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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허성원 변리사 칼럼]#205 적이 살아야 내가 산다

by 변리사 허성원 2025. 10. 12.

적이 살아야 내가 산다

 

"다들 적(敵)이 원수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적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들 적이 해롭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적이 얼마나 이로운 존재인지는 알지 못한다(皆知敵之仇 而不知為益之尤, 皆知敵之害 而不知方利之大)."

이 말은 당(唐)나라 때 대문장가이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 773-819)이 쓴 <적계(敵戒)>라는 글의 첫 문장이다. 실로 대단한 통찰이다. 적이란 존재는 응당 쳐부수어 없애야만 나와 내 조직이 평화와 안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범인들의 상식이다. 그런데 유종원은 오히려 그 존재의 이로움과 고마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적계(敵戒)>에서는 먼저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나라를 예로 들었다. "진(秦)나라는 여섯 나라와 대적했을 때에는 항상 긴장하며 강함을 유지했지만, 그 여섯 나라를 제거하고 나서는 교만해져 망하고 말았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가 통일하기 전 함곡관 동쪽에는 제(齊), 위(魏), 한(韓), 조(趙), 초(楚), 연(燕)의 여섯 강국이 버티고 있었다. 이들이 언제든지 합종(合縱)하여 진나라를 공격해올 수 있다는 위협은 상존하였다. 그러기에 진(秦)나라는 위기의식 속에서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며 강함을 추구했다. 상앙(商鞅)의 변법(變法) 등을 통해 엄격한 법치와 군공제(軍功制)를 확립해 국력을 키웠고, 출신 신분을 묻지 않고 전공에 따라 출세의 길을 열어주며 국적을 초월하여 널리 인재를 등용하였다. 내부적으로 법치와 행정 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외교적으로는 '연횡책(連橫策)'과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으로 적의 결속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상존하는 외부의 위협이야말로 진나라로 하여금 내부 결속을 다지고 체제를 혁신하며 부국강병을 이룩하게 한 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마침내 6국을 모두 정복해 외부의 적이 완전히 사라지자, 더 이상 경쟁 상대가 없어진 진나라는 생존의 기술마저 잃어버렸다. 환관 조고(趙高) 같은 측근의 암투로 내분이 일었고, 개방적 인재 정책도 배타적인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아방궁과 만리장성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로 국력을 낭비했고, 분서갱유로 지식인들의 원성을 샀으며, 가혹한 징세와 통치로 백성의 삶은 파괴되었다. 결국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봉기가 터져 나와, 통일 후 불과 15년 만인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허무하게 멸망하고 만다. 그러기에 진나라의 멸망 원인은 적이 사라졌기 때문이라 하는 것이다..

<적계(敵戒)>는 이어서 진(晉)나라의 사례를 든다. "진(晉)나라가 언릉(鄢陵)땅에서 초(楚)나라를 무찌르자, 범문자(范文子)는 근심하였다. 그러나 진여공(晉厲公)은 이를 경계하지 못해 온 나라에 원성이 가득하게 되었다."

당시 진(晉)나라가 정(鄭)나라를 치려 할 때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러 나섰다. 장수들이 상군을 초나라와 싸우려 하자, 범문자(范文子)는 전쟁을 반대하며 이렇게 말하였다(國語 晉語 편).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외부의 걱정이 없으면 반드시 내부의 근심이 생기기 마련이오. 그러니 어찌 잠시 초나라와 정나라를 놓아두어 외부의 경계대상으로 삼지 않으시겠소! 그렇게 해야 여러 신하들이 내부적으로 서로 화합하고 반드시 화목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만일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나라의 복이 될 것이오."라고까지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다. 전쟁은 벌어졌고 진(晉)나라는 초나라에 승리하였다. 그리고 범문자가 예언한 승리의 저주가 현실로 되었다. 경대부들 간의 갈등이 심각해져 일부 가문이 멸족당하고, 급기야 군주 진여공마저 시해되면서 나라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적의 이로움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적계(敵戒)>에는 노(魯)나라의 사례도 나온다. "맹손씨는 장손씨를 미워했으나, 맹손씨가 죽자 장손씨는 슬퍼하며 말하길, '약과 침이 떠나갔으니, 내 죽을 날이 머지않았구나'하였다."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가 실은 생명을 지켜주는 '약과 침'이었으며, 그것이 사라지면 자신도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미워하는 적이야말로 병을 치료하는 은인이라 여기는 그 탁월한 인식, 실로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적계(敵戒)>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적이 있으면 두려워하지만, 적이 사라지면 춤을 추고 방비를 게을리하며 자만에 빠지게 되어, 나라의 고질병을 키우게 된다. 그러니 적이 있으면 재앙이 없어지고(敵存滅禍) 적이 사라지면 화를 부르는(敵去召過) 것이다." 이는 "근심과 우환 속에 생존이 있고, 안일함과 즐거움 속에 죽음이 있다(生於憂患 死於安樂)."고 한 맹자(孟子)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적이 나의 재앙을 막아준다'는 말은 이 시대의 리더들이 특히 귀담아 들어두어야 할 지금도 지극히 유효한 가르침이다. 경쟁자를 모두 물리치고 완전한 시장 지배를 달성했다가 경악할 속도로 붕괴한 기업이 많다. 그들은 더 강한 상대에게 밀려난 것이 아니라,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잃고 교만에 빠지는 등 내부의 부식으로 스스로 무너졌다. 그들은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평화에서 패배한 것이다.

2000년대 '휴대폰의 제왕'으로 불렸던 노키아(Nokia)가 그러했다. 노키아는 모토로라, 에릭슨 등 당대의 경쟁자들을 모두 압도하며 세계 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었다. 그러나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적수가 사라지자, 혁신의 동력을 잃었다.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하며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전쟁의 서막을 열었을 때, 노키아는 그 위협을 과소평가하고 기존의 성공 방식만을 고집하다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력한 경쟁자의 부재가 미래를 보는 눈을 가렸던 것이다.

1990년대 '브라우저 전쟁'에서 넷스케이프를 꺾고 승리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IE)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며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되자, IE는 기술적인 진보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야 할 의미도 잃었다. 그 안일함의 틈을 타 파이어폭스와 크롬 같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빠르고 혁신적인 기능을 무장하여 나타났고, 결국 IE는 웹 브라우저 시장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놓아야 했다.

이처럼 적(敵) 즉 경쟁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더 강하게 단련시키는 스파링 파트너이자 기록 경신을 돕는 페이스메이커이기도 하다. 적이 있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약점을 보완하며, 새로운 전략을 고민하게 된다. 적의 존재는 나태와 교만이라는 가장 위험한 내부의 적을 막아주는 방패인 셈이다.

진정한 위험은 눈앞의 적이 아니라, 적이 사라진 후 찾아오는 안일함이다. 외부의 적이 보이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최고의 경보를 울려야 할 심대한 위기 상황이다. 적을 외부에서 찾을 수 없다면 내부에서라도 적을 키워야 한다. 이 말은 조직 내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내부의 적을 키운다는 것'은, 가상의 완벽한 경쟁자를 상정하거나, 어제의 나의 성공을 오늘의 경쟁상대로 삼아 교만과 나태가 싹트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혹은 조직 내부에 선의의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여 조직원들에게 건강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지혜를 뜻할 수도 있다.

유종원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적은 나를 파괴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생존과 성장을 위해 반드시 공존하여야 할 필수적인 존재다. 가장 강할 때가 가장 약할 때이다. 나의 적은 누구인가. 적이 살아있어야 내가 산다.

** (자료1)

<적계(敵戒) 원역문> _ 유종원(柳宗元, 773-819)

다들 적()이 원수라고 알고 있지만,
적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다들 적이 해롭다고 알고 있지만,
적이 얼마나
 이로운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나라는 여섯 나라와 대적했을 때에는
항상 긴장하며 강함을 유지했지만
,
 
여섯 나라를 제거하고 나서는 교만해져 망하고 말았다.

()나라가 언릉(鄢陵)땅에서 ()나라를 무찌르자, 범문자(范文子)는 근심하였다.
그러나 진여공(晉厲公)은 이를 
경계하지 못해 온 나라에 원성이 가득하게 되었다.
맹손은 장손을 미워했지만, 맹손이 죽자 장손이 슬퍼하며 말했다.
"약과 침(藥石)이 없어졌으니, 우리에게 망하는 날이 머지않았다."

지혜로운 이들이 이를 알고도 결국 위기에 빠지고 말았는데,
하물며 지금 사람들은 이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적이 있으면 두려워하지만,
적이 사라지면 춤을 추고 방비를 게을리하며 자만에 빠지게 되니,
나라의 고질병을 더 키우게 된다.
그러니 적이 있으면 재앙을 막고 적이 사라지면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이치를 아는 자는, 그 도가 커지고 명성이 널리 퍼질 것이다.
병을 경계하는 사람은 장수하고, 강건함만을 자부하는 자는 갑자기 죽는다.
욕망을 마음껏 부리면서 경계하지 않으면, 어리석거나 노망이 든 것이다.
내가 이 경계의 글을 지었으니, 마음에 새겨두면 허물이 없으리라.

皆知敵之仇,而不知為益之尤;皆知敵之害,而不知方利之大。秦有六國,兢兢以強;六國既除訑訑乃亡。晉敗楚鄢,範文為患;厲之不圖,舉國造怨。孟孫惡臧,孟死臧恤,藥石去矣,吾亡無日。智能知之,猶卒以危;矧今之人,曾不是思!敵存而懼,敵去而舞;廢備自盈,秪益為瘉。敵存滅禍,敵去召過;有能知此,道大名播。懲病克壽,矜壯死暴;縱慾不戒,匪愚伊耄。我作戒詩,思者無咎。_ <敵戒> (柳宗元)

** (자료2)

<범문자의 근심, 원역문>

언릉 전투에서 진(晉)나라가 정(鄭)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러 나섰다. 상군을 지휘하는 난무자(欒武子)는 싸우려 하였으나, 하군을 지휘하는 범문자(范文子)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 오직 덕이 두터운 자만이 많은 복을 받을 수 있고, 덕이 없으면서 많은 이를 복종시키려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해를 입는다고 했소. 진(晉)나라의 덕을 헤아려보건대, 제후들이 모두 등을 돌린다면 나라가 조금이라도 안정될 수 있소. 그런 제후들이 존재하기에 분분하게 시끄러운 것이니, 무릇 제후는 외란의 근원이 되는 법이오. 게다가 오직 성인만이 외부의 걱정도 없고 내부의 근심도 없을 수 있소. 

성인이 아닌 이상 외부의 걱정이 없으면 반드시 내부의 근심이 생기기 마련이오. 그러니 어찌 잠시 초나라와 정나라를 놓아두어 외부의 경계대상으로 삼지 않으시겠소! 그렇게 해야 여러 신하들이 내부적으로 서로 화합하고 반드시 화목하게 될 것이오.

지금 우리가 싸워서 초나라와 정나라를 또 이긴다면, 우리 군주는 자신의 지혜와 힘을 자랑하면서, 가르침을 게을리하며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며, 자신의 측근 세력을 키우고 후궁들의 토지를 늘릴 것이오. 여러 대부들의 토지를 빼앗지 않고서야 어디에서 가져다가 그들에게 보태 주겠소? 여러 신하들 중에 직위를 내놓고 물러나야 하는 자가 몇 명이나 되겠소?

만일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진나라의 복이 될 것이오. 만일 전쟁에서 이긴다면, 그것은 땅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니, 그 결과는 장래 나라에 큰 해로움을 끼키게 될 것이오. 어찌 잠시 싸움을 멈추는 것이 좋지 않겠소!'"

鄢之役,晉伐鄭,荊救之。欒武子將上軍,范文子將下軍。欒武子欲戰,范文子不欲,曰:「吾聞之,唯厚德者能受多福,無德而服者眾,必自傷也。稱晉之德,諸侯皆叛,國可以少安。唯有諸侯,故擾擾焉,凡諸侯,難之本也。且唯聖人能無外患又無內憂,諸臣之內相與,必將輯睦。今我戰又勝荊與鄭,吾君將伐智而多力,怠教而重斂,大其私暱而益婦人田,不奪諸大夫田,則焉取以益此?諸臣之委室而徒退者,將與幾人?戰若不勝,則晉國之福也;戰若勝,亂地之秩者也,其產將害大,盍姑無戰乎!」 _ 《국어(國語)》'진어(晉語)'편 

 ** (자료3)

<생어우환(生於憂患) 사어안락(死於安樂)> 

근심과 우환 속에 생존이 있고,
안일함과 즐거움 속에 죽음이 있다.
_ 맹자(孟子) 고자하(告子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