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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지혜로운삶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하다 _ 원균(元均)

by 변리사 허성원 2022. 8. 5.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하다 

 

원균(元均)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 당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왜군 본진이 있던 부산을 제외한 남해안의 모든 재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해 2월 26일 이순신은 파직당해 서울로 압송되면서, 원균이 후임 통제사 원균가 된다. 원균이 넘겨받은 조선 수군의 규모는 배 134척과 병력 1만7000여 명이었다.

원균이 이순신에 대해 얼마나 열등감에 차있었고 또 무능했는지는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은봉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잘 나타나 있다.

"원균은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의 처가 원씨의 친족이기 때문에 원균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나의 중부를 찾아뵙고 "내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하므로 중부는 "영감이 능히 성심을 다하여 적을 무찔러 그 공로가 이순신보다 뛰어나야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저 이순신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긴대서야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은 다시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칼과 정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라고 하므로 중부는 웃으면서 "대장으로서 칼과 정을 쓰게까지 해서야 될 말인가?" 하고 대답했다. 원균이 떠난 뒤에 중부가 나에게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 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_ 은봉전서(隱峯全書) 권8 기사(記事) 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

https://namu.wiki/w/%EC%9B%90%EA%B7%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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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7월 21일(癸酉).  맑다.  
경상우수사(元均)와 정(丁傑) 충청수사가 한꺼번에 도착하여 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가 하는 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도로 흉측한 속임수들이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을 하고도 후환이 없을까?  (後略)  
-  박기봉 편역  [충무공 이순신 전서]  -  에서 발췌

한꺼번에 도착한 두 사람은 모두 이순신의 군대 선배들입니다.
충청수사 정걸은 나이 차이가 31살이나 위이며 이순신이 태어나기도 전인 1544년에 무과 급제를 하고 전라좌수사는 이순신 보다 14년 먼저 지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의 노장으로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이 되어 까마득한 후배 전라좌수사를 도와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나이와 지위를 뛰어넘어 멋진 팀플레이로 싸움마다 이기는 훌륭한 팀워크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에 비해 원균은 나이가 이순신 보다 5살 위이며 무과 급제는 1567년으로 이순신 보다 9년 먼저 무인으로 나섰습니다. 사사건건 이순신과의 의견 충돌과 시비로 갈등을 일으키며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의 속을 썩입니다. 내가 예전에 상관이었었는데 하는 생각에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우리가 흔히 갈등과 리더십의 주제로 삼는 것 중의 하나가 선후배간의 대인관계이며 성공하는 사람들의 80% 이상은 자기 삶의 자리에서 팀플레이가 원만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대선배인 정걸은 이순신과의 팀워크에서 팀에 "나"란 존재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한 사람이었으며 언제나 조직 안에서  "나"를 주장하는 원균은 부하들에게 조차도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팀워크는 여러 리더십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므로 내가 팀원이 되었을 때는 팀장과 함께 임무를 수행 하는데에 충성심으로 나서야 하고 팀장이 되었을 때는 팀원들을 보호하며 조직을 살리는 임무에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을 역사는 이순신의 두 분 선배님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순신포럼 이부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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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襄主學御於王子期
. 俄而與於期逐, 三易馬而三後.
襄主曰 : "子之教我御, 術未盡也."
對曰 : "術已盡, 用之則過也. 凡御之所貴, 馬體安於車, 人心調於馬, 而後可以進速致遠. 今君後則欲逮臣, 先則恐逮於臣. 夫誘道爭遠, 非先則後也. 而先後心在於臣, 上何以調於馬, 此君之所以後也."
_ <
韓非子 喻老>

조양자(趙襄子)가 왕자기(王子期)로부터 마차몰기를 배웠다. 숙달되기 전에 조급하게 왕자기와 경쟁하여, 세 번이나 말을 바꾸어도 모두 뒤졌다. 조양자가 말했다. "당신은 내게 마차 모는 기술을 모두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소." 그러자 왕자기가 대답했다. “기술은 모두 가르쳐드렸습니다. 다만 그 활용법이 틀렸습니다. 마차를 몰 때 중요한 것은, 말의 몸이 마차에 편안해야 하고, 사람의 마음은 말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빠르게 달려 멀리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군주께서는 뒤처지면 저를 따라 잡으려 하고, 앞서 나가면 저에게 따라잡히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먼 길을 달려 경주할 때에는 앞서거나 뒤처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서건 뒤서건 저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말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군주께서 이기지 못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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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_ 페북 230228
 
 
1. 선조 25년(1592) 2월, 원균은 경상 우수사에 부임하였다.
이순신과 원균은 인연이 깊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그들은 조선의 무관으로서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싸움을 벌였다. 그때도 직접 간접으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었다. 두 사람의 인생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다름 아닌 “시전부락(時錢部落)”의 여진족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두 사람은 상당한 세월을 함경도에서 보냈다. 원균은 함경도 조산만호(造山萬戶) 시절에 여진족을 물리친 공적으로, 부령부사(富寧府使)에 발탁되었다. 얼마 뒤에는 종성부사(鍾城府使)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때 함경도 병마사를 도와 시전부락(時錢部落)에 쳐들어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 18세기 전반에 대사헌을 지낸 김간(金榦)이 쓴 <원균행장(元均行狀)>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의 일이었다. 선조 21년(1588) 1월 27일에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올린 <장계(狀啓)>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경원(慶源)의 번호(藩胡) 가운데 녹둔도(鹿屯島)에서 작적(作賊, 침략을 자행함)한 ‘시전부락(時錢部落)’이 있습니다. 이달 14일에 제가 본도(本道)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그리로 쳐들어갔습니다. 이경(二更)에 행군을 시작해 삼경에는 강을 건넜고, 15일 평명(平明, 동틀 무렵)에 그들의 궁려(穹慮, 주거지) 2백여 좌(坐)를 분탕(焚蕩, 불태움)하였습니다. 또, 적의 머리 3백 80급(級)을 베었고, 말 9필과 소 20수(首)를 참획(斬獲, 죽이고 사로잡음)한 다음에 전군(全軍)이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1년 1월 27일 신해.
여기에서 보듯, 우리 군사들은 시전부락을 완전히 초토화한 다음에 작전을 마치고 무사히 귀대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때 원균은 종성부사(종3품)로서 승전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순신도 그 전투에 함께 참전하였다.
그럼 위 보고서에 언급된 녹둔도 침략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순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사건이었다. 선조 20년(1587) 10월에 이순신은 조산만호로서 녹둔도를 관리하였다. 그때 여진족이 급습하여, 결과적으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당시의 사정을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은 다음과 같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적호(賊胡, 여진족)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祿)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쳤습니다. 우리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었고 1백 6명의 백성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치욕을 주었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 옥에 가둠)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 보직해임)’의 곤경에 빠졌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녹둔도에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한 것은 병마사 이일의 책임이라고 한다.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에서 보면, 선조 20년 초겨울에 이순신을 곤경에 몰아넣은 시전부락을 상대로 두 사람이 함께 싸워 속 시원히 복수한 셈이었다. 이때의 승리를 계기로 이순신은 ‘백의종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뒤로 원균과 이순신 두 사람은 함경도를 벗어나 남해안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먼저 이순신은 정읍 현감에 부임하는데, 선조 22년(1589)의 일이었다. 원균은 이미 그보다 6년 전인 선조 16년(1583)에 경상도에서 거제 현령을 지낸 터였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상대로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조정에서는 그들이 전라좌도를 침략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수군절도사를 발탁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즉 선조 24년(1591) 2월의 일이었다.
조정은 원균을 전라 좌수사(정3품)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승진 발령이었으므로 사간원에서는 그 점을 깊이 파고들었다. 사간원의 주장은 이러했다.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함경도 종성부사- 백승종)에 고적(考績, 근무평가)이 거하(居下, 상중하 가운데 ‘하’라는 뜻)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반년이 지난 오늘에 좌수사에 초수(超授, 수군절도사는 정3품)하시면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어서 물정(세평)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遞差, 다른 자리에 임용)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조선왕조실록>>, 선조 24년 2월 4일 신미.
알고 보면 사헌부와 사간원이 관리의 ‘승진’을 반대하는 것은 늘 되풀이되는 일이었다. 그 이듬해 2월에 원균은 마침내 전라 좌수사와 동급인 경상 우수사에 보임되었다. 그때는 이렇다 할 비판이 따르지 않았다.
그럼 원래 원균으로 내정되어 있던 전라 좌수사의 자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헌부는 나이도 원균보다는 젊고 ‘무략’ 또는 군사 전략에 더욱더 밝은 이를 보내라고 주문하였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러한 사헌부의 요구에 부응한 조정의 선택이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미 선조는 일본의 침략 의도를 짐작하고, 전쟁이 이어나기 3년쯤 전부터 이순신을 비롯해 여러 명의 무관을 발탁할 결심을 굳혔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2년 7월 28일 계유.
그런데 막상 이순신을 선택하자 이번에는 사간원이 들고 나섰다. 전라 좌수사로 임용하려는 이순신(李舜臣)은 현직 현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인데 좌수사로 높이 등용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이었다. 인재가 모자라서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벼슬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4년 2월 16일 계미.
무려 6등급을 한꺼번에 뛰어넘은 파격적 인사였으므로, 이와 같은 반대가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심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평시의 규정)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4년 2월 16일 계미.
조정에서는 왜군의 침략이 곧 일어날 것으로 보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장차 왜적이 전라좌도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점쳤다. 훗날 선조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선조 34년(1601) 1월에 선조는 국방 문제 전반에 대해 체찰사 이덕형과 논의할 때, 일본이 쳐들어온다면 전라좌도를 통해 섬진강을 따라서 남원과 전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올 것으로 다들 걱정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1월 17일 병진.
그런 점에서 전라 좌수사를 누구로 결정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처럼 중요한 시기에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이는 영의정 류성룡이었다. 이순신과는 막역지우(莫逆之友, 친한 벗)나 다름없는 사이로, 이순신이 함경도의 조산보 만호로 기용될 때부터 줄곧 뒤를 봐주었다. 그런 사실은 류성룡의 발언에서 확인되기도 하는데,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기용하려는 시도는 언관(言官)의 거듭된 저항에 부딪혔다. 너무도 파격적인 인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가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선조 24년(1591) 2월 18일에 사간원이 이번 인사에 문제가 많다고 다시 지적하자 왕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그러나 개정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24년 2월 18일 을유.
이례적으로 선조가 이순신의 특별 임용을 강력히 주장하자 사간원도 입을 닫았다. 애초에는 원균이 부임하기로 예정된 거처럼 보였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자리가 마침내는 이순신의 몫이 되었다. 원균과 이순신 두 사람의 운명이 크게 엇갈린 사건이었다.
임진왜란이란 대참극이 발생하기 14개월 전에 이순신은 여수에 부임하였다. 그리고는 조정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 아래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유능한 이순신이었기에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최소한의 전쟁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전쟁 발생을 겨우 두 달쯤 앞두고 부랴부랴 경상 우수사에 임명된 원균은 어떠하였을까. 그에게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작전지역인 현장을 직접 돌아보고 장비와 인원을 꼼꼼히 점검하기에도 시간은 크게 부족하였다.
선조 25년 4월, 드디어 조정이 걱정하던 전쟁이 일어났다. 적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였고, 울리 측의 예상과는 달리 전라좌도가 아니라 경상좌도의 부산으로 밀고 들어왔다. 조선은 완전히 허를 찔린 것이었다. 적은 우리의 사정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데 비하여 조선의 당국자들은 적의 의중을 조금도 알지 못했으니, 초전의 대혼란은 불가피한 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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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조선왕보실록'
국정호('69, 인천) 무일, 안일함이 없다.
* 이충무공전서 특강_03_원균의 실체가 드러나다

-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은 『부산기사(釜山記事)』와 그의 『우산집(牛山集)』에서 원균(元均)의 본색을 제대로 들추었다. (이충무공전서 14. 부록 6. 기실 하)

안방준은 1573년생으로 이순신보다 18년 아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효종(孝宗) 때 좌의정 조익이 천거하여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는데, 편저로 항의신편, 이대원전, 호남의병록, 삼원기사, 사우감계록, 혼정편록 등이 있다.

1. 싸워보지도 않고 함선을 자침시킨 원균의 비겁함과 임금을 기망하는 행동

* 안방준은 『부산기사』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키고 수군을 해산시켜 흩어지게 한 원균과 이순신의 대면 장면을 언급한다. 원균은 비겁하게 몸을 숨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측은한 마음에서 군 선배인 원균의 분발을 촉구한다.

① (이순신이) 고성의 사량도에 이르렀는데, 당시 적의 형세가 아주 급박하여 영남 연해의 여러 진영이 두려워하고 겁내며 어찌할 바를 몰라 모두 스스로의 배를 침몰시켰다.

원균 역시 작은 배 한 척으로 적량도(남해 창선면 진동리)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공이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 와서 울며 말하기를, “나는 전선이 한 척도 여기에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공(이순신)이 위로하여 어루만지며 또 말하기를, “이때는 신하가 몸을 바쳐서 국가에 보답할 때이오”라고 하였다. (중략)

② 원균은 전후의 싸움에서 조그마한 공도 없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적을 깨뜨릴 때 뒤를 따르다가 죽은 적의 목이나 취하였고, 여러 장수들이 또 각각 자기의 소득을 원균에게 나누어 주어 원균의 소득이 여러 장수보다 가장 많았다.

그래서 당시 진중에서는 “한 술 얻은 밥이 온 식기의 밥보다 많다”라는 말까지 있었다.

③ 원균은 공에게서 받은 은혜가 진실로 적지 않지만 원균이 문득 간사한 계책을 내어, 헛되이 목소리의 기세만 높이고(虛張聲勢) 임금을 기망(欺罔, 속여 넘김)하였다.

자기의 심복 군관을 시켜서 먼저 임금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곳(행재소)에 아뢰게 하였다.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오자 공론이 차츰 시행되었다.

원균은 그의 패배한 정상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도리어 이를 빌미로 뇌물을 바치고 공(이순신)을 무함하기를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딴마음이 있다고까지 하여, 마침내 잡아다가 심문을 받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원균이 이순신의 직임을 대신하자 5~6년이 걸려 완비된 수군과 기구들을 하루아침에 다 없애버렸으니, 원균의 죄상은 진실로 더 말하기에도 부족하며, 그에게 일을 맡긴 신하들도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 원균은 “한술 얻은 밥”과 같은 저급한 장수였다. 그는 왜란 초반 경상우수영 태반의 전선을 자침시킨 죄로 처벌을 당했어야 했다. 그런 장수가 살아남는 법은 오직 뇌물로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인데, 원균은 이에 더하여 책사 겸 대장군인 이순신을 모함하기에 이른다.

2. 이순신을 대신했다고 통쾌하다는 원균의 모자람

④ 원균은 바로 내(안방준) 중부(仲父, 둘째 아버지) 동암공(안중홍)의 처 원씨의 일가이다. 원균이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에 중부(안중홍)를 뵙고 인사드렸다.

원균이 말하기를, “내가 이 직함(삼도수군통제사)을 영화로 여기는 게 아니고 오직 이순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씻었다는 것을 통쾌하게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중부(안중홍)가 말하기를, “영공(令公, 영감: 원균)이 능히 마음을 다하여 적을 격파하여 그 공업이 이순신보다 뛰어나다면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소. 그저 이순신을 대신하는 것으로 통쾌하게 여기는 것을 어찌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원균이 말하기를,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그들이 멀리 있으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이 있으면 장전(長箭)을 사용하고, 부딪칠 경우에는 칼을 쓰다가 몽둥이를 사용한다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라고 하였다.

중부(안중홍)는 웃으며 말하기를, “대장으로서 칼과 몽둥이를 쓰는 지경까지 이른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원균이 떠나자 중부(안중홍)가 나(안방준)에게 말하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은 망쳤구나”라고 하며, 한참이나 탄식하고 한탄하였다. 남쪽 사람들이 지금도 말이 이 일에 미치게 되면, 성나고 분하여 주먹을 쥐지 않는 이가 없다.

* 원균은 겁장이자 졸장부였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면 해군의 총사령관일진대, 그 지위에 맞는 도량과 지략을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싸움을 일삼는 한갓 선봉장처럼 말하였다. 그의 수준을 간파한 안중홍의 탄식과 한탄이 지금까지 느껴진다.

* 공자의 말이 떠오른다. 자로가 “선생님께서 대군을 지휘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물으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맨주먹으로 범을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면서 죽어도 뉘우침이 없는 자라면 함께 하지 않겠다. 반드시 일을 앞에 두고는 두려워하며, 잘 계획하여 일을 성취시키는 사람이라야만 하겠다[臨事而懼 好謨而成, 임사이구 호모이성].”

3. 원균을 일등으로 정한 당시 조정을 비판하는 안방준의 필력

* 안방준의 『우산집(牛山集)』에는 선무공신을 선정할 때 원균을 1등 공신에 오르게 하는데서 말을 번복한 백사 이항복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 내용 중에 원균의 실체가 고스란히 보인다.

⑤ 백사(이항복)가 말하기를, “상(선조)께서 일찍이 여러 장수들을 논평하면서, ‘이순신·원균의 해상에서의 전공과 권율의 행주 승첩을 으뜸 공로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꾸지 못할 정론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원균은 특히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일을 이룬 자이므로 진실로 감히 이순신과 더불어 맞설 수 없다. 운운”이라고 하였다. (앞과 뒤의 말이 다르다)

백사는 어찌 그리 잘못 생각하였을까. 적이 수군을 거느리고 호남을 향해 오래도록 몰아칠 때, 이순신은 만 번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산도에서 차단하여, 적으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노를 젓지 못하게 한 지 무릇 6년이었다.

원균은 두려워하고 겁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스스로 자기의 전선을 침몰시키고 바다 섬에 숨어 엎드려 있던 것을, 이순신이 끌어내어 군중(軍中)에 두고 군량을 넉넉히 보급해주며, 자기가 획득한 적의 머리까지도 원균에게 나누어 주었다. 원균으로 하여금 군율을 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 따라서 포상까지 받게 하였다.

원균이 이순신에게서 난육(卵育, 어미 새가 알을 까서 새끼를 품어 기르듯이)을 받은 은혜가 진실로 대속(代贖, 대신 속죄)할 수 없을 정도로 적지 않았다.

그런데 원균은 뜻을 이룬 뒤부터 도리어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무릇 이순신을 해치는 짓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바다의 왕(海王)’이라는 말까지 지어내어 멀고 가까운 곳에 퍼뜨렸다.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자 이순신이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았다고 임금에게 몰래 아뢰어 이순신이 끝내 잡혀가서 심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원균이 통제사를 대신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 군사가 배가 뒤집혀 가라앉아 죽었으니, 죄를 지어 목을 벨만 하고, 공이 없어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없는데, 이순신·권율과 더불어 나란히 칭함은 어째서인가?

대개 원균이 서울에 거처하여 그의 족속들이 귀근(貴近, 높은 지위에 있어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한 이들과 연결되고, 또 아첨하는 당시의 사람들 중에 그의 편을 드는 자가 많았다. 그러므로 임금을 속여 벌과 상이 뒤바꿔진 것인데 백사는 그런 것을 듣지도 못하였던가?

탑전(榻前, 임금의 자리 앞)에서 공로를 논의할 때 어찌 이렇게 아뢰어 우리 선왕(先王, 여기서는 선조)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소상히 아시게 하지 못하고 물러 나온 뒤에야 말을 하는가.

처음에는 ‘바꾸지 못할 정론’이라 하고, 마지막에는 ‘감히 이순신과 더불어 맞설 수 없다’고 하니, 정론이 과연 이런 것인가.

* 백사가 살아서 이 글을 보았다면 얼굴을 붉히고 창피함을 느꼈을 것이다. 또 안방준의 이의제기를 후세에 제대로 새겨들었다면, 원균을 재평가하자는 논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조선의 수군을 두 번이나 침몰시킨 원균은 결코 이순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패장이자 졸장부(拙丈夫, 도량이 좁고 졸렬한 사내)였음을 우리는 안방준의 글에서 다시금 새겨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