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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허성원 변리사 칼럼]#185 안중근 의사를 숭모하는 일본인들

by 변리사 허성원 2024. 12. 28.

안중근 의사를 숭모하는 일본인들

 

지난 연말(24.12.27)에  안중근 의사 숭모회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 숭모회는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난 해 10월26일이 안중근 의사(1879.9.2. ~ 1910.3.26.)의 의거 115주년이고, 올해 3월26일이면 순국 115년이 된다. 이 번 행사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여러 강연과 송년콘서트가 함께 진행되었다. 총 3시간이 훌쩍 넘는 긴 행사였지만 배움과 감동이 충만한 근래 겪기 힘든 멋진 시간이었다. 끝나고 나와서 즐거운 뒤풀이 자리까지 가졌다.

강연에 나온 강사 3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흠모하는 일본인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조직적이고도 넓고 깊게 일본에 확산되어 있는 줄은 처음 알게 되었다. 강연을 들으면서 먼저 그들의 진지한 활동에 놀랐고, 안중근 의사에 대한 애정과 그들이 지금까지 이룬 실적에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조차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일을 평생을 바쳐 열정적으로 수행하는 그들에게 마음속으로부터 존경심이 우러났다. 그들은 다양한 기념행사, 연구 활동, 유물 반환 등의 일을 오랫동안 꾸준히 해오고 있다.

처음 강사로 나선 이는 일본 류코쿠대학 명예교수인 동시에 정토진종 스님인 히라타 아츠시(平田厚志)였다. 이 분은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정토진종 교화승(敎誨師)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형무소마다 교화승이 배치되어 죄수들이 죄를 뉘우치고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인도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도인 안 의사가 그들에게 감화되었을 리는 없지만, 그 두 사람이 안 의사의 유묵을 여러 개 받았던 것을 보면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적국의 승려들까지 포용한 안 의사의 사상과 인품이 어떠했던지 가늠하게 된다.

그 두 사람이 안 의사에게서 받은 다섯 유묵 작품은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부도)", "不仁者不可以久處約(불인자불가이구처약)", "敏而好學不恥下問(민이호학불치하문)", "靑天一張紙 寫我腹中詩(청천일장지 사아복중시)",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치오의오식자 부족여의)"이다.

특히 이번에 알게 된 놀랍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의 고치현(高知県) 사람들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관심이 특히 높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이나 대학에서도 안중근을 숭모하는 연구회 등이 많이 있지만, 고치현은 매우 유별나다. 고치현은 도쿄에서 서남쪽으로 700km 정도 떨어진 인구 65만 명의 농촌에 불과한데, 당시 안중근 의사의 재판에 관여한 사람들 중에는 고치현 사람들이 유독 많았다. 이 날 강사로 온 세 사람 모두 고치현 사람들이었다.(*류코쿠 대 히라타 아츠시씨는 이토 히로부부미와 동향인 야마구치현 출신이라고 숭모회의 사무처장께서 바로 잡아주셨다.)

여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우지토(平石氏人) 검사, 미조부치 타카오(水淵孝雄) 검사,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郎) 검사, 국선 변호인 미즈노 키치타로(水野吉太郎), 카마타 마사하루(鎌田正治), 관동도독부 경찰부 야기 마사노리(八木正禮), 여순 형무소 간수 카기야마 마사유키(鍵山真之), 도요신문(土陽新聞) 특파원 고마츠 모토코(小松元吾)까지 총 8명이 안 의사의 재판에 관계한 고치현 사람들이다. 그리고 재판 관계자는 아니지만 '동양평화론' 등의 필사본을 남긴 시치조 키요미(七條淸美)라는 중요한 인물도 있다. 이들의 후손은 거의 모두 안중근 의사의 유묵 등을 소중히 보존하고 있었다.

고치현의 역사학자로서 이 날 강연을 한 강사 중 한 사람인 구몽 코(公文豪)씨는 1985년에 우연히 고마쓰 모토코의 아들이 소장하고 있던 안 의사의 유묵 '志士仁人殺身成仁(지자인인 살신성인)'과 법정 스케치북, 재판 방청권 등을 접하고, 그 처리 과정에 참여하였다가 안중근 의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38년간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안 의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수집하고 유물을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다. 고마쓰 모토코가 가졌던 유물들과, 야기 마사노리 경찰관이 소유했던 "言忠信行 篤敬 蠻邦可行(언충신행 독경 만방가행)", 야스오카 세이시로 검사가 가졌던 4점의 유묵 중 3점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때 소실되고 남아 있는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등을 유족들로부터 찾아내어 숭모회에 기증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강사 중 나머지 한 사람인 니시모리 시오죠(西森潮三)는 고치현의 지방의회 의원인데, 내년 한일협정 60주년을 맞아 고치현에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만만치 않은 일일 텐데 원만하게 잘 진행되기를 빌며 관심있게 지켜볼 일이다. 그는 강연 중에 사카모토 료마(坂本 龍馬, 1836.1.3. ~ 1867.12.10.)를 언급하면서, 료마와 안중근 의사는 모두 세상을 바꾸고자 한 혁명가라는 점에서 닮았다고 하였다.

그제서야 퍼뜩 머리를 때리는 깨우침이 왔다. 작은 시골 동네인 고치현에서 어찌하여 그토록 안중근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은지가 선명히 이해되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바로 지금 고치현의 옛 이름인 도사번(土佐藩)의 하급 무사 출신이었다. 막부 말기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일본의 변혁을 주도한 풍운아로서, 짧은 기간 동안 치열하게 활약하여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근대 국가로 재탄생하는 길을 연 국민 영웅이다. 하지만 료마는 자신의 뜻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을 다 보지 못하고 31살의 나이에 암살에 의해 뜻이 꺾이고 만다.

안중근 의사도 그와 같은 나이에 그 꽃다운 청춘이 이슬처럼 스러졌다. 안 의사가 목숨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것은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였다. 그리고 그 고매한 인품과 의기는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깊은 인상의 남겼다. 그의 재판에 관계한 고치현 출신의 여러 사람들과 그 후예들은 안중근 의사에게서 그들의 국민 영웅이자 고치현의 명예인 료마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그렇기에 같은 나이에 아깝게 꺾여버린 두 영웅을 함께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기(義氣)를 다시 느껴보자. 한국통사()에 기록된 그의 마지막은 이렇다. "안중근은 경술년 양력 3월 26일 오전 10시에 형장에 서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하였다. 마침내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용히 형장으로 나아가니, 나이 32세였다." 그리고 한 유묵에서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썼다.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은 구름 같도다(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사카이 요시아키(境喜明)라는 경시(警視)에게 준 것으로 추정되는 유묵으로서,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순국 직전의 사진

 

고치현, 일본 시코쿠 지방에서 가장 작은 현. 인구 65만.
사카모토 료마( 坂本 龍馬 )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생존한 학자 박은식이 우리나라 근대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여 1915년에 간행한 학술서. 역사서. 이때 이미 '한국'이라는 말이 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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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유묵들>

"총 200점 이상으로 추정되며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은 57점을 인정하고 있다. 안중근은 정황상 이들 전부를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의 부탁을 받고 써 주었으며 현재 국내외 박물관, 기관, 단체, 개인 등이 소장하고 있다. 이중 대한민국 정부 기관이나 한국의 단체 혹은 한국인에게 기증·인도(引渡)된 26점이 1972년부터 2007년까지 순차로 보물 569-1~26호 '안중근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이 중 569-4호는 본래 청와대에서 보관했으나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 이후 2022년 추가로 5점이 지정되어 총 31점으로 늘었다.

보물로 지정된 것 외에 안중근의 통역관 소노키 스에요시(園木末喜)가 받은 1점(日韓交宜善作紹介: 일한교의선작소개[4])은 한국인 학자가 세운 도쿄의 국제한국연구원에 기증되었는데 관리를 잘못하여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에는 옛 주지 쓰다 가이준(津田海純)이 뤼순 파견 시절 안중근으로부터 받은 것을 사찰 측이 1997년 류코쿠대학에 위탁한 유묵 중 세 점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7]되었다. 또한 2004년 박삼중 스님이 뤼순 감옥 소장의 손자로부터 국내로 들여온 1점(敬天: 경천)은 2009년 TV쇼 진품명품에 소개되어 “값을 매길 수 없다”라는 이례적인 찬사를 받은 뒤 이후 2014년 잠원동 성당이 5억 9천만원에 매입,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기증하여 현재 서소문 순교성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안중근은 휘호마다 '大韓國人 安重根(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당당한 서명[10]과 함께 무명지 한 마디가 잘린 왼손바닥에 먹물을 묻혀 찍어 낙관을 대신하였다. 내용은 주로 논어, 사기 등의 교훈적인 구절이나 본인의 심경, 사상 등을 담고 있으며 독립(獨立)처럼 일본 측이 민감했을 법한 담대한 글귀도 서슴지 않았다. 만 서른의 젊은 나이임에도 힘과 기개가 느껴지는 엄청난 명필인데다 제작 배경과 내용을 통해 그의 식견, 심중과 철학, 나아가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근현대 명사들의 휘호 중 최고의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나아가 붓글씨를 부탁할 정도로 당시 안중근을 마주한 일본인들이 그의 사상과 인품에 감화되어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비범한 인물로 보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출처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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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대림사(大林寺, 다이린지)의 '안중근 의사 현창비(顯彰碑)' 내용 중>

"우직하고 정의감에 넘치는 동북의 사나이였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씨의 눈에 비친 옥중 안중근 의사의 언행은 말 그대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고 민족의 독립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친 청렴한 인격의 선비였다. 때때로 언급하는 평화에 대한 고매한 이념에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안 의사를 칭송하는 것을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당시의 정세에도 치바 씨는 안 의사에 대한 동정을 금할 수가 없어서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을 품게 돼 안 의사를 위해 모든 정성을 다하게 됐으며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됨을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안 의사 또한 당시의 일본인으로서 매우 특별한 치바 씨의 인간미 넘치는 대우에 답해 3월 26일 사형대로 가기 직전에 군인다운 치바 씨에 적절한 문구를 붓으로 적어 선물했다. 즉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치바 씨는 귀향 후 안 의사의 초상과 유묵을 불단에 모시고 매일같이 고인의 명복을 빌었고, 그의 부인도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안 의사와 치바 씨의 명복을 기도하다 세상을 떴다. 그의 후손 역시 수많은 곤란을 무릅쓰고 치바 씨의 뜻을 받들어 안 의사의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을 70년간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
(생략) 치바 도시치의 유족은 (생략) 고국의 안중근 의사 숭모관에 이 유묵을 바쳤다."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대림사(大林寺, 다이린지) '안중근 의사 현창비(顯彰碑)' 안중근 의사의 유묵비 「爲國獻身軍人本分」와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찰. 안중근 의사가 여순 감옥에 수감 중, 일본군 헌병 간수이었던 치바 도시치(千葉十七)는 처음에는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 분노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으나, 점차 안중근 의사가 동양 평화를 갈구하는 굳은 의지와 높은 인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우정을 나누게 됨. 안중근 의사는 사형되기 직전, 치바 도시치에게 「爲國獻身軍人本分」의 필묵을 선물로 전달안중근 의사와 치바 도시치 간의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1981년 사찰경내에 현창비(顯彰碑)를 건립. 당시 미야기현 지사였던 야마모토 소이치로씨는 "안중근 의사의 기일을 맞아 한일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기념하며"라는 글을 비석 배면(背面)에 새겨 한일우호를 강조동 사찰의 사이토 다이켄(齊藤泰彦) 주지는 30년 이상 매일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공양을 드리고 있으며, 매년 9월 첫 일요일에 한국의 안중근의사숭모회와 함께 위령법요식 및 친선교류회를 개최해 오고 있음.
안중근 서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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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회 행사에 초대하고 함께 참석하였던 김재석 관세사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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