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경이 너를 편하게 하고 함정이 너를 구한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로서, 세종에서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6대에 걸쳐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어머니가 세종의 비 소헌왕후의 동생이었으니 세종이 그의 이모부였고, 그의 형도 뛰어난 화가인 강희안(姜希顔)이다.
그 대단한 문장가가 '도자설(盜子說)' 즉 ‘아비 도둑과 아들 도둑 이야기’라는 재미있는 우화를 남겼다. 이 이야기는 그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은 '훈자오설(訓子五說)'에 실려 있다. 아비 도둑이 아들에게 도둑질 기술을 모두 전수한 후, 마지막에는 일부러 곤경과 함정에 빠뜨려 진정한 지혜를 스스로 체득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아비 도둑은 자신의 모든 기술을 아들에게 가르쳤다. 아들이 아비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게 되어 자만하게 되자, 아비 도둑이 훈계하였다. “지혜란, 배움으로만 성취하기에는 모자람이 있으니,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데에서 넉넉함이 있는 법이다. 너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아들이 반박한다. 이에 아비 도둑은 말을 더한다. "한 가지만 차질이 생겨도 재앙이 되는 법이니, 모습이나 흔적이 드러나지 않고 임기응변의 요령에 막힘이 없으려면, 스스로 깨달은 바가 없어서는 안 된다. 너는 아직 멀었다.”고 하며, '스스로의 깨달음(自得)'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아비는 어느 날 밤 아들을 데리고 부잣집으로 도둑질을 하러 간다. 아들이 창고에 들어가 보물을 탐하며 챙기고 있을 때, 아비는 밖에서 문을 닫고 잠가버린다. 그러고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집주인이 나오게 만든 다음 자신은 달아난다. 집주인이 아비를 쫓다가 돌아와 창고 문이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창고에 갇힌 아들은 나올 수가 없어 곤혹스러워하다가, 고심 끝에 손톱으로 문을 긁으며 쥐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집주인이 쥐를 쫓아내려고 문을 열 때 그 틈을 타서 도망을 친다. 사람들에게 쫓기던 아들은 연못에 돌을 던져 자신이 연못에 뛰어든 것처럼 속이고, 그 틈에 무사히 달아나 집으로 돌아온다. 겨우 집에 돌아온 아들은 아비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이에 아비가 이렇게 말한다.
“이제야 너는 천하를 홀로 다닐 수 있는 진정한 도둑이 되었다. 무릇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 배운 건 한계가 있는 법이니, 제 마음으로 깨우쳐야만 무궁한 변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하물며 곤궁하고 꽉 막힌 상황이라면, 능히 사람의 심지를 굳건하게 해주고, 사람의 인성을 성숙하게 하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기가 막힌 말을 한다. "내가 너를 곤경에 처하게 한 것이야말로 곧 너를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내가 너를 함정에 빠뜨린 것이야말로 바로 너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궤변과 같은 대단히 역설적인 말이다. 그 근거를 설명하며 말을 맺는다. "네가 창고에 갇히고 추격을 당하며 환란을 겪지 않았다면, 어찌 쥐 긁는 소리 내고 연못에 돌을 던지는 그런 기발한 생각을 해낼 수 있었겠느냐? 네가 곤경에 빠졌기에 지혜를 이끌어내고 임기응변을 구사하는 기이한 생각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밑바닥까지 한번 열리고 나면, 다시는 미혹에 빠지지 않는 법이다. 이제 너는 마땅히 천하를 독보할 것이니라.”
이야기를 끝내면서 강희맹은 자기 아들에게 이르는 말로 마무리한다. "너 또한 이와 같으니, 갇히고 쫓기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으로부터의 깨달음을 스스로 얻도록 하여라.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엄청난 교육관이 아닐 수 없다. 강희맹의 가문은 왕실과 인연을 맺으며 대대로 벼슬을 누린 명문 세가였다. 그런 강희맹이 집안의 권세에 안주하지 않고, 우화에서와 같은 실천적 지혜와 자발적 성찰을 중시하는 교육을 아들에게 물려주려 애쓰고 있다. 그 가문이 수대에 걸쳐 영광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필시 그런 지혜와 교육관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강희맹의 우화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있다. 하나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배움이란 건 남의 가르침을 뒤따르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면 그 깨달음이 자신을 이끈다. 곧 타인이 아닌 자신의 깨달음을 따르는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남의 길을 배우는 데에서 출발하지만,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길에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하나의 가르침은 그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그것은 극도의 절박한 상황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다. "곤경이 너를 편하게 하고, 함정이 너를 구한다." 이 얼마나 뼛속까지 울리는 송곳 같은 가르침인가. 곤경과 함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이 결국 궁핍한 상황에서 자신의 마음을 안락하게 해주고 위험이 닥쳤을 때 자신을 구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스스로 얻은 깨달음'은 바로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에 해당한다. 암묵지란, 말이나 글로 아무리 설명해도 전해질 수 없는 지식이다. 오직 몸으로 부딪쳐 보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며 얻는 체험을 통해서만 내면화되는 지혜다. 자전거를 배울 때 수십 번 넘어져야 균형을 익히듯이, 혹은 오래된 장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처럼, 필요한 순간에 본능처럼 튀어나오는 임기응변 역시 암묵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암묵지에 상대되는 개념은 ‘형식지’ 혹은 '명시지'(Explicit Knowledge)로서, 이들은 설명이나 교육만으로도 습득이나 전달이 가능한 지식이다. 그저 책이나 교육을 통해 배운 명시지만으로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결코 되지 못한다.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위기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실천적 지혜 즉 암묵지가 충분히 체화되어야만 진정한 전문가라 칭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침을 정리해보자. 배움은 남을 따르는 일이고, 깨달음은 스스로 길을 여는 일이다. 그 깨달음은 안락한 곳에는 오지 않는다. 막다른 길, 피할 수 없는 난관에서 비로소 깨어난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곤궁은 안락의 문이 되고 난관은 구원의 길이 된다. 시련은 고통의 모습으로 위장한 축복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도 정직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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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 도둑과 아들 도둑 이야기 _ 강희맹의 도자설(盜子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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