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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習_아테나이칼럼/천리마리더십

[허성원 변리사 칼럼]#72 이왕 닭을 키우겠다면 계경(鷄經)을 만들어 보아라

by 변리사 허성원 2022. 6. 9.

이왕 닭을 키우겠다면 계경(鷄經)을 만들어 보아라

 

“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일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한 것, 맑은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농서(農書)를 잘 읽고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보아라. 색깔을 나누어 길러도 보고, 닭이 앉는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보면서 다른 집 닭보다 더 살찌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또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보아야 하느니, 이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다. 만약 이(利)만 보고 의(義)는 보지 못하며, 가축을 기를 줄만 알지 그 취미는 모르고, 애쓰고 억지 쓰면서 이웃의 채소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것은 서너 집 사는 산골의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양계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중(1805년)에 작은아들 학유(學遊)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강진으로 면회 온 큰아들 학연(學淵)으로부터 학유가 닭을 키운다는 말을 듣고 쓴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뜨자 강진으로 유배를 간다. 18년의 유배를 살면서 약 500권의 책을 저술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그 엄청난 저술 외에도 서신을 통해 아들, 제자, 친지 등과 소통하고 가르쳤다.

양계(養鷄)를 가지고 둘째아들을 훈계한 이 글을 보면 정약용 선생의 실학자다운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우선 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사대부 집안 아들이, 아무리 폐족이 되었다 하더라도, 당시에 엄두조차 낼 수조차 없는 천하고 더럽고 힘든 양계를 하겠다니. 아들의 그런 용기와 결단도 대단하지만, 다산의 격려와 가르침은 더욱 감동적이다. 책을 통해 배우면서 창의적인 시험을 하고 더 좋은 양계 기술을 연구하며 선비의 품위와 고결함을 지키라고 훈계한다.

무엇보다 이익만 보지 말고 옳음을 추구하라고 한다. 양계를 그저 돈벌이로서가 아니라, 선비의 취미나 내적 성장을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삼으라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 취미로 삼으면 그 자체가 삶의 즐거움과 행복의 대상이 될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양계를 시로 쓸 것을 권한다. '시'라는 건 폭넓은 경험과 깊은 관찰을 통해 새로운 성찰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비로소 우러나오는 내면의 소리가 아니던가. 자신의 일을 기초로 시를 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이미 그 분야에서 최상의 도를 터득한 것이다. 이처럼 만사를 취미나 시 창작의 대상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세상에 힘들고 두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일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최상의 고상한 품격이다. 진정 대단히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편지는 더 이어진다.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낸 뒤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鷄經)' 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다경(茶經)’,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연경(烟經)’과 같은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세속의 일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계경(鷄經)’이란 곧 양계의 경전 즉 바이블이 아닌가. 이제 막 닭 몇 마리 키우기 시작한 어설픈 초보 농부에게 양계의 경전을 쓰라니. 그저 많은 책을 읽고 이론을 터득하였다고 해서 경전을 지을 수 있겠는가. 장기간 풍부히 체험하며 깊이 탐구하는 애정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 뜻은 어떤 일에든 뜻을 두었다면 경전을 쓰겠다는 정도의 대범한 각오를 품고 시작하라는 엄중한 가르침에 있다. 그런 마음 자세로 매사를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세속의 일도 고결한 취미로 격상될 것이다.

하지만 계경을 쓰라고 한 다산의 뜻이 그저 지식인의 취미에 머물 리가 없다. 닭을 기르면서 연구하고 익힌 지식을 갈무리하여,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양계 기술을 널리 많은 백성들에게 퍼뜨리라는 것이 다산의 진정한 깊은 뜻이리라.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쓰신 선생의 실학자적인 목민 정신이 이토록 지극하다. 학유가 계경을 썼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학유는 농가의 월별 세시풍속을 묘사한 귀한 가사집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를 남겼으니, 선생의 가르침은 마냥 헛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나저나 귀하는 어떤 경전을 쓰시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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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도 품위있는 것과 비천한 것, 맑은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농서(農書)를 잘 읽고 좋은 방법을 골라 시험해보아라. 색깔을 나누어 길러도 보고, 닭이 앉는 홰를 다르게도 만들어보면서 다른 집 닭보다 더 살찌고 알을 잘 낳을 수 있도록 길러야 한다. 또 때로는 닭의 정경을 시로 지어보면서 짐승들의 실태를 파악해보아야 하느니, 이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양계다. 만약 이(利)만 보고 의(義)는 보지 못하며 가축을 기를 줄만 알지 그 취미는 모르고, 애쓰고 억지 쓰면서 이웃의 채소 가꾸는 사람들과 아침저녁으로 다투기나 한다면 이것은 서너집 사는 산골의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양계다. 너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낸 뒤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鷄經)" 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다경(茶經)",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연경(烟經)"과 같은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속사(俗事)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_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박석무 편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