 완전히 개방된 특허 시스템, 그의 화학적 통찰력에 기초한 드라이클리닝 산업, 그리고 가장 심오하게는 법적 권리 협회에서 NAACP 법률 변호 기금으로 흐르는 민권 법률 전략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1950년대와 60년대 민권 운동의 승리를 볼 때, 우리는 19세기 뉴욕의 척박한 토양에 토마스 L. 제닝스가 뿌린 씨앗의 수확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부록: 구조화된 데이터 분석
표 2: 제닝스 가족의 영향 연대기
| 연도 | 사건 | 의의 |
| 1791 | 토마스 제닝스 뉴욕에서 자유인으로 출생. | 점진적 노예 해방의 과도기에 태어남. |
| 1812 | 제닝스, 1812년 전쟁 참호 구축 참여. | 국방 복무를 통해 시민권에 대한 권리 확립. |
| 1820 | 특허 출원. | 1793년 특허법의 "시민" 요건을 시험함. |
| 1821 | 특허 3306x 승인. |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특허; 시민권에 대한 연방 인정. |
| 1820s | 아내 엘리자베스의 자유 매입. | 가족에 대한 재산법을 무효화하기 위해 특허 수익 사용. |
| 1831 | 유색인종 전당대회 부서기 역임. | 전국 흑인 지도부 조직; 식민 이주 반대. |
| 1836 | 특허청 화재. | "드라이 스카우어링" 원본 기록 소실 (X-특허). |
| 1854 | 딸 엘리자베스 전차에서 폭행 당함. | 인종 분리 철폐 법적 투쟁의 촉매제. |
| 1855 | 제닝스 대 제3번가 철도 평결. | 노선 인종 분리 철폐 법적 승리; 체스터 아서 변호. |
| 1855 | 법적 권리 협회 창설. | 민권을 위한 소송 전략의 제도화. |
| 1859 | 토마스 제닝스 사망. |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인권의 수호자"로 추모. |
표 3: 토마스 제닝스의 재정 전략
| 수익원 | 할당 | 전략적 결과 |
| 맞춤 양복점 | 가계 / 사업 운영비 | 사회적 지위에 필수적인 "존경받는" 중산층 지위 유지. |
| 드라이 스카우어링 독점 | 해방 기금 | 아내와 자녀들의 자유 매입; 가족 이산 방지. |
| 사업 수익 | 노예 폐지론 자선 | 애비시니언 침례교회 및 법적 권리 협회 자금 지원. |
| 자본 준비금 | 법률 수임료 | 인종 분리 사건 투쟁을 위해 엘리트 변호인(체스터 아서) 고용. |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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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omas Jennings, Tradesman born - African American Registry, 12월 9, 2025에 액세스, https://aaregistry.org/story/thomas-jennings-b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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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omas L. Jennings, the First African American to receive a patent - Issuu, 12월 9, 2025에 액세스, https://issuu.com/atrmediagroup/docs/theportfeb20231/s/1983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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