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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과 세상살이/지혜로운삶

하늘의 공을 탐하다(貪天之功)

by 변리사 허성원 2020. 4. 5.

'하늘의 공을 탐하다(貪天之功)'


진문공(晉文公)에게는 개자주(介子推)라는 충신이 있었다.
진문공(晉文公)은 제환공(齊桓公)에 이어 춘추시대 두 번째로 패업(霸業)을 달성한 군주이다.
그가
임금에 즉위하기까지 무려 19년 동안 고된 망명의 유랑생활을 지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들도 군주와 함께 온갖 고초를 겪었다.
19년의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로 돌아와 임금으로 즉위한 후 망명을 수행한 공신들을 위한 공신록을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공신록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고하게 하였다.

여러 공신들 중에서 개자주(介子推)는 특히 진문공이 굶주릴 때 자신의 허벅지 살로 베어 국을 끓여 진문공을 살린 적이 있다.
그런데 진문공이 논공행상을 시작하자, 공신들이 서로 망명 때의 각자의 공로를 내세우며 다투었다.
그는 그렇게 공을 내세우는 다른 공신들과 함께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을 핑계대며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결국 진문공의 눈에 띄지 않게 되니 논공행상에서도 누락되었다. 

노모가 이를 안타까워하자 개자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헌공의 아홉 아들 중 오직 주공만이 어진 분이십니다.
진혜공과 진회공은 덕이 없었기에, 하늘은 그 도움을 거두어들여,
이 나라를 주공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신하들은 그러한 하늘의 뜻을 모르고 자신의 공을 다투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저는 차라리 평생 짚신을 짤망정,
감히 하늘의 공을 탐하여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獻公之子九人,惟主公最賢。惠懷不德,天奪其助,以國屬於主公
諸臣不知天意,爭據其功,吾方恥之!吾寧終身織屨,不敢貪天之功以為己力也!"

 

그후 개자추는 혼탁한 세상을 피해 노모를 업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개자추를 공신에서 누락한 것을 뒤늦게 깨달은 진문공이 사람을 보냈으나 산속의 깊이 숨은 개자추를 찾지 못했다.
그러자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지르게 한다.
효심이 강한 개자추가 노모를 살리기 위해 뛰쳐나올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모자는 버드나무를 부둥켜 안은 채 불타죽고 말았다.

청명절에 불을 피우지 않고 찬밥을 먹는 한식(寒食) 풍습은 이 개자추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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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자추의 고사에서 '하늘의 공을 탐하다(貪天之功)'라는 성어가 나왔다.

어떤 일이 성사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의 공(功)이 필요하다.
탑을 쌓는 일과 같이, 오랜 시간 동안의 수많은 노력과 정성이 모이고 쌓여서 하나의 큰 성과를 구축한다.
나라를 일으키거나 기업을 성장시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염 질병이나 전쟁과 같은 환란을 극복하는 데에도 그러하다.
그런 일이 지나고 나면 공을 논할 때가 온다. 그러면 당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간혹 그런 공을 서로 다투기도 하고 자신의 공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비분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많은 성공은 사실상 상당 부분은 '하늘의 공'에 의존한다.
민심이 천심(民心卽天心)이라 했으니
나라의 성공은 백성이 따라주어야 가능하고,

기업의 성공은 모든 종업원과 고객들이 받쳐주어야만 이룰 수 있다.
그리고 시대나 환경의 변화, 리더의 덕목도 모든 성공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역시 '하늘의 공'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공한 리더들은 자신의 성공을 운(運)의 덕분이라 겸손히 말한다.

지금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공을 내세우며 우쭐해하거나 원망하는 사람들은 항상 널려 있다.
개자추는 지금도 그들을 호되게 질책한다.

'감히 하늘의 공을 탐하지 말라(不敢貪天之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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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라는 말의 유래

형제의 아들딸을 일컫는 호칭인 조카라는 말의 어원은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 개자추()로부터 시작된다. 개자추는 진나라 문공이 숨어 지낼 때 그에게 허벅지살을 베어 먹이면서까지 그를 받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뒤 서기전 637년 왕위에 오르게 된 문공이 개자추를 잊고 그를 부르지 않자 이에 비관한 개자추는 산속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나무 한 그루를 끌어안고 타 죽었다. 그때서야 후회한 문공이 개자추가 끌어안고 죽은 나무를 베어 그것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신고는 “족하()! 족하!” 하고 애달프게 불렀다. 문공 자신의 사람됨이 개자추의 발아래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생겨난 족하라는 호칭은 그후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천자 족하’, ‘대왕 족하’ 등 임금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가 그 이후에는 임금의 발아래에서 일을 보는 사관()을 부르는 호칭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같은 나이 또래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형제자매가 낳은 아들딸들을 가리키는 친족 호칭으로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카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2012. 1. 20., 이재운, 박숙희, 유동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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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친구가 한 말이 기억난다.

"병을 고치는 데 의사가 하는 역할은 매우 작다.
대부분은 사람의 몸이 스스로 치유한다.
의사는 극히 작은 도움을 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매우 그럴 듯한 말이다.
몸이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떤 명의의 어떤 의술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와 비슷한 말을 아버지에게서도 어릴 때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애써 농사지은 작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벼이 취급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했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뭐 한 게 있나.
다 땅과 하늘이 지은 것이지." 

이 말씀 역시 매우 수긍이 간다.
씨앗을 땅이 품어주어야 하고, 하늘이 주는 햇빛과 비가 없으면 무슨 수로 농작물을 키울 수 있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씨앗 속에 내재된 생명력이다.
씨앗의 생명력이 하늘과 땅의 도움으로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 농업 아니던가.
인간은 아주 조금 거들 뿐이다.

그럼에도 많은 인간은 하늘의 공을 탐하고 있다.

 

** (참고)

한식(寒食)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 양력으로는 4월 5일 무렵이다.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명절의 하나이다. 일정 기간 불의 사용을 금하며 찬 음식을 먹는 고대 중국의 풍습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금연일(), 숙식(), 냉절()이라고도 한다. 한식은 음력을 기준으로 한 명절이 아니다. 따라서 한식은 음력 2월에 있을 수도 있고, 음력 3월에 있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한식은 중요한 명절로 지켜졌다. 한식을 주제로 한 많은 시가 전해지는 사실도 이를 반영한다. 한식에는 금화와 개화가 행해졌다. 세종 13년(1431)에 한식 사흘 동안 불의 사용을 금지한다는 명령이 내려진 적이 있었으며, 매년 임금은 내병조()에서 바친 버드나무를 마찰하여 일으킨 불을 궁중에 있는 관청과 대신 집에 나누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상 숭배였다. 왕실에서는 종묘 제향을 지냈고, 종묘에서 제외되었거나 후손이 없는 왕과 비빈 등에 대해서는 성묘를 했다. 허물어진 능묘를 보수하기도 하였다.
또 민간에서는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4대 절사()라 하여 산소로 올라가 성묘를 했는데, 그 중에서도 한식과 추석이 가장 성하여 교외로 향하는 길에 인적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농가에서는 이날을 기하여 밭에 파종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