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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_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by 변리사 허성원 2024. 12. 1.

<구천과 오월쟁패>

월왕() 구천()은 그 선조가 우()나라의 후예로서 하후() 제소강()의 서자였다. 회계()에 봉해져 우나라의 제사를 받들었다. 문신을 하고 머리카락을 잘랐으며, 풀을 뽑고 나무를 베는 등 황무지를 개척하여 읍을 만들었다. 그 후 20여 세()가 지나 윤상()에 이르렀다. 윤상 때 오왕() 합려()와 싸워 서로 원한을 품고 정벌하게 되었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월왕이다.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에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정벌했다. 월왕 구천은 결사대로 맞서 싸웠는데, 세 줄을 지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고함을 지르며 목을 그어 죽었다. 오나라의 군대가 이를 구경하는 사이 월나라가 오나라의 군대를 습격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취리()에서 패배시키는 한편 오왕 합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합려가 죽음을 앞두고 그 아들 부차()에게 “월나라를 절대 잊지 말아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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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 3년에 구천은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나라가 나서기 전에 월나라가 먼저 오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범려()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군대는 흉기이며,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싸움은 모든 일의 맨 마지막입니다. 음모로 덕을 거스르고, 흉기를 즐겨 사용하여 자신의 몸을 보잘 것 없는 곳에다 시험하려는 것은 상제께서 금할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충고했다. 월왕은 “내가 이미 결심했다.”고 하면서 드디어 군대를 일으켰다. 오왕이 이를 듣고는 정예병을 모두 징발하여 월나라를 공격하여 부추()에서 패배시켰다. 월왕은 남은 병사 5천을 수습하여 회계산()을 거점으로 수비에 들어갔고, 오왕은 추격하여 이곳을 에워쌌다.

三年, 句践聞呉王夫差日夜勒兵, 且以報越, 越欲先呉未発往伐之. 范蠡諫曰:「不可. 臣聞兵者凶器也, 戦者逆徳也, 争者事之末也. 陰謀逆徳, 好用凶器, 試身於所末, 上帝禁之, 行者不利.」越王曰:「吾已決之矣.」遂興師. 呉王聞之, 悉発精兵撃越, 敗之夫椒.4) 越王乃以余兵五千人保棲於会稽.5) 呉王追而囲之.

월왕은 범려에게 “그대 말을 듣지 않은 까닭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범려는 “가득 찬 것이 지속되려면 하늘이 도와야 하고, 기운 것을 바로 세우려면 사람이 도와야 하며, 절제할 수 있으려면 땅이 도와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는 말과 넉넉한 예물을 그 쪽에 보내십시오. 허락하지 않으면 몸이라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구천이 “좋소.”라 하고는 바로 대부 문종()에게 오나라로 가서 일을 성사시키게 했다. (문종이) 무릎으로 기어 머리를 조아리며 “군왕의 망한 신하 구천이 심부름꾼 신 문종을 보내 여러분들께 ‘구천은 신하가 되고, 처는 첩이 되길 청합니다’라고 감히 아뢰라고 했습니다.”라 했다. 오왕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오자서()가 오왕에게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주시려는데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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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이 돌아와 구천에게 보고하자 구천은 처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워, 죽음으로 맞서 싸우려 했다. 문종이 구천을 말리며 “보아 하니 오나라의 태재() 백비()가 탐욕스러워 이익으로 그를 유혹할 수 있으니, 몰래 가서 이를 알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문종을 시켜 미녀와 보물을 몰래 오나라 태재 백비에게 바쳤다. 백비가 이를 받고는 바로 대부 문종을 오왕에게 보였다. 문종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왕께 원하옵건대 구천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보물을 다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면, 구천은 그의 처자식을 다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다음 5천 명을 모두 거두어 죽기로 싸울 것이니 (대왕께서도) 분명 상당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백비가 오왕에게 “월나라가 항복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용서하시면 나라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오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오자서가 나서며 “지금 월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훗날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구천은 현명한 국군이고 문종과 범려는 좋은 신하들입니다. 저들 나라로 돌려보내면 장차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오왕은 듣지 않고 끝내 월나라를 용서하고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구천이 회계산에서 포위당했을 때 “내가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라며 탄식했다. 문종이 “탕()임금은 하대()에, 문왕()은 유리()에 갇혔었습니다. 중이()는 적()나라로, 소백()은 거()나라로 달아났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상황이) 복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種還, 以報句践. 句践欲殺妻子, 燔宝器, 触戦以死. 種止句践曰:「夫呉太宰嚭貪, 可誘以利, 請閒行12)言之.」於是句践以美女宝器令種閒献呉太宰嚭.13) 嚭受, 乃見大夫種於呉王. 種頓首言曰:「願大王赦句践之罪, 尽入其宝器. 不幸不赦, 句践将尽殺其妻子, 燔其宝器, 悉五千人触戦, 必有當也.」14)嚭因説呉王曰:「越以服為臣, 若将赦之, 此国之利也.」呉王将許之. 子胥進諫曰:「今不滅越, 後必悔之. 句践賢君, 種、蠡良臣, 若反国, 将為亂.」呉王弗聴, 卒赦越, 罷兵而帰.
句践之困会稽也, 喟然嘆曰:「吾終於此乎?」種曰:「湯繋夏台, 文王囚羑里, 晉重耳奔翟, 斉小白奔莒, 其卒王霸. 由是観之, 何遽不為福乎?」

오나라가 월나라를 용서하자, 월왕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는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는데, 자리에 곰쓸개를 두고서 앉으나 누우나 쓸개를 올려다보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쓸개를 맛보았다. 그러면서 “네가 회계의 치욕을 잊었는가?”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몸소 농사를 짓고 부인은 옷감을 짰다. 음식에 고기를 더하지 않았고, 옷은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체면을 내려놓고 유능한 인재를 우대하고, 빈객을 후하게 접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조문하면서 백성들과 수고를 함께 했다.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범려는 “군대 일이라면 문종이 범려만 못합니다만 나라를 단단히 어루만지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이라면 범려가 문종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국정을 대부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를 보내 담판을 짓고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했다. 2년 뒤 오나라는 범려를 돌려보냈다.

구천이 회계에서 돌아온 지 7년(기원전 487년)만에 군대와 백성을 잘 다독거려서 오나라에 보복하는 데 쓰려고 했다. 대부 봉동()이 “나라가 얼마 전에 망했다가 이제 조금 넉넉해지려고 합니다. 군비를 정비하고 무기를 가다듬으면 오나라가 두려워 할 것이 뻔하고, 두려워하면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입니다. 무릇 매나 수리가 공격을 하려 할 때는 그 모습을 숨기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 진()나라에 병력을 더 보내고 있고, 초나라와 월나라는 한이 깊습니다. 명성이 천하에 높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왕실에 해가 되고 있습니다. 덕은 적고 공은 많으니 분명 자기 멋대로 교만하게 굴 것입니다. 월나라를 위한 계책으로 말하자면 제나라와 결탁하고, 초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진()나라에 의지하고, 오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나라의 야심이 커지면 싸움을 우습게 볼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주도권을 쥐고, 세 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정벌하고, 우리 월나라는 오나라의 지친 틈을 이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직간했다. 구천이 “좋소!”라고 했다.

呉既赦越, 越王句践反国, 乃苦身焦思, 置胆於坐, 坐臥即仰胆, 飲食亦嘗胆也. 曰:「女忘会稽之恥邪?」身自耕作, 夫人自織, 食不加肉, 衣不重采, 折節下賢人, 厚遇賓客, 振貧弔死,15) 與百姓同其勞. 欲使范蠡治国政, 蠡対曰:「兵甲之事, 種不如蠡;填16)撫国家, 親附百姓, 蠡不如種.」於是挙国政属大夫種, 而使范蠡與大夫柘稽17)行成, 為質於呉. 二歳而呉帰蠡.

句践自会稽帰七年, 拊循其士民, 欲用以報呉. 大夫逢同18)諫曰:「国新流亡, 今乃复殷給, 繕飾備利, 呉必懼, 懼則難必至. 且鷙鳥之撃也, 必匿其形. 今夫呉兵加斉、晉, 怨深於楚、越, 名高天下, 実害周室, 徳少而功多, 必淫自矜. 為越計, 莫若結斉, 親楚, 附晉, 以厚呉. 呉之志広, 必軽戦. 是我連其権, 三国伐之, 越承其弊, 可克也.」句践曰:「善.」

2년이 지나자, 오왕이 제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오자서가 “안 됩니다. 신이 듣기에 구천은 두 가지 이상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고,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 한답니다. 이 자가 죽지 않으면 틀림없이 우리나라의 근심이 됩니다. 오나라에게 월나라는 뱃속의 질병이지만 제나라는 오나라에게 부스럼 정도입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제나라는 놔두시고 월나라를 우선시하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오왕이 듣지 않고 기어코 제나라를 정벌하여 애릉()에서 (제나라를) 패배시키고 고장()과 국하()를 포로로 잡아 돌아와서는 오자서를 나무랐다. 오자서가 “왕께서는 기뻐할 것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이 노했다. 오자서가 자살하려고 하자 왕이 이를 알고는 말렸다.

한편 월나라의 대부 문종은 “신이 보아하니 오왕의 정치가 교만합니다. 시험삼아 양식을 빌려 달라고 하고, 그 일이 어찌 되는 지 예측해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식량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오왕은 주려고 하는데, 오자서가 주지 말라고 했다. 오왕이 끝내 빌려주었고, 월나라는 은근히 기뻐했다. 오자서는 “왕이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3년 뒤면 오나라의 땅이 폐허가 되겠구나!”라고 했다.

태재 백비가 이를 듣고는 오자서와 월나라에 대해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면서 오자서를 두고 “오원(오자서)이 보기는 충성스럽지만 실은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 아버지와 형님도 돌보지 않았는데 어찌 왕을 돌보겠습니까? 왕께서 전에 제나라를 치려고 하셨을 때 오원이 강력하게 말렸지요. 공을 세웠는데도 이 때문에 오히려 왕을 원망했습니다. 왕께서 오원에 대해 대비하지 않으면, 오원은 반드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모함했다. 그리고는 봉동과 함께 모의하여 왕에게 오자서를 모함했다. 처음에 오왕은 이 말에 동조하지 않고,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가 제나라에 가서 그 아들을 포목()에게 맡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왕이 “오원이 정말 과인을 속였구나!”라며 크게 노했다.

(제나라 정벌에서) 돌아와서는 사람을 시켜 오자서에게 촉루검()을 주면서 자살하게 했다. 오자서가 크게 웃으며 “내가 네 아비를 패주로 만들었고, 내가 또 너를 세웠다. 네가 처음에 오나라를 반으로 나누어 내게 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네가 오히려 모함의 말을 듣고 나를 죽이는구나. 오호라, 오호라! 혼자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라 하고는 사신에게 “반드시 내 눈알을 파내 오나라 동문에 걸어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게 하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 그리하여 오왕은 백비에게 정권을 맡겼다.

居二年, 呉王将伐斉. 子胥諫曰:「未可. 臣聞句践食不重味, 與百姓同苦樂. 此人不死, 必為国患. 呉有越, 腹心之疾, 斉與呉, 疥■19)也. 願王釈斉先越.」呉王弗聴, 遂伐斉, 敗之艾陵,20) 虜斉高、国21)以帰. 譲子胥. 子胥曰:「王毋喜!」王怒, 子胥欲自殺, 王聞而止之. 越大夫種曰:「臣観呉王政驕矣, 請試嘗之貸粟, 以卜其事.」請貸, 呉王欲與, 子胥諫勿與, 王遂與之, 越乃私喜. 子胥言曰:「王不聴諫, 後三年呉其墟乎!」太宰嚭聞之, 乃數與子胥争越議, 因讒子胥曰:「伍員貌忠而実忍人, 其父兄不顧, 安能顧王? 王前欲伐斉, 員彊諫, 已而有功, 用是反怨王. 王不備伍員, 員必為亂.」與逢同共謀, 讒之王. 王始不従, 乃使子胥於斉, 聞其託子於鮑氏, 王乃大怒, 曰:「伍員果欺寡人!」役反, 使人賜子胥属鏤剣以自殺. 子胥大笑曰:「我令而父霸,22) 我又立若,23) 若初欲分呉国半予我, 我不受, 已, 今若反以讒誅我. 嗟乎, 嗟乎, 一人固不能独立!」報使者曰:「必取吾眼置呉東門, 以観越兵入也!」24)於是呉任嚭政.

3년이 지나자, 구천은 범려를 불러 “오나라가 이미 오자서를 죽였고, 지금 그 주위에는 모두 아부만 일삼는 자들만 있으니 (공격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려가)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오왕은 북쪽 황지()에서 제후와 회맹했다. 오나라의 정예병은 왕을 따라 나섰고, 오로지 노약자와 태자만 남아 지키고 있었다. 구천이 범려에게 다시 묻자 범려는 “가능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물에 익숙한 2천명, 훈련을 제대로 받은 4만명, 뜻이 굳센 군자() 6천명, 근위 시종 1천명을 선발하여 오나라를 정벌하여 오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오나라의 태자를 죽였다.

오나라는 왕에게 급히 알렸다. 그때 오왕은 황지에서 제후들과 회맹 중이었는데 천하가 이 일을 알까 두려워 비밀에 부쳤다. 오왕이 황지 회맹을 마치고는 바로 사람을 보내 후한 예물로 월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월나라는 아직 오나라를 멸망시킬 능력이 없음을 스스로 헤아려서 오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居三年, 句践召范蠡曰:「呉已殺子胥, 導諛者衆, 可乎?」対曰:「未可.」
至明年春, 呉王北会諸侯於黄池,25) 呉国精兵従王, 惟独老弱與太子留守.26) 句践复問范蠡, 蠡曰「可矣」. 乃発習流二千人,27) 教士四萬人,28) 君子六千人,29) 諸御千人,30) 伐呉. 呉師敗, 遂殺呉太子. 呉告急於王, 王方会諸侯於黄池, 懼天下聞之, 乃袐之. 呉王已盟黄池, 乃使人厚礼以請成越. 越自度亦未能滅呉, 乃與呉平.

그 뒤로 4년 만에 월나라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 오나라의 군사와 백성들은 이미 지친 상태였다. 정예병이 모두 제나라와 진()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월나라는 오나라를 대파하고 3년 동안 포위했다. 오나라의 군대는 패했고, 월나라는 마침내 고소산()으로 오왕을 몰아넣었다.

오왕의 사신 대부 공손웅()은 웃통을 벗고 무릎으로 기어서 월왕에게로 다가가 강화를 요청하며 “오갈 데 없는 신 부차가 감히 속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지난 날 회계에서 죄를 지었을 때 이 부차는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고 왕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여 귀국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몸소 옥체를 움직여 신을 토벌하시니 신은 명을 받들 뿐입니다. 회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지요?”라고 했다.

구천은 차마 모질지 못해 받아들이려 했다. 범려가 “회계의 사건은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준 것인데 오나라가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려는 것인데 월나라가 어찌 하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왕께서 아침 일찍 조회를 하고 저녁 늦게 파한 것은 오나라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22년을 계획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린다니 될 말입니까? 하늘이 주시는 데도 받지 않으면 오히려 그 화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그 본이 멀지 않거늘’라는 (시경의) 구절이 있듯이 왕께서 회계의 재앙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했다.

구천은 “내가 그대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사신에게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소이다.”라 했다. 그러자 범려는 북을 울려 군대를 진격시키면서 “왕께서 이미 이 일을 내게 맡겼으니 사신은 돌아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죄를 받게 될 것이오!”라고 했다.

오나라의 사신은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구천이 가엾게 여겨 곧 사람을 보내 오왕에게 “내가 왕을 용동()으로 보내 100가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하겠소.”라고 했다. 오왕이 “내가 이미 늙어서 군왕을 섬길 수 없겠습니다.”라며 사양하고는 드디어 자살했다. 그때 그 얼굴을 가리게 하면서 “내가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다!”라고 했다. 월왕은 바로 오왕을 장사지내고 태재 백비를 죽였다.

其後四年, 越复伐呉. 呉士民罷弊, 軽鋭尽死於斉、晉. 而越大破呉, 因而留囲之三年, 呉師敗, 越遂复棲呉王於姑蘇之山. 呉王使公孫雄31)肉袒膝行而前, 請成越王曰:「孤臣夫差敢布腹心, 異日嘗得罪於会稽, 夫差不敢逆命, 得與君王成以帰. 今君王挙玉趾而誅孤臣, 孤臣惟命是聴, 意者亦欲如会稽之赦孤臣之罪乎?」句践不忍, 欲許之. 范蠡曰:「会稽之事, 天以越賜呉, 呉不取. 今天以呉賜越, 越其可逆天乎? 且夫君王蚤朝晏罷, 非為呉邪? 謀之二十二年, 一旦而棄之, 可乎? 且夫天與弗取, 反受其咎. 『伐柯者其則不遠』, 君忘会稽之厄乎?」句践曰:「吾欲聴子言, 吾不忍其使者.」范蠡乃鼓進兵, 曰:「王已属政於執事,32) 使者去, 不者且得罪.」33)呉使者泣而去. 句践憐之, 乃使人謂呉王曰:「吾置王甬東, 君百家.」34)呉王謝曰:「吾老矣, 不能事君王!」遂自殺. 乃蔽其面,35) 曰:「吾無面以見子胥也!」越王乃葬呉王而誅太宰嚭.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하고 바로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회하를 건너 제후 제나라, 진()나라와 서주()에서 회맹하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주나라 원왕()은 사람을 시켜 구천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에 임명했다. 구천은 철수하여 회하 남쪽을 건너 회하 위쪽 땅을 초나라에 주고, 침탈한 송나라의 땅을 돌려주고, 노나라에게는 사수() 동쪽 사방 100리 땅을 주었다. 당시 월나라의 군대가 장강과 회하 동쪽을 주름잡으니 제후들이 모두 축하를 드리며 패왕()이라고 칭했다.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문종에게 편지를 보내 “날던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감추고, 약은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기는 법이오. 월왕은 목은 길고 입은 뾰족하여 근심과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오. 그대는 어째서 떠나지 않소?”라고 했다.

문종이 편지를 보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누군가 문종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중상하자 구천은 문종에게 바로 검을 내리며 “그대가 과인에게 오나라를 정벌할 일곱 개의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과인은 그중 세 가지만 사용하여 오나라를 물리쳤다. 나머지 넷은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선왕을 따라가서 그것을 시험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문종이 마침내 자살했다.

句践已平呉, 乃以兵北渡淮, 與斉、晉諸侯会於徐州, 致貢於周. 周元王使人賜句践胙, 命為伯. 句践已去, 渡淮南, 以淮上地與楚,36) 帰呉所侵宋地於宋, 與魯泗東方百里. 當是時, 越兵横行於江、淮東, 諸侯畢賀, 号称霸王.37)范蠡遂去, 自斉遺大夫種書曰:「蜚鳥尽, 良弓蔵;狡免死, 走狗烹.38) 越王為人長頚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種見書, 称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剣曰:「子教寡人伐呉七術,39) 寡人用其三而敗呉, 其四在子, 子為我従先王試之.」種遂自殺.

[네이버 지식백과] 권41. 월왕구천세가 [卷四十一. 越王句踐世家] - 한글 번역문 (사기: 세가(번역문),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네이버 지식백과] 권41. 월왕구천세가 [卷四十一. 越王句踐世家] - 한자 원문 (사기: 세가,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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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려는 월왕 구천을 모시면서 고생하며 온 힘을 다했다. 구천과 20년 넘게 깊게 고민하여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에서의 치욕을 갚았다. 회수 이북으로 군대를 출병시켜 제나라, 진나라를 압도함으로써 중국을 호령하고 주 왕실을 높였다. 구천은 이로써 패주가 되고 범려는 상장군으로 불렸다.

范蠡事越王句践, 既苦身戮力, 與句践深謀二十余年, 竟滅呉, 報会稽之恥, 北渡兵於淮以臨斉、晉, 号令中国, 以尊周室, 句践以霸, 而范蠡称上将軍.

귀국한 뒤 범려는 큰 명성 아래서는 오래 머무를 수 없고, 구천이란 사람이 근심은 함께 할 수 있어도 편안함을 함께 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구천에게 다음과 같은 사직서를 썼다.

還反国, 范蠡以為大名之下, 難以久居, 且句践為人可與同患, 難與処安, 為書辞句践曰

“신이 듣기에 왕께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수고를 다하고,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과거 군왕께서 회계에서 치욕을 당하셨음에도 죽지 않은 것은 이 일을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설욕을 했으니 신은 회계의 치욕에 대한 죽음을 청하옵니다.”

「臣聞主憂臣勞, 主辱臣死. 昔者君王辱於会稽, 所以不死, 為此事也. 今既以雪恥, 臣請従会稽之誅.」

구천은 “내가 나라를 나누어 그대에게 주겠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대에게 벌을 주겠소.”라고 했다. 범려는 “군주는 명령을 집행하고 신하는 뜻을 실행합니다.”라 하고는 가벼운 패물 등을 챙겨 식구, 노복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구천은 회계산을 범려의 봉읍으로 삼아 기념했다.

句践曰:「孤将與子分国而有之. 不然, 将加誅于子.」范蠡曰:「君行令, 臣行意.」乃装其軽宝珠玉, 自與其私徒属乗舟浮海以行, 終不反. 於是句践表会稽山以為范蠡奉邑.

범려는 바닷길로 제나라에 도착해서는 성과 이름을 바꾸어 스스로를 ‘치이자피()’라 했다. 해변에서 힘들게 온 힘을 다해 농사를 지었는데 아들과 함께 생산에 종사하여 얼마 되지 않아 수십 만의 재산을 모았다. 제나라 사람들이 범려의 유능함을 알고는 재상감으로 여겼다. 범려는 “집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로는 경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보통 사람으로는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명성을 오래 갖고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탄식하고는 곧 재상의 도장을 돌려보내고 재물을 다 나누어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귀한 보물만 가지고 몰래 떠났다.

范蠡浮海出斉, 変姓名, 自謂鴟夷子皮,3) 耕于海畔, 苦身戮力, 父子治産. 居無幾何, 致産數十萬. 斉人聞其賢, 以為相. 范蠡喟然嘆曰:「居家則致千金, 居官則至卿相, 此布衣之極也. 久受尊名, 不祥.」乃帰相印, 尽散其財, 以分與知友郷党, 而懐其重宝, 閒行以去,

도()나라라는 곳에 와 보니 천하의 중심이자 교역의 통로로 장사를 하면 치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칭 ‘도주공()’으로 칭하고 다시 아들과 함께 농사와 목축을 하며 물건을 사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다시 팔되 1할의 이윤을 남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억만의 재산을 모으니 천하가 도주공을 칭송했다.

止于陶,4) 以為此天下之中, 交易有無之路通, 為生可以致富矣. 於是自謂陶朱公. 复約要父子耕畜, 廃居, 候時転物, 逐什一之利. 居無何, 則致貲累巨萬.5) 天下称陶朱公.

서시와 함께 월나라를 떠나는 범려

도주공이 도나라에 살면서 막내아들을 낳았다. 막내아들이 장성할 무렵 도주공의 둘째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나라의 감옥에 갇혔다. 도주공이 “사람을 죽였으니 죽는 것이 도리에 맞다. 그러나 내가 듣자 하니 천금을 가진 집의 자식은 저자거리에서 죽지 않는다고 한다.”라 하고는 막내아들에게 가서 (형을) 보게 했다. 그리고 황금 천 일()을 마대자루에 넣어 소가 끄는 마차에 실어 가져가게 했다. 막내아들을 막 보내려는데 도주공의 큰아들이 한사코 자신이 가겠다고 나섰다. 도주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朱公居陶, 生少子. 少子及壮, 而朱公中男殺人, 囚於楚. 朱公曰:「殺人而死, 職也. 然吾聞千金之子不死於市.」告其少子往視之. 乃装黄金千溢, 置褐器中, 載以一牛車. 且遣其少子, 朱公長男固請欲行, 朱公不聴.

장남은 “집안의 장남을 집안일을 돌본다 해서 ‘가독()’이라 합니다. 지금 동생이 죄를 지었는데 아버님께서 저를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는 것은 제가 불초해서입니다.”라며 자살하려고 했다. 그 어머니도 “지금 막내를 보낸다고 해서 둘째를 꼭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 그보다 앞서 큰아들을 잃게 생겼으니 어찌 합니까?”라고 했다. 도주공이 하는 수 없이 큰아들을 보내면서 편지 한 통을 써서 오랜 친구인 장생()에게 주라 하고는 “도착하면 바로 장생에게 천금을 드리고 그가 하는 말을 잘 듣되 이 일을 놓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조심 하거라!”라고 했다. 큰아들은 떠나면서 자기도 개인적으로 수백 금을 챙겼다.

長男曰:「家有長子曰家督, 今弟有罪, 大人不遣, 乃遺少弟, 是吾不肖.」欲自殺. 其母為言曰:「今遣少子, 未必能生中子也, 而先空亡長男, 柰何?」朱公不得已而遣長子, 為一封書遺故所善荘生.6) 曰:「至則進千金于荘生所, 聴其所為, 慎無與争事.」長男既行, 亦自私齎數百金.

초나라에 도착했다. 장생의 집은 성 근처였는데 잡초가 집 주위로 잔뜩 자라고 있었고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그러나 큰아들은 편지와 천금을 건넸다. 장생은 “여기 머무르지 말고 빨리 가라하고, 또 동생이 (감옥에서) 나오거든 그 자초지종을 묻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 큰아들은 장생의 집에서 떠나왔지만 다시 장생 집에 가지 않고 몰래 머무르면서 자기가 가져간 황금을 초나라 권력자에게 바쳤다.

至楚, 荘生家負郭, 披藜藋到門, 居甚貧. 然長男発書進千金, 如其父言. 荘生曰:「可疾去矣, 慎毋留! 即弟出, 勿問所以然.」長男既去, 不過荘生而私留, 以其私齎献遺楚国貴人用事者.

장생이 누추한 곳에 살고 있었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것이 나라에 알려져 초나라 왕 이하 모두가 그를 스승처럼 존중했다. 도주공이 금을 보내오자 그것을 받으려는 뜻이 아니라 일이 이루어진 뒤 다시 돌려주어 신의를 보이려 했다. 그래서 금을 받자 부인에게 “이건 도주공의 금이요. 갑자기 병이 나서 미리 알리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나중에 다시 돌려 줄 것이니 건드리지 마시오.”라고 했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장생의 생각을 모르고 그에게 별다른 방법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荘生雖居窮閻, 然以廉直聞於国, 自楚王以下皆師尊之. 及朱公進金, 非有意受也, 欲以成事後复帰之以為信耳. 故金至, 謂其婦曰:「此朱公之金. 有如病不宿誡, 後复帰, 勿動.」而朱公長男不知其意, 以為殊無短長也.

장생은 틈을 봐서 (궁으로) 들어가 초왕을 만나 “어떤 별이 어떤 곳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초나라에 해가 됩니다.”라고 했다. 왕이 평소 장생을 믿기에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소?”라고 했다. 장생이 “오직 덕을 베푸셔야만 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초왕이 “선생께서는 돌아가 편히 계십시오. 과인이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곧 사신을 시켜 금, 은, 동 삼전()의 창고를 봉쇄했다. (큰아들에게 뇌물을 받은) 초나라 권력자는 깜짝 놀라 도주공의 큰아들에게 “왕이 사면령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왕께서 사면령을 내리실 때면 늘 삼전의 창고를 봉쇄하시는데 어제 저녁 사람을 시켜 봉쇄했습니다.”라고 했다.

荘生閒時入見楚王, 言「某星宿某, 此則害於楚」. 楚王素信荘生, 曰:「今為柰何?」荘生曰:「独以徳為可以除之.」楚王曰:「生休矣, 寡人将行之.」王乃使使者封三銭之府.7) 楚貴人驚告朱公長男曰:「王且赦.」曰:「何以也?」曰:「毎王且赦, 常封三銭之府. 昨暮王使使封之.」8)

도주공의 큰아들은 사면이 내려지면 동생도 당연히 나올 텐데 천금을 장생에게 주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장생을 찾아갔다. 장생이 놀라며 “아직 안 갔는가?”라고 했다. 큰아들이 “아직 안 갔습니다. 당초 동생 일로 왔는데 지금 사면이 논의되고 있다 해서 선생께 인사를 드리고 가려 합니다.”라고 했다. 장생은 그가 황금을 다시 가져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자네, 방에 들어가 황금을 가져가게나.”라고 했다. 큰아들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가지고 떠나면서 혼자 좋아 어쩔 줄 몰랐다.

朱公長男以為赦, 弟固當出也, 重千金虚棄荘生, 無所為也, 乃复見荘生. 荘生驚曰:「若不去邪?」長男曰:「固未也. 初為事弟, 弟今議自赦, 故辞生去.」荘生知其意欲复得其金, 曰:「若自入室取金.」長男即自入室取金持去, 独自歓幸.

장생이 도주공의 아들에게 모욕당한 것이 부끄러워 곧 들어가 초왕을 만나 “신이 일전에 별 이야기를 말씀드렸더니 왕께서는 덕을 베풀어 (하늘에) 보답하려 하셨습니다. 지금 신이 밖에 나가 길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부자 도주공의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에 갇혀 있는데 그 집에서 금전을 많이 갖고 와서 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께서 초나라를 아껴서가 아니라 도주공 아들 때문에 사면을 내리려 한다고 말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크게 노하며 “과인이 부덕하기로서니 어찌 도주공의 아들 때문에 은혜를 베푼단 말이오!”라 하고는 명을 내려 도주공의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사면령을 내렸다. 도주공의 큰아들은 결국 동생의 시신을 가지고 돌아갔다.

荘生羞為児子所売, 乃入見楚王曰:「臣前言某星事, 王言欲以修徳報之. 今臣出, 道路皆言陶之富人朱公之子殺人囚楚, 其家多持金銭賂王左右, 故王非能恤楚国而赦, 乃以朱公子故也.」楚王大怒曰:「寡人雖不徳耳, 柰何以朱公之子故而施恵乎!」令論殺朱公子, 明日遂下赦令. 朱公長男竟持其弟喪帰.

도착하니 그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데 도주공 혼자만 웃으면서 “내가 동생을 죽게 할 줄 알았다! 저 녀석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뭔가를 차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고생하고 생활의 곤란을 겪어서 재물을 쓸 줄 모른다. 막내 놈은 태어나면서 내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좋은 마차에 토끼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그 재물이 어디서 오는 줄 모르기 때문에 가볍게 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일전에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도 그 놈은 재물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큰 놈은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동생을 죽게 한 것이다. 사물의 이치가 참으로 이러하니 슬퍼할 것 없다. 내가 낮밤으로 둘째의 시신이 오길 기다렸노라.”라고 했다.

至, 其母及邑人尽哀之, 唯朱公独笑, 曰:「吾固知必殺其弟也! 彼非不愛其弟, 顧有所不能忍者也. 是少與我倶, 見苦, 為生難, 故重棄財. 至如少弟者, 生而見我富, 乗堅駆良逐狡免,9) 豈知財所従來, 故軽棄之, 非所惜吝. 前日吾所為欲遣少子, 固為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 故卒以殺其弟, 事之理也, 無足悲者. 吾日夜固以望其喪之來也.」

범려는 세 번을 옮기고도 천하에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떠난 것만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반드시 명성을 날렸다. 늙어 도나라에서 죽으니 세상에는 ‘도주공’이라 전해온다.

故范蠡三徙, 成名於天下, 非苟去而已, 所止必成名. 卒老死于陶, 故世傳曰陶朱公.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우()의 공이 크구나! 아홉 개의 하천을 소통시키고 아홉 개의 주를 안정시키니, 지금까지 중원이 편안하도다. 후예 구천()에 이르러 노심초사하며 끝내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키니 군대가 북으로는 중국에까지 이르러 주 왕실을 받들고 패왕으로 칭했다. 구천을 유능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개 우가 남긴 덕이 아니겠는가? 범려가 세 번을 옮기고도 모두 영예로운 이름을 얻어 후세에게까지 남겼다. 신하와 군주가 이러했으니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太史公曰:禹之功大矣, 漸九川,11) 定九州, 至于今諸夏艾安. 及苗裔句践, 苦身焦思, 終滅彊呉, 北観兵中国, 以尊周室, 号称霸王.12) 句践可不謂賢哉! 蓋有禹之遺烈焉. 范蠡三遷皆有栄名, 名垂後世. 臣主若此, 欲毋顕得乎!

[네이버 지식백과] 범려 [范蠡] - 한글 번역문 (사기: 세가(번역문),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네이버 지식백과] 범려 [范蠡] - 한자 원문 (사기: 세가,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 <화식열전( 貨殖列傳) 중>

범려
옛날 월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곤욕을 치렀을 때 범려()와 계연()을 기용했다. 계연은 이렇게 말했다.

“싸움을 알면 준비하고, 때와 쓰임을 알면 물건을 알게 된다. 이 둘이 드러나면 모든 재화의 정황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해 세성(, 목성)이 서방에 있으면 풍년이 들고, 북방에 있으면 흉년이 들고, 동방에 있으면 굶주리고, 남방에 있으면 가뭄이 든다. 가뭄이 들면 배를 준비하고, 수해가 나면 수레를 준비해두는 것이 사물의 이치이다.

6년마다 풍년이 들고, 6년마다 가뭄이 들며, 12년마다 큰 굶주림이 닥친다. 무릇 곡식 값이 20전이면 농가가 힘들고, 90전이면 상인이 힘들다. 상인이 힘들면 재물이 나오지 않고, 농가가 힘들면 농지가 개간되지 않는다. 값이 올라도 80전을 넘지 않고 값이 내려도 30전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농가와 상인이 모두 이익을 본다. 물가를 조정하고 시장에 물건이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이다.

물자를 모으는 이치는 물자를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힘을 쓰되 묵혀두어서는 안 된다. 썩은 것은 내다버리고, 상한 물건을 남겨두어는 안 된다. 값이 오를 때까지 차지하고 있어도 안 된다. 남는지 모자라는지를 잘 따지면 값이 오를지 내릴지를 알 수 있다. 비싼 것이 극에 달하면 반대로 싸지고, 극도로 값이 내려가면 반대로 비싸진다. 따라서 값이 오르면 오물을 버리듯 내다 팔고, 값이 내리면 주옥을 얻은 듯 사들여야 합니다. 재물과 화폐는 물 흐르듯 돌게 해야 한다.”

이렇게 10년간 다스리자 나라가 부유해졌고, 전사들에게 넉넉하게 상을 주니 전사들은 목이 마른 듯 화살과 돌을 향해 달려 나갔다. 마침내 강력한 오나라에 보복하고 중국을 향해 무력을 떨치니 ‘5패’로 불렸다.

昔者越王句踐困於會稽之上, 乃用範蠡、計然.1) 計然曰:「知鬥則修備, 時用則知物,2) 二者形則萬貨之情可得而観已. 故歳在金, 穣;水, 毀;木, 饑;火, 旱.3) 旱則資舟, 水則資車,4) 物之理也. 六歳穣, 六歳旱, 十二歳一大饑. 夫糶, 二十病農, 九十病末.5) 末病則財不出, 農病則草不辟矣. 上不過八十, 下不減三十, 則農末倶利, 平糶斉物, 関市不乏, 治國之道也. 積著6)之理, 務完物, 無息幣.7) 以物相貿易, 腐敗而食之貨勿留, 無敢居貴. 論其有餘不足, 則知貴賎. 貴上極則反賎, 賎下極則反貴. 貴出如糞土, 賎取如珠玉.8) 財幣欲其行如流水.」修之十年, 國富, 厚賂戦士, 士赴矢石, 如渇得飲, 遂報彊呉, 観兵中國, 稱號「五霸」.

범려는 회계에서의 치욕을 설욕하고 난 다음 “계연의 계책 일곱 개 중 월은 다섯만 쓰고도 뜻을 얻었다. 나라에 베풀어 보았으니 내가 집에다 활용해보고 싶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리고는 조각배를 타고 강호를 떠다녔는데, 성과 이름까지 바꾸었다. 제나라에 가서는 ‘치이자피()’라 했고, 도()에 가서는 주공()이라 했다. 주공은 도 지역이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 제후의 나라들과 통하여 화물이 교역될 곳으로 판단했다. 이에 장사를 시작하여 물건을 사들이고 때맞추어 사고팔되 다른 사람 탓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사를 잘 하는 사람은 사람을 잘 골라 때에 맡기는 것이다. (범려는) 19년 사이에 세 번이나 천금을 모아 두 번은 가난한 친구들과 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範蠡既雪會稽之恥, 乃喟然而歎曰:「計然之策七, 越用其五而得意. 既已施於國, 吾欲用之家.」乃乗扁舟9)浮於江湖,10) 変名易姓, 適斉為鴟夷子皮,11) 之陶12)為朱公. 朱公以為陶天下之中, 諸侯四通, 貨物所交易也. 乃治産積居. 與時逐13)而不責於人.14) 故善治生者, 能択人而任時. 十九年之中三致千金, 再分散與貧交疏昆弟. 

이것이 이른바 부유하면 즐겨 덕을 행한다는 말이다. 그 뒤 나이가 들어 늙자 자손들에게 일을 맡겼고, 자손들은 사업을 잘 꾸려 재산을 불렸는데 억만 금에 이르렀다. 그래서 부자하면 모두 도주공을 꼽는 것이다.

此所謂富好行其徳者也. 後年衰老而聴子孫, 子孫脩業而息之, 遂至巨萬.15) 故言富者皆稱陶朱公.

[네이버 지식백과] 계연과 범려 - 한글 번역문 (사기 : 열전(번역문),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네이버 지식백과] 계연과 범려 - 한자 원문 (사기 : 열전, 2013. 5. 1., 사마천, 김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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