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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토피카

친구를 배신할 것인가, 나라를 배신할 것인가

by 변리사 허성원 2026. 4. 11.

친구를 배신할 것인가, 나라를 배신할 것인가


(* E.M. 포스터는 나라와 친구 사이에서 택해야 한다면 나라를 배신할 배짱(guts)을 갖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가 용기(courage)가 아닌 배짱을 택한 것은, 이 선택이 유년기부터 내면화된 충성의 본능 전체에 역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을 교육받았고, 그 추상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현실이 과연 옳은지를 물어야 한다. 역사에서 브루투스와 페탱은 대의를 위해 사람을 배신했고, 본회퍼와 사육신은 사람에 대한 신의를 위해 국가에 맞섰다. 누가 배신자이고 누가 영웅인지는 시간이 지나야 판명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기로에 선다면, 그것은 충과 신의 깔끔한 이분법이 아니라 희생의 무겁고 가벼움을 다는 고통스러운 저울질일 것이다. 무엇을 택하든 다른 쪽의 원망은 피할 수 없다. 이 숙명을 직시하고, 교육이 심어놓은 본능에 역행하며, 자기 선택 위에 존재를 거는 것. 그것이 포스터가 말한 배짱의 본질이다.)

1. 하나의 선언

1938년, 영국 소설가 E.M. 포스터는 에세이 "What I Believe"에서 이렇게 썼다.

"If I had to choose between betraying my country and betraying my friend, I hope I should have the guts to betray my country."

나라를 배신하는 것과 친구를 배신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라를 배신할 배짱을 갖기를 바란다고. 이 문장은 발표 당시부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히틀러의 독일이 유럽을 위협하던 시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개인 간의 신의를 우선하겠다는 선언은 반역에 가까운 것으로 들렸다. 그러나 포스터가 던진 질문의 무게는 그 시대를 넘어선다. 이 질문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존재이며, 어떤 종류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핵심을 지킬 수 있는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포스터의 단어 선택이다. 그는 courage(용기)를 쓰지 않고 guts(배짱)를 썼다. courage는 이성적 판단과 도덕적 결의를 함축하는 단어다. 철학 강의실에서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guts는 다르다. 내장(gut)에서 올라오는 날것의 담력, 머리가 아니라 뱃속으로 버티는 힘을 뜻한다. 포스터는 이 선택이 고상한 사유의 결론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온몸이 거부하는 것을 억지로 해내는 일, 사회가 주입한 모든 본능과 교육에 역행하는 일, 그래서 지적 결단이 아니라 신체적 담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그는 단어 하나로 드러냈다. courage라면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guts는 존경보다 경악을 불러온다. 포스터가 원한 것은 존경이 아니라 정직이었다.

2. 국가라는 추상과 친구라는 구체

국가는 추상이다. 국경선, 헌법, 국기, 국가(國歌)는 모두 상징의 체계이며, 그 상징이 가리키는 실체는 끊임없이 변한다. 오늘의 정의로운 국가가 내일의 폭정이 될 수 있고, 오늘의 법이 내일의 불의가 될 수 있다. 반면 친구는 구체적 존재다. 이름이 있고, 얼굴이 있고, 함께 나눈 시간의 두께가 있다. 포스터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추상에 대한 충성과 구체적 인간에 대한 충성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의 원형적 사례를 제공한다. 크리톤이 탈옥을 권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법을 따르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따른 것은 아테네라는 국가가 아니라 법이라는 원리였다. 그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 살아온 원칙과의 일관성을 지킨 것이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국가에 대한 충성과 원리에 대한 충성은 다른 것이다.

3. 충성의 교육, 혹은 추상의 내면화

그런데 왜 포스터의 문장이 그토록 불경스럽게 들리는가. 그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가장 높은 덕목으로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의 암송, 호국 영웅의 서사, 순국이라는 숭고한 어휘. 이 모든 것이 유년기부터 반복적으로 주입되면서, 국가에 대한 충성은 사유 이전의 본능처럼 자리 잡는다. 국가를 배신한다는 말은 생각하는 것조차 금기가 된다. 불경(不敬)이라는 감각이 먼저 작동하여, 사유가 시작되기도 전에 질문 자체를 차단해버린다.

그러나 여기서 물어야 한다. 국가라는 추상이 자유로워야 하는 인간의 심리를 구속하게 된 이 역사적, 사회적 현실은 과연 옳은 것인가. 근대 국민국가는 채 300년이 되지 않은 발명품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듯, 국민(nation)은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다. 서로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수천만 명이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다고 느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교육과 미디어와 제도가 만들어낸 구성물이다. 그 구성물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도덕 감각, 즉 눈앞의 구체적 인간에 대한 신의보다 상위에 놓여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정당성이 시민의 자발적 동의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누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태어나면서 국적을 부여받고, 말을 배우기 전에 국기 앞에 세워지고, 글을 읽기 전에 애국의 서사를 주입받는다. 충성은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이 조건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국가라는 추상은 인간의 내면에 검열관으로 자리 잡는다. 포스터의 문장이 불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내면의 검열관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스파르타는 이 내면화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스파르타 소년은 7세부터 국가에 인도되어 아고게(agoge)라는 교육 체계 속에서 길러졌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체계적으로 제거되었고, 개인의 존재 이유는 오직 폴리스에 대한 봉사로 환원되었다. 스파르타가 군사적으로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체제가 산출한 것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국가의 부품이었다. 아테네인들이 스파르타를 경외하면서도 혐오한 것은 이 때문이다.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은 이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소련의 피오네르, 마오쩌둥의 홍위병. 이들은 모두 유년기부터 국가(혹은 당)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교육받았고, 그 교육의 결과로 부모를 고발하고, 스승을 폭행하고, 이웃을 밀고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모든 사적 관계를 압도한 결과는 인간성의 파괴였다. 파블리크 모로조프라는 소련 소년은 아버지를 당국에 밀고한 것으로 영웅이 되었다. 소련 정부는 그를 충성의 모범으로 찬양했으나, 그 찬양이 드러내는 것은 체제의 도덕적 파산이다.

포스터의 guts라는 단어가 여기서 다시 빛을 발한다. 국가가 유년기부터 심어놓은 충성의 본능에 역행하려면, 지적 용기만으로는 부족하다. 몸에 새겨진 복종의 습관을 거스르는, 내장에서 올라오는 종류의 담력이 필요하다. 포스터가 courage가 아닌 guts를 택한 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이 단순한 사상적 전향이 아니라 자기 안에 심어진 교육 전체와의 전면적 대결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충(忠)의 변주, 동양의 시선

동아시아 전통에서 충(忠)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다. 맹자는 군주가 도를 잃으면 신하가 간(諫)해야 하고, 간해도 듣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고 했다. 극단적으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까지 제시했다. 백성을 해치는 군주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일개 필부(匹夫)에 불과하므로, 그를 축출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라 정의라는 것이다. 여기서 충은 군주 개인이나 국가 기구가 아니라 도(道)에 대한 충성이다.

장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장자에게 국가란 인위적 구획에 불과하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왜곡하는 장치에 가깝다. 장자가 초(楚)나라 재상 자리를 거절하며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끄는 거북이로 남겠다고 한 일화는, 국가적 의무보다 자기 삶의 진정성을 택한 고전적 선언이다. 포스터의 문장과 장자의 거북이는 놀라울 정도로 공명한다. 둘 다 거대한 추상보다 구체적이고 친밀한 것의 편을 든다.

반면 한비자(韓非子)의 법가(法家) 전통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한비자에게 사적 관계에 대한 충성은 공적 질서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요소다. 한비자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이를 고발한 아들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인용한다. 공(公)이 사(私)를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비자의 논리에서 포스터의 선언은 국가를 해체하는 독소에 해당한다.

5. 나라를 위해 친구를 배신한 자들

역사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선택하고 사적 관계를 희생한 인물들은 적지 않다. 그들의 선택은 대의를 위한 고통스러운 결단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냉혹한 배반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자 가장 신뢰받는 측근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이 되어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자, 브루투스는 암살 공모에 가담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칼에 찔리며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고 외쳤다는 전승은, 친밀한 관계의 배신이 주는 충격을 상징하는 서양 문명의 원형이 되었다. 브루투스는 공화정이라는 대의를 위해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죽였다. 그러나 공화정은 회복되지 않았고, 내전이 뒤따랐으며, 브루투스 자신도 패배하여 자결했다. 셰익스피어는 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썼고, 단테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배신자를 배치했다. 대의를 위한 배신이었음에도 브루투스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갈린다. 공화주의의 수호자인가, 은혜를 모르는 배신자인가. 2천 년이 지나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페탱 원수는 근대의 가장 논쟁적인 사례다.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던 그는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비시(Vichy)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프랑스를 완전한 파괴로부터 구한다는 명분으로 독일에 협력하면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옛 동료와 부하들을 적으로 돌렸다. 페탱은 국가(프랑스 국토와 국민의 물리적 보존)를 위해 전우와 동지를 배신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프랑스에서 페탱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현실주의적 구국이었는가, 치욕적 항복이었는가.

한신(韓信)은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한신의 모사 괴통(蒯通)은 유방(劉邦)을 배신하고 독립하라고 권했으나, 한신은 유방에 대한 의리를 지켜 거절했다. 한나라에 충성한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후 한신을 토사구팽(兔死狗烹)했다. 한신은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국가에 충성하고 개인적 관계를 져버리지 않은 결과가 죽음이었다. 괴통의 조언을 따라 독립했더라면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신은 의리를 선택했고, 그 의리는 보답받지 못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반복된다. 유신 체제 아래에서 옛 동지를 감시하고 고발해야 했던 정보기관원들, 광주에서 발포 명령을 따른 군인들. 이들 중 다수는 국가 안보라는 대의 아래 인간적 관계를 희생했다. 그 선택이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린다. 어떤 이에게는 충성이고, 어떤 이에게는 공모다.

6. 친구를 위해 나라를 배신한 자들

반대편에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구체적 인간에 대한 신의를 택한 인물들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독일의 목사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조국 독일을 배신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배신한 것은 나치 체제였지, 독일 민족이나 독일의 이상이 아니었다. 유대인 친구들과 동료 신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 권력에 맞섰다. 1945년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전후 독일에서 그는 도덕적 저항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나치 시대의 "반역자"가 전후의 "성인"이 된 것이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독일 군인으로서 독일 국가원수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군인의 충성 서약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었으나, 더 높은 도덕적 의무에 대한 충성이기도 했다. 1944년 7월 20일 암살 시도는 실패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그날 밤 총살되었다. 오늘날 독일 연방군의 영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다. 당대의 반역자가 후대의 영웅이 되었다.

오자서(伍子胥)는 초(楚)나라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왕에게 처형당하자, 오자서는 조국을 떠나 적국 오(吳)나라로 망명하여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를 침공했다. 원수 초 평왕은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혀 있었으나, 오자서는 그 시신을 파내어 300번 채찍질했다. 복수를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로 오자서는 조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중국 전통에서 오자서는 효(孝)의 극단적 실천자로 존경받는 동시에, 조국을 파멸시킨 자로 비판받는다. 하나의 평가로 수렴되지 않는다.

사육신(死六臣)은 또 다른 각도를 보여준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성삼문 등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되었다. 현재의 국가 권력(세조 정권)을 배신했으나, 어린 왕 단종과의 군신 간 의리, 그리고 정통성이라는 원리에 충성했다. 세조 당대에 그들의 가문은 멸문(滅門)을 당했으나, 숙종 대에 이르러 복권되고 시호를 받았다. 역적에서 충신으로의 전환에 200년이 걸렸다.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는 이 주제의 이상적 사례를 보여준다.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는 젊은 시절부터의 친구였으나, 제(齊)나라 왕위 계승 분쟁에서 서로 다른 왕자를 모셨다. 소백이 승리하여 환공이 되었을 때, 패배한 쪽의 관중은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이때 포숙아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걸고 관중을 천거했다. 환공은 관중을 재상으로 삼았고, 관중은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으뜸으로 만들었다. 이 경우에는 친구에 대한 신의가 국가에 대한 충성과 합치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한 결말은 역사에서 극히 드물다.

에드워드 스노든은 현대의 가장 극적인 사례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계약직 기술자였던 그는 2013년 미국 정부의 대규모 불법 감시 프로그램을 폭로했다. 미국이라는 국가를 배신한 것이다. 스노든의 경우 "친구"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감시당하는 수억 명의 시민이었다. 추상적 국가 권력에 맞서 구체적 인간들의 권리를 택한 것이다. 2020년 연방법원은 NSA의 감시 프로그램이 실제로 불법이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스노든은 여전히 귀국하지 못한다. 법적 판단과 도덕적 판단, 그리고 정치적 판단은 서로 다른 시간표 위에서 움직인다.

킴 필비(Kim Philby)는 이 모든 사례와 대비되는 반면교사다. 영국 정보부 MI6의 고위 간부였으나 소련의 이중첩자였던 그는 이념을 위해 조국을 배신했고, 그 과정에서 동료와 친구도 함께 배신했다. 양쪽 모두를 배신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기회주의다. 필비는 말년을 모스크바에서 보냈으나, 소련 체제에도 환멸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모든 것을 배신한 자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7. 선택의 숙명, 피할 수 없는 기로

이 사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선택하든 다른 쪽의 원망과 피해는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숙명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선택의 순간이 오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인간은 평생 국가와 친구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극단적 상황을 만나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것은 포스터의 문장이 암시하는 것처럼 충(忠)과 신(信)의 깔끔한 이분법으로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선택은 언제나 더 복잡하다. 필시 그것은 희생의 무게를 다는 일이 될 것이다. 이쪽을 택하면 무엇이 얼마나 무너지고, 저쪽을 택하면 무엇이 얼마나 파괴되는가. 누구의 고통이 더 크고, 누구의 상실이 더 회복 불가능한가. 추상적 원리의 대결이 아니라, 구체적 손실의 무겁고 가벼움을 저울에 올리는 일이다.

이것은 그리스 비극이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로 출항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리스 연합군이라는 대의를 위해 자기 딸을 죽인 것이다. 아가멤논은 선택했고,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귀국한 그를 기다린 것은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의 칼이었다. 딸을 죽인 대가가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이 연쇄를 추적한다.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죽여야 한다. 어느 쪽을 택해도 다른 쪽의 복수의 여신(에리니에스)이 쫓아온다. 그리스 비극이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선택과, 그 선택이 수반하는 대가뿐이다.

사르트르는 이 상황을 현대적 언어로 포착했다. 2차 세계대전 중 한 학생이 사르트르를 찾아왔다.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가, 레지스탕스에 합류해야 하는가. 어머니를 돌보면 조국에 대한 의무를 져버리는 것이고, 레지스탕스에 합류하면 홀로 된 어머니를 버리는 것이다. 이 학생도 충과 신의 이분법으로 고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의 외로움과 조국의 위기 사이에서 희생의 무게를 달고 있었다. 사르트르의 대답은 냉혹했다. 어떤 도덕 체계도 이 문제에 답을 줄 수 없다고. 칸트의 보편 도덕법칙도, 공리주의의 최대 행복 원리도, 기독교의 이웃 사랑도 이 구체적 상황에서 하나의 명확한 답을 산출하지 못한다. 인간은 선택해야 하고, 선택한 후에야 비로소 그 선택의 의미가 만들어진다. 선택 이전에 정답은 없다.

유교 전통에서는 이를 의(義)와 명(命)의 관계로 설명한다. 공자는 "도가 행해지는 것도 명이요,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도 명이다(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라고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뿐이며, 그 결과는 명(命)에 속한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선택의 의무를 면제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선택은 더 무거워진다. 사육신이 복권되기까지 200년이 걸렸다. 본회퍼가 영웅이 되기까지는 불과 몇 년이었다. 페탱에 대한 판결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 스노든은 여전히 귀국하지 못한다.

니체는 이 불가피한 선택의 무게를 "운명에의 사랑(amor fati)"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운명을 바꾸려 하지 말고,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선택의 결과가 고통을 수반하더라도, 그 선택이 자기 자신의 것이었음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브루투스가 자결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면, 본회퍼가 교수대에서도 평온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운명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결과를 감수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이미 배짱의 발현이다.

8. 키르케고르의 렌즈, 윤리적 단계와 종교적 단계

키르케고르의 실존 단계론은 이 문제에 독특한 해석 틀을 제공한다. 윤리적 단계에서 인간은 보편적 규범에 복종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은 윤리적 단계의 전형적 의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단계 위에 종교적 단계를 놓는다. 종교적 단계에서 개인은 보편을 초월하는 절대적 의무 앞에 선다.

키르케고르가 드는 사례는 아브라함이다. 신의 명령에 따라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윤리적으로는 살인이다. 그러나 키르케고르는 이를 "목적론적 정지(teleological suspension of the ethical)"라 부르며, 보편 윤리를 넘어서는 더 높은 차원의 의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포스터의 선택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편 윤리를 정지시키고, 더 근원적인 인간적 유대에 대한 의무를 우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키르케고르 자신도 인정한 위험이 있다. 보편 윤리를 정지시킬 권한이 개인에게 있다면, 광신과 진정한 신앙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국가를 배신하는 것이 배짱인 경우와 단순한 반역인 경우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키르케고르의 대답은 불안(Angst) 속에서 도약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확실성의 보장 없이 선택하는 것. 그것이 실존의 조건이다.

9. 아렌트의 경고,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관찰하면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명령에 충실한 관료였다. 국가에 대한 충성, 상관의 지시에 대한 복종, 법률의 준수라는 윤리적 단계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이었다. 그 결과가 수백만 명의 학살이었다.

아렌트의 분석은 포스터의 선언에 가장 강력한 철학적 근거를 부여한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 자동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충성의 대상이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했을 때, 충성을 계속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공모(共謀)가 된다. 이 지점에서 "배신할 배짱"이란 사실상 "판단할 배짱"을 의미한다. 명령과 규범의 자동화된 흐름을 멈추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 아렌트가 말한 "사유(thinking)"의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10. 배짱의 본질

포스터의 문장에서 핵심 단어는 "배신"이 아니라 "배짱(guts)"이다. 왜 나라를 배신하는 데 배짱이 필요한가. 국가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를 배신한 자에게는 투옥, 추방, 처형이 기다린다. 그러나 물리적 위협만이 이유는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3장에서 살펴보았듯, 유년기부터 내면화된 충성의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배짱이 필요한 것은 외부의 처벌 때문만이 아니라, 내부의 검열관 때문이다. 자기 안에 심어진 "국가에 대한 배신은 불경"이라는 감각 자체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배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용기의 정의와 맞닿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용기란 무모함이 아니라,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올바르게 구분하는 능력이다. 포스터의 선택에서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국가의 처벌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에 대한 신의를 저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도덕적 핵심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용기(andreia)가 전장에서의 덕목이었다면, 포스터의 배짱(guts)은 전장 밖에서, 일상의 한복판에서, 교육받은 모든 것에 역행하며 발휘해야 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래서 courage가 아니라 guts인 것이다. 영웅의 어휘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어휘. 훈장이 아니라 뱃속의 뒤틀림. 포스터는 이 선택이 영웅적 서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실임을 끝까지 직시했다.

11. 그러나 친구도 배신할 수 있다

이 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반론은 다음과 같다. 친구에 대한 충성 역시 맹목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피아의 오메르타(침묵의 규율)는 친구와 가족에 대한 충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사례다. 사적 유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은 부패와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 공자가 "군자는 두루 사귀되 편당하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고 한 것은 바로 이 위험을 경계한 것이다.

포스터의 명제가 유효하려면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친구에 대한 충성이 곧 정의에 대한 충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나라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불의한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 친구는 여기서 구체적 인간관계의 상징이자, 추상적 권력에 환원되지 않는 도덕적 현실의 거점이다.

12. 결어

포스터의 선언은 결국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무엇에 충성할 때 가장 인간다운가.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에 자신을 맞출 때인가, 아니면 눈앞의 구체적 인간과의 약속을 지킬 때인가. 이 질문에 보편적 정답은 없다. 다만 역사는 하나의 경향을 보여준다.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자들은 종종 악의 도구가 되었고, 구체적 인간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국가에 맞선 자들은 종종 후대에 의해 도덕적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그러나 이 경향이 선택을 쉽게 만들지는 않는다. 정말로 그런 기로에 선다면, 그것은 충과 신의 깔끔한 이분법이 아니라 희생의 무게를 다는 고통스러운 저울질이 될 것이다. 선택의 순간에 인간은 후대의 평가를 알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을 것인가뿐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다른 한쪽의 원망과 상처는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비극적 핵심이며, 그리스인들이 비극이라 부른 것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 선택을 위해서는 courage가 아니라 guts가 필요하다. 교육이 심어놓은 충성의 본능에 역행하는 담력, 사회가 불경이라 부를 생각을 감히 하는 담력, 영웅이 아니라 배신자로 기억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버티는 담력. 포스터가 말한 배짱이란 결국 이 숙명을 직시하는 힘이다. 완벽한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 선택의 대가를 미리 감수하는 것. 충성의 대상을 스스로 정하고, 그 선택 위에 자기 존재를 거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무거운 자유이며, 그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 배짱의 본질이다.