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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193 <아버지와 똥장군>

by 변리사 허성원 2025. 4. 27.

아버지와 똥장군

 

평소 가까이 지내는 후배가 사업에서 좌절을 겪었다. 생활을 위해 자신은 임시적인 일자리를 구하고 가족들은 어렵사리 고향 시골동네에 치킨집을 열었다. 아내와 딸이 주방과 홀을 맡고 군대를 갓 제대한 아들이 배달을 맡아, 인건비와 배달업체 비용을 줄였다. 시골이라 많이 팔리지는 않지만, 인건비가 나가지 않으니 그런대로 살림에 보탬이 된다고 한다.

그 후배를 불러 식사를 하며 소주를 기울였다. 어려움이야 많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고생하든 것을 보는 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한다. 어느 비오는 밤에 아들이 배달을 나가는데, 우의를 덮어쓰고 불안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이 찢어질 듯 비통한 심정이었다는 것이다. 그게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눈물마저 보인다. 이럴 때 참 뭐라 해줄 말이 없다. 그저 말없이 함께 잔을 기울였다.

잠시 그러다 내가 말을 했다. "이보게, 혹 자네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나? 그 나이의 보통 애들이라면 어림없는 일일 텐데. 그런 힘든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하지. 억지로 시켜도 달아날 텐데, 그렇게 당당하게 제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보통 기특한 녀석이 아니야.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 아닌가?" 후배는 내 말에 동의하면서 그런 아들이 너무도 고맙다고 한다. "그럼 우리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들어봐 주시게."

옛날 시골 화장실은 통시라고 불렀지. 자네도 농가에서 태어났으니 잘 알겠지만, 한동안 통시에 모인 것은 곰삭게 되고, 그 양이 어느 정도 차면 푸어서 논밭에 뿌려 거름으로 썼었지. 통시에서 푼 거름을 어떻게 옮기는지는 잘 알지? 바로 똥장군이라는 걸 이용한다네. 똥장군은 와인 발효용 오크통과 구조나 형상이 똑 같아. 나무판재를 통형상으로 둘러가며 치밀하게 짜맞춰 만드는데, 가운데가 배가 부르도록 하여 양단을 마감판은 마감을 하지. 틈새에는 아교로 메우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오래 쓰다 보면 조금씩 새어나오기도 하고 그러지.

그런데 그 똥장군 나르는 일을 아버지는 유독 내게 시키셨다네. 대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부터는 그 일이 거의 예외 없이 내 몫이었던 같아. 당시 이동 수단은 주로 짐자전거였어. 그 내용물이 액체가 아닌가. 무게도 상당하지. 대충 족히 40~50kg는 나갔을 거야. 그러니 그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웠겠는가?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건 대참사야. 마치 새 신부가 시댁의 신주를 모시듯 조심조심해야 하지. 워낙 조심해서 다녀서인지, 음식을 싣고 다니다 엎어본 적은 있어도 똥장군을 엎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네.

그걸 싣고 다닐 때의 냄새나 위태로움도 상당한 고역이었지만, 정작 곤란한 점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었어. 집에서 나와 논에까지 가려면 동네를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따라 가야 하는데, 그 과정이 동네 사람들에게는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애들이 궂은일을 혐오하는 건 마찬가지니, 그 중에는 나를 놀리는 동네 친구도 있을 테고,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동네 여자 애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

사실 그때 나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대학생이었지. 그 희귀한 대학생이 똥장군을 자전거에 싣고 다녔으니, 특히 말 많은 동네 아지매들은 그런 나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해댔지. "외동 양반, 참말로 얄궂고 별나시재. 우째 저 귀한 아들을 세상에 저런 일을 다 시키실까? 일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학교 가면 똥냄새 난다고 쫓겨나는 거 아이가?", "나중에 판검사 되믄 똥장군 판검사라 놀림 당할낀데..", "장가 갈 때 똥장군 신랑 소리 나오면 우짜노.." 등등..

아버지는 그 곤란하고 향기롭지 못한 일을 왜 굳이 내게 맡기셨을까? 물론 농가에서는 언제나 일손이 부족하니 바쁠 때는 고양이 손도 빌리고 강아지 주둥이도 빌려야 하잖아. 누구든지 걸리는 대로 일을 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게 농가 가장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이긴 하지. 나는 특히 장남이었으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똥장군일까. 집에는 평소 일 도와주는 일꾼들이 몇 있었는데도 말이야. 물론 아버지는 그따위 시시콜콜한 일을 내게 친절히 설명해주시거나 이해를 구하실 분이 아니셨어. 아마 물어봤더라도 응당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야. "어른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 시킬 만하니까 시키는 거지."

여하튼 지나고 보니 '똥장군'의 경험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삶의 태도를 정하는 데에 중요한 몇 가지 가르침을 준 것 같아. 그게 아버지가 의도하신 깊은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선 첫째는 필시 내 교만을 경계하시고 싶었던 것 같네. 내가 대학 배지를 달고 옆구리에 책을 끼고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다니는 모습이 아버지 눈에도 뻔히 보였었겠지. 아버지는 평소 내게 수도 없이 하신 말씀이 있어. '웃자란 풀이 잘려나간다', '범을 청하지 말고 숲을 지어라' 등등. 자칫 머리꼭지로 올라갈 수도 있는 나의 교만을 어떻게든 미리 다잡아 놓고 싶으셨을 거야. 응당 그러실 분이었어. 그 덕분에 내 똥장군 이야기는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우리 동네의 거의 전설에 가까운 모범적인 미담이 되었지.

둘째는 아마도 솔선수범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 같아. 아버지는 항상 정말 힘들거나 더럽거나 위험한 일은 일꾼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하셨어. 지금 말로 하면 일하는 사람들의 근로 환경을 제대로 보장해주고 싶으셨던 셈이지. 나도 그런 교육 덕분인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보면 남들보다 먼저 팔 걷어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무엇보다 일꾼들의 체면이나 입장을 생각하셨던 걸 거야. 비록 품삯을 받기 위해 우리 집 일을 도우러 온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역시 동네 사람이고 그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을 터이니, 그들이 그걸 나르고 다니는 것 보면 그들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남들이 우리 일로 인해 체면을 상하는 것보다 당신의 아들이 동네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게 당연히 더 낫다고 여기셨겠지.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 더럽고 불편한 일일수록 더 귀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네. 아마 아버지가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으셨겠지만, 이 가르침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시로 고마움 깨닫곤 한다네.

살면서 온갖 곤란한 일들을 만나게 되잖아? 실제로 더러운 일도 있지만, 똥장군과 같은 사람이나 똥장군과 같은 일거리가 있기 마련이지. 살다 보면 긴급을 요하거나 밤새 처리해야 하거나 까다로운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등의 고통스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싫고 힘든 일일수록 혼신의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 잘 알지? 그러지 않으면 더 큰 후회거리를 남기게 되는 법이지. 불편한 일일수록 더욱 충심으로 대하는 업무 자세는 그때 몸에 밴 것 같네.

어떤가? ‘똥장군의 가르침 말일세. 그럴 듯한가? 사실 내가 그럴 듯하게 말하긴 했지만, 별 거 아닐세. 근 반세기 전의 경험을 이제 와서 나름대로 좋아보이게 잘 해석하거나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네. 같은 일을 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가르침을 얻기야 하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궂은일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네. 나도 당시에는 그 일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겠지. 아버지에게 불평도 하고 대들기도 했었다네. 하지만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임을 수긍하고, 수긍했으면 군말 없이 책임껏 수행해야지. 그게 본분을 지키는 것 아니겠나. 지나고 보니 이게 정말 중요한 가르침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 리더가 갖춰야 할 덕목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니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고 그걸 사명으로 삼아서 어떤 유혹이나 비판 혹은 조롱을 받더라도 꿋꿋이 해나가는 그 자세 말일세.

자네 아들을 보게. 딱 그런 리더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그 일을 시작하면서 어린 나이에 내심으로 번민과 심적 저항이 어찌 없었겠나. 그런데 그걸 훌륭히 자제하고, 제 '할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모습인가. 이 사람아! 자네는 정말 멋진 아들을 두었네. 굳이 이 경험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 태도만 보아도 필시 큰일을 이룰 멋진 리더로 성장할 재목이 틀림없네. 그런 자네 아들과 그런 아들을 가진 자네의 행운을 축복하네. 자 한잔 드세.

 

 

챗GPT와 SORA를 이용해 그린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