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정비업 30여년 … ‘완제기 꿈’ 날갯짓
대한항공의 부산 항공우주테크센터 가보니
부산=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 제106호 | 20090322 입력
대한항공 테크센터 정비사들이 군용기를 점검하고 있다. 왼쪽에 A-10 공격기, 오른쪽에 CH-53 헬기가 늘어서 있다. |
방금 정비를 마친 대한항공과 미국 유나이티드항공의 B747이 공장 격납고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게 눈길을 끈다. 공장 안에 들어가 보니 F-15, F-16 전투기를 비롯해 A-10 공격기, UH-60 헬기 등 군용기 수십 대가 정비 중이다. 이라크 주둔 미군이 사용하던 CH-53 헬기도 먼지를 뒤집어쓴채 정비를 받으러 들어와 있었다.
민항기 제조공장에선 미국 보잉의 차세대 항공기 B787에 들어갈 부분품 생산이 한창이다. 공장 안에 별도로 마련된 방에서는 10여 명의 기술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얇은 종이를 겹겹이 붙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종이가 아니라 B787의 몸체를 이룰 첨단 소재인 탄소섬유였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기술자들은 의사처럼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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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센터의 김종하 상무는 “열팽창계수에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불량품이 되기 때문에 아주 정교한 기술이 필요하다”며 “고열에도 탄소섬유가 비틀리지 않는 기술을 자체 개발했으며, 특허를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신 상무는 “알루미늄 소재를 쓰는 기존 항공기와 달리 탄소섬유를 쓰면 무게가 훨씬 가벼워 연료 소모가 줄어들고, 부식과 변형이 적어 항공기의 수명이 오래간다”며 “탄소섬유 비행기에선 가습기를 이용한 습도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내 환경도 매우 쾌적해진다”고 설명했다.
현재 대한항공은 B787의 날개와 꼬리 등에 들어갈 6개의 핵심 부품을 제작해 보잉에 납품하고 있다. 세계 1100여 개 부품 공급처 가운데 기체 분야 최우수 공급처로 선정됐을 정도로 기술력과 신뢰도를 인정받고 있다. 에어버스의 차세대 항공기 A350 프로젝트에도 화물칸 문 등을 제작, 공급한다. 말이 부품이지 큰 것은 가로·세로 길이가 3m씩 되는 대형 구조물이다. 2021년까지 확보한 해외 수출 주문 잔액은 13억5000만 달러(약 1조9000억원)에 달한다.
조항진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장(부사장)은 “대한항공은 보잉이 2005년 B787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참여해 자체 기술로 부분품 설계와 디자인을 제시했다”며 “대한항공의 항공기 제작 관련 기술 수준과 노하우는 이미 세계적 수준에 올라있다”고 강조했다.
F-5 전투기 생산 경험도
테크센터의 연혁은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항공은 국내 민간 기업으로는 최초로 항공기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초창기에는 항공기 완제품 조립 생산에 집중했다. 헬기 500MD(군용)와 500D(민간용) 모델이 주력 제품이었다. 미국 전문업체 휴즈와 계약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췄다. 박정희 대통령도 당시 테크센터를 찾아와 깊은 관심을 보였다. 국내 항공기 제조업의 산실이었기 때문이다.
80년에는 최초의 국산 전투기 F-5E와 F-5F의 사업권자로 선정됐다. 미국 전투기 제작사인 노스럽과 계약하고 개발에 착수, 82년 9월 1호기를 공군에 납품했다. 이 사업으로 항공기 부품 제조 기술과 노하우를 얻어 전방·후방의 몸체를 포함한 3000여 개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다. 90년대 들어선 미국 시코르스키가 개발한 18인승 중형 헬기 UH-60의 생산에도 나섰다. 처음엔 조립생산으로 출발했지만 2, 3단계 사업을 거치면서 부품의 대부분을 국산화했다.
항공기 생산은 군용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대한항공 항공기술연구원은 84~88년 초경량 민간 항공기 ‘창공 1~3호’를 개발했다. 이어 91년에는 200마력급 5인승 항공기 ‘창공91’의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항공기의 개발·제작·품질인증까지 모두 순수 국내 기술로 이뤄낸 것이다. 창공91은 3대가 만들어졌으며, 지금도 대기오염 탐사 등에 쓰인다.
그동안 만든 헬기와 전투기만도 500여 대에 달할 정도로 활발했던 대한항공의 항공기 제조업은 97년 외환위기로 시련을 맞게 된다. 외환위기 직후 정부가 주도한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때문이다. 정부는 대우·삼성·현대그룹의 항공부문을 합쳐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을 출범시킨 뒤 법을 만들어 KAI가 항공기 관련 방위산업 물량을 독점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군용기 제조 사업을 접어야 했다.
민항기 생산도 난관에 부닥쳤다. 국내 시장은 수요가 워낙 적고, 해외시장 개척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중국과 손잡고 100인승 규모의 민항기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했지만 양국 정부의 정치적 문제로 없었던 일이 되기도 했다.
현재 대한항공은 무인 항공기와 50~100인승 규모의 중소형 민항기 개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70년대 개발된 500MD 헬기를 무인용으로 개조, 군사작전과 해양경찰의 해안 감시활동 등에 활용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김종하 상무는 “무인기 개조를 통한 500MD 헬기의 수명 연장 방안을 국방부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군용기 설계-개발-정비 일관화 추진
대한항공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KAI의 인수를 추진해왔다. 2003년에는 대우종합기계가 갖고 있는 KAI 지분(28.1%)을 1020억~1298억원에 사들이는 양해각서(MOU)까지 맺었다.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 2596만 주를 주당 최저 3930원에서 최고 5000원에 사되 실사를 통해 최종 가격을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대우종기가 실사와 상관없이 5000원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해 본계약이 무산됐다.
최근 대한항공은 다시 KAI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KAI 인수에) 당연히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함께 회의에 참석한 박용현 두산건설 회장도 “지분 매각에 관심이 있다”고 언급했다. 현재 KAI 지분은 정부(산업은행)가 30.54%, 현대차·삼성·두산그룹이 각각 20.54%를 나눠 갖고 있다. 두산은 대우종기를 인수하면서 KAI의 지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항공기 제조업을 하는 업체는 대한항공과 KAI 2곳뿐이다. 하지만 군용기는 KAI가 설계·개발을 도맡아 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정비·개조만 맡고 있을 뿐이다. 대한항공은 KAI를 인수하면 군용기의 설계에서 정비까지 일관공정을 갖출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정부는 산업 합리화와 공적자금 회수를 위해 산업은행이 갖고 있는 KAI 지분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대한항공이 산업은행과 두산그룹이 보유한 KAI 지분을 모두 사들인다면 50%가 넘는 지분을 확보,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KAI의 공동 대주주인 현대차그룹과 삼성그룹도 인수 후보자로 거론된다.
문제는 가격이다. 대한항공은 이미 한 차례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KAI의 인수를 포기한 적이 있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KAI를 가져오면 항공우주 분야의 기술 개발과 경쟁력 향상에 시너지(상승) 효과가 기대된다”면서도 “그러나 가격이 맞지 않으면 무리해 인수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KAI는 2006년 경영 악화로 1100억원의 적자를 냈으나 산업은행이 나서 대규모 감자와 출자전환을 해 2007년 흑자로 돌아섰다. 반면 대한항공 항공우주 부문은 매년 견조한 실적을 올리며 회사 내 ‘효자 사업부’로 자리잡았다. 지난해 대한항공은 고유가와 달러값 상승으로 여객·화물운송 부문에서 1364억원의 영업적자를 냈지만 항공우주 부문에선 284억원의 흑자를 냈다. 지난해 항공우주 부문 매출은 3776억원으로 전년보다 50% 늘었다. 대한항공이 KAI 인수에 대해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자신감을 보이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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